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ruth or Dare
1.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의 위치가 달라지듯이, 진실과 거짓도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법.
당신들은 정말로 자신이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하나요?
랑그라디아 루시펠이 말한다. 곧 인면괴수들이 랑그라디아를 호위하듯 둘러싸고 그들은 문 너머로 멀어진다. 닫힌 문은 다시 열리지 않았다.
특수부는 종말의 마녀를 코앞에서 놓쳤고 인면괴수 소탕 작전은 원점으로 돌아갔다. 불행 중 다행으로 가야트리는 상처 없이 돌아왔다. 가야트리는 납치되었을 당시의 기억을 더듬어 방공호 심층부가 도시유적의 아지트로 연결된다는 사실을 밝혔다. 치안국장 엘레노어 덴버는 원광교의 본거지인 아지트에 대한 공습을 계획했다. 에스퍼들은 돌아온 특수부장을 필두로 작전을 준비했다. 하루가 멀다 하고 회의가 이어지는 한편 작전에 참여한 에스퍼들은 서로를 알아갔다. 작전 재개 전 크루즈에서 열린 선상 파티는 허울뿐인 자리였지만, 작전에 함께하는 이들과 대화할 시간을 마련해주었다. 최연소자인 콰디라의 생일이 껴 있다는 얘기가 퍼졌을 때는 다 큰 어른들이 각자 케이크를 들고 모이는 웃긴 광경이 펼쳐지기도 했다. 2월이 지나가고 있었다. 특수부 내부에는 승리에 대한 기대감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물론 어디서나 분위기를 깨트리는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헤일 우드는 엘레노어가 주도하는 일차 회의에서부터 의문을 제기했다. 날이 선 분위기는 가까스로 수습되었으나 그날 이후로도 회의실은 종종 얼어붙었다. 의문을 가진 사람은 한둘이 아니었다. 파티마도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원광교에서 인면괴수들을 써먹는 거라면 시나리오를 더 다양하게 짤 필요가 있어요. 우린 아직 그들 사이에 어떤 커넥션이 있는지도 모르잖아.”
“커넥션… 이라고 할 정도일까요?”
“이래서 정보 수집이 더 필요하다는 거야. 적진으로 굴러 들어가는 건데 내가 들어갈 굴이 호랑이 굴인지 뱀 굴인지는 알아야지.”
작전의 뿌리부터 흔드는 발언이 회의실에 등장한 것도 벌써 몇 번째였다. 회의실 앞쪽에 있던 엘레노어가 지도 앞에 삼삼오오 모인 인파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탁상공론은 그쯤 해두고 다음 안건으로 넘어가죠.”
“치안국에서 정보를 더 제공해주면 이 ‘탁상공론’도 그림이 조금 달라질 것 같은데. 어떻게 생각해요?”
모여 있던 에스퍼들의 시선이 일제히 파티마에게 쏠린다. 순식간에 공기가 서늘해졌다.
회의가 끝난 뒤에도 파티마는 밤이 될 때까지 퇴근하지 않았다. 전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원광교와 헤븐스게이트, 인면괴수의 관계. 자경단의 이상행동. 게다가 종말의 마녀가 사라진 순간을 떠올리면 더 복잡해진다. 그날의 랑그라디아는 인면괴수들과 한패로 보였다. 기계 팔을 단 괴수와 자경단의 휘장을 단 괴수는 꼭 사람처럼 움직였다. 그들이 가야트리를 멀쩡히 돌려보내 준 것도 이상한 점이다. 그날 이후 가야트리의 얼굴에는 그늘이 드리워졌다. 말하지 않는 것이 있는 게 분명했다. 파티마는 가끔 숨기는 게 있지 않냐며 가야트리를 들볶았지만, 가야트리는 속 시원하게 말해주는 법이 없었다. 파티마는 자기가 할 수 있는 선에서 특수부 자료를 뒤졌다. 원광교에 관한 정보는 지극히 제한적이었고 인면괴수에 대한 정보는 어디에도 없었다. 혹시나 하고 아는 포브의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상대는 받지 않았다. 답답한 시간이 흘렀다.
휴게실에서 커피를 내리고 파티마는 다시 회의실로 향했다. 창 너머로 무수한 종이와 스크린에 둘러싸인 바르톨로가 보였다. 파티마는 조용히 그러나 일부러 소리를 내며 문을 열었다. 기척을 느낀 바르톨로가 고개를 든다.
“아, 파티마 씨.”
“혼자 뭐 하고 있어요?”
“그냥요. 조심하려고요. 큰 작전이잖아요. 무슨 변수가 있을지 모르니까 자료라도 많이 봐 놔야죠.”
파티마는 바르톨로 쪽으로 걸어가 바르톨로의 머그 옆에 제 컵을 내려놓았다. 바르톨로는 아웃스커트의 수도와 방공호 구조 도면을 보고 있었다. 가야트리의 정보에 따르면 헤븐스게이트 지하의 수로가 방공호로 향하고 다시 미로 같은 방공호의 심층부의 끝에 도시유적의 아지트로 연결되는 환기구가 있다. 파티마도 이 자료를 여러 번 살펴보긴 했다. 현장에서 머리를 굴리는 것도 서포터의 일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경로를 외우는 건 누구에게든 필요한 일이지만, 바르톨로는 필요한 것보다 방대한 자료들 사이에 묻혀 있었다.
특수부 직원에게 회의실에 남아 있는 에스퍼가 있다는 얘길 듣고 오는 길이었다. 회의가 끝나고도 한참 지난 시각이었고 바르톨로의 커피는 차게 식어 있었다. 무난하게 일하는 에스퍼 중 하나라고 생각했는데. 파티마는 펼쳐진 도면 사이에서 헤븐스게이트의 지도를 집어 들었다.
“열심이네. 여기까진 안 봐도 될 텐데.”
“그래도 민간인들이 아직 그 안에 남아 있을 수도 있고, 근교에 위험 요소를 둘 수도 없잖아요.”
“전부 외우려 하다가는 머리 터진다?”
“오. 그건 무섭다. 그때는 물 좀 부어주세요.”
“그건 나도 좀 무서워서. 생각해볼게요.”
실없는 농담에 두 사람은 웃었다.
“그런데 정말. 정말 열심이다.”
파티마는 지도를 내려놓으면서 말했다. 지도를 모조리 머릿속에 집어넣으려는 노력은 성공을 위한 집착일까, 실패에 대한 불안일까? 파티마는 바르톨로의 생각이 궁금했으나 바르톨로는 그저 사람 좋은 얼굴로 웃었다.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니까요.”
2.
작전 실행일이 일주일 정도 남은 날 파티마는 오마리와 마이나의 숙소를 찾아갔다. “들어오세요!” 약간 들뜬 표정의 마이나가 문을 열어주었다. 파티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마이나를 훑어봤다. 마이나는 외출복 차림이었다.
“왜 그렇게 차려입었어? 우리 어디 나가?”
“아뇨…! 그런 게 아니라. 제가 파티마를 초대하는 건 처음이잖아요. 조금 신경 써봤어요.”
그러고 보니 그의 개인 공간을 찾는 건 처음이었다. 파티마는 오마리가 일하는 카지노에 종종 들렀으나 그건 경우가 달랐다. 저 나와서 살고 있어요. 이틀 전 오마리가 말했을 때 두 사람은 자연스럽게 약속을 잡았다. 오마리와 마이나에게만큼은 아니지만, 그 말은 파티마에게도 의미가 있었다.
“니트 마음에 든다.”
“고마워요.
파티마는 와인병을 마이나에게 건네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것도요. 준비할 것 없는데.”
“같이 마시려고 산 거야. 진짜 집들이였으면 다른 걸 가져왔지.”
“그건… 조금 기대된다. 참. 차 내렸는데 한 잔 드릴까요?”
파티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이나는 작은 분홍색 컵 두 개를 가져와 홍차를 내렸다. 파티마가 올 시간에 맞춰 준비한 차는 따뜻했다. 파티마는 차를 한 모금 마시고 침대에 앉았다. 그러고는 숙소를 이리저리 둘러봤다. 오퍼레이션 마아트가 진행될 동안 치안국에서 임시로 제공한 숙소라고 했다.
“작네.”
“그래도 혼자 생활하긴 충분해요.”
“글쎄. 어디 보자.”
파티마는 진지한 얼굴로 침대보를 눌렀다. 보들보들한 이불을 만져보고 침대 위에서 엉덩이를 들썩였다가 결국 시트까지 들춰보는 모습에 마이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이거 시트 너무 싼 거 쓴 거 아냐? 왜 이런 데 돈을 아껴?”
“저는 괜찮은데…. 어제도 잘 잤어요.”
“마이나. 괜찮으면 안 되지. 이 사람들은 더 해줘야 해.”
파티마가 깐깐한 심사위원처럼 테이블과 의자, 벽지 등을 눈으로 훑어봤다. 마이나는 난감한 듯 웃으며 가까운 의자에 앉았다. 그는 파티마가 마음에 안 드는 건 이 공간이라기보다는 이 공간을 제공한 곳이라는 걸 눈치챘다. 둘만 있는데 무슨 말을 못 하겠냐마는 마이나는 원체 남의 흉을 안 보는 사람이었다. 대상이 사람이 아니라 치안국이래도 마찬가지였다.
파티마는 마이나의 성향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엔 더 노골적으로 말했다.
“요즘 하는 짓 보면 더 그렇잖아. 뭐, 이 일이야 원래 목숨 수당 받고 일하는 거라지만. 이 사달이 났는데도 정보를 안 내놓고 저들끼리 꽁꽁 싸매고 있으면 뭘 하냐고.”
“정보가 제한적인 건 사실이지만…. 비밀로 하는 데에 이유가 있지 않을까요?”
“우리 좋을 일은 아니지. 지금 돌아가는 꼴이 괜찮아 보여?”
마이나는 눈을 살짝 굴렸다.
“마음에 걸리는 게 있긴 해요.”
“그렇다니까.”
이어서 말하라는 듯 파티마가 입을 다물었다. 마이나는 따뜻한 컵을 손으로 문지르다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그 사람이 사라질 때 괴수들이랑 같이 갔잖아요. 그것도 이상하고…. 그 사람이 했던 말도 계속 생각나고요.”
파티마는 마이나가 어떤 순간을 말하는지 단번에 알아챘다. 랑그라디아 루시펠이 인면괴수들과 함께 문 너머로 사라진 순간. 특수부가 종말의 마녀를 놓친 순간이었다.
“너도 그 말이 신경 쓰여? 알고 있던 게 거짓이 되면 달라질 것 같아?”
“모르겠어요. 괴로운 진실보다 거짓이 더 나을 때가 있잖아요….”
마이나는 잠깐 생각에 잠겼다가 덧붙였다.
“그렇지만 전 적어도 전에 하던 일보다 이 일이 더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닌 걸까요?”
그 무렵의 파티마는 치안국에 대한 불만으로 매일같이 짜증을 냈다. 그래서 마이나의 말을 평소보다도 열심히 비웃어줄 수 있었다. 좋은 일을 하고 살고 싶냐고. 좋은 일이 뭔데? 그게 어디 쉽긴 한가. 남 좋은 일을 할 바에는 너한테 좋은 일을 해. 하지만 두 가지 이유로 그러지 못했다. 첫 번째는 마이나가 ‘전에 하던 일’을 파티마가 싫어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 그 일을 할 바에야 다른 일이 더 낫다. 그게 마이나에게 도덕적으로 나쁜 일일지라도 상관없었다.
두 번째는 마이나처럼 랑그라디아 루시펠이 했던 말을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좋은 일이 뭔데? 그렇게 묻는 순간 두 사람은 다시 랑그라디아 루시펠이 했던 말을 떠올릴 것이고 파티마는 그렇게 되는 게 싫었다. 랑그라디아의 말은 대부분의 이들이 고개를 끄덕일만한 삶의 이치였다. 삶은 흑백으로 단순하게 나뉘지 않는다는 이치. 그러나 랑그라디아의 말은 곧 그들이, 아니 파티마가 틀렸다고 말하는 것과도 같았다.
그래서 파티마는 대신 이렇게 말했다.
“도망갈 거면 가기 전에 말해. 알아는 두자.”
마이나는 조금 웃었다.
“그러지는 않으려고요. 아직은 제가 필요할 수도 있잖아요.”
“어머. 용감하네.”
“놀리는 거죠?”
“응.”
3.
비밀은 예상한 것보다 끔찍한 모습으로 드러났다.
목덜미에 선뜩하게 번지는 전멸의 예감. 퇴각하라고 외치는 가야트리의 목소리. 다급하게 물러나는 인파. 외침. 날붙이가 스치는 소리. 피. 이해할 수 없는 장면.
최전방에서 싸우던 가야트리가 쓰러지고 그의 몸이 부풀어 오른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가야트리의 몸이 부풀고 뒤틀리고 다시 부풀더니 가야트리가 사라진다. 흑요석 같은 피부에 두 개의 뿔과 다섯 쌍의 팔을 지닌 괴수가 가야트리를 대신했다. 가야트리와 닮은 얼굴을 한 채로.
가야트리가 시간을 버는 사이 다수의 에스퍼들이 빠져나갔으나 파티마는 빠져나가지 못했다. 찰나의 순간 운명이 나뉘었다. 파티마는 그때 흑요석처럼 반짝이는 괴수의 뒷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발바닥이 뜨끈하게 달아올랐다. 파티마는 괜찮지 않았다. 수로에 진입할 때부터 아니 회의실에 있을 때부터 그랬다. 줄곧 머릿속에 앉아 있던 건 실패의 예감이다. 우리가 올 걸 어떻게 알았지? 이렇게 될 줄 알았어. 가야트리, 뭐라고 말 좀 해봐요. 거기 있어? 당신이야? 아니면 랑그라디아 루시펠 당신이 말해보든가. 아니. 이건 뭐야? 그래서 뭔데.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건데. 내가 뭘 더 알아야 한다는 건데. 그래서. 이렇게 진다고?
“파티마 씨, 퇴각해야 돼요!”
바르톨로의 말이 맞다. 냉수를 뒤집어쓴 것처럼 온몸이 차가워졌다가 발끝부터 다시 열이 올랐다. 부글부글 끓는 것이 이성을 마비시킬 것 같은 기분이었으나 파티마는 그것을 애써 억눌렀다. 파티마는 바르톨로의 뒤를 노리던 인면괴수 쪽으로 총을 쐈다. 상대는 잽싸게 몸을 꺾어 총알을 피한다. 곧 바르톨로가 옆에 있던 에스퍼 한 명을 파티마가 있는 쪽으로 보냈다. 그가 누구인지를 알아본 파티마의 눈썹이 약간 위로 꺾였다. 다니엘 로스. 인면괴수의 군락을 목격한 순간부터 불안한 표정을 짓던 사람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는 지금도 손을 떨고 있었다. 아직 앳된 다니엘의 얼굴에 공포가 어른거렸다. 파티마는 다니엘을 부르려고 했으나 다니엘이 더 빨랐다. 다니엘은 성급하게 다시 앞으로 튀어 나갔다.
“잠깐. 잠깐, 다니엘!”
사람들, 괴수들이 서로 뒤엉켰다. 다니엘은 속도전에 능했고 파티마는 그를 쫓아갈 수 없었다. 이런 난전에서 파티마가 할 수 있는 건 많지 않다. 퇴각로를 찾아야 한다. 파티마는 주변 구조를 눈에 담으면서 가까이 다가오는 인면괴수들을 향해 총알을 쐈다.
“파티마 씨! 진입로 말고 4시 방향의 통풍구! 그걸 부수면 옆 방으로 연결돼요!”
바르톨로가 다시 외쳤다. 두 사람의 눈이 마주친다. 순간 파티마는 복잡한 미로 같던 수로를 모조리 외우려 들었던 바르톨로의 모습을 떠올렸다. 역시 당신도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질까 봐 그렇게 열심히 지도를 외웠던 거잖아. 무의식에서 나온 말이 목구멍에 달라붙는다. 만약 바르톨로가 정말로 그랬더라면, 바르톨로는 퇴각로를 염두에 뒀을 것이다. 남아 있는 에스퍼는 10명 남짓. 퇴각로를 아는 바르톨로를 살려서 함께 이동해야 했다.
파티마는 4시 방향으로 달려 나갔다. 근처에 있던 인면괴수들의 고개가 그쪽으로 돌아갔다. 저들은 분명 상황을 이해하고 있다. 파티마는 제게로 따라붙는 인면괴수의 시선을 느끼며 통풍구로 달렸다. 다니엘이 괴수들의 앞을 가로막듯 발을 내밀어 바닥을 짓밟았다.
“멈추지 말아요.”
파티마는 강경하게 말하며 다니엘의 옆을 지나쳤다.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다니엘의 검이 바닥을 긁는 소리가 들렸다.
통풍구 앞에 섰을 때 파티마의 상의는 반쯤 찢겨나가 있었다. 안에 입고 있던 바디 수트도 소매가 사라졌다. 팔에서 피가 흘렀고 등이 욱신거렸다. 등도 맞았나? 그랬던 것도 같다. 파티마는 주머니에서 빠져나온 강장제를 입에 물고 통풍구에 어깨를 부딪쳤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이들이 눈에 들어온다. 적들의 수는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데 에스퍼들은 이미 몇몇이 사라졌다. 죽었나? 아니라면? 이제 몇 명이지? 통풍구를 뚫었다 해도 이 난리통에 옆으로 빠져나가는 건 다른 문제였다. 가야트리가 그랬듯 누군가 시간을 벌어주어야 한다. 누가 가장 오래 버틸 수 있을까. 빠르게 시선을 옮기는데 갑자기 시야가 가려졌다. 사각지대에서 튀어나온 인면괴수였다. 파티마는 총을 들었다. 그리고 패배를 직감한다. 아, 총알 떨어졌지. 방아쇠를 당기는 손이 헛돈다.
아찔한 격통과 함께 무릎이 앞으로 꺾였다. 눈앞이 흔들렸다. 총을 장전하려고 했으나 총이 보이지 않았다. 손끝이 미약하게 떨렸다. 눈을 돌리기도 전에 한 번 더 충격이 느껴졌다. 귀가 윙윙거리고 속이 울렁거렸다. 누가 소리를 지르고 있는데. 날 부르는 건가? 파티마는 간신히 고개를 들었다. 다니엘의 보라색 눈과 마주치고 아주 잠깐 어지럽던 시야가 밝아졌다.
돌이켜보면 그것은 꼭 죽기 전에 찾아온다는 어떤 특별한 순간일 것이다. 시간이 느려졌고 눈앞의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너무 선명해서 외려 현실과 유리된 것 같은 순간이었다. 아수라장 속에서 얼굴이 일그러진 다니엘이 누군가를 부르고 칼을 든다. 입술이 안쓰럽게 다물린다. 공포, 절망, 체념 따위로 물드는 얼굴. 칼끝은 다니엘의 목에 닿아 있다. 그걸 보자 뱃속에 뭉쳐 있던 것이 다시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그건 분노였다. 죽으려고? 여기서? 미쳤어? 파티마는 그 순간에도 자기가 죽음보다 삶에 가까운 길목에 서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자기가 곧 죽을 사람처럼 창백하다는 것도 몰랐고 제 뒤에 자기 행동을 관찰하듯 바라보는 인면괴수가 있다는 것도 몰랐다. 다른 사람들은, 다니엘은 그 광경 속에서 죽음을 읽어낼 거라는 것도 몰랐다. 파티마는 그들이 전멸할 거라고 예감하면서도 제 죽음은 상상하지 못했다.
죽는다는 건 완전히 지는 거니까. 그런 건 용납할 수 없다.
그러나 다니엘은 패배한 사람의 얼굴로 파티마를 바라보고 있다.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파티마는 그게 꼭 자기가 졌다는 걸 알려주는 것 같아 화가 났다.
“다니엘!”
파티마는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외쳤다. 다 죽어가는 몰골로 어디서 힘이 났는지 아마 악귀 같은 꼴이었을 테다. 다니엘의 입술이 움찔 떨렸다. 파티마는 그가 도망갈 것 같다고 생각했다. 도망갈 곳이 없는데도. 어딜 도망가. 외치려 했으나 다시 아찔한 통증이 온몸을 휘감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파티마는 어둠으로 굴러떨어졌다.
4.
텅, 텅. 축구공이 바닥을 구른다. “공 좀 내버려 둬라.” 누군가 그걸 들어 구석으로 치워버린다. 먼지가 인다. 버려진 창고, 열 명 남짓한 숫자의 청소년들이 모여 앉아 있다. 떠드는 소리와 술 냄새, 먼지와 시시껄렁한 잡담으로 가득 찬 공간이다. “야. 다시 돌려.” 한 명이 말하면 나머지의 어깨가 앞으로 약간 기운다. 가운데에 놓인 빈 병이 요란하게 돌아가다가 멈춘다. 아이들의 시선이 일제히 한쪽으로 향한다.
“진실? 아니면 도전?”
“진실.”
앳된 얼굴의 파티마가 말한다. 그러면 아이들은 서로 눈빛을 주고받으며 질문을 고민한다. 진실을 택했으니 파티마는 그게 무슨 질문이든 답해주어야 했다. 곤란한 질문일수록 분위기를 띄우기 좋았다. 이 게임의 교훈은 진실이 도전만큼 위험하다는 것이다. 누가 누구랑 잤느니 하는 식의 자극적인 가쉽은 그들 사이에서 이미 두 바퀴는 넘게 돌았다. 식상하지 않고 재밌는 질문이 필요했다. 한 아이가 입을 열려던 순간, 구석에 앉아 있던 아이가 둥글게 모인 아이들의 무리에 합류한다. 아니다. 그는 아이가 아니었다. 작은 창으로 비쳐드는 햇빛이 그의 얼굴에 점점이 번진 백반에 닿는다. 검은 눈이 파티마를 바라본다.
갑자기 뭐야? 마이나. 넌 여기 없었어. 파티마는 그렇게 말하고 싶었으나 입술이 떼어지지 않았다. 아이들은 사라지고 두 사람만 남은 방. 파티마는 쓰러진 채로 고개를 든다. 유니폼을 입은 오마리가 천천히 다가온다. 그의 얼굴은 흑요석처럼 반짝인다.
누군가 묻는다.
“파티마. 살아 있나요?”
파티마는 대답하지 못했다.
괴로운 진실보다 거짓이 더 나을 때가 있잖아요. 마이나의 목소리가 스쳐 지나간다. 그때 파티마는 생각했다. 그런 식으로는 이길 수 없다고. 지는 데 익숙해져서는 안 된다고. 그러니까 네가…
빛의 방향에 따라 그림자의 위치가 달라지듯이, 진실과 거짓도 서 있는 위치에 따라 달라지는 법.
당신들은 정말로 자신이 믿는 것이 진실이라고 확신하나요?
종말의 마녀가 남긴 말은 파티마의 뇌리에 남아 때때로 속을 긁었다. 확신하냐고? 아니. 절대. 파티마는 자기 자신 외에는 무엇도 믿지 않는다. 때로는 자신도 믿지 않았다. 삶은 쉼 없이 이기고 지는 싸움판이었다. 이기기 위해서는 손에 쥔 패가 많아야 하고 때로는 진실도 정의도 그중 하나로 사용할 뿐이다. 중요한 건 누가 어떤 패를 갖고 있느냐. 누가 얼마나 많은 패를 쥐고 있느냐. 내게 도전할 기회가 남아있느냐. 진실은 가치 있는 패이긴 했다. 그건 때때로 판을 뒤집어버리는 위험한 패다. 이기기 위해서는 그런 패가 필요하다. 파티마는 종말의 마녀가 시작한 게임에서 제가 질 것을 예감했다.
지하에 숨은 비밀을 목도했을 때 파티마가 가장 먼저 떠올린 건 마이나와 오마리의 얼굴이다.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궁금했다. 어쩌면 그날과 비슷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지 않을까. 피낭이 파티마에게 패배를 알려주고 싶어 했던 날, 오마리에게 순응하는 법을 알려주고 싶어 했던 날처럼.
파티마는 항상 이기고 싶었다. 그래서 패배를 잘 알았고 자주 화가 났다.
파티마는 벽에 머리를 부딪히며 빛으로 돌아왔다. 눈을 떴을 때는 혼자였고 주위는 믿을 수 없을 만큼 조용했다. 파티마는 쓰러지기 직전 목덜미를 누군가 가격한 것을 기억했다. 반사적으로 목덜미를 만져보니 영자칩이 있던 자리가 휑했다. 이건 고의로 훼손한 것이다. 파티마는 상처를 더듬으며 상황을 파악했다. 파티마가 누워 있던 곳은 작은 방이었다. 창문도, 나가는 문도 보이지 않는 작은 방에는 생필품이 놓여 있었다. 나는 인질인가? 다른 사람들도 같은 처지인가? 그들의 목적은…. 파티마는 마른 입술을 핥았다.
“거기 누구 있어요?”
잠긴 목소리가 갈라져 나왔다. 방 안에 유령이라도 있길 바란 건 아니었다. 파티마는 누군가가, 그러니까 지금 이 상황을 따지고 소리를 지르고 뺨을 때릴 상대가 있으면 했다. 화를 낼 상대가.
당연히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파티마는 아무도 없는 허공을 노려보다가 입을 벌리고 악을 썼다. 소리를 지르고 싶었는데 목은 망가진 라디오처럼 듣기 싫은 소리를 내다가 곧 그마저도 내지 못하고 완전히 잠겨버렸다. 목에서 쇠 맛이 느껴질 때가 되어서야 파티마는 쓸데없는 짓을 그만뒀다. 몸이 저릿저릿했다. 손에 얼굴을 묻고 화를 삭이다가 고개를 들었을 때, 방 한쪽에는 물이 준비되어 있었다. 파티마는 그것을 급하게 들이키다 사레가 들려 밭은기침을 내뱉었다.
* Truth or Dare: 파티 게임의 하나. 여기서 Truth는 진실을 뜻하고 Dare은 감히 ~하다, 도전과 같은 의미로 사용된다. 게임은 여러 사람이 질문하는 사람과 답하는 사람을 돌아가며 진행한다. 질문하는 사람이 ‘Truth or Dare’이라고 물으면 답하는 사람은 둘 중 하나를 고른다. ‘Truth’를 고르면 질문에 진실하게 답해야 하고 ‘Dare’을 고르면 상대가 시키는 것을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