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때 돌로레스는 욕심이 많은 아이였다. 넌 꼭 그렇게 욕심을 부려야겠니. 흐릿한 기억 속에서 어머니 마야가 이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돌로레스는 새 옷이 갖고 싶다거나 불공평하다는 둥의 말을 했다. 우리 집 돈 없는 것도 아니잖아.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도 그럴 게 돌로레스의 집은 동네에서 가장 큰 집이었다. 옆집의 그레첸은 늘 돌로레스를 부러워했다.
문제는 전쟁이었다.
배우로 활동하던 마야는 자선 활동에 많은 돈과 시간을 할애하는 사람이었다. 선한 의도로 하는 일이었으나 어느 정도는 배우 이미지를 위해서이기도 했다. 마야는 평판에 신경을 많이 썼다. 마야는 자신의 아이들에게 입버릇처럼 밖에서 잘난 체를 해서는 안 된다고 신신당부했다. 좋은 집에서 삼시 세끼 배부르게 먹어도 옷이나 장신구 같은 사치품에는 돈을 아꼈다. 아버지 루카는 원체 욕심이 없고 돈을 안 쓰는 사람이라 아내의 의견에 동조했다. 아이들의 옷을 대물림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여섯 형제 중 막내였던 돌로레스는 새 옷을 만져보지 못하고 자랐다. 돌로레스는 그게 무척 불만스러웠다. 하지만 집안 어른들은 물려받은 옷을 입는 것도 복 받은 환경이라고 일축했다. 거기서 끝나면 다행이지, 손위 형제인 재스퍼와 비교당할 때면 얼마나 속상했는지! 재스퍼는 형제 중에서도 유독 어른스러운 아이였기 때문에 어른들의 손을 덜 탔다. 재스퍼도 군말 한번 안 했는데 역시 막내라 그런지 어리광을 부린다는 식의 말을 들으면 돌로레스는 속에서 열불이 나곤 했다. 그야 재스퍼는 막내가 아니잖아!
전쟁이 가벼운 문제가 아니라는 것은 알았다. 그레첸이 자신을 부러워했던 것도 전쟁에 나간 어머니와 가난 탓이 크다는 걸 알았다. 하지만 전쟁의 심각성을 실감하기에 돌로레스는 너무 잘 먹고 잘 잤다. 어린 마음에는 당장 누릴 수 없고 당장 불편한 일들이 더 가깝게 와닿았다. TV 광고에 나오던 화려한 드레스, 첫째 륀이 자기 돈으로 샀다며 자랑하던 예쁜 핀, 새 지갑, 엄마가 줬다 뺏은 새 신발(마야가 신발 광고를 하고 선물 받은 여섯 아이의 신발은 어느 보육원으로 보내졌다.)…. 어린 돌로레스에게 전쟁은 가지고 싶은 것들을 빼앗은 못된 주범이었다.
“돌로레스, 전쟁을 모른 채 살고 싶었다면 군을 떠나야 했어.”
의무실 침대에 기대앉은 오선 상사가 돌로레스 하사에게 말했다. 발탄에서 델가 군과 페티르 기사단의 전쟁이 막 시작되려던 때였다. 오선은 절벽에서 떨어져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구하고 돌아왔다. 발을 헛디딘 것이라 했지만, 오선의 부상은 그것으로 설명되기에는 석연찮은 구석이 많았다. ‘싸우신 게 분명해.’ 치료를 담당하는 군인들 사이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을 품은 채로 돌로레스는 오선의 안부를 물으러 왔다. 처음 의도는 그랬다.
어느 새부턴가 돌로레스는 상사에게 어리광을 부리고 있었다. 발탄에서 정말 전쟁이 시작된다는 걸 믿기 힘들었던 탓이다. 금방 잦아드는 소란이 아닌 거겠죠? 돌로레스의 바보 같은 질문에 오선은 차분히 답해 주었다. 그렇지 않다고. 이건 전쟁이라고.
“지금이라도 고향에 돌아가고 싶다면 돌아가라고 하고 싶네.”
‘돌아간다.’ 그 말에 돌로레스는 반성하는 사람처럼 각을 잡고 바르게 앉았다.
“아니, 아닙니다. 멍청하게 실감이 잘 안 나서 확신을 얻고 싶었습니다. … 제 발로 군에 들어왔으면서 약한 모습 보이고 싶진 않아요. 라고 했지만…. 약한 모습 보여드려 죄송합니다!”
“이렇게 사과하는 것도 이번 한 번이었으면 좋겠어.”
“예! 명심하겠습니다.”
이미 전쟁을 겪어본 오선은 젊은 군인을 안쓰러워했다.
전쟁을 모르는 돌로레스는 부끄러웠다.
신께 능력을 받은 것은 축복이요, 마땅히 신과 국가를 위해 그 힘을 바쳐야 한다. 델가 군에게는 당연한 이 사실이 많은 이들에게 족쇄와도 같다는 걸 알고 있다. 능력이 생기면 징집되는 현실. 휴전 중에도 누군가에게는 달갑지 않았을 텐데 전쟁이라니. 자의로 입대한 것도 아닌 사람들이 전쟁을 위해 목숨을 바쳐야 한다. 돌로레스는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먹고 자고 있었다. 돌로레스는 신께 선택받은 자가 아니었다. 자신의 의지로 군에 입대했으면서 그만한 책임을 지니지 못하고 있다는 게 새삼스럽게 부끄러웠다.
어리다는 말을 들어도 할 말이 없다. 씁쓸한 생각을 감추며 돌로레스는 사과를 깎았다. 빨간 사과 껍질을 돌돌 돌려가며 깎다 보면 잡생각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상사님, 그래서 말입니다.” 사뭇 즐거운 말투로 미주알고주알 상사에게 이야기를 늘어놓던 돌로레스는 흠칫 놀랐다. 아까까진 멀쩡했는데….
손톱은 언제 나간 거지? 오른 엄지손톱이 자리에 없었다. 피가 묻어 나오는 엄지가 욱신거리면서 아프기 시작했다. 의식했더니 아픈가 보다, 의식했더니 이렇게….
돌로레스의 양손은 빨갛게 물들어 있다. 돌로레스의 피가 아니었다. 그건 다른 죽은 사람의 피였다. 피가 울컥거리는 몸에 양손을 내리누르고 치료하려고 지혈하려고 아무리 애를 써도 피가 멈추지 않았다. 여긴 어디지? 의무실이 아니었다. 텅 빈 건물들, 피 웅덩이. 두 사람이 쓰러져 있다. 돌로레스는 방금 막 전투를 치렀다. 그래. 맞다. 이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이야. 알고 있다. 알고 있는데….
돌로레스는 델가 군복을 입은 시신의 눈을 감겨 주고 그의 주머니 밖으로 튀어나온 사진을 꺼냈다. 죽은 상병은 친구들 사이에서 우스꽝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었다. 이런 표정도 지을 줄 아는 사람이구나. 잘 알던 사람도 아닌데 사진을 보니 눈물이 나왔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전쟁이, 죽음이 너무 무겁고 무서웠다. 돌로레스는 그 자리에서 한참 앉아 있다가 몸이 추워질 무렵 일어나 걸었다. 이대로 걷다 보면 집이 나오면 좋겠다. 시간이 억겁처럼 길게 느껴졌다. 집은 걸어서 갈 수 없는 곳에 있었고, 돌로레스는 대신 한 골목 앞에서 멈춰 섰다. 그곳에는 잡동사니를 무덤처럼 쌓아둔 케셰트 기사대장이 있었다. 그들은 지금 전쟁 중이었고 케셰트가 가져온 것들은 유류품이 분명해 보였다.
“아무리 전시라지만, 남의 물건 그렇게 훔치시다가는 벌 받습니다.”
그렇게 말할 때에서야 돌로레스는 자신이 아직도 죽은 상병의 사진을 들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주머니에 사진을 거의 구겨 넣는다. 그리고… 무슨 대화를 했더라.
돌로레스는 갑자기 시간이 빠르게 흐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케셰트의 얼굴이 흐려졌다.
“자네는 싸우는 사람 한 명 한 명의 얼굴을 기억해 두고 사나?”
돌로레스는 케셰트가 건넨 남의 열쇠고리를 받았다. 이건 누구 거지? 눈앞에 있는 사람의 얼굴은 흐려지는데, 대신 죽은 사람들의 얼굴이 머릿속에 아른거렸다. 이상한 일이었다. 왜 벌써 죽은 사람들이 이렇게 많은 건지. 죽은 사람들을 왜 이렇게 많이 알고 있는 건지.
“자네는 유품 같은 건 너무 오래 곁에 두지 말게. 그러다 화병 나겠군.”
케셰트가 말했다. 기사님, 저는 이제 제가 죽인 사람들의 얼굴을 기억합니다. 돌로레스는 그렇게 말하는 대신 이렇게 말한다.
“냅다 남의 유품 주면서 하실 말씀입니까.”
돌로레스는 고개를 들었다.
하늘로 거대한 닻이 날아가는 게 보였다. 아나스타샤 상사의 전매특허인 푸른 닻이 페티르 기사단 앞에 꽂히더니 파도처럼 그들을 밀어낸다.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나스타샤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어쩌면 착각일지도 모른다. 돌로레스는 이날 최전선에 있지 않았고, 아나스타샤의 활약을 다른 이들에게 전해 들었다.
돌로레스는 피 묻지 않은 깨끗한 손으로 총을 쥐고 있다. 이 손에도 곧 피가 묻을 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들은 지금 전쟁 중이었고 돌로레스는 군인이니까. 기사들과 군인들은 라라쥬 꽃밭에서 대치하고 있다. 한때 꽃이 흐드러지게 피었던 이곳은 폐허나 다름없다. 그야 전쟁이 3년이나 계속됐으니까….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이제야 알 것 같다. 시간이 이상하게 흐르는 게 아냐. 나는 꿈을 꾸고 있는 거야.
함성과 함께 빛이 번쩍거린다. 군인들이 썰물처럼 앞으로 달려 나간다.
돌로레스도 달렸다.
앞으로 뒤로
의식이 물결처럼 흐른다.
돌로레스는 일직선으로 이어진 레인에서 죽을힘을 다해 헤엄치고 있다. 죽을힘? 죽는다는 게 뭔지는 알고? 수압 때문인지 코에 피가 몰리는 기분이다. 정신을 차려보면 돌로레스는 코피를 줄줄 흘리고 있다. 이건 언제인지도 모르겠네. 사람을 죽일 때도 그렇게 피가 몰렸다. 피가 몽땅 사라지는 것처럼 느낄 때도 있었다. 돌로레스의 몸은 때로는 온탕에 때로는 온탕에 담근 것처럼 제멋대로 굴었다. 탕― 격발음. 머리가 울린다. 누가 머리를 때렸다. 돌로레스는 저도 모르게 눈을 치켜떴다가 다시 고개를 내린다. 앞에 서 있는 건 중령이다. 아니, 상사일 수도 있고. 군인이 아닐 수도 있겠다. 돌로레스는 꽤 많은 사람에게 혼나며 살았다. 발밑으로 물이 넘실거린다. 델라와 해변의 물색이다. 돌로레스는 무릎을 꿇고 바닷물에 제 몸을 적셨다. 다리만 적실 생각이었는데 어쩐지 몸이 자꾸 앞으로 쏠린다.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겁다. 이건 무슨 느낌인지 아는데…. 몸을 뉜다. 누우면 편안할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온몸 구석구석이 아프기 시작했다. 문득 의식이 수면 위로 빼꼼 고개를 든다. 아, 그랬지. 복귀하는 길에 기사와 마주쳐서 싸우다가 다쳐서… 급한 대로 치료하고….
돌로레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언제 의식을 잃은 거지? 출혈은… 아니 저체온증이라도… 이게 사실 주마등…?
돌로레스는 화들짝 놀라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비명을 질렀고 특히 옆구리가 시큰거렸다. 죽을 정도는 아니었다. 하지만 피곤해서 힘이 빠진다.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돌로레스는 아픈 몸을 끌어안고 끙끙대며 다시 자리에 누웠다. 바람이 불었고, 등이 정말로 시렸다. 눈을 깜빡이자 별이 반짝거리는 하늘이 보였다.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다 나왔다.
“아… 미친. 어디서 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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