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 여기가 떠돌이들의 고향이다
2023. 12. 14.

with. 바울

 

 

어린 시절 돌로레스의 가족이 함께 살던 집은 인적 드문 해안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아침에 커튼을 걷으면 창문 너머로 부드럽게 펼쳐진 모래사장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보이는 곳.

바다 곁에 집을 짓자고 한 건 아버지 루카였다. 물에서 하는 온갖 스포츠 마니아였던 루카는 매일 아침 바다를 볼 수 있는 집이 로망이라며 아내를 열심히 설득했다. 어머니 마야가 나중에 말하기를 “안 들어주면 앞으로 10년은 삐져 있을 것 같길래 어쩔 수 없이” 그들은 바다에 집을 지었다. 돌로레스는 루카와 마야의 아이 중에서도 유독 바다를 사랑하는 아이였다. 배만 든든하게 채우면 바다에서 반나절을 꼬박 보낼 수도 있었다. 돌로레스가 바다를 사랑하는 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아버지가 아니었다. 1, 2년에 한 번꼴로 놀러 오는 아버지의 친구 한나였다.

루카가 물을 사랑해서 바다 앞에 집을 지었다면, 한나는 물을 사랑한 나머지 배를 자기 집처럼 여기는 사람이었다. 어릴 때 돌로레스는 한나의 배를 타고 2주일간 여행을 떠난 적이 있다. 재스퍼였나, 린이었나, 마야였나…. 누구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평범하게 가족과 싸우고 가출하려던 돌로레스를 막 놀러 왔던 한나가 데려갔다. 배가 시원하게 물살을 가르고 앞으로 나아갔다. 한나는 안개 낀 바다 위에서도 배를 잘 몰았다. 그 무렵 돌로레스는 진로에 관해 고민하고 있었다. 델가와 페티르가 휴전을 선언하고 3년. ‘수영 선수가 될 수 있느냐’는 큰 문제가 아니었다. 돌로레스는 즐겁게 헤엄치는 방법을 잊어버릴 게 두렵다고 한나에게 말했다.

그러자 한나는 뜬금없이 루카와 친구가 된 과정을 이야기해주기 시작했다. 이야기는 두 사람이 처음 만났을 때부터 시작해서 쓸데없이 싸운 이야기, 화해한 이야기, 그리고 루카가 마야를 짝사랑하던 시절의 이야기(돌로레스는 부모의 연애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다고 질색했지만, 한나는 개의치 않았다)까지 이어졌다. “서핑 동호회에서 만난 사람들이라고 다 평생 파도를 끼고 사는 건 아닌데, 이 나이 먹고도 이러고 있다는 게 ‘끼리끼리 친구 된다’는 말이 딱 맞아.” 한나는 하고 싶은 이야기가 생기면 말이 길어지는 타입이었다. 날이 금세 어두워졌고 그들은 배를 해안가에 정박했다.

“말이 길어졌네~. 아무튼 처음으로 돌아가서…. 나 사실 친구가 진짜 없었거든.”

“엥. 한나가??”

“응. 원래 어디 마음 둘 데 없는 떠돌이들이 바다를 그렇게 좋아해요. 아무튼….”

“아무튼.”

“돌리. 수영장에서 헤엄치는 거랑 바다에서 헤엄치는 거 느낌 다르지?”

“수영장 물은 안 짜잖아.”

“맞네.”

한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돌로레스가 더 어렸을 때 종종 그러던 것처럼 돌로레스의 코를 톡 건드렸다.

“즐겁게 헤엄치는 마음은 바다에 두고 가면 되지 않겠어? 바다에는 레인도 결승선도 없잖아.”

“… 뭐야? 멋진 말하네.”

“그럴듯하지.”

“그럴듯해.”

그 말은 정말로 그럴듯했다. 명쾌한 답을 찾은 것처럼 속이 시원해졌다. 돌로레스는 벌러덩 드러누웠다.

“한나는 그럼 어떤 마음을 바다에 줬는데?”

“나?”

한나가 시원스럽게 웃는 얼굴로 돌로레스를 내려다보았다. 한나의 얼굴에 장난기가 번지는 걸 본 돌로레스는 상체를 일으켰다. 하지만 한나가 더 빨랐다. 한나는 돌로레스를 붙잡아 냅다 바다에 던졌다. 유쾌한 목소리로 이렇게 외치면서.

“나는 전부지. 자, 여기가 떠돌이들의 고향이다~”

 

 


 

 

천둥소리 사이로 파도가 철썩이는 소리가 들린다. 민이 돌로레스의 팔을 꽉 붙잡았다. 이제 열다섯은 넘었을까, 아직 앳된 얼굴의 민은 발탄에 남아 있던 거주민 중 한 명이었다. 돌로레스는 번개 때문에 일어난 화재 현장에서 민을 구출해 데려가던 길이었다. 민이 처치가 늦어 화상이 남은 볼을 어색하게 움직이며 말했다.

“딱 한 번만 눈 감고 도와줘요.”

“… 민. 그럴 수 없는 거 알잖아요.”

“알아요. 아는데… 저 사람 착한 사람이에요…. 위험한 일 없을 거예요. 내가 장담해요.”

민이 파도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민이 바라보는 방향에는 해안 절벽이 있었다. 그리고 그곳으로 천천히 걸어가는 기사가 한 명. 멀리서도 상태가 안 좋은 게 잘 보였다. 처진 어깨로 아주 느리게 걸었고, 피를 흘리고 있었다. 분홍색 머리카락이 바닷바람에 지저분하게 흩날렸다. 돌로레스는 그 사람이 누군지 알았다.

“… 나도 저 사람 착한 거 아는데, 지금은 안 돼요. 갑시다.”

“돌로레스…!”

“부탁합니다.”

낯설 정도로 강경한 목소리에 민이 입을 다물었다. 마른 입술을 얼마나 꽉 깨물었는지 저러다 피가 날 것 같았다. 막 화재로 가족과 집을 잃은 사람이었다. 민의 눈시울이 빨개지는 것을 무시하고 돌로레스는 민의 손을 잡고 걷기 시작했다.

걷는 내내 민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임시 처소 앞에 도착해서야 건넨 형식적인 인사가 전부였다. “들어가요.” 돌로레스는 민이 처소로 들어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돌로레스는 왔던 길을 돌아 뛰듯이 걸었다. 아직 그 자리에 그 사람이 남아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마음에 걸려서 이대로 넘어갈 수가 없었다.

“또 걔래.”

“누구?”

“그 왜 있잖아. 떠돌이 기사. 아니, 성자라고 해야 하나? 이놈 붕대 걔가 손수 매준 거란다.”

“아…. 가만있을 성격 아닌데 용케 가만뒀다. 너 졌지.”

“….”

병상에 누워 있던 하사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등을 돌렸다. 돌로레스는 한숨을 푹 쉬었다. “부상 좀 봅시다.” 대답이 없다. 어지간히 속이 상했던 모양이다. “알아서 한다?” 돌로레스는 팔짱을 풀어줄 생각이 없는 하사의 팔짱을 알아서 잘 풀고 부상을 치료했다.

‘떠돌이 기사’ 혹은 ‘떠돌이 개’. 언젠가부터 전쟁과는 썩 어울리지 않는 별칭의 기사에 관한 소문이 들렸다. 의무실에 들락거리는 돌로레스는 그 소문을 유독 자주 접하는 사람 중 한 명이었다. 떠돌이 기사는 의무실에서 유명했다. 군인들을 처참한 몰골로 의무실에 보내는 악명 높은 기사인가 하면 그건 아니었다. 그 기사는 오히려 사람들을 살려 보냈다. 누구는 붕대를 감아줬다 하고, 누구는 겉옷을 받아오고, 누구는 기절했다가 정신을 차려보니 부축받고 있었다고 했다. 동에 번쩍 서에 번쩍 나타나서 사람들을 도와주다니, 어느 동화에서 본 의적과 닮은 꼴이 아닌가.

돌로레스는 소문의 주인공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다정하고 고집이 센 사람이었다. 돌로레스는 그 사람의 그런 성격을 좋아했지만, 전쟁이 시작되고 소문을 접했을 때는 이렇게 생각했다.

괜한 짓을 해.

“바울!”

돌로레스는 일부러 소리를 높여 상대를 불렀다. 싸우러 온 게 아니라는 걸 알리고 싶었다. 절벽가에 서 있던 떠돌이 기사, 바울이 고개를 돌렸다. 돌로레스는 숨을 몰아쉬며 바울에게 다가갔다. 언제부터 뛰었는지 얼굴에 땀이 흐르고 있었다.

“… 왜 다시 왔어요?”

“앗. 봤습니까?”

“봤죠. 모른 척 지나가 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는데….”

바울이 천천히 대꾸했다. 돌로레스는 바울의 몸을 훑어봤다. 피는 팔에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얼굴은… 놀란 건지, 아니면 약에 취한 건지 분간이 안 된다. 돌로레스는 입을 꾹 다물고 있다가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다친 데 봅시다.”

“대답은 안 해줄 거예요? 돌로레스.”

왜? 왜 갔던 길을 다시 돌아와 애먼 기사를 치료하려고 들까. 돌로레스는 그 질문에 쉽사리 답하기 어려웠다. 전쟁이 시작되고 3년. 그 사이 돌로레스에게는 새로운 철칙이 생겼다. ‘전장에서 만난 기사에게는 치료 능력을 쓰지 말 것. 설령 상대가 아주 잘 아는 사람이더라도.’ 이나기트가 강림한 뒤로 장소를 가리지 않고 몰아치는 번개가 민의 집을 불태웠고, 그들의 뒤에서도 반짝이고 있었다.

“… 민 알죠? 민이 바울 도와주지 않으면 절 영원히 저주할 거라고 해서 말입니다.”

그리고 간간이 파도가 절벽에 부딪혀 부서지는 소리가 들린다. 돌로레스가 사랑하는 바다가 두 사람의 옆으로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돌로레스는 발탄의 바다를 자주 찾았다. 때로는 혼자였고 때로는 곁에 사람이 있었다. 함께 바다를 구경하던 사람 중에는 기사도 있었다. 유리병 안에 마음을 담아 바다에 띄워 보낸 사람 중에도 있었다. 많은 사람이 떠도는 마음을 맡기러 바다를 찾았다.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었다. 바다는 어디로든 이어지니까.

돌로레스는 바다를 바라보던 바울의 뒷모습을 잊을 수 없었다. 그 자리에는 누구든 설 수 있었다. 국적도, 성별도, 나이도 상관없이.

떠돌이 기사도 그것을 알고 있을 테다.

“사실 거짓말입니다. 민이 그런 말을 할 리가 없죠.”

돌로레스는 볼을 긁적이고는 손수건이며 붕대를 꺼내기 시작했다.

“이번 한 번만입니다. 이대로 두고 가면 제 꿈자리가 사나울 것 같아서요. 그럴 생각 없었다면 미안합니다만…. 바다에 마음은 맡겨도 되는데 몸은 맡기지 말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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