一
'그 일'이 있기 직전, 무량은 고양이를 구경하고 있었다. 옆에는 청야의 주 강희와 적 연오, 그리고 장이 있었다.
"이 고양이를 붙들고 시간이 종료되면, 얘도 따라올까요?"
"고양이가 따라와지면 좋겠습니다. 깻잎은 안 좋아하는 것일까요..."
"고양이는 생선이라지 않습니까."
"그냥 우리를 안 좋아하는 것 같다.."
"하지만.. 특정 잎을 좋아하는 경우가 있다 하여.. 그것과 비슷하다 생각했습니다.."
무량과 장, 강희는 쪼그려 앉아 고양이의 식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고, 연오는 옆에서 자신을 할퀸 고양이를 나무라고 있었다. 마경이 끝나고, 그들 모두가 뱉어져야 할 시간이었다. 무량은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 마경 때문에 화가 났고, 자꾸만 다치는 장이 걱정되었으며, 첫 출발이 좋지 않다는 생각에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그 순간, 마경이 종료될 시간이 임박했음에도 수확이 없던 그 순간, 무량은 방심하고 있었다. 화도, 걱정도, 조바심도 잠시 자취를 감추었다.
그게 낭패였으리라. 무량은 그 뒤로 오랫동안 그리 생각했다. 조금만 더 서둘렀더라면, 방심하지 않았더라면.
그날 마경은 그들을 바깥으로, 심상세계로 뱉어내지 않았다. 4명의 선인들은 제자들을 끄집어내지 않았고, 바닥과 천장, 벽, 온 사방이 제자들을 삼켰다. 어둠이 눈을 가리고 불온한 기운이 온몸을 짓눌렀다. 무량의 머릿속에는 심상세계로 들어오던 길에 그를 움켜 쥐었던 그림자가 떠올랐다. 역시 그때부터 무언가 잘못된 것이 분명하다. '잘못되었다.'는 생각이 머리를 지배했다.
목소리가 들렸다.
《너희는 가장 깊은 절망에서, 나를 볼 것이고, 나를 닮거나 이겨내려 발버둥칠것이다.》
정신을 차렸을 때 무량은 땅 위에 발을 딛었다. 하지만 안개가 너무도 짙었고, 자신이 밟은 게 땅인지도 알 수 없었다. 소리를 고래고래 질렀는데 쉰 소리가 나오고 목이 아팠다. 무량은 목이 따가울 때까지 기침했다.
"장!!!" 대답이 없다.
"주 소협!!! 적 소협!!!"
"단 장!!!! 야!!"
제자리에서 한참을 불렀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무량은 혹 누가 쓰러져 있는 게 아닐까 주변의 땅을 더듬어 봤다. 마경의 함정 속에서 그랬듯이, 어둠 속에서 그랬듯이 바닥을 더듬고 주변 땅을 딛었다. 전일 쓰러졌던 장이 다시 졸도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지푸라기 같은 희망을 안고 장과 강희와 연오의 이름을 불렀다.
시간이 지났다. 만약 생명이 위급한 자가 있었다면 지금은 같은 땅을 밟고 있어도 죽었을 것이다.
무량은 자리에서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적 여물!"
"사저!!"
사저와 사형과 사제의 이름을 불렀다.
"소운!"
"야 신 소하!!"
다른 문파 제자들의 이름도 생각나는 대로 모두 불렀다.
"…누구 없어?"
목소리가 다 쉬어 비릿한 맛이 느껴질 무렵, 무량은 자리에서 쓰러졌다.
그리고 일어났을 때에는, 다시 안개였다.
무량은 다시 걸었다.
이번에는 아무도 부르지 않았다.
어차피 아무도 듣지 못할테니까.
심상세계로 돌아왔다. 무량에겐 십 년이었고, 안내인에게는 2주에 불과한 시간이 흐른 뒤였다.
무량은 십 년만에 반가운 얼굴들을 여럿 만났다. 십 년 동안 그랬던 것처럼 반가웠고, 두려웠고, 조금은 지쳤고... 명치가 쑤셨다. 무량은 그들이 자란 모습에 충격을 받았다. 지난 십 년 동안 만난 이들의 모습과는 제법 달랐다. 그러나 우습게도 의심은 지우지 못했다. 믿는 것은 어렵지만 의심은 제 옷과 같았다. 수많은 경우의 수를 생각한다. 설령 이곳이 진짜 심상세계고 저들이 모두 진짜더래도, 거울 너머에 떨어져 있던 시간 동안 어떤 사람으로 변했을지 모르는 일이다.
심상세계에서의 첫날. 무량은 지나치는 제자들의 그림자를 한 번씩 밟아 보았다.
차라리 우스워지리라. 그편이 낫다.
다시 만난 심상세계의 집은 흉물이었다.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무량이 배운 것이 있다면, 최소한 심상세계에서는 미신을 믿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무량은 집으로 들어가는 대신 평상, 지붕 위, 나무 위나 밑에서 쪽잠을 청했다. 지난 일기도 읽었다. 오래전, 처음으로 안개에서 벗어나 아등바등 심상세계와 제자들에 관해 적었을 시기의 일기. 기억을 되살리는 수단이라기에는 너무 바랜 기록들을 읽으며 조금이라도 더 기억해 보려 애썼다. 막상 얼굴을 가진 이들 앞에 서면 그 기억은 무용해짐을 알면서도, 읽었다. 어쩌면 허탈함을 메우기 위해 더 애쓰는 건지도 모른다. 무량은 허탈했다. 그 세계는 오롯이 자신만의 것이었다는 사실. 십 여 년을 다른 이를 찾아다닌 것이 모두 허송세월이었다는 사실이, 서로에게 닿지 못하고 그저 각자의 유령을 보고 있었다는 사실이......
「나도 이렇게 되고 싶지 않았어...」
심상세계에 달라진 점이 또 있다면, 그것은 령(靈)의 존재다. 무량은 스쳐 지나가는 혼령의 뒷모습을 눈으로 쫓았다. 어린아이부터 노인까지 다양한 모습을 한 령들이 마을 곳곳을 배회했다. 웃으면서, 소리치면서, 울면서, 눈과 귀를 괴롭혔다. 어떤 령들은 먼저 공격해 오기도 했다. 그것이 무량에게는 아주 많이 거슬렸다.
'위령제라니? 당장 얼굴과 마음이 반쪽이 된 이들이 한 무더기 같더만. 누구보고 누굴 위로하라는 거야? 지금 장난해? 이 xxxx한 xxxxxx 같으니!!!'
무량의 수첩에 적힌 글자에는 모서리마다 짜증이 섞였다.
"그거 아냐. 나는 십 년을 망령과 얘기하며 살았다."
암기를 손에 쥔 채 무량은 쪼그려 앉았다. 앞에는 포박된 유령이 꼭 제가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입을 열었다 닫았다, 손을 꼼지락거리고 있었다. 무량은 인상을 쓰고 유령을 한참 노려보았다. 이것들이 싹 다 사라졌으면 좋겠는데............
십여 년의 세월 동안 무량이 배운 것이 있다면, 최소한 심상세계에서는 미신을 믿어 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게다가 이번에 그가 만난 망령-사람-의 숫자는 너무 많았다. 이번에 잘못된다면... 무량은 잃을 게 많았다.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나온다.
"셋 셀 테니 말할 게 있으면 빨리 말해. 그러니까... 난 잠깐은 들을 수 있다는 뜻이야. 오래는 못 기다린다. 한 번만 더 허튼짓하면 네가 령이든 무엇이든 다시 저승을 구경하게 해 주지. 알간?"
靈
오늘 무량은 심상세계에 오고 처음으로 '집'에 들어갔다. 하늘에서 혈우가 내려 바깥을 도통 돌아다닐 수가 없었던 탓이다. 무량이 잠시 머물었던 집은 한쪽이 반쯤 무너졌고, 이상한 것이 묻은 벽은 질척거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혈우가 집을 더 괴기한 모습으로 만들고 있었다. 무량은 그동안 피했던 것이 무색하게 바로 문을 열었다. 내부는 외부에 비하면 멀쩡했다. 벽이 축축한 것을 제외하고 있던 것은 전부 있는 것 같았다. 확신할 수는 없었는데, 내부의 전경이 무량에게 생소하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집안에는 그의 취향과는 거리가 먼 가구들과 자기, 그리고 장식장이 있었다. 자기와 장식장이라니, 무량으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장식장에는 인형과 고양이 가면이 있었다. 역시 이상했다. 기억이 날듯하면서도 흐릿해서, 무량은 책장에서 일기를 모두 꺼냈다. 창문을 넘는 곡성을 무시하려 애쓰면서 십 년 전의 일기를 읽기 시작했다.
과거의 일기는 굉장히 헐거웠다. 하고 싶은 말만 대충 쓰여 있는 것이 절로 혀를 차게 만들었다.
'청야의 진호련과 말싸움을 했다. 아니 잘 좀 말 좀 해 보려고 했는데 갑자기 이상한 데로 대화가 튀었다. 근데 진짜 웃긴 건 집에 와서 생각해 보니까 왜 싸웠는지 모르겠다.'
'규연화를 다시 만났다. 연화. 이름은 기억하지 못했는데 예쁜 이름이다. 백야의 설산을 오르다가 눈을 다쳤다고 했다. 여전히 목소리가 좋은 것 같다.'
'축제. 눈 딱 감고 구경했다. 소운과 같이 돌아다녔는데 사람이 싹싹하고 잘 웃는 게 좋다. 안 미운 도련님 같다. 소운이 골라 준 고양이 가면을 샀다. 유치하지만 기념으로 남겨 두려고 한다. 아. 인형도.'
"이렇게 쓰면 누가 알아 보라고?"
무량은 과거의 제 자신을 욕했다. 그러나 웃음이 난다.
'눈을 딱 감고 흑야의 도연호를 집으로 불렀다. 도련님 같았으니 아마 잘 알겠지. 웬 자기도 만들어 줬는데 물릴 수는 없어서 뒀다. 심미안은 있는 것 같다. 맘에 안 들면 나중에 없애면 되니까. 이제 집이 좀 차 보인다. 나도 구색 좀 맞추면서 살고 싶다.'
'마경. 손에 자꾸 땀이 찬다. 장이 자꾸 다쳤다. 다쳐 놓고 뭘 그렇게 나서는지 모르겠다. 하여튼 말은 드럽게 안 듣는다. 청야의 주강희, 적연오와 함께 다녔다. 적연오는 무인 하기엔 좀 심약해 보인다. 주강희는 맞는 말만 한다. 잘 맞았다.'
마경 얘기가 나오기 시작할 무렵, 무량은 이상한 기미에 창밖을 바라보았다.
안개였다.
순간 숨이 턱 막혔다. 바깥으로 나오자 안개가 눈앞을 가린다. 거짓말 같아서 무량은 통곡하고 싶었다. 무량은 안개가 너무도 미워 제 이름자를 바꾸고 싶을 지경이었다. 지금이라면 곡성에 섞여서 제 목소리도 흩어지리라. 아무래도 괜찮으리라.
"...내 이럴 줄 알았어."
익숙해진 줄로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역시 이번엔 잃을 게 많아서 그런 건지도 모른다. 무량은 잠시 망설이다 걷기 시작했다. 이제는 2주라고 알려진, 그러나 그보다는 훨씬 긴 세월 동안 해왔던 것처럼.
눈물이 찔끔 나왔다.
안개가 다시 걷혔을 때, 무량은 공터에 서 있었다. 곡성은 끊겼고, 령과 인간들이 지나다녔다.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갓을 고쳐 쓰고, 복권을 확인했다. 그러다 그리운 얼굴을 잠깐 바라보는 사이, 부지불식간에 수마가 덮쳐 온다. 십 년을 그리워하던 유령들의 얼굴. 무량은 서 있을 자신이 없어, 흉물의 문을 열고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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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