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andst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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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래 폭풍은 심하지만 않으면 괜찮아. 이대로 누워 있다 보면 지나갈 거야. 폐가 썩는 기분이 드는데. 죽지만 않으면 됐지. 뭐라고?
바람 소리가 윙윙거린다. 집채만 한 바람이 등을 몰아붙인다. 천을 뒤집어쓰고 있는데도 모래 알맹이가 날아와 달라붙는다. 우리는 더러운 천과 작은 불빛에 의지한 채 바람이 지나가기를 기다리고 있다. 예고 없는 모래 폭풍이었다. 몇 시간째 이러고 있었더라? 기억이 바람에 휩쓸려 날아간 것처럼 희미하다. 공기 덩어리들이 서로 지나가겠다고 한 곳에서 부딪히면 생기는 거래. 바람이. 모래는 거기에 그냥 휩쓸린 거지. 나쟈가 말한다. 이 와중에도 날 가르치고 싶어 하는 건가 싶어 나는 조소한다. 누군 모르나. 그냥 말하는 거잖아. 아, 모래 들어왔어. 나는 입에 들어온 모래를 뱉는다. 야! 여기서 뱉으면 어떡해! 그럼 먹냐? 티격태격하는 사이 경고음처럼 낮은 바람 소리가 우리의 머리 위를 지나간다. 우리는 작게 중얼거리다 말을 멈추고 다시 말하기를 반복한다. 나쟈가 읊조린다. 이사 안 갔으면 좋겠다. 왜? 지금 집이 마음에 들어. 난….
문 열리는 소리.
1
세 사람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파티마는 빠르게 몸을 일으켰다. 꿈에 잠겨 있던 의식이 천천히 현실로 돌아온다.
“오래 혼자 두어 미안합니다.”
파티마가 가장 먼저 들은 말은 이것이었다. 말을 건 사람이 나머지 두 사람에게 방을 청소하라고 일렀다. 새 옷과 먹을 것을 가져온 자가 먼저 움직였다. 다른 한 사람은 청소도구를 들고 있었는데 아는 얼굴이었다. 자라면서 연락이 끊긴, 파티마가 아는 다른 사람과 더 친했던 사람이기도 했다. 눈이 마주치자 상대는 시선을 피했다. “로피. 나쟈도 여기 있어?” 잠긴 목소리가 갈라졌다. 로피는 물을 건네면서 말했다. “이분이랑 함께 가.” 여기서는 어떤 의문에 답해줄 생각도 없다는 태도였다. 로피가 가리킨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미소 짓고는 한 팔을 파티마의 등 뒤로 가져갔다. 손은 대지 않았지만, 앞으로 나아갈 것을 종용하는 손짓이다.
“일단 가면서 얘기하시죠. 두 사람이 방을 청소할 수 있도록요. 제 이름은 제인입니다.”
파티마는 제인과 함께 밖으로 나갔다. 갇혀 있던 건물은 제법 컸다. 복도를 지날 때마다 비슷한 문이 이어졌다. 제인은 다른 에스퍼들이 모두 살아있다는 소식을 전했다. 방에 갇힌 뒤로 이틀이 지났다고. 내부 회의가 진행되는 동안 ‘불가피한’ 상황에 방치할 수밖에 없었다고. 파티마는 제인이 다시 건네는 사과를 무시했다. 대신 곁눈질로 그의 옷을 살폈다. 제인은 가슴팍에 포브의 휘장을 매달고 있었다.
“포브의 다른 지부에서도 협력하는 일인가요?”
“저희가 무슨 일을 하려고 모였는지 사이코 씨는 아직 모릅니다.”
“그럼 알려주던가.”
“죄송합니다. 다른 뜻으로 한 말은 아니에요.”
“그러시겠죠.”
“나데즈다가… 나데즈다와 가족이라고 들었습니다. 그 사람이 그러더군요. 사이코 씨를 설득하는 건 어려운 일이 될 거라고요.”
“걔가 내 얘길 해요?”
파티마는 무심결에 되물었다가 제 입술을 깨물었다. 걔가 내 얘길 해요? 이런 얼빠진 질문은 계획에 없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제인은 답하지 않았다.
“치료를 받은 뒤에 옆 건물로 가세요. 거기서 자세한 설명을 드릴 겁니다.”
제인은 파티마를 큰 방으로 데려다준 뒤 떠났다. 병실을 흉내 낸 방이었다. 흰색 가운을 걸친 사람이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더니 침구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파티마와는 거리를 둔 채였다. “거기가 내 자린가요?” “예? 예… 일단은.” 방에는 병원에서 볼 수 있을 법한 침대들이 나란히 늘어서 있었는데 그중 하나의 침대에만 주인이 있었다. 그쪽으로 걸어가자 의사가 상체를 세웠다. 파티마는 담요를 뒤집어 쓰고 누워 있는 사람에게로 다가갔다. 카란이었다. 그는 창백했고 죽은 사람처럼 말이 없었다.
“어떻게 된 거예요.”
“머리를 다쳤어요. 의식이 없지만 심각한 건 아니에요. 곧 깨어날 겁니다.”
날카롭게 묻자 의사가 재빨리 대꾸했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이쪽으로 오세요. 협조해주셔야 치료할 수 있어요.” 파티마는 카란의 몸이 호흡에 따라 가볍게 들썩이는 것을 확인한 뒤 움직였다. “긴장 푸세요. 다친 부위들을 확인해볼게요.” 하고 싶은 말이 많았지만 파티마는 말을 삼켰다. “금방 끝나요.” 의사가 말했다.
2
치료에는 시간이 한참 걸렸다. 의사는 폭탄을 해체하는 사람처럼 조심스럽게 파티마를 살펴봤다. 그를 두려워하는 게 분명했다. 파티마는 답답해서 의사를 재촉하고 싶은 걸 겨우 참았다. 아무리 그라도 몸에 박힌 유리 조각을 빼내는 의사를 놀라게 해서 잘못되고 싶은 마음은 없었기 때문이다. 살펴보니 의외로 크게 다친 곳은 없었다. 오른쪽은 당분간 쓰지 마세요. 의사는 마지막으로 파티마의 팔에 깁스를 해주고 치료가 끝났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건물 밖으로 나오니 도시 한복판이었다. 그런데 무언가 이상했다. 사람들이 말하고 걸어 다니면서 간간이 파티마가 있는 쪽에 시선을 주었으나 괴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불길한 기시감이 들었다. “이쪽.” 감시역으로 붙은 자가 파티마를 재촉했다.
파티마는 회의실로 안내되었다. 전면 창 너머로 안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구조였다. 먼저 보인 건 빅터의 등. 그리고 그 맞은편에 있는 건… 나데즈다 사이코였다. 그새 둘이 무슨 얘기를 했는지 웃고 있었는데 그 얼굴이 아주 익숙하기도 아주 낯설기도 했다. 저렇게 웃었나? 6년 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둘 중 먼저 연락을 끊은 게 누구인지는 불분명했다. 서로 연락하지 않았으니까.
나데즈다의 얼굴을 보면서 파티마는 과거에 남았던 몇 가지 의문을 다시 건져냈다. 제 언니와 연락하라고 말하던 엘비라가 언젠가부터 나데즈다 얘기를 먼저 꺼내지 않게 된 것. 저보다 나데즈다와 연락을 자주 했을 친구가 나데즈다의 안부를 물은 것. 그건 전부 나데즈다가 이곳에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데즈다가 지상에 없었기 때문에. 바보가 아닌 이상 이 지하도시가 정부의 법망을 피해 존재한다는 것쯤은 알 수 있었다. 영자칩을 제거한 것부터가 그 증거였다.
“왔냐.”
나데즈다와 대화를 나누던 빅터가 귀신같이 파티마를 불렀다. 여기까지 와서 나데즈다를 무시하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 같기도 했다. 회의실로 들어가자 나데즈다의 얼굴이 약간 굳었다. 파티마는 나데즈다 역시 저를 가늠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6년간 무엇이 달라졌는지, 제가 알던 사람이 맞는지, 어디를 얼마나 다쳤는지.
빅터는 두 사람에게 시간을 주려는 것처럼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러나 둘은 다른 사람 앞에서 서로를 살갑게 걱정하거나 만나서 반갑다고 인사할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습지만 그건 자존심이 걸린 문제이기도 했다. 잠깐의 침묵이 지나고 파티마가 입을 열었다.
“여기로 오면 설명해준다던데.”
“맞아. 네가 오길 기다렸어.”
기다렸다는 말이 어떻게 들릴지 걱정되는 사람처럼 나데즈다가 곧바로 덧붙였다. “설명을 여러 번 하면 나도 번거롭거든. 일부는 설명해야 했지만.” 빅터는 두 사람이 이렇게 넘어갈 줄 알았다는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편안한 자세였지만, 잘 보니 어깨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나데즈다는 뒷짐을 지고 있었는데 손톱을 뜯고 있는 게 분명했다. 두 사람을 오래 알고 지냈기에 눈치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두 사람이 긴장하고 있는 걸 확인하자 외려 마음이 편안해진 파티마는 의자에 앉았다.
“그럼 얘기해봐.”
오만한 말투에 나데즈다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러나 나데즈다는 금세 표정을 차분하게 갈무리하고 빅터에게도 의자를 권했다.
“여긴 두앗이야.”
이야기는 거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두앗이 어떻게 생겨난 곳인지 이곳의 규칙이 무엇인지 두앗 사람들이 중요시하는 가치는 무엇인지. 알키마드의 중앙집권에 반대하는 소수의 프론티어들이 만든 마을이 이곳의 시초라고 했다. 빅터가 간간이 궁금한 걸 물어보면 나데즈다는 빼놓지 않고 답변을 돌려줬다. 포브의 일부 단원들과 원광교 교인, ‘환영받지 못하는’ 유민들이 이곳에 다수 거주하고 있다고 나데즈다는 설명했다. “추방된 사람들의 도시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에는 옅은 애정이 묻어나왔다. 파티마는 팔짱을 낀 채 얘기를 들었다. 사족이 왜 이렇게 길어? 얘기가 길어지는 걸 참기 힘들었으나 형제간의 기묘한 냉전이 입을 막았다.
얼마 뒤 결국 참지 못한 파티마가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두드리자 나데즈다가 짧게 웃었다. 이번엔 파티마의 눈썹이 올라갔다.
“그래. 다음에 할 얘기는… 이건 마음의 준비를 하고 들어.”
나데즈다는 그렇게 말하면서 빅터를 보았다. 걱정하는 눈빛이다.
“무슨 얘기를 하려고 뜸을 들여?”
“그게…. 우선 우리가 너희 영자칩을 제거한 이유를 말해줄게.”
나데즈다는 알키마드에 호루스의 눈이라는 감시 시스템이 있고 그것을 이용해 영자칩을 이식한 사람들을 감시하고 있다고 말했다. 거슬리긴 해도 예측 가능한 범주였다. 그러나 그다음이 문제였다. 나데즈다는 영자칩이 감각기관에 오류를 불러일으켜 영자칩을 삽입하지 않은 인간을 괴수처럼 보이도록 했다고 말했다. “그 말은….” 빅터가 미간을 좁혔다. “그래. … 너희가 ‘인면괴수’라고 부르는 건 괴수가 아니야.” 나데즈다가 담담하게 대꾸했다.
“우리 사람들이 죽었어.”
입꼬리가 약간 내려갔는데 그건 나데즈다가 화를 참고 있다는 거였다. 나데즈다는 슬플 때도 비슷한 표정을 짓긴 했다. 그는 고개를 약간 돌렸다.
“고의가 아니었겠지만. 뭐… 사람 마음이 그렇잖아. 사람들이 너희에게 적대적으로 나와도 이해해줘라.”
빅터와 파티마를 탓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눈치였다. 빅터는 무어라 대꾸할 말을 찾지 못했다. 회의실에는 정적이 흘렀다. 빅터가 자기가 죽인 괴물들이 실은 무고한 인간이라는 이야기를 뼈아프게 받아들이는 사이 파티마의 사고회로는 다른 곳으로 튀어 나갔다. 파티마가 처음으로 질문했다.
“정부도 알고 있어?”
확신에 가까운 어조였다. 나데즈다가 파티마를 돌아보았다. “안 그래도 얘기하려고 했어.” 나무라는 표정으로 나데즈다는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종의 환각인데. 영자 에너지가 영향을 미치는 것 같아. 특히 에스퍼들은….”
“빨리 말해.”
“대상을 적으로 인식하거나 흥분할수록 환각이 심해진다고 본대.”
“써먹기 좋겠네.”
파티마가 깁스하지 않은 쪽 주먹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파티마.” 조용하던 빅터가 진정하라는 듯 파티마의 이름을 불렀지만, 파티마는 분을 참지 못하고 일어났다. 나데즈다의 말이 사실이라면… 아니 사실일 것이다. 나데즈다는 거짓말을 못 하니까. 무엇보다 작전 내내 파티마를 따라다니던 괴리감이 이것이 답이라고 말하고 있다.
두앗에서 느꼈던 기시감은 헤븐스게이트로 연결된다. 지능을 갖고 판단을 내리는 괴수. 원광교와 포브의 규합. 제한된 정보 속에서 강행되던 작전. 이건 에스퍼들을 이용해 사람을 솎아내는 작전이었다. 잘못되더라도 쓰고 버리는 패니까 상관없겠지. 에스퍼들이 죽인 것이 괴수가 아닌 사람이라는 게 밝혀지더라도 책임을 전가할 심산이었을 테다.
그들은, 오퍼레이션 마아트는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역겨운 덫이었다. 뭘 숨기고 있나 했더니 이런 식으로 엿을 먹여? 이런 식으로?
“아직 할 얘기 남았으니까 흥분하지 마.”
“아. 흥분한 내가 잘못이다?”
“그런 얘기가 아니잖아.”
나데즈다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지고 있었다. 회의실 안을 빙빙 돌던 파티마가 불쑥 나데즈다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방에 감금되었을 때 파티마는 자기가 의식을 잃기 전을 자주 복기했다. 괴수는 파티마의 무릎을 꿇렸다. 그대로 죽이면 되었을 텐데 그는 파티마를 그냥 지켜보고 있었다. 그 괴수는 쓰러진 파티마 곁에 있다가 파티마가 악을 썼을 때에서야 목덜미를 쳤다. 방 안에 혼자 갇혀 있을 때는 괴수의 정체가 그렇게 궁금했는데. 그게 인간이라는 걸 알게 된 지금 뒷덜미를 선뜩하게 스치는 직감이 있었다.
“너지? 마지막에 나 친 거.”
어쩐지 이상하다 했어.
“말해.”
“넌 진짜 달라진 게 없다.”
파티마가 재촉하자 굳은 얼굴의 나데즈다가 비아냥댔다. 파티마는 곧바로 나데즈다에게 달려들었다. 그 순간이 올 것을 예감하고 있었던 것처럼 빅터가 잽싸게 앞을 가로막았다.
“야. 진정해.”
“놔.”
“싸울 때를 좀 가려!”
빅터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고 나데즈다는 입술을 앙다물었다. 파티마는 두 사람의 얼굴에서 익숙한 표정을 읽었다. 두 사람도 그럴 것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달라진 게 없다. 나데즈다의 말이 맞았다. 분출할 목표를 잃은 분노와 수치심이 온몸을 휘감았다. “놔.” “못 놔.” “놓으라고! 나갈 거야.” 빅터가 팔에 힘을 풀었다. 파티마는 두 사람을 밀치고 밖으로 나갔다.
3
매사냥꾼은 정부의 현 체제를 뒤집을 생각이라며 에스퍼들에게 협조를 구했다. 목표는 영자칩의 오류를 고치고 나아가 그걸 이용한 감시 시스템인 호루스의 눈을 소멸시키는 것. 실질적인 반란이었다.
생각할 시간을 드리겠습니다.
에스퍼들은 두앗을 돌아다닐 수 있게 되었다. 자유라 보기에는 어려웠다. 그들은 두앗에서 나갈 수도 없었고 바깥의 사람들에게 연락할 수단도 얻지 못했으니까. 두앗을 돌아다닐 때도 감시역을 붙이고 한정된 구역만을 맴돌아야 했다. 게다가 두앗에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 정부는 에스퍼들이 무슨 선택을 하든 그들을 반란분자로 낙인찍을 것이다. 두앗에 억류된 에스퍼는 파티마까지 총 13명. 그중에는 특수부장인 가야트리 아드바니도 있다. ‘특수부장의 주도로 작전 참여 에스퍼 절반이 정부와의 연락을 끊고 반란분자로 돌아섰다.’ 그림 나오기 딱 좋네. 심사가 뒤틀렸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휘둘리는 건 적성에 맞지 않는다. 파티마는 툭하면 인상을 썼다.
“사장님. 그러고 계시면 이마에 주름 생겨요.”
“넌 눈을 밖에 두고 다니나봐?”
“안 봐도 보이는 게 있죠.”
마르셀의 목소리는 뒤에서 들려왔는데 파티마 역시 안 봐도 그의 표정을 상상할 수 있었다. 또 얄밉게 웃고 있을 테다.
파티마가 한손을 못 쓴다는 걸 알게 된 마르셀은 머리를 묶어주겠다고 나섰다. 어떤 스타일이 좋으세요? 저처럼 묶어드릴까요? 마르셀은 절반만 묶고 나머지 머리카락을 내리고 있었다. 목뒤의 상처를 숨길 생각인 것 같았다. 영자칩을 제거한 자리다. 파티마는 제 목에 난 상처를 만지다가 반항적으로 읊조렸다. 아니. 너랑 안 똑같게.
마르셀은 파티마의 머리를 하나로 땋아 준 뒤 앞으로 돌아왔다. 거울을 확인하는 동안 마르셀이 물었다.
“참. 다른 데는 안 다쳤어요?”
“그걸 이제 물어 봐?”
“일단 잘 걸어 다니시고. 제 말에 대답도 잘해주시고.”
“넌 너~무 멀쩡하고.”
비아냥거리자 마르셀이 주먹을 피하는 것처럼 고개를 약간 뒤로 뺐다가 멈췄다. 한 팔에는 깁스를 하고 한 팔에는 음료수를 든 파티마에게 마르셀을 때릴 제3의 손이 없다는 걸 깨달은 것이다. 마르셀의 얼굴에 화사한 미소가 번졌다.
“아휴, 큰일 날 뻔했네.”
“걱정이 이상한 데로 갔다?”
“그래도 사장님 걱정 많이 했어요. 제 진심을 알아주세요.”
“뭐가 보여야 말이지.”
심드렁하게 대꾸하자 마르셀이 파티마의 깁스를 톡톡 두드렸다. 만수무강하세요~ 깁스에 또렷하게 박힌 글씨가 눈에 띄었다. 마르셀이 적은 것이다.
“사장님은 제 돈줄 최후의 보루 같은 거거든요. 만수무강하셔야 해요?”
“고마워. 너도 어디서 깨지기 전에 조심해?”
두 사람이 웃는 얼굴로 마주 보던 중 옆에서 카란의 목소리가 들렸다.
“어. 저도 써도 돼요?”
머리에 감은 붕대는 온데간데없고 얼굴에도 생기가 돌았다. 어린애라 회복력이 빠른 건지. “이거 써.” 파티마가 카란의 뒤통수를 문질러보는 사이 마르셀이 주머니에 있던 펜을 꺼내 카란에게 건넸다. 파티마의 눈썹이 상승곡선을 그렸는데 마르셀은 그걸 보고 웃기나 했다. “저 다 나았는데. 파티마 씨. 괜찮죠?” 카란이 펜을 들고 물었다. “뭐라고 쓰는지나 보자.” 카란이 싱긋 웃고는 펜을 고쳐 쥐었다.
카란이 상체를 숙이자 뒤로 약간 떨어진 곳에서 매사냥꾼 셋이 옹기종기 모여 그들을 지켜보고 있는 게 보였다. 세 사람에게 각각 한 명씩 붙어 있던 이들이었다. 그들은 츄러스를 하나씩 사서 나눠 먹고 있었다. 퍽 여유로운 광경이다. 마음에 안 들게.
“어떻게 따돌릴래?”
파티마의 시선을 눈치챈 마르셀이 카란을 눈짓하며 은밀하게 속삭였다.
“얠 미끼로 쓸까요?”
“괜찮은 생각이네. 스트라이커인데 세 사람 몫은 하겠지.”
“키도 제일 크고.”
“다 들려.”
고양이를 그리고 있던 카란이 중얼거렸다. 마르셀이 어깨를 으쓱였다.
“들켜버렸네요. 이제 어쩌죠?”
“뭘 어떻게 해. 둘이 밀면 자기가 별수 있겠어?”
“네, 두 사람의 마음은 잘 알았어요. 나 버림받았네. 그래도 뭐, 해 보죠.”
카란이 대꾸하다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농담 맞죠?” 이때는 파티마도 조금 웃었다.
4
유적에 산다는 고양이가 ‘얼른 나으세요.’ 하고 말하고 있는 깁스는 3일 뒤에 풀었다. 영자력을 이용해 치료한 덕이었다. 영자력의 힘이 대단하긴 했다. “영자력은 최소한으로 쓰는 게 좋습니다.” 깁스를 푼 날 제인이 말했다. 그건 두앗의 절대 규칙 제1번이었다. 생활에 필요하지 않은 기술을 개발 또는 사용하여 이득을 취하지 않을 것. 영자력은 그들에게 그런 기술 중 하나였다.
제인은 다른 에스퍼가 동행을 요청했는데 당신도 함께하면 좋겠다고 말했다. “왜 나일까.” 파티마가 물었을 때 제인은 미소 지었다. “사이코 씨가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어차피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던 파티마는 제인을 따라나섰다.
제인은 두앗에서 꽤 영향력 있는 유지였다. 두앗의 주민들은 파티마와 다른 에스퍼들에게 먼저 말을 거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제인과 함께 있을 때면 상황이 달라졌다. 제인에게 말을 걸면서 겸사겸사 옆에 있는 에스퍼에게도 관심을 보인 것이다. 다른 동행인 바르톨로는 그런 관심을 달갑게 여겼다.
“구경시켜주신다면 절대 사양 안 하죠. 저녁에 거기로 갈게요.”
“당장 가지 않으셔도 됩니까?”
“그럼요. 제인 씨에게 더 묻고 싶은 게 있어서요. 이쪽이 선약이잖아요.”
바르톨로는 막 두앗의 교육 기관 관련자와 약속을 잡아 들뜬 표정이었다. 처음부터 제인이 두앗에서 행정을 담당하는 중책이라는 걸 듣고 찾아왔다고 했다. 그는 끊임없이 두앗에 관해 물었다. 이 도시가 어떻게 굴러가고 있는지, 도시를 구성하는 요소는 무엇인지, ‘이런’ 도시를 유지하기 위해 주의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 그 열정적인 모습은 아웃스커트와 방공호 지도를 들여다볼 때와 닮아 있었다. 파티마는 바르톨로가 꿈꾸는 것이 알키마드 밖의 도시라는 걸 쉽게 눈치챘다. 누구라도 알 수 있을 터였다. 역시 그것을 눈치챘을 제인은 시종일관 친절한 태도로 답변했다. 바르톨로의 열정이 두앗에 해를 끼치지 않을 거라고 판단한 것 같았다. 덕분에 두 사람과 함께 걷던 파티마도 두앗에 관해 많은 정보를 얻었다.
제인은 이제 두앗의 대중교통에 관해 설명했다. “오. 저희 이거 타보죠 그럼.” 바르톨로가 제안했고 제인과 파티마는 승낙했다. 그들이 올라탄 것은 작은 버스 같은 형태로 철로 위를 달렸다. 속도가 빠르지 않았기에 거리의 사람과 건물이 안에서 잘 보였다. 창밖을 바라보던 파티마가 바르톨로에게 물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 도시 계획에 뭐가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글쎄요. 지금은 교통? 재밌긴 한데 교통편이 뒤죽박죽이라 정비가 필요할 것 같아요.”
“필요하긴 합니다.”
두앗의 교통에 대한 지적에도 제인은 기분 나쁜 기색이 아니었다. 필요하다는 걸 알아도 손 쓸 수 없는 것들이 있었다. 두앗에도 그런 것들이 많으리라. 두앗은 계획도시가 아니었고 도시에 사용된 기술도, 건물의 양식도 뒤죽박죽이었다. 어떤 것들은 알키마드에서 사용되고 있고 어떤 것들은 사장된 기술이고 어떤 것들은 낯설었는데 그중에는 유물을 이용한 기술도 꽤 있는 듯했다. 모르던 유물을 이용한 기술에 관해 제인이 설명해줄 때면 파티마도 조금쯤은 귀 기울여 들었다. 아는 사람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도미노가 들으면 좋아 죽겠네. 도시유적에 사는 스캐빈저인 도미노는 평소 말이 없는 편이었다. 그러나 언젠가 알딸딸하게 취해서는 전에 없이 많은 말을 했다. 그때 파티마는 도미노가 알키마드에서 유물을 만지던 일을 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뭐 그렇게 아는 게 많았는지, 그걸 또 말하지 않고 어떻게 지냈는지. 파티마는 유물에 관해 떠드는 도미노를 보면서 음악에 관한 얘기가 나오면 눈을 빛내던 라이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유물을 발굴할 줄만 알지 알아보는 법은 모른다고 입 다물고 있던 사람이 말이다. 거짓말이었구나. 파티마는 쉽게 이해했다. 제 욕심을 드러내지 않기 위해, 혹은 버리기 위해 선택한 방법이리라. 도미노는 거주지를 자주 옮겼다. 자신을 숨기고 싶어 했다. 두앗의 존재를 안다면 도미노는 좋아할까.
“우리에겐 대안이 필요해요.”
둘만 남았을 때 바르톨로는 말했다. 자신이 꿈꾸고 계획하는 것은 그 대안이라고. 파티마는 바르톨로의 나이를 가늠했다. 이제 스물을 조금 넘었을까. 치안국 경찰부 소속에 오시리스 구역에 거주하고 날 때부터 시민인 것 같던데. 그는 최근 작전을 위해 아웃스커트를 ‘알아야겠다’고 결심할 정도로 성채 밖의 삶에 관해 아는 게 없었다. 파티마는 미숙한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시선을 숨기지 않았다.
“알죠? 이 사람들. 여기 두앗에 있는 사람들도 대안을 찾아 여기로 왔을 거라는 거.”
그리고 그 대안의 장소는 정부에 의해 공습 대상으로 지정되었다.
“솔직히 날 때부터 시민이었던 사람이 나서는 것도 한계가 있지. 당신 욕하려는 게 아니고 다른 사람들 눈에 어떻게 비칠지를 생각하란 말이에요. 사람들은 꿈꾸는 걸 좋아하지만… 어느 정도는 자기 현실을 집어넣어야 믿어주거든.”
“아 이거 참. 다들 비슷한 말씀을 하시네요.”
“그렇지?”
바르톨로는 머쓱한 표정으로 웃었다. 눈을 내리고 잠시 고민하는 눈치였는데 그가 다시 시선을 맞춰왔을 때 파티마는 바르톨로가 기죽지 않았다는 걸 느꼈다. 되려 바르톨로는 갈색 눈동자를 빛내며 물어왔다.
“그래도 저는 가능성을 보고 싶어요. 파티마 씨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세요?”
쉽게 포기하지 않는 사람의 얼굴이다. 그 얼굴을 보고 파티마는 그에게 현실적인 조언을 잇는 대신 가볍게 응원이나 던져주기로 했다. 넘어져 봐야 멈추는 사람도 있는 법이다. 만에 하나 바르톨로가 성공한다면… 바르톨로에겐 잘된 일이고.
“어렵긴 하겠지. 그래도 잘해봐요.”
“그럴 거예요.” 바르톨로가 환하게 웃었다.
제인과 바르톨로와 두앗을 돌아다니면서 파티마는 희망을 발견하지 못했다. 두앗의 면면을 눈에 담고 머리에 담는 건 제가 처한 환경을 속속들이 알아두기 위해서였다. 새로운 것들이 자극을 줄 때도 있었지만, 알키마드와 두앗 사이에 꼭두각시처럼 매달린 상황보다 중요한 건 없었다. 이곳도 사람 사는 땅이긴 하지. 최소한 나데즈다 사이코가 파티마 사이코에게 무엇을 말하고 싶었는지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들 형제는 자신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서로에게 증명하고 싶어 했으니까.
나데즈다가 부탁한 거예요? 헤어지면서 묻자 제인의 입꼬리가 미미하게 꿈틀거렸다.
아닙니다. 답은 반 박자 느리게 나왔다.
포브는 거짓말 못하는 사람만 들이나봐?
맞습니다….
5
방으로 돌아가 좁은 침대에 누울 때면 어린 시절로 돌아간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제집이 아닌 공간. 제 뜻대로 선택할 수 없는 것들. 원하든 원치 않든 함께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 좀처럼 잠들지 못하는 밤이 많았다. 그런 밤에 나데즈다가 찾아왔다. 나데즈다는 파티마를 높은 건물로 데려갔다. 지하도시의 천장이 가까운 곳이었는데 두앗의 풍경에 한눈에 들어왔다. 나데즈다는 불쑥 말했다.
“난 네가 사람은 죽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걱정하는 말투였다. 파티마는 그제야 두 사람이 6년 전에 어쩌다가 다신 안 보게 되었는지를 기억했다. 넌 사람 죽여도 눈 하나 깜빡 안 할 거야. 파티마가 기억하기로는 나데즈다의 그 말이 발단이었다. 자신이 뭐라고 대꾸했는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나데즈다가 싫어할 법한 말을 골랐을 거라는 건 안다. 파티마가 말했고, 그리고 나데즈다는 그 말에서 비밀을 읽어낸 사람처럼 굴었다. 너 사람 죽였냐? 그렇게 말하는 나데즈다의 목소리와 표정이 기억난다. 경멸과 슬픔, 절망이 뒤섞인 나데즈다를 보고 파티마는 상처를 입었다. 죽였으면 어쩔 건데? 그래서 그 말을 내뱉을 때 자신의 목소리가 형편없이 떨렸다는 것도 기억했다. 나데즈다는 그 떨림을 다른 식으로 해석했다.
“나쟈, 세상엔 어쩔 수 없는 일이 있어.”
“네가 그런 말을 해?”
나데즈다가 날카롭게 말했다.
“사람들이 죽었어! 파티, 넌…. 아무리 그래도 네가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 안 돼. 지금은 안 된다고.”
“알겠어. 미안해.”
파티마가 그렇게 말하자 나데즈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나데즈다는 침묵했다. 그들 사이에 오간 말들의 역사를 생각하면 현명한 선택이었다. 침묵 속에서 파티마는 담배를 꺼냈다. 나데즈다에게 한 개비를 내밀자 그는 거절했다. “끊었어.” 파티마는 나데즈다를 내버려 두고 담배를 피웠다. 전날 제인에게 받은 것이었는데 꽤 독했다. 담배 연기가 몇 번째 올라갔을까. 나데즈다가 말했다.
“릭에겐 강요하고 싶지 않아. 그 애는 너무 어려.”
“얘기해봤어?”
나데즈다는 고개를 저었는데 얘기를 안 해봤다는 것인지 마음대로 안 풀렸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파티마는 언젠가 나데즈다 얘기를 꺼냈을 때 에메릭이 짓던 어색한 미소를 기억했다. 미안한 얼굴이었나? 잘 모르겠다. 그 애는 파티마에게도 미안한 기색을 내비친 적이 있었다. 별 거 아닌 일에도 마음 쓴다는 점에서 에메릭은 나데즈다와 비슷한 부류였다.
나데즈다는 에메릭이 케일럽을 닮았다고 했다. 형제니까 닮긴 했겠지. 그러나 파티마는 그게 이유가 아니라는 걸 알았다. 나데즈다는 한참 나이가 든 뒤에도 제가 어릴 때 죽은 약혼자를 가끔 떠올렸다. 죽었기 때문에 더 오래 잔상을 남기는지도 몰랐다. 그러고 보니 케일럽이 죽었을 때가 지금의 에메릭과 비슷한 나이였을 것이다.
“그럼 어린애들 다 봐줄래? 걔 또래 많아 여기에.”
비아냥대면 곧바로 말이 돌아올 줄 알았는데 나데즈다는 답하지 않았다. 그게 조금 의외였다. 파티마가 기억하는 나데즈다 사이코는 자기가 할 수 없더라도 그러고 싶다고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나데즈다는 남을 다치게 하는 걸 끔찍하게 싫어했다. 어린애들에게 무르기도 했다. 모르는 척하는 걸 혐오했다. 파티마는 나데즈다가 불현듯 낯설게 느껴졌다. 사실 파티마의 기억 속 나데즈다는 어린 시절의 기억에 많은 부분을 기대고 있다. 6년 전에도, 16년 전에도 그들은 자주 만나지 않았으니까. “한 명 정도는 어떻게…. 아니다, 내 말 잊어라.” 나데즈다의 목소리가 공중에 흩어졌다.
“너 이러고 있는 거 엄마도 알아?” 파티마가 물었다.
“어느 정도는.”
“왜 같이 안 들어왔대.”
고개를 돌리고 있던 나데즈다가 파티마를 돌아보았다.
“네가 있으니까.”
그 말은 예상치 못했다.
그날 두 사람은 오래 대화를 나누었다. 나데즈다와 새벽까지 얘기했다고 말하자 빅터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너희 둘이? 그게 가능한 일이었냐? 파티마에게도 의외였다. 나데즈다와 그렇게 대화를 나눈 건 몇 십 년만이었다. 처음이 아니라는 것도 웃겼다. 그렇게 대화를 나눈 적이 언제 있었지? 파티마는 기억을 한참 곱씹었다.
나데즈다에게 모터사이클 모는 법을 배웠을 때였다. 그날 나데즈다는 파티마를 데리고 멀리 나갔다. 도시유적까지 나가자 넓은 아스팔트 도로가 나왔다. 그렇게 큰 도로를 파티마는 살면서 처음 봤다. 그런 길은 어떻게 알았는지. 사람이 잘 쓰지 않는 도로에는 모래가 흩뿌려져 있었는데 거슬릴 정도는 아니었다. 여기서 달려봐. 아무도 없으니까 괜찮을 거야. 나데즈다가 말했다. 파티마는 뻥 뚫린 도로를 달리면서 자유를 느꼈다. 그리고 그날 해가 저물 때 그들은 모래폭풍을 만났다. 천을 뒤집어쓰고 모래 바닥 위에 누워서 바람이 모두 지나가기를 기다렸다. 눕혀둔 모터사이클에 등을 기댄 채로. 잠들 수 없는 밤이었기에 파티마와 나데즈다는 나란히 누워서 밤새도록 대화했다. 바람 때문에 서로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지만 대화는 간간이 이어졌다.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 그 도로를 먼 미래에 에메릭과 찾은 적이 있다는 걸 말해줬다면 나데즈다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나데즈다 사이코는 달라졌다. 어쩌면 아주 오래전부터 파티마가 알던 사람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나데즈다는 두앗에 올 때부터 결심을 내린 것처럼 보였다. 나데즈다는 자기 사람들을 위해서라면 파티마에게 칼을 들이댈 수 있을 것이다. 엘비라도 그것을 이해했을 터다. 그 사실을 깨닫자 파티마는 그들 세 사람이 가족이라는 걸 체감했다.
두앗에서 나데즈다를 다시 만나고 회의실에서 도망치듯 나왔던 날, 빅터가 쫓아왔다. “넌 그래서 앞으로 어떻게 할 거냐.” 빅터가 말했다. 파티마는 짜증부터 냈다. 뭘 어떻게 해? 파티마는 정부의 꼭두각시가 된 것도, 두앗에 억류된 것도, 선택을 강요하는 편에 나데즈다가 서 있는 것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빅터는 말하지 않아도 파티마가 왜 화가 났는지 이해한다는 듯 굴었는데 그것도 화가 났다. 빅터는 가타부타 말하는 대신 담배를 내밀었다. 한풀 꺾인 파티마가 그것을 받아 들었다.
그때 파티마의 진심에 가장 가까운 말은 보잘것없었다.
“모르겠어.”
6
두앗을 돌아다니거나 방에 틀어박히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던 에스퍼들은 종종 여럿이 뭉쳐 시간을 보내곤 했다. 파티마는 라이라와 벤치에 앉아 길거리 음악가의 연주를 들었다. 처음 보는 막대사탕을 발견했을 때는 월터에게 갖다주었고 미하일의 안마봉을 빌려 어깨를 두드리던 날도 있었다. 아침이나 밤에 복도에서 다른 이들과 마주치면 인사를 나눴다. 일없이 지하 도시에 갇혀 보내는 시간은 잘만 흘러갔다. 파티마는 대부분의 에스퍼들과 썩 나쁘지 않은 관계를 유지했다.
물론 거기에는 예외도 있었다.
파티마는 다니엘이 껄끄러웠다. 파티마는 다니엘의 눈동자에 서렸던 공포와 두려움을 기억했다. 다니엘이 손을 떨던 것도 칼을 스스로의 목에 들이댄 것도 기억했다. 그때의 다니엘 로스는 약해 보였다. 너무 연약해서 누가 툭 치지 않아도 제 발로 죽어버릴 사람 같았다. 파티마는 그런 사람들을 유구하게 싫어했고 다니엘의 얼굴을 다시 마주했을 때는 짜증부터 올라왔다. 그러나 근래의 다니엘은 괜찮아 보였다. 바로 며칠 전 죽으려고 했던 사람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두앗의 거리를 돌아다니고 있던 어느 오후, 다니엘이 찾아왔다. 하고 싶은 말이 있으니 시간을 내어줄 수 있냐면서. 다니엘은 두 사람의 감시 담당에게 양해를 구하고 파티마를 테라스가 있는 카페로 데려갔다. 두 사람은 탁 트인 테라스의 테이블에 앉았다. 주문한 음료의 얼음이 녹아 컵에 송골송골 물이 맺히고 있을 때, 다니엘이 입을 열었다.
“그때는 죄송했어요.”
“그때?”
“저희 탈출에 실패하고 의식을 잃었을 때요.”
만족스럽지 않은 대답이었다. 파티마가 고개를 젓자 다니엘이 조금 웃었다.
“괴수가 되기 전에 죽으려고 했던 거요.”
“웃어?”
날카로운 목소리에 다니엘이 눈썹을 약간 내렸다.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그 얼굴을 본 파티마는 어이가 없었다. 지금 그런 표정을 지어야 할 건 나라고. 나.
“왜 화가 나셨나요?”
“화 안 났어요.” 거짓말이다.
“….”
“여기가 밖이었으면, 당신이랑 일 못 한다고 이 사람 빼라고 말했을 거야. 문제 많다고.”
다니엘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다시 안 그럴 거예요. 괴수가 되는 게 아니라면 죽을 이유는 없고… 죽은 에스퍼보다는 살아 있는 에스퍼가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으니까요.”
“괴물이 되기 싫은 거야?”
“괴수가 되고 싶지 않았던 거예요.”
“사람을 죽이는 건 괜찮고?”
“괜찮지 않아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게 있으니까요.”
“뭐가 소중해요 당신은.”
“사람들이요. 제가 아는 사람들.”
다니엘은 선언하듯 말했다.
“파티마 씨도 제게 소중해요.”
우스운 일이다. 이 대화에서 정을 먼저 생각할 정도로 무른 사람이 저런 확신을 보인다는 게 말이다.
파티마는 다니엘 로스의 마음이 며칠 새 엄청난 강도로 담금질 되었으리라 생각지 않았다. 사람은 그렇게 쉽게 바뀌지 않는다. 기실 다니엘은 변하지 않았다. 어떤 면에서는 그랬다. 사람에 대한 정도, 괴수에 대한 두려움도, 어느 것 하나 버린 것 같지 않은데 앞으론 죽을 생각이 없다고. 파티마는 그 말을 믿을 수 없었다. 감정에 기댄 선택은 언제고 실패할 가능성이 있다. 사람에 기대도 마찬가지다. 흔들리고 말 테니까.
“됐어요. 그런 얘길 듣고 싶은 건 아니었어.”
“그럼….”
두 사람은 동시에 입을 열다가 멈췄다. 불청객이 있었다. 언제 왔는지 어린아이가 테이블을 노크하듯 두드렸다. 테이블 옆으로 가깝게 다가온 아이를 매사냥꾼들은 말리지 않았다. “무슨 일이니?” 다니엘이 친절하게 묻자 아이는 파티마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무사가 찾아요.”
그 이름을 가진 사람을 둘 안다. 파티마는 아이를 관찰했다. 아이는 마르고 작았다. 꼭 파티마 사이코를 찾아왔던 때의 콰디라 알사기르 무사처럼.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이건 하릴 무사가 의도한 배역과 각본이다. “라고 아저씨가 전해달래요. 아줌마는 저쪽으로 가세요.” 아이가 덧붙였고 파티마는 헛웃음을 지었다. “안 가면?” “어….” 그런 각본은 받은 적이 없는지 아이가 망설였다. “근데 아저씨가 심부름 값도 받으라던데.” 아이는 태세 전환이 빨랐다. 애드리브를 고민하는 대신 제 몫을 챙기기로 한 것이다. 파티마의 눈썹이 꿈틀거리는 걸 본 다니엘이 나섰다.
“그건 나한테 받자. 이분은 아저씨한테 가셔야 하잖아.”
“주기만 하면 상관없어요.”
다니엘이 파티마를 바라보고 말했다.
“가셔도 돼요.”
아주 단순한 주문이었다. 그러나 그 말은 어디로든 갈 수 있다는 말로도 들렸다. 그것이 우스워서 파티마는 실소했다. “어디로든?” 농담처럼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자 다니엘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네.”
7
하릴 무사는 휠체어에 앉아 파티마를 기다렸다. “왜 이렇게 늙었어?” 늙어서인지 앉아서 생활해서인지 예전보다 왜소해진 하릴은 그러나 익숙한 금색 눈동자를 빛내고 있었다. “당신은 안 변했군.” 하릴이 맞은편의 의자를 가리켰다. 파티마는 눈높이가 저보다 약간 낮아진 하릴을 내려다보다 자리에 앉았다.
“죽기 전엔 못 볼 줄 알았는데.”
“환영 인사로 받지.”
그리고 침묵. 그들은 약속이나 한 듯 말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모르는 것도 있었고 상대가 무슨 말을 꺼낼지 재는 것도 있었다. 파티마가 신경질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리자 한참 만에 하릴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왜 이렇게 화가 나셨나.”
“당신 때문에 화가 난 거라곤 생각 못 해?”
“아닌 것 같은데.”
“짜증 나는 인간이 많다고 생각하고 있었어.”
“예를 들면?”
“내 앞에 한 명 있네.”
“아, 그래. 나데즈다가 당신 가족이라면서.”
신경을 긁을 의도라는 걸 빤히 아는데도 파티마는 그의 뜻대로 테이블을 긁었다.
“본론만 말해.”
“닮았던데.”
“내가 여기 얌전히 앉아서 당신 얘기 들을 이유 없는 거 알지?”
하릴은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러고는 지금껏 그래왔듯 제멋대로 주제를 바꿨다.
“곧 에잇핑거가 돌아온다.”
에잇핑거, 포브의 전설. 또 다른 유명인사의 이름을 들은 파티마가 미간을 좁혔다. 하릴은 파티마가 머리를 굴릴 시간을 주겠다는 듯 다시 입을 다물고 기다렸다.
“그래서?”
“흐름을 읽어, 파티마. 당신이 잘하는 거잖아?”
그 말에는 뼈가 있었다. 그러나 파티마는 그의 말처럼 흐름을 읽고 하릴 무사의 판에서 발을 뺀 전적이 있었다. 그와는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처럼. 그때 하릴 무사가 알력 다툼에서 밀려나 추방된 후로 8년이 흘렀다. 그동안 파티마는 하릴의 도움 없이 특수부에서 제 자리를 찾았다. 더는 하릴에게 빚을 질 이유도 그의 눈치를 볼 필요도 없었다. 지금의 하릴은 그렇게 위협적으로 보이지도 않았다. 두앗에서 어떻게든 살아남은 모양이지만, 그의 입지가 에잇핑거나 제인을 넘어서지는 않을 테다. 파티마는 대놓고 하릴을 비웃었다.
“당신한테 걸어서 잘 될 것 같진 않은데.”
“같이 걸자는 거지. 옛날처럼.”
하릴이 느긋하게 대꾸했다.
“잘 생각해봐. 곧 바람이 불 거야.”
그 정도는 나도 안다고. 유치해질 걸 알아서 뱉지 못한 말이 목구멍에 맴돌았다. 알고 있다. 하릴과 무슨 대화를 하든 상황은 달라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바람은 불 것이다. 가만히 있더라도 휩쓸릴 것이다. 그런데 왜 그래야 하지? 파티마는 가만히 있는 것도, 휩쓸리는 것도 싫었다. 그건 하릴 무사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생각해왔다. 그는 제 손으로 힘을 거머쥐어야 하는 사람이었으니까. 사람을 쓸지언정 의지하지는 않는 것이 하릴 무사일 텐데. 에잇핑거가 온다고. 같이 걸자고. 과거에 비해 쇠락한 하릴 무사의 말을 되새기며 파티마는 열패감에 휩싸였다.
하릴이 휠체어를 뒤로 밀었다. 이제 대화가 끝났으니 일어나도 된다는 듯이. 뻔뻔하고 오만한 태도였다. 덕분에 파티마는 먼저 일어날 기회조차 놓쳤다. 의자가 날카롭게 땅을 긁었다.
“성질이 죽었나? 난 화가 많은 쪽이 마음에 들었는데.”
“똥을 무서워서 피해? 더러워서 피하지.”
파티마는 인사 없이 등을 돌렸다. 그런데 등을 돌리자마자 하릴의 목소리가 파티마를 붙잡았다. 그치곤 약간 성급했다.
“콰디라는 어때?”
파티마는 일부러 콰디라에 대해 일언반구도 꺼내지 않고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콰디라와 파티마는 만나지 않을 테니까. 콰디라 알다기르 무사. 알키마드에 남아있는 하릴 무사의 딸. 하릴 무사가 건재하던 시절 콰디라와 파티마가 따로 연락할 이유 따위는 없었다. 그러나 파티마와 콰디라는 만났다. 하릴이 없는 알키마드에서. 파티마 사이코는 매해 돌아오는 콰디라 알사기르 무사의 생일을 챙겼다. 두 사람의 인연은 하릴이 없는데도, 아니 하릴이 없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졌다.
하릴에게 파티마가 콰디라를 무시하는 시나리오는 없는 모양이다. 사람을 시켜 이미 알아보았거나. 후자일 가능성이 높았지만, 파티마는 그걸 당연하게 여기는 하릴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직접 물어봐.”
그럴 수 있다면. 삼킨 뒷말에는 조롱이 섞였다. 8년을 찾아오지 못했으면서 이제 와 당신이 그 애를 만날 수 있겠냐는, 당신은 추방당한 낙오자에 불과하다는 의미의. 그 말을 내뱉지 못한 건 그 조롱의 화살이 하릴 무사뿐만 아니라 파티마 사이코를 겨냥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추방당한 이들의 도시. 나데즈다는 그런 표현을 썼지만, 그곳은 지금 파티마를 가두는 감옥이다.
카페로 돌아갔을 때 웬일인지 다니엘은 떠나고 없었다. 혼자 남은 파티마는 복잡하게 엉킨 두앗의 골목에서 어느 쪽으로 가야 할지 고민했다. “저쪽은 안 됩니다.” “왜요?” “안 됩니다.” 파티마를 졸졸 따라다니던 매사냥꾼이 친절하게 일러준 덕분에 파티마는 금세 결정을 내릴 수 있었다. 신경질적으로 발을 떼자 작은 돌멩이가 발에 채여 굴러갔다.
8
며칠 뒤 파티마는 모래를 밟고 있었다. 지하를 벗어난 지상의 공기는 텁텁하고 건조했다. 바람이 불었다. 어디론가 움직이기를 종용하는 바람이 등을 가볍게 밀어붙이고, 파티마는 걸음을 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