열린 결말
2021. 3. 13.
 

  탈라사 비나는 세상이 멸망할 때 절벽 위에 있었다. 구멍이 뚫린 것 같은 하늘에서 물이 쏟아져 내렸고, 전신주가 무너졌고, 사람들이 휩쓸렸고, 쓰레기가 둥둥 떠다녔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도시의 모든 불이 일시에 꺼졌다. 전과 비교할 수 없는 양과 속도로 물이 세상을 뒤엎고 있었다. 굉음 속에서 생츄어리와의 실이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등 뒤에 무언가가 붙었다. "어라?" 목을 돌린 순간 물에 휩쓸렸다.

  탈라사 비나는 죽었다.

 

  그리고 살았다.

  "뭐야?"

  비나는 30분 전까지만 해도 그가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다. 기억은 사라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아무 전조도 없이 돌아왔다. 오늘은 10월 30일. 그러나 어제는 10월 29일이 아니고 이곳은 그가 알던 리하인이 아니었다.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그는 앞에 있던 D를 밀쳐내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다가 골목까지 기어 들어왔다. D는 처음에는 어이없어했고, 다음 순간에는 분노하다가, 마지막에는 혀를 찼다. ‘아, 아니에요. 젠장. 난 죽었어… 빌어먹을. 오늘 날짜가 어떻게 돼요?? 아니~ 아니야. 나 갈게요!’ ‘당장 꺼져요.’ 비나는 오늘처럼 얼빠지게 굴어 본 적이 없다고 생각했다.

  습관적으로 주머니에 손을 집어넣었다가 바로 뺀다. 푹 젖은 주머니에서 물이 뚝뚝 떨어졌다. 아직도 죽었을 때의 감각이 선연하다.

  “아씨!”

  비나는 뒷목을 때리면서 뒤를 돌아보았다. 뒤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소름이 돋아난 목이 홧홧해졌을 뿐이다. 벽에는 호기심의 형상을 딴 것처럼 보이는 그라피티가 있었다. 이번에 비나는 벽과 자신 사이의 공간에 손을 뻗어 보았다. 그는 여전히 인챈터였지만, 공간은 비어 있었다. “아니야~ 아무것도 없는 게. 내가 잊어버렸어.” 중얼거리다 보니 울컥 화가 치밀어 허공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악!!!!!” 냅다 소리를 지르고

  “악!!!!!” 자기 몸을 더듬거렸다가

  “악!!!!!”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지르고, 그리고……

  “비나?”

  “아악!!!! 짜증나!!!!”

  “비나 씨!!”

  누군가 어깨를 붙잡았다. 축 처진 머리카락을 막 쥐어뜯으려던 비나가 고개를 돌린다.

  “그레이스?”

  그곳에는 아커만 그레이스가 서 있었다.

  탈라사 비나가 기억하는 모습 그대로.

 

 

10월 30일

 

  그레이스를 만나기 몇 시간 전, 비나는 바 테이블에 앉아서 사람들을 구경하고 있었다. 할로윈답게 많은 사람들이 코스튬을 하고 돌아다녔다. 철이 지난 디스코 음악이 흘러나왔고, 어림잡아도 30년은 더 전에 유행했을 법한 화장이 눈에 띄었다. 낯선 기분이 들었다. ‘낯설다’는 감상에 비나는 스스로를 이상하게 여겼다. 그는 자신이 유연하다 못해 뼈가 없는 것 같은 사고방식의 소유자라고 믿고 있었다-최소한 그가 기억하는 한에서는 그랬다-. 게다가 리하인의 유행이야 어디서 어디로 튈지 모르는 일인데, 이런 일이 놀라울 것도 없는데. ‘이건 무슨 기분이지?’ 비나는 턱을 괴고 생각했다.

  “이상하네?”

  “뭐가 이상한가요? 손님.”

  비나는 술값을 치르기 위해 더듬더듬 주머니를 뒤졌다. 물에 푹 젖은 사탕껍질과 젤리, 명함이 두서없이 딸려 나왔다. 돈은 없었다. 왜 물에 젖었는지 영문을 몰라 잠시 멀거니 바텐더의 얼굴을 보았다. "그렇네. 뭘 잘못 찾아온 기분이야." 비나가 중얼거리는 말에도 바텐더는 상냥한 미소를 유지했다. 아직까지는.

  “돈이 없네요~?”

  비나는 양손을 들어 올렸다. 이제 바텐더는 입만 웃고 있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손님?"

  "글쎄요? 어떻게 하지? 난 아는 사람도 없는데~ 외상 돼요?"

  "안 됩니다."

  비나가 주변을 둘러보며 싱겁게 대꾸하는 사이 바텐더는 깨끗하게 닦인 잔을 내려두고 비나를 지켜보았다. 그는 신기였고, 손님이 그냥 빠져나가게 두지는 않을 생각이었다. "손님." 바텐더가 경고처럼 말을 꺼냈다. 그때, 테이블 왼쪽에서 손이 불쑥 튀어나왔다.

  “제가 살게요.”

  두 사람이 고개를 돌리자, 단정한 차림을 한 사람이 슬며시 웃어 보였다.

  “손님께서 계산하시겠어요?”

  바텐더는 사양하지 않았다. 물론, 비나도 거절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D라고 소개했다. 비나는 D에게 자신을 B라고 소개했고, 그들은 술을 몇 잔 더 마셨다.

 

 

 

재회

 

  “그레이스! 헐~! 그레이스다! 그레이스, 놀라지 말아요? 난 죽었거든요? 근데 지금 살아 있다?”

  비나는 그레이스를 보자마자 우는 표정을 짓더니 두서없이 말을 뱉기 시작했다. 그레이스는 안도와 놀람이 섞인 표정으로 비나를 지켜보았다.

  “아, 이제 산 건가? 그건 아닌 것 같은데~? 여긴 안전지대도 아니구? 그러게, 그레이스는 왜 여기 있지? 꿈인가?”

  비나가 그레이스의 볼을 콕 찔렀다. 그대로 볼을 문질거리자, 결국 그레이스가 비나의 손을 잡아 내렸다. "와." 비나는 살아있는 사람을 처음 본 사람처럼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죽었어요. 안전지대에 가기로 한 날에요. 갑자기 왜… 살아났는지는 모르겠어요.”

  “아~ 아아… 진짜? 그렇구나??”

  그레이스의 볼에 남은 손톱자국을 구경하던 비나는 한 박자 늦게 반응했다. 그레이스는 한숨을 쉬며 비나의 오른쪽 벽에 등을 기댔다. 서로의 안부를 묻기에는 타이밍을 놓쳤고, 경우도 맞지 않았다. 어색하고, 익숙했다.

  그레이스는 죽기 전까지 비나와 생츄어리였다. 살아난―이것을 살아났다고 표현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뒤로 그레이스는 왜 이런 일이 생긴 건지, 이제 자신은 어떻게 되는지에 관해 생각했다. 비나를 포함한 다른 사람들은 안전지대에 무사히 도착했을지 생각해 보기도 했다. 그레이스가 기억하는 마지막에 생츄어리를 느낄 수 없었으므로, 그레이스는 비나도 다른 사람들도 안전지대에 도착했을 거라고 믿고 싶었다. 비나는…… 자신의 생츄어리는 번번이 믿음을 저버리는 사람이었지만, 그래도 안전지대에 오기로 약속했다.

  그레이스는 의문이 담긴 눈으로 비나를 바라본다.

  “어쩌다 죽은 거예요?”

  “아~…… 글쎄. 어쩌다 죽었더라? 나는~ 아마도 휩쓸렸지, 그냥. 그냥 그랬어요. 숨이 막혀서 죽는 줄 알았어. 진짜 죽었지만. 아니, 슬픔한테 등 떠밀려서 떨어졌을 수도 있고? 뭐가 붙었거든. 아닌가. 어쩌다 죽었을까? 그레이스는 어쩌다 죽었어요? 지금은 왜 여기 있지??!?”

  비나는 그레이스가 기억하던 것보다 미친 사람 같았다―이상한 사람이긴 했지만 미친 것 같진 않았는데―. 상황이 너무 어이없어서 저러는 걸지도 모르고, 원래 저런 사람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는 사람의 온기는 제법 위안이 되었다. 아직 비나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걸 그레이스는 그때 깨달았다.

  비나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다. 비나는 맞잡은 손을 흔들면서 그 특유의 미소를 지었다. 짓궂고 여유로우면서도, 어딘가 비뚤어진 미소.

  “그레이스.”

  “네?”

  “이러면 안심이 돼요?”

  “그건….”

  “아하?”

  비나가 눈을 빛냈다. 그레이스는 비나의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전신을 타고 올라오는 감각. 머리를 두드리는 생각, 안정감과 불안감, 자신의 것인 감정들과 자신의 것이 아닌 감정. 그리고 긍정의 답변.

  두 사람은 서로가 아직 서로의 생츄어리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생츄어리

 

  사람의 기억이 조각날 때 리하인의 사람들은 그를 드로운이라고 불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어제까지 왼손잡이였던 사람이 양손잡이가 되는 것, 평생을 사랑하던 사람을 한순간 싫어하게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드로운이 생겨나는 이유 역시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우울을 어깨에 붙이고 다니고, 호기심을 주머니에 넣고, 분노를 발로 밟고 증오를 피하면서 살았다. 그리고 일이 안 풀리면 세상이 온통 드로운 투성이라고 외쳤다.

  즐겨 찾던 식당이나 자신의 형제, 눈썹이 깎인 이유, 혹은 이름을 잊어버린 사람들을 볼 때도 리하인 사람들은 안타까운 어조로 그렇게 말했다. '드로운이 왔다 갔나 보네.'

  드로운이 되지 않으려고 사람들은 생츄어리를 맺었다. 생츄어리를 맺으면 기억할 수 있다. 상대를 이해할 수 있고, 상대의 감정에 공감할 수 있다. 내가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나의 생츄어리가 기억하고, 감정과 생각은 두 사람 분의 것이 된다. 서로를 공유하고 서로의 빈칸을 채워주는 존재. 존경받는 연예인이 TV 프로그램에 나와서는 생츄어리가 곁에 있다면 당신은 사랑도 분노도 슬픔도 우울함도 잊지 않고 당신의 생츄어리와 그 모든 순간을 나눌 것이라고, 얼마나 값진 삶이냐고 말했다. 간혹 가다 죽기 전까지 서로가 생츄어리였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미담처럼 떠돌았다. 글로, 영화로 그런 이야기가 남겨지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생츄어리를 쉽게 맺고 끊었다. 다른 사람과 살을 맞대고 몸을 만지면서 생츄어리를 만들었다. 미담과 달리 현실의 생츄어리는 보통 3-4개월을 간다지만, 이 사람들은 1개월 만에, 1주 만에, 1시간 만에 생츄어리를 끊는 일도 잦았다.

  탈라사 비나도 그런 사람들 중 하나였다. 그는 섹스 도중 생츄어리를 맺곤 했다.

  시야에 몸을 가두고, 살을 부딪히고 냄새를 맡다 보면 충족감과 함께 더 많은 것을 바라는 마음이 생겼다. 생츄어리와 섹스를 할 때의 느낌은 차원이 달랐다. 더 큰 자극과 충만함. 그리고 그것을 넘어서는 무언가…. 남의 시야와 기억 속에서 스스로의 몸을 감각할 수 있었고, 타인의 몸도 자신의 몸처럼 느낄 수 있었다. 생각, 감각, 느낌, 기억, 모든 것을 극한으로 끌어올리는 것 같은 경험이었다. 비나는 그것 때문에 생츄어리를 맺었다.

  비나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들이 자주 찾는 동네에 거주했다. 펍과 클럽이 많아 낮보다 밤이 더 시끄러운 곳이었다. 비나는 잡다한 걸 파는 가게를 운영하는 한편 남의 뒤를 캐는 일을 했다. 사람들은 비나를 ‘b’라고 부르거나 ‘탐정’이라고 불렀다. 비나는 젊었고, 사는 게 지루했다. 사람을 쉽게 사귀고 놓았으며 생츄어리도 그와 마찬가지였다. 언젠가 끊길 것을 상정하고 있었기에 더 자유로웠고, 개방적이었다. “왜 그런 생각을 했어?” 생츄어리가 그의 생각을 읽고 물어보면, 비나는 “그냥~.”하고 넘겼다. 사는 게 늘 그런 식이었다.

  ‘그냥.’

  모든 일이 그냥 벌어졌다.

  그렇게 생각해야 마음이 편했다.

 

  “좀만 더 천천히….” “이런 적 처음이에요.” D는 비나의 팔을 붙잡고 자주 이렇게 말했다. 열에 들뜬 얼굴로 입술을 깨물곤 했는데, 그게 마음에 들어서 비나는 속도를 늦췄다. 뜸을 들이며 고개를 들면 D가 비나의 팔과 허리, 허벅지를 붙잡고 다음을 재촉했다. “천천히?” 비나가 놀리듯 말했다.

  "당신이 원한다면…"

  생츄어리의 실이 미약하게 생기는 걸 느낀 순간, 비나는 D를 밀쳤다. 결코 약하지 않은 세기였다. 방금 전까지만 해도 몸을 붙이고 있던 사람이 얼빠진 얼굴로 벌떡 일어난다. D는 상황을 이해하지 못해 어안이 벙벙했다.

  “왜 그래요?”

  “젠장… … … ….”

  비나는 자기 얼굴을 벅벅 문질렀다. 그러고도 진정을 못 해 똥 마려운 사람처럼 빠르게 걷기 시작했다. D는 비나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비나는 답하지 않거나 동문서답을 했고, D가 비나의 어깨를 붙잡았을 때는 쳐내기까지 했다. D는 혼란스러웠다.

  “내가 생츄어리가 있거든요? 그레이스라고? 아니, 난 죽었거든요! 아니, 이게 아니지, 내가 토르만 쇼 주인공이거든요? 생츄어리에 가려고 했단 말이야. 그러니까 안전지대에! 그러니까… … 그러니까 나 왜 여기 있지?”

  "비! 왜 그래요? 진정하고 말을 해봐요."

  "아~ 미치겠네. 아, 아니에요. 젠장. 난 죽었어… 빌어먹을. 오늘 날짜가 어떻게 돼요?? 아니~ 아니야. 나 갈게요!"

  "하…"

  D는 분을 참지 못하고 비나의 옷을 집어던졌다.

  “당장 꺼져요.”

  D의 집안을 배회하던 비나는 그제야 옷을 주워 입었다.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것 같았지만, D는 이제 그것이 궁금하지 않았다. 저런 드로운 같은 인간은 무시하기로 정했다. 하지만 어떤 말은 너무 잘 들려서 D의 심기를 불편하게 만들었다. 예를 들자면,

  “좆 됐네.” 같은 말.

 

  D에게 뺨을 맞고 밖으로 나온 비나는 한참 골목을 배회했다. 혼란스러웠다. 자꾸만 기억이 떠올랐다. 이를테면 자신은 죽었다는 사실이라든가. 카시안의 킥보드를 잃어버렸다는 사실이라든가. 물에 빠졌을 때 느낀 공포감이라든가. 재이 후안에 관한 것들이라든가. 아커만 그레이스의 말이라든가.

  비나는 뇌에 구멍이 뚫린 것 같다고 상상한 적이 있다. 지금은 그 구멍에서 물이 밖으로 튀어나와 넘실거린다. 뚜껑을 닫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애초에 뚜껑 따위 가져 본 적이 없다는 걸 깨닫는다. "앗." 눈꺼풀에 물방울이 떨어졌다. 고개를 들어보니 비가 내리고 있다. 그가 기억하는 리하인처럼.

  비나는 아주 긴 한숨을 내쉬며 한탄했다.

  "아~~…… ……어디 갔지?"

 

 

 

구멍

 

  어느 오후, 29세의 탈라사 비나는 자신이 다른 사람이 되었음을 깨달았다. 분명 자신의 집일 텐데 아주 낯설었고, 과거가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그것은 벼락을 맞거나 목덜미의 털이 쭈뼛 서는 경험은 아니었다. '드로운이 왔다 갔나 보네.' 깨달음의 순간은 찰나였고, 집을 둘러보던 탈라사 비나는 이사를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결정은 빨랐다.

  기억에 구멍이 뚫린 부분도 많았다. 처음에 그 구멍은 작았는데, 탈라사 비나가 이사를 하고 성을 쓰지 않고 명함에 이름을 비로 적는 동안 넓어졌다. 비나는 신경 쓰지 않았다. 아니, 신경 쓰고 싶지 않았다. 새까맣게 뻥 뚫린 구멍을 들여다보는 일은 미친 짓이라고 생각했으니까. 그런 건 철학자나 과학자가 하는 일이지, 탈라사 비나가 할 일이 아니다. 전에도, 아주 어렸을 때도 그런 구멍들은 존재했다. 다들 그렇게 산다. 탈라사 비나는 인챈터였고 공간과 공간 사이 틈에 물관을 보관했다가 꺼내곤 했다. 잊어버린 것들은 영영 꺼내지 못한 채로 잃어버린다. 다른 것들도 마찬가지다. 어떤 것들은 이해하려고 노력해봤자 이해할 수 없다. ‘그럼, 뭐. 그냥 그런 거지.’ 비나는 자주 어깨를 으쓱였다.

  몇 년 뒤 비나는 이상한 문자를 받았다. 곧 비가 내릴 테니 뭘 잡고 있는 게 좋겠다나 뭐라나. 비나는 생츄어리였던 카시안의 손을 잡았고 함께 물에 휩쓸렸다. 정신을 차려보니 생츄어리의 연결고리는 끊어져 있었다. 처음 보는 도시였다. 그때의 비나는 서른셋이나 서른넷… 혹은 서른둘 정도의 나이를 먹었다. 뚜껑을 덮어둔 구멍 같은 건 마음에 걸리지도 않았다. 그러나 그날, 이상한 문자를 받고 낯선 도시에서 눈을 뜬 날 이후로 모든 것이 바뀌었다.

  탈라사 비나는 생각한다. 기억을 되짚는 일은 새까만 구멍을 들여다보는 것과 비슷하게 멍청한 짓이다. 잃어버린 것을 위해 애써봤자 소용이 없다. 잃어버릴 것은 잃어버리도록 두면 된다. 애쓰는 일은 한심하다. '어차피 언젠간 죽을 텐데.'

  이상한 문자의 발신인은 세상이 멸망할 거라고 말했다.

  생츄어리를 만드세요.

  기억하세요.

  안전지대를 알려줄게요. 그곳으로 가세요.

  마치 신처럼 정답을 말했다.

  문자를 받은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신에게 선택받는 것은 늘 소수이니 이상한 일은 아니라고 비나는 생각했다. 비나는 샨과 생츄어리가 되었다가 다시 혼자가 되었고, 신은 그에게 아커만 그레이스의 연락처를 공유했다. 비나와 그레이스는 생츄어리가 되었다. 비나가 생각하기에 그레이스는 착하고 순진한 사람이다. 그런 사람과 생츄어리를 하는 일은 처음이었고, 아마 그레이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비나는 그레이스와 섹스를 하지 않았지만 생츄어리를 그만두지도 않았다. 가끔 무료함이 고개를 들 때면 생각했다. '죽기는 싫으니까.'

  리하인이 멸망하는 날. 비나는 안전한 곳으로 도망가는 데 실패했고, 죽었다.

  그리고 10월 30일, 리하인에서 눈을 떴다.

  이번에 비나는 구멍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곳에 자신이 있었다. 이 세계의 모든 잃어버린 기억과 물건과 사람들처럼 그 구멍 안에 들어가 있다가, 별안간 밖으로 꺼내어졌다. 비나가 잃어버린 것들도 함께.

  어쩌면 신도 인챈터인지도 모른다. 자기 마음대로 넣었다가 뺐다가. 이번에는 신이 고약한 장난으로 자기가 넣고 잊어버린 것들을 세상에 부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쓰레기통을 거꾸로 뒤집어 비우듯이, 몽땅.

 

 

 

 

약속

 

  “네. 그렇네요. 비나 씨도 그렇지 않나요?”

  “그런… 가? 아~ 아니라는 게 아니고, 아직…”

  “불안해서요?”

  비나는 장난스럽게 웃었다. 그레이스는 그것이 침묵을 가장한 긍정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불안해하고 있다. 그것들을 공유할 수밖에 없는 그레이스를 속일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장난스럽게 웃는 얼굴 너머로 불안과 우울과 절망과 분노가 넘실거리고 있었다. 그 기운이 분노우울슬픔과도 닮아 있어서 그레이스는 저도 모르게 손을 뺐다.

  “왜?” 비나가 묻는다.

  “….”

  “실망했어요?”

  그레이스는 불퉁한 표정으로 입을 다물었다. 곁눈질로 자신의 생츄어리를 보자 붉은 뺨이 눈에 들어왔다. 누가 봐도 맞은 꼴이다.

  “뺨은 왜 그래요?”

  비나는 말없이 입꼬리를 올렸고, 다음 순간 그레이스는 자신을 만나기 전 비나에게 있었던 일들을 알게 되었다. 잊어버린 기억을 떠올리듯 자연스럽게. 서로의 기억을 공유하는 생츄어리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레이스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눈을 굴렸다. 그가 안다는 걸 비나도 알고 있기에 모른척하기도 어려웠다.

  “생츄어리… 하려고 하셨네요.”

  “안 했어요~! 나 기억도 없었는데!”

  “원래 그렇게 쉽게 하세요?”

  “뭐, 그렇죠. 오히려 이쪽이 이상하지. 뭐냐면~ 별 이유 없이 생츄어리를 유지하는 거. 오래되진 않았나. 아닌데. 우리 꽤 오래 했잖아요?”

  “얼마 안 됐다고 생각했어요.”

  “에이. 근데요, 그레이스. 있잖아.”

  대화는 자주 끊겼다. 단지 서로 어긋나서가 아니라, 비나가 툭하면 생떼를 부리며 우는 소리를 냈기 때문이다. 비나는 자신의 주머니에 다섯 번쯤 손을 집어넣고 그때마다 욕을 뱉었다. 여섯 번째에는 주머니에 든 것을 모두 꺼내 바닥에 버렸다. 그레이스는 바닥에 쓰레기를 버리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으나 그쯤 되니 힘이 빠졌다.

  “그러지 말고 우리 계획을 세워 봐요.”

  “계획~? 이게 다 뭔지 모르겠는데 무슨 계획을요? 우린 죽었어!”

  신경질적인 대꾸가 돌아왔으나 그레이스는 물러서지 않았다.

  “이번이 마지막이 아닐지도 모르잖아요.”

  "마지막이 아니면 뭐해??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잖아!"

  "확신할 수 있는 것도 없잖아요."

  "기억도 제멋대로고 죽었다 사는 것도 제멋대론데 뭔 의미가 있다고?"

  "제발, 좀!"

  그레이스가 큰 소리를 냈다. 두 사람의 시선이 교차되는 사이에 그의 분노가 그대로 비나에게 넘어온다. 그레이스는 고개를 돌렸다. 비나는 아직 빨갛지 않은 쪽 뺨을 맞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레이스는 감정을 삭힐 동안 비나의 얼굴을 보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렇게 전달하고 나서야 그레이스는 비나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만약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이 하루라면요?”

  “하루?”

  비나는 반사적으로 시각을 확인했다. 12시 정각이 되기까지 6분이 남아 있었다. 비나는 초조해졌다.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근거는 없어요. 가정해 본 거죠. 굳이 찾으면, 할로윈에는 죽은 사람이 돌아온다는 말도 있잖아요.”

  “그러면, 아니 그걸 왜 지금 말해요?”

  그레이스의 생츄어리는 이제 절망 어린 얼굴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 수면 밑에서 넘실대는 감정들이 느껴졌지만, 제법 가라앉았다. 이 정도는 괜찮다고 그레이스는 생각했다. ‘이미 이 사람을 겪어봤으니까.’ 비나가 다시 불행과 비관과 분노에 자기 몸을 맡기려고 들기 전에, 그레이스는 비나의 팔을 붙잡은 손에 약하게 힘을 주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으니까. 그러니까 제 말은… 우리에게 필요한 말을 하자는 말이에요.”

  “이제 5분이야.”

  “다음에도 우리 둘 다 살게 된다면, 가장 큰 도시의 1번지에서 만나요. 1번지는 어디에든 있을 테니까요. 술 마시거나 골목에서 소리 지르거나 … 하지 말고 바로 와요.”

  “….”

  “작별인사처럼 들린다는 거 저도 알아요. 하지만,”

  “… 그레이스는 어떻게 그렇게 멀쩡해요?”

  "저 안 멀쩡해요…. 비나 씨도 알고 있잖아요."

  "아~~ 알았어요. 알았다구요."

  비나는 자기 얼굴을 문지르고 머리카락을 쥐어짰다. 잠시 정적이 흘렀지만, 두 생츄어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손과 팔이 서로의 몸에 닿았고 비는 모든 냄새를 선명하게 만들었으니까.

  리하인이 멸망하는 날, 비나는 그레이스와 했던 약속을 떠올렸다. '술 마시거나 골목에서 소리 지르지 말고 바로 와요.'와 비슷한 약속이었다. 그땐 약속을 지키지 못했다. 그러나 지킬 생각을 하고 있었다. 비나는 자신의 머릿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을 생츄어리를 향해 고개를 들었다.

  "비나 씨. 괜찮아요?"

  "그레이스는?"

  "안 괜찮아요."

  "나두. 근데요, 그레이스."

  "네."

  "왜 우린 지금도 생츄어리일까?"

  "잘 모르겠어요."

  "우리 사실 드로운인 건 아니겠지?"

  "… 그건 아닐걸요."

  "나 태어나서 지금처럼 기억이 멀쩡한 적이 없는데?"

  "좋은 게 좋은 거라고 생각해요. 그리고요."

  그레이스가 비나의 생각을, 구멍 속을 들여다보며 운을 뗐다. 동의를 구하는 무언의 의사에 비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잃어버린 물건이 있다면 찾고 싶더라고요."

  "흐응~"

  "유실물 센터가 있잖아요. 가도 못 찾을 수도 있지만요. 그리고"

  "난 탐정이고?"

  비나가 그레이스가 할 말을 읽고 웃었다. 뒷말이 생략되어도 두 사람은 서로의 말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다.

  "그래요~ 그레이스가 부탁한 건 내가 찾아 줄 수 있지."

  "약속인가요?"

  "의뢰 접수!"

  둘은 서로의 말과 생각이 우스워 웃었다. 생츄어리의 웃음은 쉽게도 전염된다. 그러나 시간이 줄어들고 있었다. 서서히 실이 희미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레이스와 비나는 물에 잠기던 순간을 떠올렸다. 모든 것이 가라앉는 때, 굽이치는 물살과 그레이스가 구하려던 이의 얼굴과 비나가 먹던 젤리의 색깔, 그리고 안전지대에 두고 왔던 깃발과 서로의 목소리를. 그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미친 … 이거 12시 땡 하고 아무 일도 없으면 완전 쪽팔리는 거 알죠? 근데 그레이스.”

  “네.”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생츄어리가 구태여 입 밖으로 내민 말을 듣고 그레이스가 웃었다. 그레이스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꾹 다물었다. "그레이스." 비나가 그레이스의 볼을 콕 찌른다. 그 실없는 행동에 그레이스는 실소했다. 그리고는 비나의 볼을 꼬집는다.

  "아얏! 아파요~~"

  "엄살 부리지 말고 비나 씨야말로 빨리 오세요."

  "아, 알겠어요~!"

  농담 같은 목소리. 그레이스는 조금 짓궂은 표정이 되어 손을 내린다.

  "… 다음엔 늦지 않을게요."

 

 

 

  D가 골목에서 정신을 차린다.

  방금 전까지 무언가를 찾으려고 했던 것 같은데…… 기억나지 않는다. 그는 이 시간 즈음 담배를 사러 밖으로 나오곤 했으니, 이번에도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어딘가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다. D는 골목 안쪽으로 들어간다. 어두운 바닥에 우울이 들러붙어 있다. 그것을 발로 꾹 누르다가 D는 눈을 가늘게 뜬다.

  "하여튼 쓰레기를 꼭 이런 데 버린다니까"

  물에 젖은 종이와 사탕 껍질이 우울 곁에 버려져 있다. D는 그걸 쓰레기통에 버릴지 잠시 고민하다가 발로 끌어온다. 그리고……

  일순 빗줄기가 거세진다. 모든 소음이 빗소리에 묻힌다.

 

 

 

 

/

1. 비나에게 가장 기억에 남는 ㅇㅇㅇ

2. 할로윈에 죽은 사람들이 돌아온다면?

3. 허무주의 생츄어리주민에게 모든 기억이 돌아온다면?

옛~~~~날에 얘기나눈 적 있는 것들을 바탕으로 써봤어요. 사실 1번은 쓰다가 드랍했지만 그 흔적이 1g 정도 들어가 있답니다(흠) 이렇게 길게 붙잡을 게 아니었는데 어쩌다보니 오래...길게...붙잡고 있었네요. 이 친구는 유독 글쓰기가 힘든 것 같아요 자아가 젤리같은 친구라 그런가봐요. 죽었지만 조금은 나아진걸까나... 못난캐가 맞지만 이렇게까지 못날일인가... 쓰다가 현타왔네요 무튼 그레이스 빌려주신 대마님께 감사드립니다^__^(대마님:?) 캐붕은 공설로 반박해 주세요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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