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의 집
2024. 10. 21.

 

1

인류가 멸망의 길을 걷던 2149년. 폐허 속에서 정체불명의 까만 구체가 떠올랐다. 기이한 힘이 깃든 구체는 사막 한복판에 오아시스를 만들었고 괴수들을 내쫓았으며 밤이면 보름달처럼 은은한 빛을 내어 사람들의 얼굴을 비췄다. 마치 신처럼.

인류는 구체를 중심으로 도시를 재건한다. 구체는 신의 사자요, 마땅한 이름이 필요했기에 사람들은 신화 속에서 이름을 찾았다. 풍요와 생명, 부활과 내세를 의미하는 고대 이집트 신 오시리스는 그렇게 지상에 내려오게 되었다.

신의 도시는 사람을 전부 수용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장벽을 세워 오시리스 구역과 그 외 구역을 나누었다. 아웃스커트(Outskirt). 장벽을 겹겹이 둘러싼 외곽 지역에는 오시리스로 넘어가기 위해 순번을 기다리는 체류민들이 모였다. 신의 도시에 자리 잡은 정부는 몰려드는 사람을 감당할 수 없어 아웃스커트를 확장했다. 대기표가 길어졌다. 자신이 살던 지역이 아웃스커트 개발지역으로 지정되면서 체류민으로 등록하게 된 사람들도 많았다. 엘비라 사이코는 그중 하나였다.

엘비라가 살던 곳에는 카사솔(Casa Sol)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이탈리아어로 ‘태양의 집’이라는 뜻이라고 밍이 알려주었다. 엘비라는 밍의 손을 잡고 체류민으로 신분을 등록했다. 당장 눈에 띄게 달라지는 건 없지만, 오시리스에 한결 가까워질 기회라고 밍이 말했다. 엘비라는 ‘체류’의 뜻을 밍에게 물었다. “그건 우리가 잠깐만 이곳에 머문다는 의미다.” 그럼 우린 어디로 가? “오시리스로.” 밍은 고개를 들어 장벽을 바라보았다. 오시리스가 무엇인지는 어린 엘비라도 알았다. 밍은 종종 그리운 것을 떠올리는 사람처럼 장벽을 바라보곤 했다. 밍은 오시리스를 봤어? 엘비라가 묻자 밍이 고개를 저었다. “넌 볼 수 있겠지.” 밍은 3개월 뒤에 죽었다. 만나지도 않은 존재를 어떻게 그리워할 수 있냐는 엘비라의 의문에는 대답해주지 않은 채로.

유독 뜨거운 해였다. 카사솔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더위로 죽는 사람이 나왔다. 숫자는 누구도 세지 않았다. 셀 수도 없었을 테다.

신실했던 밍은 종종 엘비라에게 오시리스의 기원이 되는 신화를 얘기해주었는데 그중에는 세트에 관한 이야기도 있었다. 사막과 혼돈, 이방인과 전쟁의 신인 세트는 오시리스의 형제이며 그를 시기했다고 한다. 그래서 종국에는 오시리스를 살해했다고.

장벽을 기준으로 오시리스 구역과 세트 구역이 나뉜 걸 생각하면 얄궂은 이름이었다. 밀려난 자들의 시기는 무섭지도 않나 보군. 엘비라는 가끔 굳건한 장벽을 노려보며 세트의 기분을 헤아리곤 했다. 선택받은 이들의 성채에 들어간들 무엇이 달라질까. 엘비라는 그곳에서 이방인이 될 것임을 알았다. 최소한 장벽 밖에는 ‘우리’가 있다. 평생을 이곳에서 살아온, 태양의 그늘에서 살아가는 이들이.

엘비라는 오시리스행 티켓을 기다리며 삶을 죽일 생각이 없었다. 삶은 이곳에, 엘비라가 머무는 곳에 있었다. 체류민이라는 신분은 사람들을 소외시켰지만, 소외된 이들은 외로움을 공통분모로 뭉치기도 했다. 자경단 포브가 생겼을 때 엘비라는 기꺼이 포브에 들어갔다. 사명감과 열정이 있던 시절이었다. 엘비라는 포브에서 가족과 친구를, 동료를 만들었다.

페네시도 그곳에서 만났다. 그만큼 아끼게 된 사람은 밍이 죽고 처음이었다.

페네시는 아이를 갖고 싶어 했다. 자기를 혹은 널 닮은 아이가 있으면 좋을 것 같다며 꿈을 꾸듯 말했다. 엘비라는 그게 허황된 꿈이라고 생각했다. 애는 누가 낳고 누가 키워. “내가 다 할게. 할 수 있어.” 페네시는 엘비라를 꾸준히 설득했고 1년 뒤 그들은 첫 아이를 계획했다. 엘비라와 페네시는 함께 아이를 가질 수 없었기에 다른 방법을 찾아야 했다. 그러나 인공 수정 비용은 두 사람이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이었다. 페네시는 사람을 고용했다. 꼭 이렇게까지 해서 애를 가져야겠어? 엘비라는 유전자를 제공할 사람을 만나러 가는 페네시에게 말했다. 페네시는 걱정하지 말라며 웃었다. “그 사람 머리가 너처럼 검은색이더라. 괜찮을 거야.”

페네시는 아이에게 나데즈다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페네시는 괜찮다는 말을 자주 했는데 엘비라는 그럴 때마다 모멸감을 느꼈다. 행복은 잠깐이고 불행은 공기처럼 그들 주변을 배회했다. 그건 거짓말이잖아. “거짓말이 뭐 어때서.” 그만 좀 해. “엘.” 우린 안 괜찮다고. 빌어먹을, 안 괜찮다고!

어느 날 페네시가 사라졌다. 페네시의 행방을 수소문했으나 누구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면 알면서도 알려주지 않았거나. 엘비라는 1년이 지나서야 페네시가 자길 떠났다는 걸 받아들였다. 엘비라의 곁에 남은 건 걸음마를 떼기 시작한 나데즈다뿐이었다.

둘째를 가진 건 계획에 없는 일이었다. 충동적인 섹스였고 엘비라는 상대의 이름도 몰랐다. “혼자예요?” 의사가 물었을 때 엘비라는 그렇다고 답했다. “지울 건가요?” 의사가 다시 물었다. 그것밖에 답이 없다고 생각했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엔 날 닮은 아이니까 다음엔 널 닮은 아이가 있어도 좋겠다. 곤히 잠든 나데즈다를 보면서 페네시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엘비라는 아이를 가질 생각이 없었지만, 그 순간을 깨트리고 싶지 않아서 말을 삼켰다. 페네시는 단지 꿈을 꾸고 싶었을 뿐이니까. 엘비라는 페네시의 꿈이 자신을 지탱하던 시간이 있다는 걸 알았다. 가져본 적 없는 가족을 그리워하는 페네시를 이해했다.

그들은 집을 만들고 싶었고 한때 엘비라는 그것을 가졌다고 생각했다. 어떤 모양인지 알아볼 수는 없어도.

낳을 겁니다. 엘비라는 충동적으로 답했다.

아이의 이름은 길거리 작명소에서 받았다. 파티마. 작명소에서 이름의 의미를 알려주었지만 엘비라는 오래 지나지 않아 그걸 잊었다.

2

엘비라는 괜찮은 사람이에요. 밖에서 만나면 그렇죠. 두 얼굴의 엄마, 이런 얘기는 아니고…. 집에 잘 안 들어가서요. 걔들은 자기 엄마랑 보내는 시간이 적었어요. 그래도 닮은 걸 보면 웃기죠? 나데즈다가 그러더라고요. 걔는 자기 혼자 컸다는 말을 밥 먹듯이 하는 애였는데. 다 큰 뒤에야 엘비라 사이코를 알게 됐다고. 근데 그 사람이 자기랑 닮았더라고. 자기가 엄마 닮았다는 걸 다 커서 알았다나.

흔한 일이에요. 우리 집도 그랬으니까. 애들이 다 그랬어요.

우리 애들요. 우리가 어떻게 친해졌냐면요. 어른들이 자경단 활동하면서 자기 애들을 서로 맡기고 그랬거든요. 돈도 벌어야 하고 자경단도 해야 하는데 애는 언제 키워요. 그러니까 얘들아 너희끼리 놀고 있어라 그랬죠. 애들 머리 굵어진 다음부터는 그냥 니들 알아서 해라, 하고. 그래서 발랑 까진 애들이 많잖아요. 애들이 다 싸가지가 없어요.

아, 걔요. 맞다. 네. 파티마가 제일 싸가지가 없었어요. 걘 진짜 사이코라니까. 사이코(Saiko) 말고 사이코(Psycho)요.

우리처럼 태어난 사람들은요…. 욕심을 크게 안 가져요. 안 그러면 살기 힘들거든요. 보통 둘로 나뉘죠. 현실을 받아들이고 사는 애들, 열을 내다가 지치는 애들. 솔직히 질투한 것도 있죠. 보시다시피 저는 받아들이고 사는 쪽이잖아요? 파티마 걔도 그러다가 지칠 거라고 생각했어요. 걘 욕심이 너무 많았거든요. 진짜 더럽게 많았어요. 그런데 걘 못할 거라고 생각을 안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걔가 사이코라는 거예요. 뭐, 결국 잘된 걸 보면…. 좀 돌아야 성공하나?

나데즈다도 욕심이 많았어요. 그런데 걘 성공하기 힘들어요. 이상주의자라서 저 같은 애들도 잘됐으면 하거든요. 운동하는 사람들이 그렇죠. 근데 그래서 전 파티마보다 나데즈다가 좋았어요.

아뇨. 성공 못할 거라는 점에서요.

하루는요. 나쟈가… 나데즈다가 그러더라고요. 파티마가 저러고 안 들어올 것 같대요. 걔가 집을 자주 나갔거든요. 괜한 걱정이라고 했지만 제 생각에도 그랬죠. 파티마라면 갑자기 연락을 끊을 수도 있겠다고. 그런 애도 가족이라고 나데즈다는 걱정하더라고요.

그럴 땐 나쟈가 안됐어요. 나쟈는 파티마를 못 놓을 거예요. 걔 손해죠.

3

“나 그냥 집 나와서 여기서 살까?”

“안돼. 좁아.”

“돈은 낼게.”

“돈은 당연히 내야지. … 그리고 오늘처럼 하루 재워주는 건 그렇다 쳐도 어른 넷이 지내는 곳에 널 들이는 건 좀 그렇지 않냐?”

“여기서 나이를 꺼낸다고.”

파티마가 얼굴을 확 구겼다. 빅터는 어깨를 으쓱이고 파티마의 접시에 팬케이크를 올렸다. “지는 나이 얼마나 먹었다고.” 몇 살 어린 친구 녀석은 구시렁거리면서 팬케이크를 입에 집어넣다가 뜨겁다고 호들갑이었다. “주스.” 남의 집에 편하게 앉아서 손짓하는 꼴이 얄밉기 그지없다. 지금도 이런데 같이 살면 얼마나 더 할까. 상상만 해도 끔찍했다. 빅터는 고개를 내저으면서 포도 주스를 앞으로 밀었다. “주스 달라니까.” 파티마는 오렌지 주스를 찾았다. “그건 니가 어제 다 마셨잖아.” 빅터는 눈을 가늘게 떴다.

얄미운 녀석의 비위를 이 정도라도 맞춰주는 건 사정을 알기 때문이었다. 파티마가 집에 찾아올 경우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 나데즈다와 싸웠거나. 둘째, 나데즈다가 마음에 안 들거나. 빅터는 그 두 사람이 얼마나 살벌하게 싸울 수 있는지 알았다. 뭐, 파티마가 잘못했겠지…. 빅터는 속으로 미적지근하게 나데즈다의 편을 들었으나 파티마를 내쫓지는 않았다.

어느새 포도 주스를 깨끗하게 비운 파티마가 가방을 멨다.

“나 간다.”

“다신 오지 마라.”

“존나 생색내네. 너 말고 재키 찾아온 거거든?”

재키는 집에 잘 들어오지도 않는다.

“얼른 꺼져.”

빅터의 친절한 인사에 웃는 얼굴로 화답한 파티마는 현관문을 활짝 열어둔 채로 가버렸다. “문 안 닫냐? 야!” 빅터가 문을 닫으러 나갔을 때 파티마의 등은 이미 저만치 멀어지고 있었다.

일찍 나왔다고 생각했는데 해가 중천에 떴다. 빅터의 집에서 나온 파티마는 손으로 차양을 만들고 고개를 젖혔다. 여름의 햇빛은 저주스러울 정도로 뜨겁다. 집으로 갈 시간이 되면 유독 덥게 느껴졌다. 빅터네 동네나 카사솔이나 거기서 거긴데도.

돌아가는 길에는 버스를 탔다. 에어컨이 작동되고 있긴 한 건지 다닥다닥 달라붙어 선 사람들 때문에 숨이 막혔다. 집 앞까지는 버스가 가지 않았기 때문에 중간부터 자전거를 타고 가야 했다. 버스 정류장에서 내린 파티마는 소매로 땀을 닦았다. 정류장 근처에 자전거를 묶어뒀는데…. 자전거를 묶어둔 곳으로 간 파티마는 석상처럼 굳었다. 없다. 자전거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머리끝까지 짜증이 솟구쳤다.

“어떤 새끼야!!!”

소리를 지르자 3초 후에 맞은편 집에서 누군가 고함을 질렀다. “시끄러워!” 파티마는 씩씩대며 나무를 발로 찼다. 닥치라는 소리가 두 번 더 돌아왔을 때에서야 화풀이를 그만뒀다.

차가 있으면 좋을 텐데. 사람 한 명 겨우 발 디딜 수 있을 법한 인도 옆으로 2차선 아스팔트 도로가 이어졌다. 집에 차가 두 대 있긴 했다. 하나는 엘비라가 쓰는 구식 쿠페고 다른 하나는 나데즈다가 쓰는 모터사이클이다. 파티마의 것은 자전거가 전부다. 땀을 뻘뻘 흘리면서 페달을 수동으로 돌려야 하는데 그마저도 누가 훔쳐 가버린 자전거 말이다. 파티마는 빈 페트병을 내던졌다. 떨어진 페트병을 차가 밟고 지나가며 요란한 소리가 났다. 바닥에서 뜨거운 열기가 올라왔다. 파티마는 차를 타고 도로를 달리는 상상을 하다가 다음에는 아스팔트를 다 뜯어버리는 상상을 했다. 둘 다 못하니까 걸어야 했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2시가 다 된 시각이었다. 집에서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들렸다. 거실 소파에 나데즈다와 로피, 다리야가 앉아서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다. 로피가 먼저 아는 척을 해왔다. “어. 파티마다.” 나데즈다는 파티마를 보는 둥 마는 둥 했고 로피와 다리야는 같이 영화를 보자고 했다. 세 사람이 앉은 소파는 꽉 껴서 더 앉을 자리가 없었다. 소파를 들일 때 엘비라는 세 식구에게 더 큰 건 필요 없다고 말했다. 웃기는 일이다. 이놈의 집구석에는 손님이 없는 날이 없는데. 파티마는 단란하게 앉은 세 사람을 보다 고개를 돌렸다. “아니. 쪄 죽겠다.” 뭐가 웃긴지 다리야가 웃었다.

“너 땀 냄새 장난 아니다.”

“누가 자전거 생겼다 그러면 그 새끼 나한테 알려줘.”

그대로 방에 들어가려는데 나데즈다의 목소리가 등에 꽂혔다.

“자전거는 왜. 잃어버렸냐?”

“그렇게 됐어.”

“어쩌다가?”

“내가 훔친 놈 생각을 어떻게 알아?”

파티마가 짜증스럽게 대꾸했다. 나데즈다가 어제와 똑같은 옷을 입은 파티마를 위아래로 훑어보고 고개를 저었다.

“빅터? 아니면 케이? 걔네는 왜 아직도 너랑 친구를 해주는지 모르겠다.”

파티마는 나데즈다의 말을 무시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고장 난 문은 문고리를 양손으로 세게 잡아당긴 뒤에야 제대로 닫혔다. 세 사람이 떠드는 목소리, 웃음소리, 텔레비전 소리가 벽을 타고 넘어왔다. 입 좀 다물라고 하고 싶었는데 화를 내기도 힘들 만큼 지쳤다. 땀에 젖은 옷이 기분 나쁘게 몸에 달라붙었고 턱으로 땀줄기가 흘러내렸다. 씻기도 귀찮았다. 파티마는 옷을 벗고 침대로 기어 들어갔다.

눈을 떴을 때는 밤이었다. “옷 입고 나와.” 나데즈다가 문을 반쯤 열고 말했다. 열린 방문으로 훈제 고기 냄새가 흘러들어왔다. 웬일로 일찍 귀가한 엘비라가 식탁에 앉아 있었다. 나데즈다가 식기를 놓았고 파티마는 물을 가져왔다. 엘비라와 나데즈다는 파티마가 깨기 전부터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데즈다가 성인이 되어 포브에 들어간 뒤로 엘비라와 나데즈다는 부쩍 대화를 자주 나눴다. 카사솔의 땅값, 정부의 새 정책, 무책임한 도시 계획이 도마 위에 올랐다. 파티마는 가끔 그들의 토론에 끼어들었으나 대개는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식사가 마무리될 무렵 나데즈다가 파티마에게 말을 걸었다.

“어제 설거지는 왜 안 했어.”

“웃겨. 나만 손 있어?”

“파티. 우리 인간처럼 살자. 응? 집에 두 사람이 다 밤늦게 돌아오면 네가 좀….”

“아, 나는 일 안 하냐고. 그쯤 해. 안 그래도 짜증나 죽겠으니까.”

“죽겠다는 말 좀 하지마.”

나데즈다는 가끔 이상한 데서 딴지를 걸었다. 파티마가 죽겠다는 소리를 하는 것도 싫고 파티마가 남의 집에서 자는 것도 싫고 파티마가 대학에 가는 것도 싫고 파티마가 머리카락을 자른 것도 싫다고 했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 파티마가 얼굴을 구겼다.

“예민하게 굴지 마.”

“파티마. 네 언니 말은….”

“아, 제발 좀!”

파티마는 엘비라의 말을 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두 사람을 중재하려던 엘비라의 표정이 단번에 굳었다.

“앉아.”

그 뒤는 정해진 수순이었다. 세 사람은 번갈아 언성을 높였다. 엘비라와 파티마가 싸우면 나데즈다가 잠시 침묵하고 나데즈다와 파티마가 싸우면 엘비라가 잠깐 기다리는 식이었다. 하는 말도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엘비라와 나데즈다는 파티마가 너무 이기적이라고 했다. 조금만 가족을 생각할 순 없냐고도 말했다.

엘비라는 파티마가 대학에 가는 것도 인테리어를 배우는 것도 괜찮다고 했다.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라고 너그러운 어머니처럼 몇 번이고 말했다. 하지만 때가 되면, 그러니까 고성이 오가고 못된 속내와 감정이 드러날 때면 엘비라는 서운해했다. 엘비라는 파티마가 제 뜻대로 크지 않은 걸 아쉬워했고 파티마는 그걸 알았다. 넌 다른 것도 잘할 수 있는 애다. 그런 말을 하면서 엘비라는 꼭 배신당한 사람 같은 표정을 지었다. 그러면 파티마는 말했다.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솔직하게 말하라고.

넌 왜 말을 그렇게 해? 엘비라의 착한 딸은 그런 식으로 끼어들었다. 우린 널 걱정해서 하는 말이야. 이런 말도 했다.

파티마는 두 사람의 ‘우리’에 편입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다.

사이코 가족이 세를 든 집은 3층짜리 건물의 1층이다. 이 집은 세 식구의 다섯 번째 집이었는데 이사할 때 엘비라가 꼽은 장점은 ‘이 평수에 방 세 개 흔치 않다.’였다. 안 그래도 좁은 집에 방을 세 개나 쑤셔 넣었다는 뜻이다. 그들은 자주 이사했지만, 좋은 집으로 가기 위한 것은 아니었다. 집값이 오르거나 계약을 연장하지 못했거나 집에 벌레가 들끓거나…. 대개는 그런 이유였다. 엘비라는 카사솔을 고집해서 동네를 벗어난 적도 없었다.

개성 없이 칙칙한 외벽에 네모반듯한 창문. 습한 방. 보라색으로 칠한 현관문은 혼자 다른 데에서 떼어온 것처럼 툭 튀고 서로 겉도는 가구들이 테트리스를 하듯 자리를 채운다. 파티마는 이 집에 사는 세 사람이 꼭 그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그들은 불완전한 구성품처럼 집구석의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가 마주칠 때마다 싸웠다. 파티마는 집을 좋아해 본 적이 없었다. 누군 좋아서 사냐. 어차피 집에 들어오지도 않는 애가. 나데즈다가 그렇게 말한 적이 있다.

인테리어를 배우겠다고 했을 때 많은 이들이 파티마를 비웃었다. 집은 삶에 여유가 있는 이들이나 돌볼 수 있는 거라고. 먹고 살기만 하면 됐지 누가 그런 데 돈을 쓰냐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봐. 너 똑똑한 애잖아. 파티마는 자신을 비웃는 이들을 비웃었다. 그러니까 안 되는 거야. 똑똑한 머리가 있으면 쓸 생각을 해야지.

파티마에겐 확고한 목표가 몇 가지 있는데 첫 번째는 카사솔의 집을 벗어나는 것이다.

“파티. 파티마. 야! 또 어디 가!”

파티마는 거실 서랍장에 놓여 있던 키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잡히는 대로 들고나왔는데 나데즈다의 키였다. 모터사이클에 시동을 걸자 나데즈다가 현관문 밖으로 뛰쳐나왔다. “나 내일 일 나간다고!” 파티마는 나데즈다의 말을 무시했다. 누군 일 안 하냐고. 속으로 대꾸하면서 도로로 나가자 더위가 한풀 죽은 바람이 뺨의 열기를 식혔다. 이대로 어디까지 갈 수 있을까? 파티마는 자기가 멀리 가지 못한다는 사실을 알았으나 당장은 어디든 좋았다.

22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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