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Agnes Obel - Camera's Rolling (Instrumental)
1. 알렉산드라 볼코프
처음으로 방주 밖을 경험한 다음 날, 아지지는 병실을 찾았다. 왼쪽 손가락이 따가웠다. 무언가가 손가락을 찌르고 들어가 나오지 않았다. 나무와 수풀, 늪을 헤집고 다녔으니 당연한 일이다. 병실은 다친 사람으로 북적였다. 전날 심하게 다쳤던 사람들의 얼굴을 찾아봤으나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사실 아는 사람의 얼굴을 찾는 게 목표였기에 맥이 조금 빠졌다. 아지지는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의자에 앉았다. 방주의 병실에만 오면 속이 울렁거린다. 노아를 통해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말하자 작은 집게 모양의 기계가 의자의 옆면에서 튀어나왔다. 아지지는 한숨을 내쉬고 눈을 기계에서 돌렸다. [자아~ 따끔!] 노아의 목소리가 들리고 기계가 손가락에 들어간 것을 뽑아낸다. 반사적으로 눈을 찌푸리다가 아지지는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었던 것 같은 두 눈동자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아는 얼굴이었다.
알렉산드라 볼코프. 알렉산드르 볼코프의 가족. 아지지는 그의 이름을 떠올리면서, 고개를 살짝 까딱이는 것으로 인사를 대신했다. [아지지 님. 더 치료하고 싶은 곳이 있으신가요?] "아뇨. 없어요." 시선이 끈질기게 자신에게 달라붙는 것 같았으나 아지지는 개의치 않고 일어나 병실을 나갔다.
이튿날 아지지는 카페테리아에서 알렉산드라와 부딪혔다. 아지지는 알렉산드라가 고의로 자신과 부딪혔다는 걸 눈치챘지만, 알렉산드라는 도리어 아지지에게 경고했다. "잘 보고 다녀야지." 아지지는 별로 고민하지 않았다. "미안해요."
그 다음날 알렉산드라는 아지지의 말꼬리를 잡고 물어졌다.
또 그다음 날 알렉산드라는 아지지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친근한 척 굴었다. 그러나 말에는 조롱이, 손짓에는 우악스러움이 섞여 있었다.
아지지는 일전에 힘이 센 무리와 부딪힌 일로 얼굴이 알려져 있었고, 그 뒤로 자잘한 괴롭힘이나 조롱에 시달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과 함께 다니거나 능력을 쓰면 한결 편했지만, 24시간을 숨어다닐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얼마 뒤면 가라앉으리라고 아지지는 생각했다. 그런 놈들은 재미없어지면 금세 대상을 바꾸니까. 그동안만 불편함을 감수하면 된다.
알렉산드라는 그 무리의 누구와도 친해 보이지는 않았으나 호전적인 얼굴과 강한 몸을 갖고 있었다. 그렇지 않았더라도 얼마든지 남을 위협할 수 있다. 그건 그냥, 하고자 하면 일어나는 일이니까. 아지지는 대부분의 괴롭힘이 마땅한 이유 없이―설령 이유가 있더라도 그 이유는 대개 괴롭힘을 자행하는 자 안에 있다― 일어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잠깐 알렉산드라의 형제가 생각났다. 알렉산드라 볼코프가 알렉산드르 볼코프의 어깨 위에 친근하게 손을 올리고 걷던 뒷모습.
"버사, 무슨 생각해?"
알렉산드라가 손가락을 튕겨 아지지의 관자놀이를 쳤다.
"아무 생각도."
아지지는 최대한 재미없게 답했다.
2. 알렉산드르 볼코프
아주 먼 곳에서 풀을 헤치고 빠르게 달리던 인영이 속도를 줄인다. 자박자박 땅을 밟는 소리, 풀이 스치는 소리, 간혹 새나 벌레가 그를 피하는 소리가 들린다. 수풀의 아주 가까운 곳에서 기척이 멈출 때 아지지는 몸에 힘을 풀고 그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알렉산드르 볼코프가 수풀을 헤치고 아지지의 곁으로 다가왔다.
"저쪽엔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쪽도요. 커다란 지네를 보긴 했는데, 당장 문제가 되진 않을 거예요."
알렉산드르가 고개를 끄덕인다. 아지지와 알렉산드르는 휴대용 단말기에 그들이 본 지역에 관한 기록을 남겼고, 사진도 몇 장 찍었다. 가져온 음식을 나누어 먹고 물을 마시고 알렉산드르가 다음으로 가 볼 곳을 제안했다. 아지지가 승낙하자 둘은 다시 걸었다.
"참, 알렉. 당신의 형제 말이에요."
"예?"
"알렉산드라."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름에 알렉산드르는 눈을 한 번 깜빡이며 아지지를 바라보았다. 아지지는 웃자란 풀을 헤치며 앞서 나갔다.
"눈에 띄는 사람이잖아요. 당신 형제니까…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져서요."
"아. …저보다 말이 많습니다."
알렉산드르는 금세 아지지의 걸음을 따라잡았다. 비슷한 높이에서 시선이 맞부딪친다. 빛깔이 다른 알렉산드르 볼코프의 눈동자는 머쓱한 듯 앞을 향하고, 이제는 그가 앞서 나갔다. 아지지는 그 어색한 대답이 우스워 농담을 던졌다.
"당신보다 말수가 적다고 했으면 놀랐을 텐데요."
"……제가 그 정도입니까?"
"몰랐어요?"
"아뇨."
커다란 나무 앞에 멈춰 선 알렉산드르는 무표정 뒤에 민망함을 숨기고 단검을 꺼낸다. 나무껍질을 갉아먹는 듯한 소리. 알렉산드르가 나무에 칼집을 내는 걸 지켜보며 아지지는 얼마 전 그들이 둘이 아니라 넷일 때를 떠올렸다. 규하와 핀리까지 함께 정찰조를 꾸린 그들은 기억하던 것보다 크고 괴이한 짐승들을 만났다. 알렉산드르는 하이에나들에 의해 심한 상처를 입고 나무 밑에 기대어 있었다. 피 냄새가 진동했다. 나뭇잎이 스치는 소리마저 폭력적으로 느껴지는 오후였다. 괜찮습니다. 땀을 흘리면서 그렇게 말하던 무표정한 얼굴. 옷에 배어 나오는 피와 얼굴에 흐르는 땀이 아니었다면 아픈 사람이 아닌 것처럼 보였을 얼굴이었다. 괜찮을 리가 없는데도.
알렉산드르 볼코프는 이번에도 밖으로 나오기를 망설이지 않았다. 방주 밖을 그와 함께 드나들면서 아지지는 알렉산드르 볼코프가 많은 순간 군인 같다고 생각했다. 상처를 감내하는 사람. 무표정한 얼굴 뒤에 감정을 밀어 넣는 사람. 나라가 없는 방주 안에서도 무형의 규칙에 사로잡혀 있는 사람. 아지지는 알렉산드르 볼코프가 미간을 찡그리면서, 그 역시 이능력의 부작용으로 멀미를 겪는다고 말하던 것을 떠올렸다. 버사 아지지 힐은 습관처럼 그에게서 자신과 닮은 점을 찾아냈다.
"왜 그러십니까?"
나무에 표식을 새긴 알렉산드르가 돌아선다. 아지지는 그가 다쳤던 부위를 보던 눈을 들어 묘하게 차가워 보이는 두 눈동자를 바라본다.
"생각해봤어요. 나도 당신보단 말이 많죠?"
"버사 씨. 그건…."
"농담이에요."
아지지는 가볍게 웃으며 오른쪽을 향해 손짓했다. "돌아가죠."
3. 쇠로 만든 사람들
알렉산드라의 괴롭힘은 나날이 심해졌다. 하루는 예고도 없이 손바닥이 다가왔는데, 아지지는 눈을 세 번 깜빡인 뒤에야 자신이 맞았다는 걸 알았다. 능력을 썼을 때처럼 급작스럽게 감각이 되살아났다. 뺨이 얼얼했다. 고개를 들자 알렉산드라의 얼굴이 보였다.
"미안, 버사. 아파?"
천진한 표정, 유쾌함과 잔인함이 숨어 있는 눈동자. 알렉산드라 볼코프의 얼굴은 무감하리만치 차갑고 매끄럽지만 무자비한 열기를 품고 있었다. 쇠로 만든 것 같은 얼굴이다. 그 얼굴을 보고 아지지는 알렉산드라 볼코프가 멈추지 않을 거라는 걸 깨달았다. 전략을 바꿔야 했다.
알렉산드르 볼코프도 그것을 눈치챈 게 틀림없었다. 아지지는 며칠간 자신을 피하던 알렉산드르 볼코프를 사람이 없는 자기계발실에서 마주했다. 그는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는데, 조용하게 준비된 말을 하는 모습이 고해하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했다.
"저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마주쳐도 모른 척 지나치면 괜찮아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쟤한테는 전부 장난에 불과하니까요."
아지지는 이해했으나 동시에 알 수 없었다. 하나의 의문이 풀리고 수많은 의문이 생긴다. 알렉산드라가 자신을 괴롭히는 이유가 형제 때문이라니.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게 무엇이란 말인가. 아니, 이유를 차치하고서라도 그렇다면 왜 자신인가. 물어볼 것이 너무 많고 한편으론 아무것도 물어볼 게 없어 아지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당신 때문이라고요?"
"예."
"개인사를 물을 생각은 없었지만 이제는 물어봐야겠군요. 형제와 사이가 안 좋나요?"
"그건…. 믿기 어렵겠지만 저를 걱정해서 그렇습니다. 저와 멀어지면 나아지겠지만, 그래도 계속된다면 경험상 폭력 외엔 답이 없습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다음에도 그런다면 제게 오십시오."
알렉은 그 특유의 화법으로, 정해진 길을 제시했다. 그 길이란 알렉산드르 볼코프가 정한 길이다. 아지지는 담담하게 물었다.
"당신한테 가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그러자 고개를 드는 알렉산드르 볼코프에게서 아지지는 알렉산드라 볼코프에게서 발견했던 것과 비슷한 얼굴을 발견한다.
알렉은 예상치 못한 순간 알렉산드라 볼코프의 몸을 덮쳤다. 조금 전까지 알렉산드라는 아지지의 옆에 서 있었는데, 다음 순간 땅바닥에 엎어져 있었다. 그의 몸 위에는 알렉산드르 볼코프가 앉아 있었다. 그리고…… 아지지는 자신이 맞았던 때처럼, 아니 그때보다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처럼 서 있었다. 뇌가 마비된 것처럼 멍했다. 찰나인 동시에 영영 끝나지 않을 것처럼 긴 시간이 흘렀다. 쇠와 쇠가 부딪히는 광경. 묵직하고 날카롭고 잔인한 소음.
"사샤!"
누군가 낯선 이름을 매섭게 부르며 그들 사이에 끼어들었을 때에서야 아지지는 정신을 차렸다. 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 있었다. 고성, 그리고 긴 한숨. 두 사람의 다리 사이로 알렉산드라의 옆얼굴이 보였다. 아지지는 무거운 발을 겨우 떼어내 두 사람 사이로 걸어갔다. "알렉." 비난인지 두려움인지 그저 뜻 없이 내뱉는 말인지 모르는 채로 이름을 불렀다. 옆에 있던 사람의 새빨간 눈동자가 잠시 아지지를 향했다가 밑으로 내려갔다. 아지지는 그의 이름을 떠올려 보려고 노력했다. 메드… 그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은데 잘 생각나지 않았다. 그 사람이 몸을 굽혀 알렉산드라를 붙잡았다. 알렉산드라 볼코프의 얼굴은 엉망이었다. 그가 너무 얌전하게 누워 있어서 아지지는 덜컥 겁이 났다.
"버사 씨… 괜찮습니까?"
그 소리.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아지지는 숨을 들이켜며 고개를 돌렸다. 자신을 부르는 사람이 있을 줄 몰랐던 것처럼.
알렉산드르 볼코프가 옆에 서 있었다. 알렉산드라를 무자비하게 몰아붙이고, 다른 사람에게 멱살이 붙잡혀서야 멈췄던 사람이. 아지지는 시선을 내려 피가 맺힌 그의 주먹을 보았다. "버사 씨." 그가 재차 이름을 불렀으나 아지지는 답할 수 없었다.
4. 아둔한 사람
"버사~"
알렉산드라는 병실 침대에 누워서 손을 흔들었다. 아지지는 알렉산드라 볼코프의 그 가벼운 태도에 잠시 말을 잃었다. 주변을 둘러봤지만, 자리를 지키고 있던 메드베데프는 보이지 않았다. 아지지는 그의 이름―성씨지만.―을 뒤늦게 기억해냈다. 메드베데프는 알렉산드르 볼코프를 멈추었고, 알렉산드라 볼코프의 옆을 지켰다. 이 기묘한 형제를 잘 아는 듯 보여서 아지지는 다음에 그를 찾아가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언제 오나 했잖아~"
아지지는 의자를 당겨와 침대 옆에 앉았다. 코와 경추, 오른팔이 골절되었다고 했다. 알렉산드르 볼코프는 알렉산드라가 원만하게 치료받는 것도 용납하지 않으려 했다. 그리고 알렉산드라 볼코프는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왼팔을 들어 자신의 목을 가리켰다.
"퍼피가 미쳐 돌았나 봐. 날 이렇게 만들고. 아파 뒤지겠어."
아지지는 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왠지 제 목덜미를 만지고 싶어져 대신 자신의 손을 맞잡았다.
"당신이 졌구나."
"허어? 버사, 내 병문안 온 거 아니야?"
"내가?"
"그렇지?"
왜인지 힘이 빠진다. 아지지는 알렉산드라 볼코프가 꺾이지 않은 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고, 그 생각이 우스워 실소했다.
"당신도 참 애석해. 세상에 마음 두고 즐길 거리가 그렇게 없는지."
"요즘 제일 재밌는 거 눈앞에 있는데?"
"오, 키튼……. 그렇다면 안 됐구나. 미안하지만 이제는 재미없는 사람 하기로 했거든."
허락받지 않은 이름에 알렉산드라의 눈동자는 순식간에 달궈진 쇠처럼 빛난다. 아지지는 고요하게 그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빛을 다시 마주하는 순간을 자주 상상하곤 했다. 아마 먼저 유효타를 날리는 건 언제고 알렉산드라 볼코프가 될 것이다. 그러나 상상 속의 아지지는 가만히 있지 않는다. 찰나 능력을 써서 기척을 숨겼다가, 주먹을 뻗는다. 노아는 공정하다. 그게 누구든, 같은 인간이기만 하다면, 똑같이 폭력 아래 버려두거나 똑같이 제압한다. 2638년의 방주는 그런 곳이었다. 아지지는 남들의 이름을 감히 공정하게 부르면서 쾌감을 느꼈고, 아무렇게나 옷을 입어 보면서 허영을 누렸고, 맡길 수 있는 모든 일을 노아에게 맡기면서 해방감을 느꼈으며, 음식과 물감을 낭비하면서 자신이 뭐라도 된 것 같은 기분에 잠겼다. 그러나 방주에 힘의 논리가 조금씩 깃들면서 아지지는 다시금 무력감을 느낀다. 아지지는 이제 몸을 움직여보고 싶었다. 다른 것을 다른 사람들과 동등하게 행할 수 있다면, 폭력도 휘두를 수 있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러니 아지지는 등에 달라붙어 두렵다고 속삭이는 1919년의 버사 아지지 힐의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멍청한 짓을 해 보고 싶었다. 단 한 대면 충분했다. 그 정도만 담금질해도 아지지의 무른 살은 온몸으로 비명을 지를 터다. 단 한 대면……
그러나 침대 위에 누워 있는 알렉산드라 볼코프는 주먹을 뻗지 않고, 아지지의 손 역시 제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여 있다. 알렉산드라는 얼굴을 구겼다가 코의 통증에 욕설을 내뱉었다.
"별 게 다 나를 그따구로 부르네. 퍼피가 알려주디?"
"당신이 알려줬지. 알렉이 퍼피라면, 당신이 키튼이 아닐 이유도 없잖아."
'당신들은… 가족이니까.' 아지지는 이제 그들이 어떤 부분에서 닮았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물론 알렉산드라는 알렉산드르보다 말이 많았고 아지지는 환자의 말이 너무 길어지기 전에 병실을 빠져나왔다.
당신과 당신 형제를 구분해서 부르고 싶어요.
언젠가 아지지는 알렉산드르 볼코프에게 새 이름을 구했다. 알렉산드르와 알렉산드라는 사실상 같은 이름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알렉산드르 볼코프는 가족들끼리는 자신을 퍼피로, 알렉산드라를 키튼으로 부른다고 말해 주었다.
애칭으로요?
예.
아지지는 그 애칭이 기묘하다고 생각했다. 퍼피와 키튼은 알렉산드르와 알렉산드라만큼 성의 없게 느껴진다. 그리고 그 애칭은 아지지가 알고 있는 다른 퍼피를 떠올리게 한다. 뷰캐넌 가에 퍼피가 들어왔을 때, 사람들은 퍼피의 뒤에 모여 아무리 그래도 어떻게 번듯한 이름 하나 없이 '퍼피'냐면서 비웃는 목소리를 흘렸다. 어리다 해도 다 큰 젊은이를 퍼피라 부르는 것은 이상했던지 곧 모두 그 애를 '펍'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펍'은 '퍼피'가 아닌 사람들의 애칭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웃기는 건, 'Puppy'가 'Pup'에서 뻗어 나온 단어라는 사실이다.
사람을 사람이 아닌 존재로 부를 때는 경멸이 섞이기 마련이다. 아지지는 퍼피의 이름을, 아니 그 애를 둘러싼 세상의 경멸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다. 그 세상은 아지지를 경멸하는 세상이기도 했다. 세상이 다르고 앞에 선 사람이 다르고 언어 역시 상황에 따라 다른 법이지만, 버사 아지지 힐은 이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냥… 알렉이 좋겠군요.
아지지는 알렉산드르 볼코프를 피했다. 방주는 넓고 겨울을 날 준비로 연일 어수선했다. 조금만 조심한다면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치지 않을 수 있었다. 아지지는 문득 딜라일라를 찾고 싶었다. 하지만 딜라일라에게 자신의 힘든 일만을 토로하게 될 것이 저어되었고, 힘들 때 그 사람을 떠올린다니 그것 역시 미안한 일이었다. 무엇보다 지금 자신이 힘들다는 걸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예고 없이 사방에서 바람이 불어오는 것 같았다. 바람의 방향을 쫓는 사람이고자 했건만 실상은 그저 돌풍에 휩쓸리는 나뭇잎과 다름없다. 아지지는 뻐근한 목덜미를 주무르며 일전에 알렉과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당신한테 가면요?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건가요. 다신 괴롭히지 못하게 팰 겁니다. 이길 수 있나요? 확신은 못 하겠지만 질 것 같지는 않습니다. 그리고 알렉은 그렇게 했다. 그의 가족을, 알렉산드라를 팼다. 심지어 아지지가 그를 찾아가지 않았는데도. 그저 순식간에…….
아지지는 물리적인 폭력 앞에서는 몸이 경직되곤 했다. 자신의 얼굴과 온몸을 통해 열기를 뿜어내는 사람들을 보면 늘 압도당하고 만다. 술을 마시고 싶었다. 아지지는 그건 자신이 도망가고 싶어서라는 걸 알았다.
"혹시 날 피하고 있나요?"
이틀만에 아지지가 알렉을 찾아가 건넨 첫 마디는 우습기 짝이 없었다.
"피하진 않았습니다."
알렉은 진솔하게 눈을 맞춰 왔다. 그리고는 미리 생각해둔 것처럼 쉼 없이 말한다.
"하지만 앞으로도 키튼이 계속 버사 씨에게 피해를 준다면 서로 없는 사람으로 치는 게 좋겠습니다. 그편이 키튼도 금방 흥미가 식을 테니까요."
아지지는 그가 그렇게 말할 것을 예상하고 있어 실망하지 않았다. 곧잘 탁해지는 목소리를 다듬어 부드럽고 낮은 소리를 낸다.
"나는 당신을 없는 사람으로 칠 생각이 없어요."
"저와 거리를 두는 편이 버사 씨도 편하지 않습니까?"
양손을 가지런히 모으고 고개를 드는 알렉의 얼굴은 정해진 길을 제시하듯 매끈했다. 쇠 같은 얼굴은 아니다. 그의 무덤덤한 얼굴은 우습게도… 유약해 보인다. 알렉이 너무 쉽게 포기하는 사람처럼 굴어서 아지지는 일순 피와 쇠를 잊어버릴 것 같았다. 아지지는 이제 알렉산드르 볼코프가 솔직한 사람인지 솔직하지 못한 사람인지 알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알렉의 말은 틀리지 않았다. 아지지는 쇠가 부딪히는 광경에서 멀어지고 싶었다. 그래도 될 것 같았다. 지금 이 순간 멀어지기를 택한다면 그들은 서로를 곧 잊을 것이다.
그러나 그 목소리 때문에 도망갈 수 없었다. 버사 씨. 괜찮습니까? 그날 알렉은 아지지가 답할 때까지 끈질기게 물었다. 자신은 틀리지 않았다는 얼굴로, 그럼에도 끊임없이 제 안색을 살피기 위해 눈동자를 굴렸다. 괜찮습니까? 버사 씨. 미안합니다…. 그날은 알렉이 아지지보다 말이 많았다.
"그럴지도요. 그런데 왜 그래야 하죠?"
"형제 사이에 껴서 불편함이 많으실 텐데, 그게 가장 빠른 방법입니다."
"대체 당신에게 금칠이라도 되어 있는 건가요. 금은 구경도 못 해 봤는데, 제법 억울하군요. 이젠 오기가 생겨서라도 눌러앉아야겠는걸요."
그러자 알렉의 시선이 깊이 가라앉았다가 한달음에 위로 올라온다.
"버사 씨는 예상외로 아둔하시군요."
"그래서 마음에 안 드나요?"
"그건 아닙니다."
이상한 일이다. 사람을 두려워하면서도 외면할 수 없게 되는 일, 사람의 옆에 있으리라고 결심하는 일, 사람과 사람이 살아가며 벌어지는 모든 일이. 결국은 예고 없이 불어오는 바람이 모든 것을 바꾼다.
아지지는 알렉의 손 위에 제 손을 가볍게 올렸다.
"그렇다면 당신도 아둔한 사람이 되어보는 건 어떤가요. …혼자보단 둘인 편이 덜 우습거든요."
실은 더 우스울지도 모를 일이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옅은 바람을 내쉬며 웃었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