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여름내 머무른 마을은 젊은 연금술사에게 호의적이었다. 마을의 가장 좋은 여관에 방을 마련해줬고, 여관 주인은 아침마다 따뜻한 수프를 밀며 과분한 미소를 건넸다. 주말 저녁에는 피로를 풀라며 와인이나 맥주를 주기도 했다. 마을의 문제를 새로 온 연금술사가 해결해줄 거라는 기대로 가득한 얼굴이었다. 이전에 머물던 마을의 무취기에 대한 소문은 근방의 마을로 빠르게 퍼졌다. 이쯤 되면 그 기대는 신뢰라기보다 맹목이었다. 이반을 진정으로 편하게 대해주는 이는 마을의 길잡이, 소피아밖에 없었다. 한여름 그들의 집 뒤뜰에서 이반이 연애 제안을 거절한 뒤에도 소피아는 변함없는 태도로 이반을 대했다. 이반은 안도했다.
보석에 둘러싸인 어부가 빛날 무렵, 소피아는 잘 익은 와인을 딸 때라며 이반을 집으로 초대했다. 드디어 연금물품을 완성한 날이었다. 소피아는 마을 사람들이 축제를 열지도 모르니까 오늘까지는 둘만 알고 있자고 말했다. 이반도 같은 생각을 했다. 어디를 가느냐고 묻는 여관 주인에게는 완성이 코앞에 보이니 목이 마르다고 둘러댔다. 소피아 걔는 한창 바쁠 사람한테…. 여관 주인인 데레사가 탁자를 닦으면서 중얼거리는 말에는 웃기만 했다.
작년에 어머니를 잃은 소피아는 혼자 살았다. 어머니가 지내던 방을 이반에게 내어줄 용의도 보였지만 거절했다. 그 즈음 소피아의 마음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짐작했기 때문이었다. 이제 그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고, 그런 마음은 대개 슬픔을 동반하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소피아가 슬프지 않기를 바랐다. 이반은 소피아의 집 뒤뜰에서 검은색 꽃을 구경했다. 벌이 꿀을 빨다가 다른 꽃으로 자리를 옮겼다. 갖가지 꽃이 심어진 뒤뜰은 작은 정원 같다. 옆으로 내려와 시야를 가리던 머리카락이 등 뒤로 부드럽게 넘겨졌다. 소피아였다.
“다 됐어. 이제 가져오면 돼.”
“응.”
소피아를 따라 샐러드와 수프, 갓 구운 빵과 파이를 뒤뜰로 옮겼다. 소피아는 육류를 먹지 않는 사람이었다. 육체를 가진 정령들은 사람의 다른 모양 같아 가끔 소름이 끼친다고 했다. 무슨 뜻인지 알 것 같았다.
둘은 음식을 느리게 먹고 오래 이야기를 나눴다. 세스가 만든 그 인형을 봤느냐, 안 봤으면 꼭 봐야 한다, 데레사는 아무래도 내가 젊고 예쁜 연금술사한테 집적대는 여자로밖에 안 보이나 보다, 절반은 맞는 말이지만, 거기 맥주는 형편없다, …그런 얘기들을 웃으며 나누다 이야기는 며칠 전 왕립 연금술사들이 방문한 때로 흘렀다. 왕성에서는 이반의 존재를 알지 못했던 것 같았다. 왕립 연금술사들은 땅의 정령과 타협을 보고 그에 필요한 물품들을 만들 생각으로 마을에 도착했다. 이반과 소피아가 계획한 건 마을에서 조금 떨어져 있던 물의 정령의 힘을 빌려 마을의 지형도 자체를 바꾸는 것이었다.
위험부담이 큽니다. 탁한 금발을 높게 올려 묶은 연금술사가 미간을 꾹꾹 눌렀다. 그건 알고 있어요. 우리는 되도록 많은 경우의 수를 따져보고 설계에 들어갔습니다. 이미 완성 단계에요. 이반은 그렇게 말하다 유독 키가 큰 연금술사와 눈이 마주쳤다. 펠릭이었다. 높은 곳에서 이반을 바라보고 있던 펠릭시스가 황급히 시선을 피했다. 뒤늦게 다시 시선을 마주했지만, 어색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마지막으로 헤어졌을 때가 생각나는 얼굴이다. 그 경우의 수, 어디까지 예측할 수 있습니까? 짧은 흑발의 연금술사가 앞으로 나와, 이반은 시선을 돌려야 했다. 이런 경우의 수는 생각하지 못했다.
그날 한참 타협을 보지 못하던 그들은 이틀 뒤에야 타협안을 낼 수 있었다. 이반이 설계도를 보여주고 소피아가 이제까지의 상황을 설명하면서야 왕립 연금술사들은 납득했다. 실은 그저 여기서 물러날 수밖에 없다고 순응한 것 같았다. 그동안 펠릭시스와는 따로 시간을 낼 수 없었다. 둘만의 시간은커녕 멀리서 눈인사를 하는 것 정도가 전부였다. 떨떠름하게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순간까지, 이반은 키 큰 갈색머리의 연금술사와 제대로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다.
하여튼 왕성에서 온 작자들이라 그런지, 재수탱이가 없었다, 고 소피아가 말했다.
“그때 인사 못 한 친구가 학원 동기라고 했었나?”
“응. 라제니에 동기야.”
“라제니에… 가끔 네가 거기 출신이라는 걸 잊는다니까.”
“그건 무슨 의미야?”
“그게 아니라~.”
이반이 눈을 가늘게 뜨자 소피아가 웃으면서 등을 굽혔다.
“너는 가끔… 너무 순진한 것 같다고 해야 하나. 순진… 이게 아닌데……, 무튼 그런 아우라가 있어.”
“거기에 아우라까지 있어?”
이반이 손바닥으로 얼굴을 덮고 웃었다. 이마를 긁적이던 소피아가 자리에서 일어나 가깝게 얼굴을 붙였다. 이반은 웃음을 터뜨렸다. 소피아의 표정 변화를 보자 곤란한 얼굴로 바뀌었지만. 소피아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마구 헝클어뜨리면서 의자에 도로 앉았다.
“거, 봐~ 아우라 있다니까….”
“계속 그래….”
“너 걔도 너 혼자 친구라고 생각하고 그런 건 아니지? 사실은 복도에서 만나면 어색하게 인사나 나누던, 데면데면한 동기 아냐?”
“아~ 내가 설마 그 정도로… …너 내 친구 아냐?”
“친구 맞지….”
소피아가 뚱한 표정으로 웃었다.
“근데 너는 너무 금방 친구잖아.”
샐러드를 한 움큼 집어넣는다. 머쓱하면 소피아는 모든 동작을 더 크게 하곤 했다.
“…네가 아무리 애써봤자 안 되는 것도 있어.”
“그건…… 미안.”
“너 상처 입히려고 한 말 아냐. 걱정하는 거지…. 아, 됐다. 널 걱정해서 뭐해. 내 코가 석잔데. 야, 마셔.”
소피아가 잔을 들어 부딪치자 와인이 탁자에 조금 흘렀다. 잔 깨진다! 외치면서 이반이 웃었다. 둘은 한참을 더 와인을 마시고 다 식은 빵을 뜯어 먹었다. 밤이 깊을 때까지 이야기는 계속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헤어질 걸 알아서인지도 몰랐다. 소피아는 양초가 손가락 한마디 정도 크기로 줄어들었을 때야 지역 연맹의 이야기를 꺼냈다. 최근의 회의에서 네 얘기가 나왔다, 연맹 사람들이 널 궁금해 하더라, 도시로 가면 영주랑 만나게 될지도 모른다, 야, 너, 이러다가 완전 잘 나가게 되는 거 아니냐, 그러면, 너, 나 잊지 마라….
앞으로도 며칠은 더 머무를 텐데. 취기가 올라서일까, 소피아와 이반은 헤어지기 전 꼭 마지막 날인 것처럼 부둥켜안았다.
2.
세상에는 시간이 지나도 익숙해지지 않는 일이 있다.
도시로 돌아가는 마차 안에서 이반은 숨죽여 울었다. 짐칸에 사람이 자기밖에 없어서 다행이었다. 바닥에 돌이 많아 마차는 연신 덜컹거렸다. 손바닥에 얼굴을 묻고서야 제 손이 떨린다는 걸 알았다. 돌 때문은 아니었다.
도시에 돌아가자마자 이반은 영주를 찾아갔다. 영주는 그를 반겼지만 동시에 피로한 얼굴이었다.
“…알고 있었습니까.”
“…평소와 다르군요. 왜 흥분했는지 모르겠지만, 일단 차분히 말씀해보세요.”
영주의 말대로다. 오는 내내 말을 정리하고 마음을 진정시켰다고 생각했는데도 두서없는 말부터 튀어나왔다. 이반은 속으로 문장을 정리했다.
“우리가 결탁을 맺은 정령들이 사실은 다른 마을의 곁에 머물던 이들이더군요. 그것도 그 정령의 힘에 빌어 겨우 살아가던 마을. …오늘 우연히 제페트에 들르게 됐어요. 이곳에 머무는 동안 나는 이름 한번 들어보지 못했는데 말이죠.”
“아… 애기해주지 않은 것에 화가 난 건가요?”
영주는 놀란 기색도 없이 차분했다. 이반은 얼굴을 잔뜩 찌푸렸다가 간신히 표정을 풀었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그것도 문제지만, 정말 문제는 이런 일을 진행한 거예요. …그 마을은 죽어가고 있어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아뇨. 이 도시는 그 정령들 없이도 건재할 겁니다. 그곳은 아니고요.”
“우리에겐 그것들이 필요해요. 그리고 제페트는… 그 사람들, 말이 안 통하는 사람들이에요.”
“그건…!”
“그만하지, 연금술사. 여기 서 있는 사람은 영주다. 당신은 이 도시에도 제페트에도 발언권이 없는 외부인일 뿐이야.”
영주의 옆에서 대화를 지켜보고만 있던 영주의 친구가 날카롭게 말했다. 첫날부터 이반과는 상성이 좋지 않던 자였다. 이반은 무슨 말을 더 꺼내려 했으나, 영주는 나가주기를 부탁했다. 그리고 다시는 만나주지 않았다.
짐을 꾸려 제페트에 다시 도착했을 때는 두 구의 송장이 땅 아래로 묻히고 조용한 장례가 치러지는 중이었다. 땅도 물도 메마르고 공기의 정령의 힘을 빌려 살던 마을에는 정령이 사라진 이후로 전염병이 돌았고, 천식과 닮은 병을 앓다 하나둘 사람들이 죽고 있었다. 거짓말은 할 수 없었다. 이반은 자신이 도시에서 어떤 일을 했는지 밝혔다. 미안하다. 나는 당신들의 일에 책임이 있다. 날 비난해도 좋다. 다만 앞으로 이곳을 돕고 싶다. 방법을 찾겠다. 이전에 봤을 때 연금술사를 환대하던 그 눈빛들은 화살이 되어 돌아왔다. 이반은 그 길로 쫓겨났다.
비가 거세게 내리는 날이었다. 마차가 오지 않아 한참을 걸었다.
오래전 떠나온 집에서는 역할이 분명하게 정해져 있었다. 원하는 일을 하고 필요한 일을 하는데 어려움이 없었다. 안정적으로 분배된 책임과 고요한 만큼 달디 단 평화. 그곳을 떠나면서 이반의 세상은 뒤집어졌고, 다시는 전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하지만 세상이 이렇게 무거운 것일 줄 알았다면……
몰랐다면.
좋았을 텐데.
뭉텅이처럼 생각이 끊겼다. 거짓말이다.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어디로 가야 하지? 여길 떠나서도 비슷한 일은 반복될 것이고, 이반 역시 비슷한 일을 계속할 것이다. 그 무렵 수도에서 큰 축제가 열린다는 소식이 들렸다. 수확제에서 만난 유라이어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동기들의 얼굴이 떠올랐다가, 펠릭시스의 얼굴이 떠올랐다. 정확히는 그가 왕립 연금술사들과 함께 찾아왔던 날을 떠올렸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들은, 최소한, 혼자가 아니야.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자신의 나약함이 부끄러워서 목울대가 홧홧해졌다.
1년 뒤 왕성에서 시험을 보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왕성의 탑에 짐을 내려놓는데도 마음이 둘 데 없이 갑갑했다. 오는 길에 보았던 커다란 나무는 라제니에 학원의 나무를 닮았다. 그래서 찾아간 나무 밑에서 나쟈를 만났을 때, 그립고 반갑고 울컥 눈가가 뜨거워졌을 때, …그때 이반은 자신이 도망쳐왔음을 알았다.
3.
이반은 이제 고향의 이름을 말할 수 있었다. 그곳은 ‘헤이터스’라고 지도의 귀퉁이에 기록되어 있다. 이반이 지리를 배우지 않았다면 영영 몰랐을 이름이었다. 헤이터스를 떠나지 않았다면 그곳은 그저 ‘집’, 안데스숲 근처, 로베르 마을 근처라고 설명할 수 있었을 것이다. 오래전 노바를 살릴 수만 있다면 어디로든 갈 수 있다고 말하던 얀의 세계의 끝은, 안데스숲의 협곡이었다. 하지만 이제 이반은 안데스숲 협곡 너머를 안다. 떠나온 곳의 지명을 안다. 얀도 그럴 것이다. 문득 얀은 지금쯤 어느 곳의 땅을 밟고 있을지를 생각했다.
헤이터스에서는 시신을 들고 바다에 갔다. 나무로 엮은 뗏목에 죽은 이를 묶고 그를 위해 새로 짠 천을 동여맸다. 바닷가에서 뗏목을 밀면 천은 늘 커다란 휘장처럼 펄럭였고, 불을 붙이면 모든 게 무서운 속도로 타올랐다. 때때로 뗏목을 덮쳐오는 검푸른 파도는 죽은 이들의 커다란 손 같았다. 죽은 자를 떠나보내는 그 방법은 안데스숲 너머에 사는 사람들도, 로베르 마을에 사는 사람들도 똑같았다. 죽은 자들은 바다로 떠나보내고, 산 자들은 육지로 돌아온다. 그게 법칙이었다. 헤이터스가 지금처럼 인적 없는 곳이 되기 이전에 무수한 뗏목이 한꺼번에 바다로 내보내졌다는 건 나중에 알았다. 그 평화로운 곳에서도 먼 옛날에는 전쟁이 있었다는 걸. 이반이 헤이터스를 헤이터스라고 부르게 된 시기였다.
수도로 들어가기 전 이반은 해변에서 홀로 수평선을 바라보고 있었다. 몇 해 전 타티아나가 데려와준 곳이었다. 금빛으로 반짝이는 수면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들은 즐거워 보였다. 이곳의 바다는 헤이터스의 바다와는 다르다. 한 발짝 내밀면 그저 칠흑 같은 어둠으로 떨어질 것 같던 바다. 아름다운 금빛 모래사장이 없는 바다. 그런 바다를 그토록 사랑했던 건, 그 바다가 죽은 이들을 위한 안식처였기 때문이다.
세상이 너무 넓다. 벅차도록 넓어서, 아무리 걸어도 끝이 보이지 않아서, 이반은 눈물이 났다. 눈을 제대로 뜨고 앞을 봐야 한다. 다시 슬퍼져도, 앞을 보고… … 이반은 제자리에 서서 눈가를 꾹 눌렀다. 이 아름다운 바다의 수평선을 바라보는 일이 왜 이렇게 슬픈 건지 모를 일이다. 마음속으로 조용히 뗏목을 여러 대 밀었다.
파도가 해변으로 무너져 내리며 이반의 맨발을 간질였다. 먼 바다의 끝에서, 천천히 동이 트고 있었다.
#20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