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 까마귀가 있다. ‘서부 갈까마귀’라고 불리는 이 까마귀는 까만 날개를 지니고 있다. 옷을 입은 것처럼 목덜미의 털은 잿빛이다. 서부 갈까마귀들은 흑빛과 잿빛으로 몸을 둘둘 두른 칙칙한 녀석들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여기 이놈의 꽁지는 이상하게 파랗다. 훔친 것이다. 훔치는 데 타고난 재능을 보이는 이 까마귀는 남의 파란 깃털로 제 꽁지를 치장하고, 새로운 목표물을 찾고 있다.
저기 목표물이 있다. 목표물은 울고 있다. 영특한 까마귀는 이유를 바로 찾아냈다. 버섯 때문이다. 이상하게 저 목표물처럼 생긴 생물들은 저 요란하게 생긴 버섯만 보면 그렇게 울어 재낀다. 궁금해서 먹어보려고 한 적도 있지만, 버섯은 뜯어 먹기가 아주 어려웠다. 어찌나 질긴지. 지금의 까마귀에게는 잘된 일이다. 목표물은 엉엉 울면서도 버섯을 도려내는 데 집중하고 있다.
버섯은 까마귀의 관심사가 아니다. 둥지를 틀기 좋아 보이는 지저분한 머리도 아니다. 눈물? 당연히 아니다. 까마귀는 목표물의 허리에 주렁주렁 달린 반짝이는 병에 눈독을 들였다. 저놈은 혼자고, 질긴 버섯과 싸우느라 정신이 없다.
까마귀가 날개를 펼친다.
여기 키사 할라라가 있다. 키사는 얼마 전 의뢰받은 묘약의 재료를 찾기 위해 숲으로 들어왔다. 평소처럼 검과 약주머니를 허리춤에 차고 옷 위에는 어두운 로브를 둘렀다. 재료를 찾는 일은 수월했다. 하나만 빼고.
날이 밝을 때 들어왔건만 버섯을 찾다 보니 어느덧 해가 불그스름해졌다. 키사는 나무 사이로 비치는 빨간 햇빛을 보고 눈을 찡그렸다. 찾는 건 불똥버섯이었다. 불에 그을린 것 같은 무늬 때문에 그런 이름이 붙었다. 불똥버섯은 이름과는 달리 습한 곳에서 발견되곤 했는데, 서대 산맥에서는 유독 찾기가 어려웠다. ‘더 늦으면 체니가 뭐라고 할 텐데….’ 키사는 조금만 더 찾아보자며 수풀을 헤쳤다. 갑자기 기묘한 냄새가 나고 코가 시큰거렸다. 키사는 고개를 훽 돌렸다. 거기 찾던 게 있었다. 안도의 한숨과 함께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당연히 감상적인 이유는 아니었다. 불똥버섯은 다른 무엇보다 그 냄새로 악명이 높았다. 지독하게 매운 냄새가 사람들의 눈물 콧물을 빼놓았던 터다. 아무튼 키사는 기쁨 때문도 슬픔 때문도 아닌 눈물을 짜내면서 버섯을 채집하는 데 열중했다. 드워프 다리처럼 단단한 버섯을 잘라내고 있을 때…
까마귀가 날개를 펼친 건 그때였다.
까마귀는 혼자가 아니었다.
“아! 아!”
새떼가 달려들자 순식간에 시야가 좁아졌다. 게다가 몸은 여기저기 왜 그렇게 찔러대는지. 키사는 도통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이럴 때를 대비해 준비한 묘약이 있다. 그것도 냄새가 꽤 지독하지만, 잘만 쓰면 요긴했다. 허리춤을 더듬던 키사는 그 ‘지독한 냄새’가 이미 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머니가 휑했다. 약병을 문 까마귀 하나가 뒤로 빠지자 바닥에 약물이 쏟아진 게 보였다. 훔치려면 제대로 훔칠 것이지 약병을 가져가다가 두어 개를 깨트린 모양이었다. 이제 까마귀들은 주춤거리면서도 약을 올리듯 키사의 머리통을 콕콕 찔러대고 있었다.
도합 최소 2주 이상은 공들였을 묘약들이 전부 동이 났다. 키사는 말을 잃었다. 까마귀들을 쫓아내야 한다는 것도 잊었다. 원래도 까마귀들과 대화할 생각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불똥버섯이 아니래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정말로 울지는 않았을 거다. 정말로, 아마도….
얼마나 지났을까. 문득 인영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키사는 그때까지도 얌전히 까마귀에게 쪼아 먹히고 있었다. 어찌나 얌전했는지 엉망진창인 상황에도 불구하고 키사 할라라가 까마귀들과 모임이라도 가진 건가, 장난을 치고 있는 건가 싶은 정도였다. 그대로 또 몇 초가 흐르고 정수리를 찍힌 키사는 아주 느리게 입을 움직였다. 소리 없이 말하기를,
도, 와,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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