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도회
2021. 11. 25.

 

파트너

with. 뉴먼 메릿

 

 

 

  길이 130cm, 너비 24m의 대형 증기 유람선 〈그레이트 니케 호〉는 거대한 불협화음의 연속으로 만들어진 악보와 같았다. 영국에서 호주까지 인어를 보러 온 각국의 사람들은 종종 익숙하고 편안한 화음을 만들기도 했으나 그보다 자주 충돌했다. 음의 충돌이 얼마나 많은 곳에서 벌어지는지, 뛰어난 음감을 가진 자라도 악보를 그릴 수 없을 터다.

  프랭키는 이 악보가 흥미로웠다. 따지자면 그는 불협화음을 만드는 주범 중 하나였다. 영 편하지는 않지만 난 꼭 어느 날까지 호주로 가야 하는 사람은 아니라… 파도가 운명처럼 우릴 여기 데려온 거라고 생각하고 있지. 튀는 음표는 불협화음 속에서 쉽게 묻힌다. 음이 어긋나고 튀어나가는 세계가 프랭키는 정교한 하모니의 세계보다 편안했다. 그도 그럴 게 프랭키는 밀항자였으나 1등석에 머물고 있었고, 정상적으로 운행했다면 참석할 일이 없었을 무도회에도 참가하게 되었다. 마다할 이유가 없다.

 

 

 

 

 

 

  불을 밝힌 연회장은 오랜만에 사람들로 가득했다.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빙글빙글 도는 사람들. 손을 맞잡고 서로의 어깨나 허리를―때로는 발을― 건드리는 파트너들. 벽에 기대서거나 의자에 앉아 홀로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도 있었고, 와인을 기울이며 떠드는 사람들도 있다. 무도회답게 들뜬 목소리와 낮게 맴도는 추문, 은밀하게 오가는 무형의 감정.

  프랭키는 눈을 가늘게 뜨고 벽을 바라봤다. 화려하게 입은 사람들 사이에서 어두운 드레스를 입고 벽 앞에 꼿꼿하게 선 자가 눈에 띈다. 얼마 전에는 가까운 거리에서도 그를 못 알아본 척했지만, 실은 얼굴이 보이지 않아도 몰라볼 수가 없었다. 런던의 마녀, 명성 높은 기숙학교의 교장, 귀부인들을 위한 탐정…. 뉴먼 메릿. 이 유람선이 거대한 불협화음의 악보라면, 뉴먼은 불협화음이 없어지는 순간까지 튀는 음을 찾아내는 조율사였다. 프랭키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가 지금 어떤 눈동자로 이 연회장을 지켜보고 있을지.

  "하여간 나 탐정이오, 그렇게 티를 내야겠어요?"

  곁으로 다가가 웃음기를 숨기지 않은 채 묻자, 뉴먼은 프랭키에게 할애할 시간은 없다는 듯 고개도 돌리지 않고 답했다.

  "이 배에서 단서를 찾는 인물이 한 명은 아니니 문제 될 것은 없겠죠."

  "틀린 말씀은 아니지만… 보통 이럴 땐 벽과 거리를 두자는 제안이죠, 팀장님."

  프랭키가 짐짓 정중한 신사의 자세를 흉내 내며 손을 내민다. 뉴먼의 시선이 프랭키의 손바닥으로 향한다. 왼손이다.

  "아직은 생각 없어요, 프랭키."

  "그럼 나중에는요? 얼마나 기다려야 할까요?"

  손을 무르지도 않고 말을 부러 곡해하는 뻔뻔함이란. 뉴먼은 가볍게 한숨을 쉬었다. 프랭키는 눈에 띄는 사람이었고, 뉴먼은 소란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마 프랭키도 이를 알고 있을 터다.

  "오른손."

  "아차. 손등 다쳤죠?"

  프랭키는 왼손을 내렸다. 오른팔은 이럴 때 잘 쓰지 않았지만 별수 없었다. 근육을 풀듯이 뻣뻣한 오른손을 쥐었다 펴고는 뉴먼에게 내민다. 그 어색한 동작을 뉴먼이 포착했다. 프랭키는 그의 시선을 느끼고 속으로 앓는 소리를 낸다. 하여간 탐정이란.

  뉴먼은 상처가 없는 손등을 프랭키의 손 위에 올린다. 이제 남은 손은 프랭키의 화상이 없는 쪽 손과 뉴먼의 상처가 생긴 쪽 손이다. 프랭키는 고민할 겨를 없이 뉴먼의 다른 손을 제 어깨 위에 올린다.

  "탐정님이 팔이 길어서 다행이에요. 그쵸?"

  "실없는 소리를 하는군요."

  "내가 보조할게요."

난 탐정님 조수로 왔죠. 니케 호에 밀항한 것을 뉴먼에게 들켰을 때 프랭키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그렇게 외쳤더랬다. 그때와 비슷한 얼굴로 웃으며 프랭키는 남은 손을 뉴먼의 허리에 둘렀다.

  "오. 다행히 이번 곡은 그렇게 빠르지 않네요."

  "그게 무슨 상관이죠?"

  "빠른 곡은 싫어하실까 봐."

  그들은 어느새 홀에 나와 있다. 눈동자는 파트너를 향하다 지나가는 인물들로 향하기를 반복한다. 독특한 화음으로 가득 찬 홀에는 질서가 없었다. 아마 사교계의 거물이 이 무도회를 봤다면 어린애 소꿉장난이라며 비웃을 터다. 심지어 프랭키의 눈에도 허점이 눈에 보였다. 모든 것이 예정대로 흘러갔다면 이 무도회는 어떤 모습이었을까? 죽은 사람도 없고, 인어도 없고, 모든 승객이 자기 자리에 있었다면.

  그랬더라면 탐정과 조수의 자리도 없을 터.

  프랭키는 고개를 살짝 숙여 파트너에게 읊조렸다.

  "그래도 왈츠는 파트너와 떠들기에 제법 좋은 춤이죠. …하던 얘기를 마저 해볼까요?"

 

 

 

 

 


 

듀엣

with. 안드레아 르밀러

 

 

 

머무는 동안 애칭으로 불러도 괜찮겠습니까? 불리우고 싶은 이름을 알려주신다면 더욱 좋아요.

 

그렇다면 당신 애칭을 먼저 알려주십시오. 그래야 짝을 맞출 수 있을 테니까.

 

 

 

 

 

 

  "래니."

  서신에 적혔던 활자는 음색을 입고 귀로 들어온다. 프랭키는 그 애칭이 제 것이라는 걸 뒤늦게 눈치챘다. 그것이 홀을 메운 사람들 사이에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를 놓친 이유요, 두 번째로 애칭을 들었을 때에서야 옆을 돌아본 이유였다.

  "애니."

  "안녕하세요, 즐기고 계신가요."

  안드레아가 양손에 잔을 들고 다가와 프랭키와 메릿을 올려다봤다. 프랭키가 대답하려는 찰나 안드레아가 내미는 잔을 거절한 메릿이 프랭키를 흘긋 보고는 등을 돌렸다. 프랭키는 장난스럽게 윙크한 뒤 안드레아를 돌아본다. "탐정님과 춤을?" "그렇게 됐습니다." 프랭키는 안드레아가 환히 웃으며 내민 잔을 받는다. 술을 잘하는 편은 아니었으나 오늘 같은 날은 조금 취해도 괜찮았다. 음악과 웃음소리에 섞인 술이 목구멍을 타고 내려간다.

  "제가 방해한 게 아니면 좋겠어요. 래니, 나랑도 춤춰줄래요?"

  안드레아의 이 제안에 프랭키는 왠지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는데, 안드레아가 왜냐고 묻지 않는 대신 같이 웃어주었기에 그들은 순조롭게 홀로 나갈 수 있었다.

 

 

 

 

 

 

애니, 앤디, 레아.

애니, 앤디, 레아.

래니. 그러면 제 애칭은 이걸로 하죠, 애니. 마음에 듭니까?

 

제가 알려드린 애칭이니 마음에 들것 말것 할 여지가 없습니다. 저를 애니, 하고 불러주실 당신 음성을 상상해보았어요. 친애하는 F ―제발 P로 시작한다고 말하지 말아주세요!―

 

 

 

 

 

 

  프랭키는 두어 번 정도 누군가의 파트너 자격으로 사교계의 무도회에 참가한 전적이 있다. 지금보다 더 그럴듯한 옷을 입고, 머리를 단정히 묶은 채로. 물론 차림새가 달라진대도 프랭키는 프랭키였다. 프랭키와 같은 날 무도회에 있었던 인물들의 말에 의하면, 프랭키는 '춤을 제멋대로 추고' '교양 없이 말하며' '도무지 이런 자리에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가벼운 발과 두꺼운 얼굴을 가진 자들의 특기―뻔뻔함!―로 제 흠결을 튕겨내곤 했다. 내 파트너는 괜찮다는데?

  조난자들의 무도회에서 프랭키의 춤사위는 그럭저럭 봐줄 만했다. 다만 프랭키는 여기서도 손을 맞잡은 사람들과 그리 어울리는 파트너 감은 아니었다. 하물며 안드레아 르밀러라니. 프랭키는 안드레아가 안드레아라서 웃었다.

  발목까지 내려오는 연홍색 드레스와 갈색 가죽구두. 어깨를 감싼 레이스 장식은 머리카락과 마찬가지로 금빛이라 간간이 조명 아래서 반짝인다. 푸른 바다와 낭만이 깃든 눈동자. 장밋빛 뺨. 무엇보다 머리 위를 장식한 화환은 안드레아를 빛나는 주인공으로 만들었다. 오늘 같은 날 누구나 한번은 무도회의 주인공이 될 수 있겠으나…… 프랭키는 아니다. 단정히 입었다고는 하나 평소와 같은 옷과 구두, 가볍게 넘겨 묶은 머리카락. 그의 모든 것들은 잿빛으로 물들어 조명 아래서도 빛날 리가 없다.

  그러나 안드레아는 그날 만난 사람 중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프랭키의 손을 잡았다. 안드레아의 허리를 잡기 위해서는 프랭키가 약간 어깨를 기울여야 했기에 그들은 자연스레 서로에게 밀착하게 되었다.

  "이럴 때에 나서면 주목받기 십상이라……. 이런 스텝은 너무 가까워서 별로신가요? 아무래도 어설픈 부분이 있죠?" 안드레아가 묻지도 않은 질문을 걱정하듯 설명했다.

  "부끄러움을 많이 타시는군요." 아마 탐정 뉴먼이 들었다면 질색할 만큼 느끼한 어조로 프랭키가 답한다.

  "당신이랑 떨어지기 싫어서요…."

  이건 예상한 것을 넘어서는 답이다.

  프랭키는 화환을 쓴 안드레아의 머리를 내려다보다 예의 그 목을 긁는 웃음소리를 낸다. 어느 쪽 손이든 신경 안 써요…. 잘 잡아주시기만 한다면요. 그렇게 말하던 목소리를 환기하며 자세를 살짝 고친다. 손바닥을 바르게 하면 생활감이 느껴지는 드레스의 부드러운 질감 너머로 온기가 느껴졌다. 이제 프랭키는 안드레아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해졌다. "스텝이 꼬일 일이 없어서 좋은데. 난 춤의 귀재는 아니거든요." 프랭키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움직인다. 안드레아가 하는 대로 왼쪽으로, 오른쪽으로, 한 발이 다른 한 발을 쫓듯이.

  "그런데 뭐가 그렇게 무서워서요?"

  장난스러운 질문에 안드레아는 즉석에서 답을 만들어낸다.

  "잘 모르겠어요. …눈 때문이라고 할까요?"

  "그런 걸로 하죠."

  교묘한 질답이 끝나면 프랭키는 눈동자를 옆으로 돌렸다. 이제 시선은 금빛 어깨에 닿는다. 프랭키는 정중한 신사―그래도 프랭키는 프랭키였다.―와 뻔뻔한 광대의 얼굴을 번갈아 끼며 안드레아와 발을 맞췄다. 그들은 아주 느리게 춤을 췄으므로 서로에게서 멀어지거나 어긋날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춤곡이 끝날 무렵이면 사람은 더 줄어들고, 음악 역시 박자를 늦춘다. 이제 프랭키는 안드레아의 뺨을 바라보며 묻는다.

  "이쯤에서 물어야 할 것 같은데… 아직도 무서워요? 애니."

  다시 말하자면, 프랭키는 불협화음을 싫어하지 않는다. 아니. 그는 기묘한 듀엣을 즐긴다. 아직 선율은 끊기지 않았고 자리에는 두 사람이 있었다.

 

 

 

 

 

 

친애하는 애니에게.

어제는 즐거웠습니다.

 

 

 

#2021

 

Heritage Library (후가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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