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SSION 06
2023. 12. 14.

with. 델피나 카마이

 

“산토스 하사님.”

“예.”

“이것을…. 빈 병장이 전해줬습니다.”

“이게 뭡니까?”

“읽어보시면 알 거라고…. 전 전해드렸습니다.”

제인 병장은 주변의 눈치를 살피면서 돌아갔다. 돌로레스는 제인의 태도를 의아해하며 그가 건네준 것을 보았다. 그건 구겨진 편지였다. 편지가 맞는지도 불분명한 종이는 사람 손을 여러 번 탄 것처럼 더럽게 때가 탔다. 이렇게 편지를 보낼만한 사람이 없는데…. 돌로레스는 평평한 바위 위에 앉아서 편지를 펼쳤다.

‘돌로레스 하사에게, 제 이야기를 들어줘서 고마웠습니다.’ ¹ 편지는 그렇게 시작했다. 이름도 적히지 않은 짧은 편지. 익숙하지 않은 필체. 그러나 돌로레스는 편지를 쓴 사람이 누군지 알아봤다. 이나윤 중사… 아니, 자신을 볼품없고 구제 불능인 쓰레기라고 말하는 사람의 편지였다. 제인이 이해됐다. 니리타 상사의 눈에 띄지 않게 전해주고 싶었던 것일 테다. 편지의 발신인은 탈영한 군인이니까. 전장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그들에게도 이나윤 중사가 탈영했다는 소식은 금방 닿았다. 소식을 들은 직후 니리타 상사의 표정이 어떻게 구겨졌는지 돌로레스도 똑똑히 기억했다.

 

돌로레스는 소수의 군인, 그리고 한 명의 신관과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대피 명령이 떨어진 신전에 도착했을 때는 기사단이 그곳을 습격한 직후였다. 다수의 신관이 그 자리에서 처형당했고, 군인 세 명이 죽었다. 남은 자들 중 가장 직급이 높은 니리타 상사와 지나드 신관은 짧은 상의 후에 폰투스를 최종 행선지로 정했다. 상황 보고를 마치자 상부에서도 같은 명령을 내렸다. 군인들과 신관들은 평상복을 입고 일반인 피난민들 사이에 섞여 움직였다. 중간 지점에서 전투에 참여하기 힘들다고 판단된 신관 세 사람이 일행에서 빠졌다. 신관들을 안전 가옥에 데려다준 뒤, 군인들은 지나드 신관과 함께 폰투스까지 이동하기로 결정했다.

지금 그들은 작은 해안가 집을 빌려 휴식을 취하는 중이었다. 내일이면 폰투스 근방에 도착한다. 이틀 밤낮을 쉬지 않고 움직였으니 오늘 밤만은 잠을 청하는 게 좋을 테다. 제인이 들어간 문을 통해 지나드가 밖으로 나왔다. 돌로레스는 짧은 편지를 도로 접어 군복 안주머니에 넣었다.

“돌로레스.”

“지나드 님. 필요한 게 있으십니까?”

평상복을 입은 지나드가 돌로레스의 맞은편 바위에 앉았다.

“얘기나 나눌까 했지요. … 표정이 안 좋군요, 돌로레스.”

“지나드 님과의 대화는 언제든 환영입니다만… 그렇습니까?”

“네.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무슨 일 있나요?”

돌로레스는 무릎 위에 놓인 제 손을 만지작거렸다. 신전에서 나와 폰투스까지 향하는 짧은 여정에서 돌로레스는 이 나이 지긋한 신관에게 꽤 많은 이야기를 했다. 기차와 자동차, 사람 없는 골목길과 건물을 오가다 보면 나눌 수 있는 건 대화밖에 없었다. 지나드는 겸손과 경청의 태도가 몸에 밴 신관이었다. 또한 군인인 돌로레스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지나드가 폰투스로 가게 된 건 그가 과거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돌로레스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입을 열었다.

“떠난 사람들을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바다는 그들을 추억하기 좋은 곳이지요….”

돌로레스는 이나윤 중사와 나눈 대화를 떠올렸다. 죄책감으로 마음이 무겁다는 돌로레스에게 나윤은 직급에 걸맞은 책임만을 지라고 말해 주었다. 그렇게 말했으면서… 당신 역시 책임에서 벗어나고 싶었던 게 아닌가. 군인이라는 이름과 중사라는 계급을 뒤로 하고 떠난 나윤을 생각하니 한숨이 나왔다.

“사람들이 말입니다. 희망을 붙잡아 보겠다고, 살아 보겠다고 애를 쓰지 않습니까. 바다에 편지도 띄워보고, 등불을 하늘 위에 올려보고, 곧 무너질 돌탑도 쌓아보고요.”

“네.”

“저는 사람들이 덜 아프고 덜 죽었으면 하는데요. 총 들고 할 말은 아니지만…. 그래서요. 온종일 총질하고 누가 다쳤니 누가 죽었니 소식을 듣고 밤에 누우면 말입니다…. 전부 무슨 소용인가, 가끔은 그런 생각이 들어요.”

“… 이해합니다.”

“지나드 님은 그럴 때 어떻게 이겨내십니까?”

지나드는 조금 난감한 사람처럼 웃었다.

“전 이겨내진 못하겠더군요. 대신….”

“….”

“바다는 언제나 흐르고… 하나의 생명이 죽으면 새 생명이 다시 태어난다는 걸 기억하지요. 바다는 떠난 생명을 돌려주지 않으시며 제 슬픔도 거두시지 못하지만… 새 생명과 축복을, 기쁨을 우리에게 내밀어 주십니다. 그러니 ‘희망의 물은 고갈되지 않으리.’ 저의 선생님께서 자주 해주시던 말씀이에요.”

“좋은 말씀이네요.”

고개를 끄덕이던 돌로레스가 불현듯 웃음을 터뜨렸다. 줄곧 바다를 바라보던 지나드가 돌로레스가 있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돌로레스?”

“아, 죄송합니다. … 갑자기 생각난 게 있어서요. 얼마 전에 같은 말을 들었거든요. 전쟁 중에도 아기는 태어나지 않냐고….² 지나드 님이랑 비슷한 말이었는데 전혀 달라서 말입니다.”

“어떻게 달랐나요?”

“그 사람은 자기가 4cm 자란 걸 자랑하던 중이었거든요. 누구는 4cm가 줄었을 텐데 그 사람은 4cm를 얻었다잖아요. 전쟁 중에도 사람 생명이 그렇게 질기다 이겁니다.”

이번엔 지나드가 웃었다. 하지만 태어난 생명을 생각하면 죽어간 생명을 생각하게 되는 게 전쟁이었다. 두 사람은 대화를 멈추고 한동안 파도 소리를 들었다. 깊이가 가늠되지 않는 밤바다가 출렁거렸다.

“사실은 말입니다…. 죽어서 떠난 사람 말고, 다른 사람들도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랬군요.”

“… 전쟁이 끝났으면 합니다.”

“알다하 님께 기도를 드려볼까요?”

“예….”

지나드는 약식으로 기도문을 읊고 돌로레스를 향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돌로레스는 지나드를 따라 알다하를 부르는 문장을 말하고 눈을 감았다. 신관 옆에서 기도하려니 정말로 신에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눈을 감고 신을 생각하자 다른 군인, 기사들과 신을 욕한 기억부터 떠올랐다. 욕심쟁이 어린애 같다, 신도 욕 듣는 건 감내하셔야 한다, 미워 죽겠다(이렇게까지는 말하지 않았다)…. 하나하나 생각하다 보니 끝도 없고 양심에 찔려서 지나드에게 다 미안했다. 실눈을 뜨니 지나드는 여전히 허리를 곧게 펴고 눈을 감고 있었다. 소리 없이 입술을 움직이는 모습이 보인다.

소원 대신 질문이라도 해볼까 했습니다.³ 문득 아녜스의 말이 떠오른 건 그때였다. 사람의 기억이란 게 참 영리하고 잽싸서 곧바로 시체의 머리를 붙잡은 아녜스 기사의 서늘한 이미지가 떠올랐지만, 돌로레스는 애써 그 기억을 뒤로 밀어냈다. 신에게 소원 대신 질문을 하던 아녜스는 발탄에 있었고 돌로레스와 아녜스의 앞에는 작은 돌탑이 있다. 이 탑에는 무슨 질문을 던질 겁니까? 돌탑은 두 개. 아이스크림을 드시냐고 여쭤볼까요?³ 하나는 돌로레스의 것, 하나는 아녜스의 것이다.

돌로레스는 눈을 감고 신에게 물었다.

 

살아서 전쟁의 끝을 볼 수 있을까요?

 

그건 아녜스가 했던 질문이었다.

 

 

 

 

 

 

 

 

“산토스 하사.”

“예, 상사님.”

“후회하지 않나?”

“… 전쟁이 끝나기 전에는 안 합니다.”

“그럼 됐다. 제인?”

“준비됐습니다.”

니리타 상사가 돌로레스와 제인을 한 번씩 보고 소매를 걷었다. 폰투스 인근, 지나드가 배치되기로 한 신전에 도착하기도 전에 그들은 멈춰 서야 했다. 며칠 전에는 해일이 덮치더니 이제는 지진까지. 갈라진 도로에서 물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오는 길 내내 지진을 겪었으니 그것이 그들이 멈춰 선 이유는 아니었다. 다만 전황이 어지럽게 흘러가고 있었다. 신전이 있는 위치는 이곳에서도 확실히 보였다. 골렘 바바토의 육중한 발소리, 그리고 못 알아볼 수가 없는 벼락과 빛. 골렘 바바토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둔했다. 신전에서 벌어지는 싸움은 기사단이 우세를 잡고 있는 게 분명하다. 니리타는 신전을 버리고 다음 명령이 내려올 때까지 지나드를 보호하는 걸 우선할 셈이었다.

“지나드 님. 예상보다 적이 침투하는 속도가 빠릅니다. 대피를 도와드리겠습니다.”

“괜찮습니다. 명 받은 대로 제 몫을 해내야지요. 여러분처럼 제게도 소임이 있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내내 침착하던 지나드의 얼굴에 불안한 빛이 엿보였다.

“지나드 님. … 솔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저희는 최선을 다해 지나드 님을 보호하겠지만, 적의 숫자가 많다면 가망이 없습니다.”

“그래도….”

“옵니다!”

제인이 외쳤다. 돌로레스가 급하게 지나드의 팔을 끌어당겼다. 번갯불이 번쩍거리는 작은 회오리바람이 그들 옆을 스쳐 지나갔다. 지나드의 옷자락이 찢어졌다. 꼭 번개와 바람을 뭉쳐서 만든 작은 공 같았는데, 그 위력이 엄청나서 뒤에 있던 나무가 쓰러졌다. “피해요!” 네 사람은 기울어지는 나무를 피해 움직였다. 니리타는 지면에서 분출되던 물줄기의 방향을 틀어 기사를 공격했다.

“대장님! 이쪽이에요~!”

기사가 날렵하게 몸을 뒤로 빼면서 소리쳤다. 고개를 든 돌로레스는 골렘 바바토의 모습도, 번개도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신전에서 벌어진 전투에 결판이 난 것이다. 예상보다 더 빠르다. 지금 네 사람을 공격한 기사는 혹시 모를 생존자를 처리하기 위해 주변을 살피러 나온 것일 터. 손이 차가워졌다. 니리타는 등도 돌아보지 않고 돌로레스에게 말했다.

“산토스 하사. 하사는 지나드 님을 안전한 곳으로 데리고 간다.”

“예. 상사님.”

“니리타, 제인, 그건….”

“지나드 님. 가시죠.”

돌로레스는 망연한 지나드를 데리고 신전과 반대 방향으로 달리기 시작했다. 니리타와 제인의 모습이 멀어졌다. 적의 숫자는 얼마나 될까? 기사는 그들을 보았으니 니리타와 제인이 잠시 시간을 벌어준다 해도 언젠가는 그들 뒤를 쫓을 것이다…. 아니지, 니리타와 제인이 잘 해낼 수도 있다. 아니, 아니, 아니다…. 전장에서는 의문도, 후회도, 희망도, 절망도 전부 뒤로 밀어둬야 한다.

얼마나 뛰었을까. 돌로레스는 흐르는 땀을 대충 닦으며 지나드를 돌아봤다. 지나드는 곧 쓰러질 것 같은 지친 얼굴로 숨을 헐떡였다. 제아무리 건강한 사람이라 해도 이제 전투와는 연이 없는 늙은 신관이었다. 니리타와 제인을 두고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거리 곳곳에 번개가 내리쳤다. 무차별적인 공격이었다. 꼭 숨바꼭질의 술래가 숨어 있는 사람들을 찾으려고 여기저기 뒤지는 것처럼.

“돌, 로레스. 절 두고 가세요.”

“그럴 수 없습니다. 조금만 더 힘내십시오. 무전을 쳤으니 곧 지원군이 올 겁니다.”

“….”

숨 쉬는 게 힘든지 지나드는 제자리에서 연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돌로레스는 근심 어린 표정으로 지나드를 보았다. 이대로라면 얼마 안 가 걷는 것도 힘든 상태가 올지도 모른다. 정면으로 붙는다면 어차피 승산 없는 싸움이다. 돌로레스는 상대가 최소 셋 이상이라고 판단했다. 그때 근처에 있던 전봇대가 번개에 맞아 기울어졌다. 돌로레스는 지나드를 데리고 옆에 있던 건물 안으로 피신했다. “여기서 잠깐 숨을 돌립시다.” 차라리 아주 적은 시간이라도 벌 수 있다면, 지원군이 기사단보다 더 빨리 온다면, 최소한 지나드는 살릴 수 있을 테다.

“돌로레스.”

지나드가 앓는 소리를 냈다.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소총을 쥐고 건물 입구를 경계하던 돌로레스가 화들짝 놀라 지나드에게 다가갔다. 옆구리에서 피가 흐르고 있었다. 살펴보니 유리 파편인 것 같았다. 지진이며 벼락이며 온 거리가 위태롭게 흔들리는 와중에 무엇에라도 다칠 수 있는 상황이었다. “심한 상처는 아닙니다. 제가 보겠습니다.” 돌로레스는 지나드의 몸에 생명력을 불어넣었다. 심한 상처가 아닌데, 왜 이렇게까지 불안한 건지…. 문득 돌로레스의 시선이 바닥에 닿았다. 작은 핏방울이 점점이 바닥을 수놓고 있다. 지나드가 걸은 자리를 따라서…. 돌로레스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지나드 님. 일어나시죠. 여기서 나가야 합니다.”

말이 끝나기도 전에 지나드가 기대어 있던 벽이 기이한 모양으로 허물어지기 시작했다. 얇은 가벽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고 그 자리로 무수한 돌멩이들이 쏟아졌다. 뿌연 먼지 속에서 네 사람의 인영이 보였다. 기사들이었다.

돌로레스는 소총으로 그중 한 사람의 머리가 있을 곳을 겨냥했다. 그 사람이 뒤로 넘어가는 것과 동시에 팔에 힘이 빠졌다. 옆으로 굴러왔던 돌멩이들이 날카로운 창이 되어 팔을 꿰뚫은 것이다. 고통이 몰려왔다. 돌로레스는 소총을 손에서 놓쳤다.

“그만. 우리의 목적을 잊지 마세요.”

익숙한 목소리. 쇠가 돌에 부딪혀 나는 마찰음. 돌로레스는 먼지가 조금 가시고 나서야 상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서 있는 사람은 셋. 처음 번개와 바람으로 공을 만들었던 기사가 지나드의 목덜미에 칼 모양의 번개를 들이대고 있다. 다른 기사는 손에 돌을 쥐고 있었는데, 분노와 원망이 가득한 얼굴로 돌로레스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가운데 델피나 기사대장의 프렌치 네일이 기사의 앞을 막고 있다. 익숙한 목소리의 주인이었다. 한 사람은 쓰러져 있다. 바닥에 고인 피를 보면 돌로레스의 총에 맞은 기사는 아마 죽었을 테다. 그런데도… 무슨 이유에서인지 델피나는 돌로레스가 죽는 걸 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지나드는 몸에 힘을 빼고 앉아 돌로레스를 바라보았다. 죽음을 예감한 사람처럼 체념한 얼굴이었다. 돌로레스의 눈동자가 핑핑 돌아갔다.

“두 사람은 먼저 신관을 데리고 가도록.”

델피나가 프렌치 네일을 거두면서 두 기사를 향해 말했다. 돌을 쥐고 있던 기사는 이제 분노가 가득한 눈동자를 델피나에게로 돌렸는데, 델피나는 그를 향해 한 줌의 시선도 주지 않았다.

“명령을 거역할 셈인가요? 시안 기사. 시간이 벌써 많이 지체되었답니다.”

“그게 다 여기 두 인간 때문에….”

“두 번 말하지 않겠어요.”

냉랭한 목소리가 떨어졌다. “예, 기사대장.” ‘시안’이라고 불린 기사 말고 그 옆에 있던 기사가 대신 답했다. 시안 기사는 불만이 가득한 얼굴을 홱 돌리고 다른 기사와 함께 지나드를 반강제로 일으켜 끌고 갔다. 이 기류는 뭘까. 날 살려뒀기 때문에? 아니면 다른 이유? 돌로레스는 숨을 죽이고 기사들의 눈치를 봤다. 적어도 지나드를 제 눈앞에서 죽이지는 않을 모양이다. 그래도 지금은 저들이 지나드를 인질로 잡은 것이나 다름없으니 공격을 시도하는 건 위험하다.

세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된 직후 권총을 꺼내 들던 돌로레스는 이번엔 델피나의 프렌치네일에 팔을 찍혔다. “델피나!” 돌로레스는 델피나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양팔을 움직일 수 없는 건 큰 제약이었다. 델피나는 창조 능력자였지만, 주변에 널린 돌멩이나 흙, 책상이나 물건 따위를 사용할 필요도 없었다. 델피나는 부질없어 보이는 돌로레스의 몸싸움을 성실하게 받아쳐 주다가 결국 군인을 무릎 꿇게 했다.

“돌로레스 하사. 승산 없는 싸움에 목숨을 매달지 마세요.”

“… 죽일 겁니까?”

“당신을 죽일 생각은 없답니다.”

“홀로 남은 신관은 일반인이나 다름없습니다.”

“….”

델피나는 바닥에 꽂혀 있던 프렌치네일을 집어 들고 등을 돌렸다. 독한 연초 냄새가 희미하게 코를 간질였다. 돌로레스는 손을 뻗으려 노력했으나 몸이 너무 무거웠다.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부드럽고 어쩌면 날카롭게 들리는 델피나의 목소리. 밖으로 걸어 나가는 델피나의 등이 무어라 말을 걸었다. 알아들을 수는 없었다. 멀어지는 의식 속에서 돌로레스는 지나드의 얼굴을 떠올렸다. 희망의 물이 고갈된 사람의 얼굴을.

이 전쟁에서 보내는 하루가, 한시간이, 일분일초가 너무도 길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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