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오로라 레인필드
이야기는 한 인간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절망하며 시작합니다. 상대에게 거절당한 인간은 해안가에 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눈물을 바라보며 무엇을 떠올린 걸까요? 그 인간은 바다에 대고 정령을 부릅니다. 정령은 삽시간에 파도와 함께 인간의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하지요. "당신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로써 당신은 사랑을, 나는 뭍의 삶을 얻습니다. 단, 약속을 어긴다면 당신의 숨은 바다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원하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사랑. 눈앞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그가 약조한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인간은 쉽게 마음을 뒤바꾸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존재니까요.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자를 원망하며 정령에게 약조합니다.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로써 내 숨은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이미 예견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쉽게 마음을 뒤바꾸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존재인지라, 그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주인이 돌아오자 흔들리고 맙니다. 아! 사랑이란! 이것은 잔인한 운명의 장난일까요, 아니면 그 무엇도 영원히 속박될 수 없다는 진리의 방증일까요. 그와 그의 마음은 결국 처음과는 다른 길로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던 곳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남은 자는….
편집장에게 진짜 이야기를 찾겠다고 선포하고 인어의 이름으로는 '텐'을 빌리고 누군가에게는 운명을 시험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말한 프랭키는… 이야기를 만드는 데 골머리를 앓고 있다.
파도 소리. 뭍과 바다의 공기. 아틸라스. 신의 최후통첩. 프랭키는 분명 원하던 대로 풍랑에 떠밀려 신의 시험에 들었다. 이대로 죽음을 받아들이고, 아틸라스의 세계로 끌려들어갈 건가요. 신이 인간의 목숨과 인어의 자유를 앗으리라 선포한 날, 크리스텔이 말했다. 크리스텔은 섬에 거주하던 원주민이라고 했다. 프랭키는 그의 목소리에 어깨를 움찔 떨었다. 신에게 반항하는 불경한 언사다. 섬에 거주하던 인어라면 신과 가까운 곳에서 신의 숨을 느꼈을 터다. '그런데 어떻게? 어떻게 저런 말을 하지?' 프랭키는 지레 놀라 자리를 벗어났다. 우리 모두에게 아직 기회가 있다는 뜻이 아니겠어요. 크리스텔은 단단하게 땅을 딛고 서서 말을 이었다.
프랭키는 종종 다른 사람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아틸라스가 등장하고 방에 처박힌 뒤로는 먼저 익명의 서신을 불특정 다수에게 보내기까지 했다. 내용은 물의 정령 운디네를 모티프로 지어진 이야기였으나 끝을 모호하게 열어두었다. 이오가 그랬던 것처럼 누군가가 저를 만족시킬만한 이야기를 이어주길 바라면서. 물론 그 자신도 잘 알지 못하는 마음을 생면부지의 타인들이 기가 막히게 포착해 종이에 옮겨줄 리가 없다. 프랭키는 가끔 웃고 가끔은 지루해하면서 답신을 쓰고, 이야기를 구상했다.
익명의 종이에는 기묘한 힘이 담긴다. 프랭키 역시 다른 이들의 말 없는 감정과 욕망, 갈등과 고민이 숨은 서신을 받아볼 때가 생기곤 했다. 근래에 받은 서신 하나는 프랭키의 마음을 크게 뒤흔들었는데, 그 내용은 아래와 같았다.
고민이 끊이지 않아 적어봅니다. 바보 같은 질문이지만‥ 신을 없애는 방법이 있다고 생각하시는지.
프랭키는 아가미가 크게 펄럭거리는 듯한 착각에 가슴을 만진다. 들숨, 날숨, 들숨, 날숨. 들썩거리는 몸은 오롯이 인간의 육신인 양 호흡한다. 아가미는 없다.
바보 같은 질문이 맞군요. 바다를 삼키는 방법을 묻는 게 쉽겠습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습니까?
발밑으로 간간이 바닷물이 들어온다. 프랭키는 신발을 벗어들고 해안가를 천천히 걸었다. 간혹 산책하는 이를 발견하긴 했지만, 혼자 걷는 이들은 먼 거리에서 서로의 인영을 넘겨보고 마주치지 않는 경로를 택했다. 어둠 속에서는 혼자가 되는 게 쉬웠다. 발에는 물 먹은 모래 알갱이들이 꼭 바위에 붙은 조개껍데기처럼 다닥다닥 달라붙었는데, 그게 왠지 기분이 좋았다. 넘실거리는 바다가 가져오는 평화와 공포가 익숙했다. 아틸라스는 늘 그런 존재였다. 가장 편안하고 두려운 곳으로 당신의 아이들을 끌고 가는…….
바다 한가운데에 파도의 흐름을 역행하는 존재가 있었다. 달빛 아래 솟은 그것은 희미하게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는데, 점점 가라앉고 있었다. 아틸라스에게 제 몸을 맡기듯 아주 자연스럽고 익숙하게. 프랭키는 그것이 물과 하나가 되어 구분할 수 없을 때까지 바라보았다. 모래를 밟으며 그것이 있던 위치와 가까워졌지만, 뭍에 서서는 그것을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바다 밑으로 잠겼다. 프랭키는 멈춰 섰다.
'그런데 인어가 보통 저런 식으로 잠수하던가?'
답을 모르는 질문이다.
프랭키는 신발을 모래사장에 던져두었다. 바다에 발목을 담그고 달빛이 닿는 수면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보이지 않는다.
"이봐!"
프랭키는 작게 외쳤다. 수면 밑에서는 제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걸 직감한다. "괜찮은 거지?" 알 수 없는 불안감이 가슴 밑에서 울렁거렸다.
"어이!!"
망설인다.
"거기 있어?"
대답이 오지 않는다. 바다는 하나의 거대한 생물처럼 고요히 흐르고 있다.
"이봐!!"
어느새 프랭키는 허벅지까지 바다에 몸을 담그고 있었다. 무언가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젠장, 안경이…." 중얼거리면서 물살을 헤치고 앞으로 걷는다. 그러다 무거운 바다의 중압감을 견디지 못한 몸이 다리를 지우고 지느러미와 아가미를, 꼬리를 만들어내면 프랭키는 헤엄치기 시작한다. 물을 가르고 헤엄치는 몸. 생경하면서 익숙한 감각이었다. 프랭키는 곧 그것을 발견했다. 달빛이 닿았던 머리카락이 해초처럼 퍼져 있었다. 그것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프랭키는 수면 밑으로 잠수했다.
그것은 막 눈을 뜬 존재처럼 보였다. 햇빛을 받은 바다처럼 다채로운 빛깔로 반짝이는 눈동자가 프랭키를 바라보고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과 물색 드레스는 사방으로 둥글게 펼쳐져 있었는데, 그 모양이 꼭 해파리 같았다. 그러나 드레스 밑으로 보이는 것은 분명 인간의 다리였다. 결정적으로…….
딸꾹.
오로라의 입에서 공기 방울이 점점이 튀어나온다. 하! 긴장이 풀린 프랭키는 입을 크게 벌려 웃었다. 물을 먹은 오로라와 웃느라 정신없는 프랭키 덕분에 그들의 눈앞은 부글부글 끓는 것처럼 보였다. 프랭키는 오로라와 함께 모래사장으로 나왔다. 꼬리 끝이 모두 뭍으로 나오도록 몸을 당겨 앉는 동안 오로라는 기침과 딸꾹질을 가라앉혔다.
"프랭키 경!"
민망함과 비난이 섞인 목소리에도 크게 웃던 프랭키는 오로라의 시선이 제 하반신에 닿는 걸 발견하고서야 천천히 웃음을 그쳤다.
"뭐 하고 있던 거야? 죽어버리는 줄 알았어."
오로라가 저를 공격할 의사가 없음을 알면서도 프랭키는 선수를 친다.
"네? 그럴 리가요…. 그냥 잠수하고 있던 거예요."
"왜?"
딸꾹질을 멈춘 오로라는 얼굴에 붙은 머리카락들을 귀 뒤로 모아 넘겼다.
"해파리가 되고 싶어서요."
물이 뚝뚝 떨어지는 몸으로 프랭키를 바라보던 오로라가 모래사장에 떨어져 있는 바지를 주워 쥐어짰다.
"이거 프랭키 경 옷이에요?"
"앗, 차거. 물 튀잖아!"
프랭키는 오로라가 프랭키의 바지와 오로라의 드레스의 물을 짜내고 아직 인간이 되지 못한 제 곁으로 와 앉는 걸 지켜본다. 물론 얌전히 있지는 않아서 쉼 없이 오로라를 놀리다가 한 번 혼났다. 모래사장에 눕자 젖은 옷이 등에 달라붙는다. 오로라는 프랭키의 몸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줄 모양이었다.
"그런데 왜 해파리야?"
"해파리가 어때서요?!"
"음… 뭘까. 인간보다 오래 살기는 하지. 재생도 하고… 먹고 사는 데 문제없고."
프랭키는 호의를 베푼 보람을 안기는 인물이 아니다. 입바른 말에는 유효기간이 있고, 위선은 위악보다는 나을지언정 최선은 아니다. 프랭키는 오로라의 호의를 이미 받아먹고, 잘 받아먹기만 한 전적이 있었다. 주정을 부린 대가로 따뜻한 레몬티와 상냥한 서신으로 아침을 시작하는 건 분에 겨운 일이다. 그 뒤에 프랭키가 오로라에게 한 것이라곤 툭하면 그를 놀려대는 것밖엔 없었지만. 그래도 신경은 쓰였다. 선의로 가득한 이 사람이 왜 한밤중에 바다로 걸어 들어가는 건지.
바다를 열망하는 인간들을 프랭키는 이해할 수 없었다.
인어의 몸으로 인간 앞에서 이렇게 자유롭게 누워본 것은 처음이었다. 어두운 눈에는 반짝이는 별들로 아름답다는 하늘이 잘 보이지 않았지만, 프랭키는 가슴 밑의 뻐근함을 잊고 서늘한 밤공기를 들이마실 수 있었다. 프랭키는 바다를 헤엄치는 인어들과 다른 생물들, 활짝 벌렸다가 오므린 몸으로 천천히 바닥으로 가라앉는 해파리, 그리고 조용히 물속에 잠겨있던 오로라를 연이어 떠올리다 느긋하게 입을 열었다.
"바다에서는… 헤엄치지 않으면 가라앉거든. 당신이 가만히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왠지… 뭐랄까. 기왕이면 다른 동물을 생각해 봐. 가만히 있어도 가라앉지 않는 놈들 많잖아. 땅에 사는 놈들. 토끼라든가, 토끼라든가, 아니면… 또 뭐가 좋아?"
목소리는 점점 짓궂은 기운을 띈다. 어쩐지 오로라가 저를 흘겨보는 것 같다고 느끼며 프랭키는 웃었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