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삶엔 대가가 있기 마련이더군요. …당신도 그렇지 않나요."
당근을 썰면서 아지지가 묻자 비나가 고개를 들어 아지지를 바라본다. 정말 알아도 괜찮냐고 묻는 듯한 눈이다. 그는 냄비의 불을 조절하면서 말한다.
"알고 싶어?"
1.
아지지는 옆구리를 붙잡고 언더를 향해 사정없이 총을 쐈다. 몸이 아팠다. 땀으로 옷이 젖었고 옆구리에서 흘러나오는 피가 손을 빨갛게 물들였다. 기척을 숨기려고 애써봤지만, 고통에 갇힌 몸을 선명하게 인지하면서 동시에 희미하게 만드는 건 불가능했다. 죽기 전에 느꼈던 공포가 서서히 몸과 영혼을 잠식했다. 차라리 언더에게 한 번 더 공격당한다면 빠르게 죽을 수 있겠지, 죽는 건 순식간이야, 적이 많으니까 그냥 힘을 빼면 돼, 가만히, 몸을 맡기면 돼……. 방주에서 눈 뜨기 전 버사 아지지 힐은 천천히 죽었고, 아지지는 고통 속에서 천천히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는 경험을 다시는 하고 싶지 않았다. 비이성적인 사고가 이어지는 동안 마지막 총알이 나무에 맞았다. 아지지는 팔을 위협적으로 휘두르며 다가오는 언더에게 총을 겨냥했다. 방아쇠를 연신 당겼지만 소용이 없었다. 막상 총알이 떨어지자 목구멍에서 낮은 비명이 흘러나왔다.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그러나 눈앞에 보인 것은 언더의 뒷모습이다. 모든 언더들이 일제히 등을 돌리고 방주에서 떠나고 있었다.
어떻게 방주로 돌아왔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았다. 속이 울렁거렸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옆구리의 부상으로 온 신경이 몰리다가도 뇌가 마비된 것처럼 멍해졌다. 사람들과 언더들의 시체, 피와 살점과 생체 광석들 사이를 걸으면서 죽음과 고통에 관해 생각했다. 생각이 부정적인 방향으로 흐르는 걸 걷잡을 수 없었다. 불현듯 왼쪽 귀를 통해 끔찍한 비명이 들려왔다. 아지지는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가 잘린 팔을 붙잡고 우는 사람의 얼굴과 마주쳤다. 옆에는 검은 팔이 떨어져 있었다. "보지 마십시오." 누군가 아지지의 지척에서 말했고 아지지는 그의 말대로 고개를 돌렸다. 목소리가 이어졌다. 아지지는 그가 한 말의 대부분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덕분에 다른 생각에 사로잡히지 않을 수 있었다.
허공에 떠 있던 반투명한 흰 검이 기억난다. 몸 안에 갇혀 울렁거리는 모든 것들을 견딜 수 없어 아지지는 구역질을 했다. 시야가 좁아졌다. 검이 자신을 향해 다가오자 아지지는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끔찍하게 길게 느껴지는 시간 동안 아지지는 숨을 참았다. '죽겠구나.' 죽음의 순간 찾아오는 검이 흰색인 건 아이러니하다고 아지지는 생각했다. 악마와 사신은 검은색을 입곤 하니까. 그러나 눈을 떴을 때 가라앉은 초록색 눈이 아지지를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괜찮아. 이건 널 해치는 검이 아냐."
죽음은 기묘하게도 고통을 앗아가는 것 같았다. 고통이 한 점에 몰렸다가 빠져나갔다. 마치 무언가가 상처를 빨아들이는 것처럼. 몸이 차갑게 식었다가 다시 뜨거워졌다. 손이 뜨거웠다. 아지지는 자신이 비나를 붙잡고 있음을, 제 손은 알렉이 붙잡고 있음을 느꼈다.
이때의 기억은 어지럽게 뒤섞여 있다. 아지지는 눈을 감았다 뜨기를 반복했다. 의식이 몽롱해지다가 또렷해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몇 가지는 알고 있다. 자신을 부축하면서 끊임없이 말을 붙여준 사람이 알렉이라는 것. 비나가 자신을 죽인 게 아니라 살렸다는 것. 손의 온기. 언젠가부터 제 손에 아무것도 붙잡히지 않아 허전하다고 생각했던 순간.
한 가지 헷갈리는 기억도 있다.
아지지는 어렴풋이 비나가 우는 얼굴을 본 것 같았다.
2.
"그래요. 알고 싶어요."
아지지는 비나가 자신을 치료하는 대가로 무엇을 잃었는지, 혹은 무엇을 부담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답이 떨어지자 비나는 스튜를 국자로 크게 휘저으면서 담담하게 말했다.
"회복의 대가는 당연하겠지만 내가 부담하게 되어 있어. 치료해주고 고통을 대신 받는 거야."
"고통이라면, 어떤…."
"칼로 찌르는 것처럼 통증이 느껴져."
아지지는 모든 동작을 멈추고 비나를 바라보았다. 자신의 배에 날카로운 통증이 스쳐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저도 모르게 비나의 배를 향해 손을 뻗으려다가 그만둔다. 그러니까 자신이 눈도 제대로 못 뜨고 구역질을 하면서 누워 있을 때 비나는 아지지를 힘들게 했던 그 통증을 받아가면서도 검을 손에서 놓지 않았던 거였다. 이어 나오는 말은 아지지가 붙잡을 수 없었다.
"미안해요."
"네 잘못이 아닌 거 알고 있지? 지금은 안 아프니까 걱정하지 말고."
발밑이 무거웠다.
3.
정신을 차렸을 때 아지지는 벌떡 일어났다. 등골이 서늘해졌다. 목구멍까지 화와 설움이 치밀었다. 확인하지 않은 것이 있었다. "그 애… 그 애는 어디 있지?"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피가 빠르게 식는 기분이었다. 아지지는 방주 안팎을 정신없이 걸었다. 우는 사람들과 비명, 가끔 마주치는 기이한 고요 속에서.
마침내 그 애의 짧은 머리카락이 어깨 위에서 흔들리는 걸 보고서야 아지지는 걷기를 멈췄다. 입안에서 'm'으로 시작하는 철자가 한참을 맴돌다 떨어졌다. 퍼피는 다쳤지만 크게 다친 것 같지는 않았다. 언더에 물린 것 같지도 않다. 다만 가만히 서서 곤란한 사람처럼 이마를 짚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낯설어 아지지는 그쪽으로 다가가는 걸 망설였다. 움직이지 않고 퍼피를 바라보다 문득 아지지는 서서히 시야가 넓어지는 걸 느꼈다. 퍼피의 앞에 누워있는 사람은 나타샤였다. 아지지는 방주 밖의 사람들이 나타샤를 '눈 아가씨'라고 부른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지지는 한 번도 나타샤를 그렇게 부르지 않았지만, 분홍빛이 맴도는 새하얀 눈 같은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날아다니는 나타샤를 본 적이 있었다. 나타샤는 검은색 옷을 입고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그의 흰 머리카락을 돋보이게 했다. 해가 높이 떠 있었다. 지구의 중력을 무시하면서도 태양을 받아 반짝거리는 나타샤의 뒷모습은 아지지의 마음속에 오래 남아 있었다. 그러나 나타샤는 다쳤고, 의식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피 흘리는 모든 사람의 낯에는 환상을 덧씌울 겨를이 없다. 아지지는 갑작스럽게 세상에 떠밀린 것처럼 사람들의 신음과 고함, 신을 구하는 목소리와 망자를 그리는 말, 울음과 고통을 들었다. 아픈 이들의 얼굴을 보았다. 이능력을 썼기 때문이 아니다. 숨을 돌릴 수 있게 되자 자신의 고통에 매몰되었던 시야가 트인 터다.
많은 사람이 죽었고, 많은 사람이 언더에게 물렸다. 지금도 사람을 구하려는 사람들, 사람을 찾으려는 사람들이 사방을 분주하게 돌아다니고 있었다. 아지지는 그중에서 제가 찾던 사람에게로 걸어갔다. 퍼피는 기민하게 기척을 알아채고 고개를 들었다. 짜증을 내고 싶은 표정이었다. 아지지는 입술을 몇 번이나 달싹였다. 퍼피의 앞에 서면 자주 할 말을 잃는다. 그러나 자신도 모르는 새에 퍼피의 어깨를 붙잡는다. 퍼피가 먼저 입을 열었다. 변명처럼 말이 쏟아져 나온다.
"이건 당연한 거야. 나랑 있을 거면 자기 목숨 위태로울 줄 알았어야지!"
퍼피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갈 곳을 잃은 것처럼 보이는 두 눈동자가 버사 아지지 힐을 향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괴로운 거지?"
"… …사람이니까."
그들은 불가항력처럼 말을 주고받는다. 퍼피의 얼굴이 조금 더 일그러졌다가 입매가 서서히 가지런해진다. 아지지는 급하게 양손을 들어 올려 먼지와 피가 묻은 날선 얼굴을 붙잡았다. 그 애가 균열을 다시 진흙으로 메꾸기 전에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무사해서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야……."
4.
아지지는 천천히 걸었다. 천천히 걸으면서 낮에는 자신이 아는 사람들이 무사한지 확인했고, 우는 사람의 등을 안거나 웃는 사람과 장난을 쳤다. 밤에는 술병을 들고 영화관에 앉았다. 술을 마시고 또 취해서는 이곳이 어딘지 잊어버리려 했다. 울고 싶거나 사라지고 싶은 새벽이 찾아왔다. 그러나 어떤 밤에는 술병 대신 무알코올 주스를 챙기거나 동행인을 구하기도 했다. 밤을 잘 보냈는데 낮을 견딜 수 없어 캡슐에서 나오지 않은 날도 있었다. 어제와 오늘, 낮과 밤이 같거나 다른 모습으로 천천히 흘러갔다. 방주에는 300명 남짓한 사람이 남았다. 아지지는 아직 살아있었다.
커다란 냄비 안에서 보글보글 끓는 스프를 바라보면서 아지지는 왜 이런 곳에서, 기계가 모든 걸 대신할 수 있는 세상에서 사람들이 계속 요리를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건 노아에게 맡기라고 했는데도 티 타임을 권하고 손수 차를 내리던 에드워드의 얼굴, '일종의 하루를 잘 부탁한다는 뇌물이에요.' 빵에 블루베리 잼을 바르고 따뜻한 커피 옆에 각설탕 두 개를 내려둔 뒤 자신에게 먹어보라 권하던 '보비 아저씨'의 얼굴이 떠올랐다.
스프가 끓는 걸 기다리는 것밖에 남지 않게 되자, 비나와 아지지는 한동안 말없이 앉아 있었다. 나란히 벽에 기대어 있다가 간간이 국자를 들어 스프를 휘저었다.
"요리는 굉장히 오랜만에 해 봐요." 아지지가 말했다.
"정말? 익숙해 보이는데."
"네. 익숙한 건 지긋지긋해지기 쉽잖아요. …불은 꺼도 괜찮겠군요."
"응."
비나가 새 수저를 들어 맛을 한 번 보고 아지지에게도 권했다. 두 사람은 불을 끄고 식탁을 정리했다. 커다란 냄비를 함께 들어서 옮기면서 아지지는 이전에 의무실을 찾았을 때 봤던 대용량 냄비를 떠올렸다. 같은 냄비다. 아지지는 비나의 어깨를 가볍게 잡았다. 비나가 무슨 일이냐는 듯 고개를 든다. 울지 않을 것만 같은 초록색 눈동자. 아지지는 그 눈동자를 보면서 생각했다. 만약 그들이 오래 살아남는다면, 지금의 일들은 어떤 기억으로 남을까.
"치료해줘서 진심으로 고마워요. 대가라기엔 부족하겠지만 보답할 기회는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러니까… 필요한 게 있으면 언제든 말해요."
#2021
Mission 06. 수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