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선희지는 경박한 사람이다. 그는 거짓이 아니라 진실을 내뱉을 때에도 엄살과 허세와 장난을 몸에 두른다.
선희지는 또한 얄팍한 사람이다. 경박함으로는 남을 완벽하게 속일 수 없고, 껍질은 투명하다.
"저는 안전주의자라서요." 안전주의자가 되기 싫었다. "알던 게 어떻게 모르는 게 되나요." 사실 자주 쓰는 전략이다. "저는 겁이 많거든요." 진실. "하다 보니 재미가 없어지더라고요." 반만 진실.
2.
겨울에 선희지는 D와 크게 싸웠다. D는 선희지에게 그 경박한 짓거리만 관둬도 네 꼴이 덜 우스울 거라고 말했다. 자학하지 말라고 했다. 만약 D가 그냥 상처받았다고 화를 냈다면 그만큼 기분이 더럽진 않았을 텐데. 선희지는 같은 짓을 반복할 수밖에 없었다. 우스울 걸 알면서도, 얇은 껍질이라도 덧씌우지 않는다면 정말로 제 꼴을 참지 못할 것 같아서. 참지 못하는 건 자신의 초라함이면서, 그걸 알아보는 D에게 너 때문에 내가 우스워진다고 책임을 전가했다. D도 얌전한 사람은 아니었기에 두 사람은 결국 서로에게 욕설과 경멸과 비난을 퍼부었다.
D는 여덟 번째 동거인이었고, 다음날 선희지는 짐을 뺐다. 다시 혼자가 되는 일은 무서웠다. 사람이 없다는 사실보다도 집이 없고 돈이 없다는 사실이 선희지를 외롭게 했다. 다시 들어가서 싹싹 빌어볼까? 그 생각을 두어 번 했으나 관뒀다. D와의 관계는 이미 유통기한을 훌쩍 넘긴지 오래였다. 이모는 자신을 반겨줄 테지만 사촌들은 이모에게 저 한심한 놈을 그만 받아주라고 말할 것이다. 그즈음 친한 친구들은 D와 더 친한 친구들이어서 찾아가기 난감했다. 고민 끝에 찾아간 C는 전애인이었다. 선희지를 반기지는 않았지만, 방만 구하고 바로 나가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선희지는 약속보다 더 오랜 시간 C의 집에 머물렀고, 그러다 공무원(B)에 지원했다.
"어떤 일이 제일 좋았는데요?"
"뭘 잃는 게 가장 두려운데요? 희지씨가 가진 것 중에서."
이런 질문 앞에서 선희지는 잠깐 뒤를 돌아보게 된다. 20대의 선희지라면 거기에 음악이라고 답했을 것이고, 사실 그것은 자존심을 뜻하는 단어였다. 30대의 선희지에게는 중요한 것이 별로 없었다. 너무 두려워서 잃을까봐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 그런 게 없다는 사실이 그는 조금 아쉬웠다. 서른다섯이나 먹을 때까지 뭘 하고 지낸 거냐는 물음에 이제는 ‘그러게.’하고 답하고 싶어진다. 아직 서른다섯밖에 안 됐는데 삶이 무료하게 느껴졌다. 류해수에게 선희지는 돈을 잃는 게 두렵다고 말했고, 실은 이제 남은 것은 조금의 체면 정도라는 뜻이다.
류해수는 얇은 껍질을 쓰고 있다는 점에서 선희지와 닮았다. 쑤의 얼굴을 벗고 류해수가 자신의 뺨 맞은 얼굴을 드러냈을 때, 선희지는 자신이 생각하는 적정선에서 그를 걱정했다. 그리고 묻지 않았다. 얼굴에 약을 발라줄 때 류해수는 따갑거나 간지러운 기색 없이 얌전했다. 쑤의 얼굴을 벗었음에도 다친 것은 자신이 아니라 겉껍질에 불과하다는 듯 초연했다.
"누가 물어보면 뭐라고 할래요?"
"아~ 넘어져서 희지씨가 약 발라줬다고 하려고요. 희지씨가 뿌듯하다고 하니까 이대로 좀 다녀보죠."
"괜찮은데요. 적어도 반은 진짜잖아요?"
"그렇죠? 중요한 점은 반이 진짜라는 거죠."
그들 사이에는 비밀이 많고, 실은 아무것도 없다. 류해수가 선희지와 다른 점이라면, 얇은 껍질 너머일 것이리라고 선희지는 생각했다. "저는 미련이 많은 타입이죠." 선희지는 제 껍질 너머가 구질구질하다. "후회요? 많이 하지는 않아요." 류해수는, 글쎄… 선희지는 류해수는 껍질 너머도 심플할 것이라 짐작한다. 이것이 아마 그들의 차이일 것이리라고. 그래서 선희지는 류해수에게 보다 솔직하게 군다. 비밀을 들어도 담지 않을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 사이에 비밀이 많아져도 실은 아무것도 없을 것이기 때문에.
"앞으로는 친구 만들지 않을 건가요? 희지 씨는 섬세하고 겁이 많으니까."
류해수가 묻고, 선희지는 진실하게 답한다.
"아뇨. 만들 거예요. 혼자인 게 더 무섭거든요."
언제나처럼 농담도 덧붙이면서.
"그런데 그건 왜 물어 봐요? 친구 해주시려고요?"
3.
옥상에서 쑤를 발견했을 때 선희지는 그가 류해수임을 단번에 알아 보았다. 시력에는 문제없을 신체로 안경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건 류해수의 흔적이었고, 때문에 류해수가 이제 류해수의 몸으로는 살아갈 수 없으리라는 것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에도 죽었다 살아난 사람의 존재는 아귀가 맞지 않아, 선희지는 쑤의 머리카락과 볼을 만져 보고 그의 경우 없는 농담을 듣고서야 그가 류해수임을 인정했다. 피부에는 온기가 돌지 않지만. 살아 돌아온 류해수는 자신이 심장과 뇌를 이용해 움직이는 안드로이드 비슷한 것이라고 말했다. ‘류해수’는 엘로가 말한 대로 사망자로 처리되었다.
처리했다, 그리고 복구되었다.
"희지 씨, 괜찮아요?"
순간 선희지는 구토감을 느낀다. 돌아온 류해수를 둘러싸고 벌어진 모든 것이 선희지를 구역질나게 했다.
선희지는 헛구역질을 여러 번 한 끝에 위액만 조금 뱉었다. 입을 헹구고 손을 씻으면서 시계를 확인해 봤을 때는 이미 십 분 가까이 화장실에 처박혀 있었던 것 같았다. 류해수는 복도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괜찮다고 말했다. 징그러울 수 있다고도 말했다. 그의 태도는 단순히 상대를 배려하려는 마음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 짓기에는 찝찝한 구석이 있었다. 그러니까 선희지의 시각에서, 류해수는 정말로 괜찮아 보였다.
"해수 씨는 참 사람이 심플하네요."
"어릴 때부터 좀 심플하게 살았어요, 천성인가봐요."
이상하게도 동이 쉬이 트지 않는 것 같은 새벽이었다. 여름이 되면서 새벽이 짧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날은 유독 새벽이 길었다. 류해수가 죽었고, 쑤는 다시 태어났다. 이런 문장은 진부하다고 생각하지만 선희지는 그렇게밖에 표현하지 못한다. 속으로 질 나쁜 SF 호러 영화 속의 단역이 된 것 같다고 생각한다. 그는 실제로 자신의 룸메이트에게 이렇게 물었다. "승원님. 그러면 저는 몇 분 만에 죽을 상인가요? 공포 영화에서요."
류해수가 죽는 순간을 상기한다. 선희지가 같은 상황에 놓였다면, 그는 구질구질하게 살아보고 싶어서 울었을 지도 모른다. 그도 아니면, 최소한 남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했을 것이다. 류해수는 그러지 않았다. 그는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파격적인 선택을 했다. 선희지와 동기들은 쑤의 10개의 검이 그대로 쑤의 몸에 꽂히는 걸 목도했다. 류해수와의 관계, 마음의 종류와 깊이는 다를지라도 모두가 작고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그러니까, 새벽이 긴 것은 분명 그의 탓이다.
"희지 씨는 울보에 겁도 많은데 착하네요. 저는 희지 씨가 울보에 겁쟁이인 걸 알고서도 그 앞에서 죽었는데."
그리고 그는 아마 한동안 자신의 파트너들과 동료들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다니리라.
"얄미운 사람일세. 그런 말은 왜 해요? 나쁜 사람처럼."
"나쁜 사람이라서요~ 저도 제가 좀 엿같은 개자식인 거 인정하거든요. 희지 씨도 이제 알게 됐네요. 그렇죠?"
"아뇨. 제 말은, …."
나쁜 사람인 걸 굳이 왜 티를 내냐고요.
그 문장을 입안에서 왼 순간 웃음이 나왔다. 혼자 허를 찔렸다.
선희지는 거짓말과 농담에도 어느 정도 사람의 마음과 의도가 담긴다고 생각한다. 모든 말에는 사람의 마음과 의도가 담긴다. 어떤 식으로든. 이를테면 선희지는 강한 척보다는 약한 척을 선호한다. 무언가 책임지는 것보다 남에게 빌붙는 게 쉽기 때문이다. 선희지는 종종 미안한 사람보다 나쁜 사람을 자청한다. 남을 상처주고 싶을 때, 무언가를 책임지기 싫을 때, 자학하고 싶을 때. 그리고 류해수는 나쁜 사람과 엿같은 개자식을 선택한다. 물론 선희지도 류해수가 죽는 순간에 그를 미친 사람이라고 호명했으니, 어쩌면 류해수는 정말로 엿같은 개자식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그 선택은 익숙한 종류의 것이다. 선희지는 류해수에 대한 생각을 바꾸기로 한다. 류해수와의 차이를 가장 명확하게 인지하는 순간, 아이러니하게도 그와 자신이 조금 닮았다고 생각했다.
나쁜 사람, 엿같은 개자식. 그렇죠?
류해수의 진심이 조금은 궁금하다.
"나쁜 사람이 되고 싶어요? 해수 씨. 아님 그것도 천성이라고 하시려나."
"희지 씨 말씀은… 뭔데요? 천성일 수도 있겠죠? 첫사랑이 오빠 여자친구를 꼬셨던 거라면, 좀 천성적으로 나쁜 여자라 해도 이상하지 않은 것 같은데…."
류해수는 미소를 지으며 돌아본다. 선희지도 웃는다.
"해수 씨도 참. 저는 천성 안 믿어요. 그리고요. 음~… 그래요. 해수 씨는 엿같은 개자식이라는 거죠?"
제가 하려던 말은요,
선희지는 다시 고른다.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