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지 하나의 값
2023. 12. 13.

with. 마고트

 

1. 한 대면 싼값이야.

때는 돌로레스가 25세, 아직 수영 선수로 알려져 있을 무렵의 일이다. 어두운 주차장. 홀로 차에 탑승한 돌로레스는 피 묻은 손수건을 코에 대고 있었다. 그것뿐이었다면 차라리 다행이었을 텐데. 코피를 닦는 것치곤 크게 펼친 손수건에 가려진 뺨이 발갛게 부어 있었다. 차에서 기다리고 있던 돌로레스의 6살 터울 자매 팔로마는 기함하며 돌로레스에게 자초지종을 캐물었다.

 

돌로레스는 은퇴 전 마지막 경기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었다. 직후에 잡혀 있던 인터뷰는 단조롭게 진행되었다. 입대를 위해 선수 생활을 그만두는 것은 흔치 않은 케이스였지만, 돌로레스의 경우 어느 정도 예견된 행보였다. 작년 24세 생일이 지났을 무렵부터 군에 입대할 생각을 공식적으로 내비쳤기 때문이다. 이미 한번 시험을 쳤다가 떨어졌다는 사실도 널리 알려진 상황이었다. 잘하는 선수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나타나니, 세상은 돌로레스의 빈자리를 금세 잊을 터였다. 다만 한 사람은 그럴 생각이 없어 보였다. 돌로레스는 인터뷰가 끝나고 에피아 이보를 만났고, 은퇴를 걸고넘어지는 에피아와 말다툼을 나눴다.

‘에피아 이보’는 돌로레스와 같은 나이에 선수 생활을 시작한 수영 선수였다. 많은 스포츠 영화나 소설에서 그런 것처럼 에피아와 돌로레스가 1, 2위를 다투는 라이벌이었던 것은 아니다. 돌로레스는 단거리, 에피아는 장거리에 자신 있는 선수였기 때문에 애초에 출전 종목이 겹치는 일이 드물었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수영장을 떠나 사적인 친분이 있었고, 두 사람이 22세가 되었을 때 그 관계가 안 좋은 방향으로 꺾였다. 돌로레스는 에피아와 사이가 나빠진 뒤로 둘 사이에 있었던 일을 제대로 얘기해주는 법이 없었다. 이번에도 그랬다.

 

어쩌다 에피아를 만났는데 어쩌다 싸움으로 번져서 어쩌다 에피아가 자길 한 대 쳤다는 돌로레스의 말에 팔로마는 버럭 성을 냈다.

 

“너 바보야? 때린다고 그걸 그냥 맞아? 네가 걔보다 싸움 잘하잖아!”

“포인트 이상하다? 그리고 한 대만 때렸잖아.”

“장난하나!”

 

팔로마는 감정을 가득 담은 손길로 얼음물을 돌로레스의 볼에 갖다 대주었다.

 

“아파!”

“어우 열 뻗쳐. 내가 대신 때려줘?”

“무서워~ 그러지 마. 별거 아니었어.”

“웃기시네. 너 그럴 때 보면 호구 같아.”

“팔로마, 좀.”

 

돌로레스는 입술을 부루퉁하게 내밀었다가 뺨이 아려서 그만두었다. 그걸 보는 팔로마는 가슴이 답답해 한숨을 푹 내쉬었다. 팔로마의 눈에 돌로레스는 어디 가서 가만히 맞고 있을 사람도, 지고만 있을 사람도 아니었다. 신기록과 순위권을 두고 쟁탈하는 선수 생활을 오래 한 것만 봐도 그렇지만, 같이 나고 자란 자매이니 그 자존심과 고집을 모를 수가 없었다. 팔로마 역시 자존심으로 둘째 하면 서러울 사람이라 그런 것도 있을 테다. 어릴 때도 툭하면 싸움이 붙어 집안을 들썩이게 만든 건 팔로마와 돌로레스였다. 말다툼이 주먹다짐으로 번질 때마다 절대로 봐주지 않고 매번 팔로마를 울게 만든 것도 돌로레스였다. 그러던 돌로레스가 언젠가부터 밖에서 지고 오는 일이 생겼다. ‘선수 생활을 하면서부터 달라졌지.’ 대외적인 평판이 중요한 자리니 현명한 판단일 수도 있겠지만, 팔로마는 제 자매가 밖에서 맞고 오는 것만은 참을 수가 없었다.

 

“아 왜! 너 이제 선수도 아닌데!”

“그게 문제냐고.”

 

그리고 돌로레스는 이럴 때마다 다짐하듯 되뇌던 말을 다시금 입에 올렸다.

 

“괜찮아. 한 대면 싼값이야.”

2. 하나 더 줄래요?

 

32세의 돌로레스는 군복을 입고 전장의 한복판에 서 있다. 옷은 피로 물들었고, 얼굴은 복잡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일그러진 채였다. 두려움, 분노, 탈력감, 배신감, 수치심, … 호승심. 그 모든 감정은 단 한 사람을 향했다.

 

마고트. 페티르 기사단의 일원으로 알려진 그 여자는 전투의 흔적이 역력한 몰골로 웃었다. 마고트가 앉은 자리 밑에는 델가의 군인이 대 자로 뻗어 있다. “하지만 이 사람은 내 손톱을 깨지게 만들었는걸요.” 마고트는 군인을 넘겨달라는 돌로레스의 제안을 거절하면서 피로 물든 손으로 직접 자기 뺨에 피를 묻혔다. “대가는 있어야죠.” “제 뜻대로 해주실 겁니까?” 돌로레스는 마고트의 제안을 들어보기로 했다. 어쩌면 그것부터 잘못된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쪽 얼굴 봐서 손톱 하나만 주면 놔 줄게요. 어때요, 싸죠? 그렇게만 하면 당신 뜻대로 해줄게요.”

“왜…. 심술을 부리십니다. 제가 적군이라 그렇다고 하시면 더 드릴 말씀은 없겠습니다만. … 제안은 진심입니까?”

“거짓말 아닌데.”

 

마고트는 군인의 제복 위에 피를 닦아낸 뒤 자기 손을 들어 보였다. 곱게 바른 매니큐어를 자랑하는 것 같은 태도였다.

 

“그건….”

“왜요? 돌로레스.”

 

돌로레스는 손톱 두 개가 빠진 그 손을 보고 동요했다. ‘원하신다면 고통은 덜어드릴 수 있습니다.’ 그런 말을 하고 싶었는데 그 생각은 곧 손바닥 뒤집듯이 바뀌게 된다.

 

“아까는 소중한 동료인 척하더니, 제 살 내주긴 아깝나 보죠?”

 

자신을 조롱하는 사람까지 걱정해주고 싶지는 않았다. ‘당신이 날 조롱해도, 그 군인의 제복을 더럽혀도, 하나로 그만둔다면 싼값이지.’ 돌로레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래서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적당한 값을 매겨봤다. 마고트는 손톱 두 개가 깨졌다고 했다. 비록 한 개라 해도 어중간한 값을 매기는 건 돌로레스도 사양이었다. 그래서 돌로레스는 엄지손톱을 내어줬다.

하나면 싼값이니까.

 

피가 흐르는 전장의 한복판에서 마고트는 어깨를 들썩이며 웃었다. “아하하!” 돌로레스는 마고트가 그렇게 크게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아하하하!!” 그렇게 경쾌하게, 차갑게, 기쁘게, 공격적으로 웃을 수 있는 사람이라는 걸 처음 알았다. 그 웃음소리가 너무 생경한 탓에 돌로레스는 한동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맙소사, 너무 웃겨, 어쩌면 좋아…! 나랑 싸우기 싫대! 아하하!”

“왜… 그렇게 웃죠?”

“아아, 실례… 아아… 미안해요… 흡… 그치만 웃긴걸요.”

 

아주 재미난 것처럼 웃던 마고트가 등을 구부리고 웃음을 참았다.

 

“하… 다 웃었다.”

“….”

“정말 저와 싸우기 싫다면 손톱 하나 더 줄래요? 그럼 더는 괴롭히지 않고 예뻐해 줄게요.”

 

온화한 빛이 가신 얼굴로 마고트가 그렇게 말했을 때. 돌로레스는 형언할 수 없는 감정을 느꼈다. 두려움, 분노, 탈력감, 배신감, 수치심, … 호승심. ‘왜?’ 이해할 수 없다. ‘진심이야?’ 의미 없는 질문이 되리라는 것을 직감했다. ‘도대체 왜.’ 상대할수록 무언가를 잃는 건 제가 될 거라는 것도. ‘이성적으로.’ 마고트에게는 인질이 있고, 여기서 전투를 한다면 지는 건 제 쪽이 될 확률이 높다. 하지만 가슴으로, 머리로 피가 동그란 경단처럼 모여 고이는 것 같다. 방금 막 손톱을 뽑아냈는데, 통증도 느끼지 못했다. 피 묻은 손톱은 손을 떠나 바닥을 구른 지 오래였다.

 

“이거 완전 싼 거예요. 다신 오지 않을 기회랍니다.”

 

마고트가 너그럽게 손을 내밀었고, 돌로레스는 생각을 멈췄다.

 

“그건 싫은데요.”

 

둘을 내줄 생각은 없다.

 

“어머…. 왜요? 깎아드리기엔 수지가 안 맞는데.”

 

껄끄러운 공기를 삼키며 돌로레스는 바람이 제 앞으로 보내준 손톱을 발로 밟았다.

 

“아뇨. 당신에게 예쁨 받고 싶지 않습니다. 마음이 안 내켜요. … 싸다고 전부 좋은 건 아니잖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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