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숭아 물들이기
2021. 2. 26.

, 신 소하

 

 

  서주에서 무량은 향서와 두리, 토영과 함께 잤다. 방은 좁았고 피곤한 어른들은 쥐 죽은 듯 잠만 잤다. 그래서 무량도 그렇게 했다. 그들 넷은 서로의 발을 치지 않도록 조심했고, 밤이 되면 지쳐서 대화를 나누는 법이 없었다.

  심상세계에 왔을 때 무량은 혼자 잤다. 적적하냐 물으면 그렇다 답하진 않았다. 서주의 삼삼오오 같이 누운 방에서도 별다른 이야기나 살가운 온기가 오고 가진 않았던 터다. 무량은 '괜찮았다'고 기억한다. 혼자 넓은 방을 쓸 수 있어 편안하다고 생각했다. 고요가 달가웠다.

  가짜 서주에서 무량은 혼자 잤다. 그곳에선 고요가 달갑지 않았으나, 믿을 사람도 환영도 귀신도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혼자 자는 것이 가장 나았다.

  다시 심상세계. 무량은 잠을 잘 때면 누가 밖에서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일어난다.

 

 

 

  "그래… 내일 아침까지는 아무 일도 없었으면 좋겠네. 잘 마르게."

  "너무… 늦은게 아니길 바라. 아무튼. 손, 줘봐."

  축시에 무량은 신 소하의 집에 있었다. "자. 그냥 오긴 좀 그래서 선물을 준비했어." "음. 어서 와...?" 집에 초대한 사람과 방문한 사람의 흉내를 내며 문지방을 넘었다. 소하의 방에는 침대가 있고, 상이 있고, 잔이 있었다. 무량은 그 풍경에 조금 안도했다. 침대는? 상은? 잔은 있어? 그리 묻던 무량은 말과 시선에 공백이 생긴 신 소하의 집이 이전보다 텅 비었을까 염려했다. 신 소하는 더는 천을 드리우지 않았고 지붕에 오르지 않았다. 깊은 곳으로 떨어졌다가 나온 많은 제자들이 이전보다 못한 꼴로 잠들었으므로-혹은 아예 잠을 자지 않는 놈도 있었다.- 무량은 소하가 그러지 않길 바랐다. 어깨에 들어간 힘이 느슨해진다. 둘은 바닥에 앉았다.

  "여기."

  무량이 왼손을 내밀자 소하가 빻은 봉숭아를 덜어내어 손톱 위에 얹는다. 그들은 잠들기 전에 봉숭아물을 들이기로 약속했다. 귀鬼를 쫓기 위함이었다. 낮에는 함께 봉숭아꽃과 잎을 떼어내고, 절구에 소금을 넣는다. 그것들을 모아 찧었다. 이제 덜어낸 봉숭아는 손톱 모양에 맞추어 꾹꾹 눌러 편다. 잘라놓은 천을 덮고, 실로 적당히 묶고…

  분명 약지에 막 봉숭아를 올리고 있었는데, 다음 순간 무량의 손톱 위에는 천이 덮여 있었다. 무량은 자신이 깜빡 졸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기억하고 있지?"

  잠들지 않았던 양 말을 뱉어 보려 했으나 실패였다. 소하는 이미 배운 대로 잘하고 있다.

  "졸려?"

  "조금. …그러네. 졸립네."

  "말했지만…"

  온기가 다른 손가락으로 옮겨가는 것이 느껴진다,

  목소리가 다른 목소리로 옮겨간다.

 

 

 

  "말했지만 뭐든지 적당한 게 중요해, 무량."

  "난 적당히 하고 있는데."

  "넌 힘이 많이 들어갔어. 이렇게 꽉 누르면 나중에 아릴 거야."

  "물이 잘 들겠지."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내가 한 걸 봐."

  향서가 자신의 손톱 위에 봉숭아를 올리고, 가볍게 누르고, 번지지 않도록 모양을 정리했다. 작고 울퉁불퉁한 손 위에 하나씩 하나씩 빻은 봉숭아를 올려 정돈하고, 천으로 덮고 실을 묶었다. 그렇게 왼손의 다섯 손톱에 작업이 끝나자 향서는 심각한 얼굴을 한 어린아이의 이마를 아프지 않게 친다.

  "다시 해 봐, 무량. 할 수 있을 거야."

  "아! 때리지 마!"

  향서가 웃었고, 무량은 지지 않고 저보다 한참 큰 어른의 이마를 쳤다. 향서는 기분 나쁜 기색도 없었다. 무량은 아까보다 힘을 빼고 봉숭아꽃을 올린다. 향서는 무량이 하는 것을 바라보면서 가끔씩 참견했다. "아, 내가 알아서 한다니까. 서 형. 저리 나와 봐." 무량은 툴툴대면서 작업에 열중한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옆에서 보고 있던 두리와 토영이 자기들도 해 달라면서 달라붙었다. "아, 또 왜요. 손 많이 써서 해 봤자 지워질 텐데?" "아냐, 무량. 봉숭아물은 그렇게 쉽게 지워지지 않아." "아, 좀!" "아하하. 량아, 너 왜 이렇게 웃기냐?" "너 계속 그러다가 쟤한테 맞는다?" 작은 아이가 어른을 발로 차고 두 어른의 손에 봉숭아물을 고정시키고 나자 축시가 다 되었다. 그 사이에 출처를 분간하기 힘든 하품이 수도 없이 쏟아졌다.

  "이러다 늦잠 자겠는데."

  "흰소리 말고 누워. 내일 더 자면 될 거야."

  "저쪽으로 가. 졸려서 미쳐버릴 것 같아..."

  "그러니까 서 형은 왜 이런 걸 시켜가지고."

  "내가 시켰어? 얘들아 쟤 좀 봐. 네가 해 보고 싶다며!"

  "아, 나 참."

  각자의 자리에 누운 네 사람의 목소리가 엉켰다가 조용해진다.

  누군가 촛불을 끈다.

  이제 방안은 아주, 아주 조용해진다.

 

 

 

  "졸리면 자도 이해할게."

  서주의 방에 누워 있던 무량은 문득 신 소하의 목소리를 들었다. 눈을 뜨자 손톱을 보느라 내리깐 자색의 눈동자가 보였다. 이곳은 서주가 아니다…… 그는 자랐다. 다른 이의 손가락, 빻아서 뭉친 봉숭아꽃, 까슬까슬한 천의 촉감이 느껴진다. 무량은 눈을 천천히 감았다가 천천히 뜨길 반복했다.

  다시.

  가짜 서주에서 무량은 남의 무릎을 베고 잔 적이 있다. 그곳에선 고요가 달갑지 않았다. 외로웠고, 적적했으며, 화가 났고, 지쳤다. "무량아. 잠을 자야지." 그렇게 말하기에 눈을 감았다. 밤중에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어둠이 코앞에 다가와 있었고, 다시 눈을 떴을 때에는 안개 속에 버려졌다. 서 있는 것은 다시 무량, 그 자신 뿐이었다. '그림자에 먹혔구나.' 무량은 알 수 있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 것이 처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때 무량에게 믿는다는 것은 포기하는 것에 가까웠다. 눈을 감고, 잡아먹혀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밤이 이따금 찾아왔다.

  그리고 지금, 무량은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한다. 그는 아주 피곤했고, 기이하게 졸렸으며, 이들이 진짜임은 믿을 수 있다고, 그렇게 전부터 생각해왔으니까…… 

  신 소하라면 믿어도 괜찮을 것이다. 왜냐하면 소하의 말과 시선에 공백이 생겨서, 그가 한눈에도 얇고 말라서, 아픈 사람처럼 보여서. 무량은 함부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다고, 괜찮다고… …

  "아주, 잠깐만…… 눈만 감을게. 너는, 그래. 괜찮지…"

  그는 자신의 목소리가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다시 눈을 감았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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