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 로드 트립
2024. 10. 21.

Road Trip

 

 

 

Ch 1. Fellow passenger

; 동승객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은 다 든든하겠네요.”

“칭찬인지 약한 소리 하는 건지 헷갈리는데. 어느 쪽이에요?”

“약한 소리면 내치게요? 이미 늦었어요.”

“뭐야? 난 이런 사람 옆에 둔 적 없는데.”

그러자 섀넌이 웃으면서 잔을 들었다.

“건배나 한번 해줘요.”

위스키 잔이 공중에서 가볍게 부딪친다. 술 대신 물이 담긴 유리잔은 투명해서 그 너머로 상대의 얼굴이 잘 보였다. 파티마는 어쩌면 그가 정말로 약한 소리를 하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두앗에 오퍼레이션 마아트 참여 인원의 과반수가 모인 시점이었다. 섀넌 웨인라이트 벨은 파티마가 ‘오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던 사람 중 하나였으나 두앗에 왔다. 전보다 수척한 얼굴이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말끔한 태도로 일관하던 사람이었는데 묘하게 흐트러져 보였다. 섀넌만 그랬던 건 아니었으나 그들이 알고 지낸 세월 동안 섀넌이 파티마에게 보여줬던 얼굴은 꽤 견고했다. 균열이 낯설게 다가올 만큼. 이 사람도 흔들리긴 하는구나. 파티마는 그들이 얼마나 위험한 길 위에 서 있는지 체감했다.

테이블 위에는 구식 캠코더가 놓여 있었다. 섀넌이 가져온 것이다. 일기장 같은 거라고나 할까요. 섀넌은 캠코더를 어설프게 세워두고는 곧 그 존재를 잊은 것처럼 굴었다. 그래서 파티마도 섀넌의 일기장을 잊었다. 그들은 다른 것은 아랑곳하지 않고 잔을 비우고 다시 채웠다.

“이 모든 게 끝나면 어떤 게 하고 싶어요?”

섀넌이 물었다. 파티마는 콧잔등을 옅게 찌푸리며 손에 든 잔을 흔들었다.

“취할 때까지 술이나 계속 마시고 싶어요.”

“또?”

“그러고 나서 샌드백이나 왕창 때릴 수 있으면 여한이 없겠다 싶긴 한데. 당신은요?”

“여행을 떠나려고요. 먼 곳으로.”

파티마는 테이블을 천천히 두드렸다. 수트를 입지 않고 머리카락을 내리고 혼자 벤치에 앉아 있는 섀넌의 모습을 상상하면서.

“당신이 여행을? 의외네.”

“다들 그런 반응이더라고요.”

“뭐가 됐든 꿈을 이뤘으면 바랄게요. 돌아오는 길에 기념품으로 샌드백도 하나 가져오면 좋고.”

“라저댓.”

퍽 짓궂게 경례하던 섀넌이 팔을 들었다. 그때까지 얌전히 테이블에 놓여 있었던 그의 일기장, 아니 캠코더가 옆으로 쓰러져 있었다. 이거 꺼진 건가? 섀넌이 중얼거렸다. 어디 봐요. 파티마는 그와 함께 캠코더를 만지다가 곧 관뒀다. 이런 건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그래야겠어요. 맹물 위스키 파티는 종료되었다. 함께 테이블을 정리하다 파티마가 문득 물었다.

“혼자 가요? 여행.”

“네. 그래야죠.”

명쾌한 대답이었다.

당신 곁에 있는 사람들.

그때 파티마는 찬의 주눅 든 얼굴을 떠올렸다. 역시 두앗에 올 것을 바라지 않았던 얼굴이었다. 오자마자 사람들을 붙잡고 법석을 떨 줄 알았는데 의외로 찬은 조용했다. 며칠간 코빼기도 안 보이더니 불쑥 나타나서 하는 말이 어떻게 할 것이냐는 거였다. 찬의 얼굴은 불안에 잠식되어 있었다. 그러면 넌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물으니 찬은 잘 모르겠다고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찬은 그 말을 자주 했다. 파티마는 찬에게 차라리 도망가라고 말했다. 그게 너에게도 좋을 거라고. 대답이 없던 찬은 한참 만에 우물쭈물 입을 열었다. 누나, 이번에는 왜 같이하자고는 안 해요…. 파티마는 우울하게 모인 찬의 입매와 처진 눈꼬리를 보다가 말했다. 넌 내가 하라면 다 할래? 내가 뭘 할 줄 알고? 그건…. 망설이던 찬이 입을 다물었다. 파티마는 다시 말했다. 찬아. 나도 너한테 거기까진 안 바라.

라이라도 있었다. 라이라는 자기 감정을 숨기는 데 재주가 없었고 한번 무언가에 빠지면 좀처럼 헤어 나오지 못했다. 몰입은 라이라의 강점이지만 단점이기도 했다. 선배. 사람을 죽였어요. 키라나 와히드가 다음 작전을 일러준 날, 라이라는 혼란스러운 얼굴로 횡설수설 말을 이었다. 사람을 또 죽일까 봐 두렵다고, 자기가 사람을 해친 일이 업보로 돌아올까 봐 두렵다고, 사람의 앙심이 무섭다고 말했다. 해가 없는 지하의 가로등이 두 사람 위에서 깜빡거렸다. 라이라가 파티마의 옷자락을 잡았다. 참가하실 건가요? 조심스러운 목소리였다. 파티마는 그럴 거라고 답했다. 그럼 저도 참가해야겠네요. 파티마는 저를 따라 일어서려는 라이라의 정수리를 꾹 눌러 다시 앉혔다. 그리고 말했다. 도망쳐도 된다고. 남이 한다고 졸래졸래 따라가거나 그러지 말고.

그 애들에게는 정말 거기까지 바라지 않았다. 중요한 순간에 일을 그르치면 안 되니까. 파티마는 찬과 라이라를 제법 좋아했지만, 그 애들의 무른 성격은 이곳에서 하등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니엘을 봐. 걘 자기가 괴물이 되는 게 무섭다고 자기 목숨을 버리려고 했어. 그때 다니엘이 정말 죽어버리기라도 했다면 전황은 더 심각해졌을 것이다. 그런 사건은 동료들의 사기를 꺾는 것으로 모자라 마음을 무너뜨린다. 그런 일이 두 번 일어날 확률은 적지만, 무엇이든 변수는 적은 편이 좋았다.

3월. 치안국은 엘레노어에 대한 공세를 멈추지 않았고 오퍼레이션 마아트의 인원을 새롭게 꾸리려고 했다. 매사냥꾼은 새로운 작전 인원들이 두앗으로 공격해 오는 것을 기다릴 생각이 없었다. 에스퍼들이 유민을 살상하는 이 계획의 실마리는 영자칩의 오류에 있기에 매사냥꾼은 그것을 고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들의 계획은 이랬다. 영자공학연구소에 잠입하여 소장과 협상을 시도한다. 이때 협상 카드를 마련하기 위해 다른 팀은 중앙방송국을 하이잭한다. 정부의 만행을 담은 폭로 영상이 준비된 상태라고 했다. 소장과 얘기가 잘 안 풀릴 시에는 이를 협상 카드로 내밀 생각이라고. 키라나는 에스퍼들에게 동행을 요청했다. 선택은 개인에게 맡기겠다면서.

결정권이 제게 주어졌다면 파티마는 섀넌의 말처럼 약한 소리를 하는 사람을 작전에서 뺐을 것이다. 그러나 결정권은 에스퍼 개인에게 있었고 잘 모르겠다던 찬도, 무섭다던 라이라도, 제 목에 칼을 댔던 다니엘도 작전에 참여하기로 결정했다.

“감당이 안 되잖아. 난 책임 못 져.”

“그걸 왜 네가 책임지는데?”

파티마는 순간 할 말을 잃었다. 나데즈다의 얼굴에 유쾌한 빛이 어렸다.

“너도 좀 달라졌네.”

“이상한 생각하지 마.”

약점을 잡은 사람처럼 구는 모양에 파티마가 인상을 구겼다. 그러나 파티마는 다시 말을 잃었다. 전날 마주했던 새파란 눈동자가 생각나서였다. 그때 제가 한 말이 지금의 것과 똑 닮았다.

얘기는 들었어. 당신이 여기 있는 이유. 에리니스가 대뜸 말했다. 그러고는 파란 눈동자로 파티마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이었는데 파티마는 그가 꼭 제 처지를 비웃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바로 그날 오후 파티마가 갈 곳이 없다던 에리니스를 놀린 것처럼. 아무 생각도 하지 마. 파티마는 면박을 주면서 에리니스의 앞으로 술병을 밀었다. 그들의 테이블에는 이미 술병이 여러 개 쌓여 있었다. 그럼 환기될만한 얘길 해 봐. 에리니스가 선심 쓰듯 말했다. 그래서 무슨 말을 했더라. 별 쓰잘데기없는 말이 테이블 위를 굴러다녔고 술 냄새가 났다.

파티마는 나데즈다를 바라보았다. 나란히 설 일이 없으리라 생각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싫으나 좋으나 그들은 같은 대로변 위에 서 있는 셈이었다. 달려온 길이 다른데도 불구하고 뭇 사람들은 그들을 동행으로 생각할 것이다. 섀넌의 말대로 파티마는 동행을 내칠 수 없었다. 그 누구도.

파티마는 껄끄럽고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사람은 가장 통제하기 어려운 변수다.

“난 일을 망치기 싫은 거야.”

Ch 2. Shape of the house

; 집의 형태

트럭은 도로 한복판에서 멈추었다. 긴 터널을 빠져나와 일반 도로로 진입한 뒤였다. “차가 안 나가요.” 오마리가 말했다. 파티마는 그와 함께 몇 가지를 조작하다가 뒤로 고개를 돌렸다. “마리에케!” 마리에케는 얼마 지나지 않아 수리 도구와 예비 타이어를 들고나왔다. 도로는 한산했다. 간혹 지나가는 차들은 갓길에 멈춰 선 트럭을 궁금해하지 않았다. 그동안 화물칸에 갇혀 있던 에스퍼들은 밤공기를 들이마셨다.

파티마와 오마리는 갇혀 있던 화물들의 얼굴을 한참 만에 다시 마주했다. 다들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나는 됐어. 저쪽부터 챙기지.” 월터는 제게 내민 물을 거절하며 섀넌 쪽을 가리켰다. 섀넌의 얼굴이 창백했다. 오마리가 화물칸에 있던 에스퍼들의 안부를 살피는 동안 파티마는 마리에케에게 갔다. 마리에케는 제 옆에 온 사람이 파티마라는 걸 확인하자 대놓고 미간을 찌푸렸다.

“무슨 말을 하러 온 거야?”

“팔은 괜찮나 보러 왔지.”

언제 다쳤는지 마리에케의 팔에 피가 묻어 나오고 있었다. 옷을 찢어서 되는 대로 지혈을 해둔 것 같았다. “뒤에 약도 있었을 텐데. 그런 건 못 알아봐?” 파티마가 말하자 마리에케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마리에케는 당장이라도 파티마를 물어뜯고 싶은 것처럼 상체를 들었다가 어깨에 긴장을 풀었다. 무언가를 의식한 태도였다. 그의 시선은 파티마의 뒤에 닿아 있었다.

“너랑 둘이 짱박혀 있을 생각은 없으니까 꺼져.”

마리에케가 빠르게 속삭였다. “파티마 씨, 마리에. 두 사람도 물 좀 마셔요.” 카란이 두 사람에게 물을 흔들며 다가왔고 뒤이어 다른 이들이 모여들었다. 파티마는 마리에케의 눈동자에서 분노의 소용돌이가 빠르게 가라앉는 것을, 그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번지는 걸 지켜보았다.

파티마에게 인테리어는 욕망을 조직하는 일이었다. 무엇을 보고 싶은지, 누굴 들이고 싶은지, 어떤 사람이 좋아해줬으면 하는지, 무엇을 대표하고 싶은지. 쓰임새는 다를지라도 모든 공간에는 욕망이 묻기 마련이다. 파티마는 의뢰인에게 많은 것을 물었고 거기서 여러 정보를 뜰채로 떠 올렸다. 그것은 많은 경우 상대를 알아가는 과정이기도 했다.

당연하지만 의뢰인은 대개 어른이다. 아이들은 자기 공간을 가질 수는 있어도 제 뜻대로 공간을 만들 수는 없다. 어떤 아이들에게 집은 족쇄가 된다. 거푸집에 쇠를 부어 자기가 원하는 모양대로 아이를 찍어내길 원하는 사람들이 있기 때문이다. 파티마는 그런 집을 몇 개 알고 있었다.

마리에케 미첼 무어의 집은 2층짜리 저택이었다. 제약 회사를 운영하는 무어 부부는 아웃스커트에 어울리지 않는 커다란 저택을 리모델링해달라고 부탁했다. 낡은 고택은 보수가 필요해 보였고 파티마는 보수 업자를 소개하며 중개료를 더 받아냈다. 보수와 인테리어까지 작업에는 긴 시간이 필요했다. 그간 파티마는 무어 가에 자주 드나들었다. 무어 부부는 요구가 확실한 편이었는데 동시에 두루뭉술했다. 실험실로 쓸 예정이라는 지하실의 조명에는 까다롭게 굴면서 아이들의 방에는 관심이 없었다. 아이 방 인테리어를 꾸밀 때 부부는 파티마의 샘플북에서 하나를 골랐다. 블랙과 화이트 톤. 첫 장에 제시한 가장 지루한 컨셉이었다. 파티마는 더 살펴보라고 샘플북을 뒤로 넘겼으나 부부는 손을 내저었다. “알아서 해주세요.”

지루한 방의 주인공은 첫째 마리에케였다. 마리에케는 파티마를 경계했다. 어쩌다 마주치면 인사만 겨우 하고 지나갔는데 그마저도 부모가 있을 때 한정이었다. 부모가 없을 때 마리에케는 파티마에게 멀리 떨어져서 그저 낯선 사람이 얼른 집에서 나가길 바랐다. 그랬던 아이가 파티마에게 가깝게 다가왔던 날이 있는데 그날은 마리에케의 방 인테리어를 마무리하던 날이었다. 마리에케는 제 방에 시계를 거는 파티마의 뒷모습을 문간에서 지켜보고 있었다. 파티마는 아이를 모르는척하다가 물었다.

“넌 원래 낯을 가리니?”

“….”

“내가 마음에 안 들어?”

“네.”

마리에케는 불퉁하게 대답하고 시계와 파티마를 차례로 노려봤다. 그러더니 그대로 돌아서서 자리를 떠났다. 어이없어. 파티마는 헛웃음을 지었다.

마리에케는 부모의 눈치를 많이 봤다. 제 부모 앞에서는 그렇게 온순하고 착한 딸일 수가 없었는데, 동생인 미첼 역시 또래보다 조숙했다. 파티마로서는 자연스럽게 그들 가족의 불균형한 애정도를 눈치챌 수밖에 없었다. “애들이 부모 말을 참 잘 듣네요.” 그렇게 말하자 무어 부부는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고 부부 뒤에 있던 마리에케는 인상을 썼다.

일이 끝난 후 파티마는 무어 가에 다신 발을 들이지 않았다. 수상쩍던 부부의 태도나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은 금세 잊혔다. 번듯한 모던 양식으로 꾸민 2층 저택을 새롭게 기억하게 된 건 10년이나 지났을 무렵이다.

수리공이 된 마리에케 미첼 무어는 불같이 화를 냈다. 파티마가 그에게 부모를 언급한 것이 이유였다.

“당신이 뭘 알아!”

벼락처럼 고성이 날아들었다. 마리에케가 던진 노트가 파티마의 볼에 생채기를 냈다. “미쳤어?” 파티마가 마리에케의 팔을 낚아챘지만 마리에케는 금세 그걸 뿌리쳤다. 휴지, 볼펜. 테이블에 있던 것들을 모조리 쓸어버린 뒤에 마리에케는 성을 냈다. 더는 던질 것이 없었다. “나 미친 거 맞으니까 다신 아는 척하지 마.” 마리에케는 크게 상처받은 사람처럼 불규칙하게 호흡하다 제 얼굴을 쓸고 돌아섰다. 파티마는 마리에케의 감정의 원인을 알 수 없었고 그래서 불쾌했다. 자기가 뭐라고 그렇게 화를 내?

다음날 마리에케는 그날을 잊은 것처럼 굴었다. 그다음 날은 파티마를 보자마자 얼굴을 구겼고 또 다른 날에는 살갑게 인사를 건넸다. 그것이 단순한 연기가 아니라 기억에 문제가 있는 것이라는 걸 눈치챈 파티마는 마리에케를 시험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파티마는 마리에케 미첼 무어에 관해 몇 가지를 알게 되었다. 그가 부모와 연을 끊었다는 것. 그 집의 지하실은 무어 부부가 파티마에게 말했던 것과는 조금 다른 용도로 사용되었으리란 것. 마리에케는 첫째가 아니라는 것(아니, 어쩌면 그가 ‘첫째 마리에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마리에케는 더는 부부의 거푸집에 들어맞는 아이가 아니라는 것.

자기가 거푸집에 맞지 않아서 화가 나는 건지, 거푸집에 저를 맞춰야 해서 화가 나는 건지, 그 부분은 조금 모호했다. 시험하지 않아도 확실한 것도 있었다. 마리에케를 집어삼킨 분노와 증오가 누구를 향해 있는지.

“난 당신이 정말 싫어….”

마리에케는 그 말도 기억하고 있을까? 아마 기억할 것이다.

언젠가부터 마리에케는 파티마를 피했다. 파티마는 마리에케가 더는 기억을 잃지 않는다는 걸 눈치챘다. 어떻게 된 것인지, 얼마나 기억할지는 몰라도 마리에케는 파티마와의 대화를 기억했다. 그렇다면 다른 것도 기억할 테다. 이를테면 그 자신의 시작점이라든가.

삶의 많은 부분은 어쩔 수 없는 것들이 결정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것을 능숙하게 흘려보내지만,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다. 마리에케 미첼 무어가 그런 사람 중 하나였고 파티마 사이코도 그랬다.

“거울이나 봐, 마리에케.”

그래서 파티마는 마리에케가 거울을 들여다보길 싫어한다는 걸 알았다.

Ch 3. Put all the cards on the table

; 모든 패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다

차는 검문소 앞에서 정차했다. 검문소 직원은 트럭이 늦게 도착한 이유나 담당자가 바뀐 이유에 관해 꼬치꼬치 묻다가 운전석 창문으로 서류를 들이밀었다. 서명을 남겨달라고 했다.

“그럴게요. 번거롭게 해드려서 죄송해요.”

오마리가 직원이 넘긴 서류를 받았다. 그러나 다음 순간, 직원의 표정이 기묘해졌다. 파티마는 그의 시선을 쫓아갔다가 백미러의 핏자국을 발견했다. 불과 몇십 분 전 백미러에 팔을 걸친 채 느물거리던 마리에케의 얼굴이 떠올랐다. 직원의 어깨가 긴장으로 굳었다. 파티마가 무어라 수습하기도 전에 화물칸에서 요란한 재채기 소리가 들렸다. 직원의 손이 허리춤으로 내려갔다.

“문 열어.”

파티마가 오마리에게 속삭였고 오마리는 곧장 문을 열었다. 바로 앞에 서 있던 직원이 그를 피하지 못하고 뒤로 나동그라진다. 오마리는 차크람을 매만지면서 그의 앞에 섰다.

“무기를 쓸 일이 없길 바랐는데요.”

“겁만 주고 제압해. 뭣하면 기절시키든지.”

파티마가 화물칸을 두드리자 화물칸에서 대기하고 있던 에스퍼들이 밖으로 뛰쳐나왔다. 섀넌이 먼저 방아쇠를 당겼다. 허공을 가르는 소리에 당황한 직원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에스퍼들은 빠르게 진열을 갖췄다. 록산나를 필두로 한 몇몇은 곧바로 연구소로 진입했다. 수면가스와 EMP로 내부를 무력화하겠다는 계획을 사전에 전달받은 터라 다른 에스퍼들은 그들이 먼저 연구소에 들어갈 수 있도록 엄호했다. 상대가 대처할 시간을 주어서는 안 됐다.

비살상 원칙을 준수하면서 적을 제압하는 건 조금 까다로웠다. 파티마는 어둠 속에서 괜히 총알을 허비하는 대신 상황을 지켜보는 데 더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그래봤자 순식간이었다. 사람들이 서로 엉키고 총알이 날아가고 신음과 서로를 부르는 목소리가 정신없이 오갔다. “진입했어요.” 카란에게서 미리 건네받은 무전기 속에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파티마는 당장 눈이 마주친 섀넌에게 사인을 보낸 뒤 눈을 돌렸다. 거기에 마리에케가 있었다. 그는 눈앞까지 도달한 적을 보지도 못했다. 파티마는 마리에케 앞에 서 있던 경비를 발로 걷어찼다. 장정 한 명이 바닥으로 쓰러지자 마리에케가 눈을 깜빡였다. 꼭 마법에서 깨어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싸울 땐 앞을 봐야지. 마리에케.”

“당신이 뭔 상관이야.”

“적어도 여기선 팀이니까?”

마리에케는 눈도 마주치기 싫은 듯 고집스럽게 시선을 내렸다. 피가 튄 겉옷이 그의 시선 끝에 닿았다. 파티마는 방아쇠를 당겼다. 막 두 사람의 곁으로 다가오던 자가 허벅지에 총을 맞고 무릎을 꿇었다. 마리에케가 눈을 들었다. 

연구소를 진압하는 것은 순조롭게 풀렸다. 그러나 막상 연구소장과의 협상이 난항이었다. 키라나 와히드는 고집스럽게 연구소장을 밀어붙였고 무장한 매사냥꾼과 에스퍼에게 둘러싸인 연구소장은 쉽사리 말을 꺼내지 못했다.

“거기까지 해. 여기까지 와서 다 그르칠 셈이야?”

월터가 키라나를 향해 경고하듯 말했다. “저쪽이 이 정도로 겁먹을 인간인 것 같아?” “키라나.” 곁에 있던 매사냥꾼이 키라나를 말렸다. 키라나가 마지못해 물러나자 록산나가 품에서 무언가를 꺼냈다. 록산나는 준비가 철저했다. 꼭 이날만을 위해 준비한 사람 같았다. 연구소장이 벌인 범죄 자료며 연구윤리 위반에 관한 자료들은 하루 이틀 준비한 것이 아니었다. 알고 있었어? 파티마가 입 모양으로 월터와 카란에게 묻자 카란은 그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월터는 대답하지 않았다. 록산나와 함께 일한 시간이 많은 두 사람은 연구소 진압 작전에서도 록산나와 많은 것을 공유하며 앞장섰던 터였다. 파티마는 어깨를 으쓱이고 록산나를 지켜보았다.

“적어도 협상을 하려면 상대의 도망갈 길을 모두 막은 뒤 그자의 목숨과 가족의 목숨줄을 모두 쥔 채 협박을 해야 들을까 말까인데 이 정도도 준비 안 한 건 아니지?”

“저는 그냥 지금 여러분이 이러시는 게 정말 갑작스럽고….”

파티마가 연구소장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괜찮아요. 당신은 협박을 받은 것뿐이야. 그렇죠?”

“….”

“재촉할 생각은 아니지만, 지금 중앙방송국에도 우리 친구들이 있어요. 록산나가 가진 것보다 더 무서운 게 방송으로 나갈지도 모르는데.”

카란에게 슬쩍 눈짓하자 그가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이대로 협조해 주시면 저희 사이의 조율도 원활하지 않겠어요. 자료도 당신 사정을 봐드릴 수 있을 테고요.”

록산나의 눈썹이 잠시 꿈틀거렸으나 그는 팔짱을 낀 채 손에 쥔 자료를 한번 흔들기나 했다. 연구소장은 주름이 잡힌 제 미간을 꾹꾹 눌렀다. 한숨과 같은 목소리가 작게 흘러나왔다.

“제게는 결정권이 없어요. 저도 지시받는 입장에 불과하다고요.”

“현명하게 생각하셔야죠. 이번 일을 시작으로 곧 정권 자체가 뒤바뀔지도 모릅니다. 당신 같은 인재가 이 일로 인해 숙청된다면 꽤 아쉬울 것 같은데. 본인도 그렇게 생각 안 하시나요?”

섀넌의 말에 연구소장이 침을 삼켰다. 정적 속에서 뒤에 빠져 있던 마리에케가 쐐기를 꽂았다.

“이미 답은 나온 것 같은데. 선택만 하면 되지 않겠어?”

“전화하게 해주세요.”

그는 영자칩의 권한이 있는 상부에 보고해야 한다고 말했다. 거짓말 같지는 않아요. 오마리가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잠시간의 의논 끝에 그들은 연구소장이 상부에 전화하도록 두었다. 연구소장은 연락용 단말기를 손에서 한번 놓쳤다. “여기요.” 오마리가 그에게 단말기를 주워 건네주자 연구소장은 손에 묻어나오는 땀을 닦고 다시 기기를 손에 들었다.

잠시 후 연구소장은 뜻밖의 이야기를 전했다. 영자칩 오류를 수정하기 위해서는 코어에 위치한 호루스의 눈을 일시적으로 정지시켜야 한다고. 연구소장과 연락한 ‘상부’에서는 매사냥꾼들의 요구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그들을 코어로 초대하겠다고 했다.

“내일 저녁에 차를 보낼게요.”

눈동자들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그날 밤은 유독 길었다. 다음날 코어로 갈 지 여부를 두고 갑론을박이 한창이었다.

“어떻게 할 거야.”

빅터의 목소리였다. 파티마는 굳이 그를 돌아보지 않고 신발끈을 묶었다.

“계속 가야지.”

“의외네. 전에는 모르겠다더니?”

“내가 언제?”

“우리가 벌써 오락가락할 나이냐?”

파티마는 빅터의 말을 웃어넘겼다. 고개를 들자 피곤한 낯의 빅터가 벽에 기댄 채로 파티마를 바라봤다. 파티마는 오랜 농담을 기억해냈다. 빅터가 경찰부에서 일하던 시절의 얘기였다. 감방 갈 일 생기면 연락할 테니 곱게 넣어달라느니, 사식은 챙겨달라느니, 그런 농담. 

“잘하면 같이 감방 가겠네?”

“난 안 가. 경찰부로 복직할 거야.”

“거길 왜 가. 자수라도 하게?”

“자수는 무슨. 너네 감옥 안 가게 할 방법이 그거밖에 더 있냐.”

파티마는 가볍게 혀를 찼다. 너도 참 미련하다는 말은 덤이었다. 파티마는 체제가 전복된다고 정의가 구현되리라 생각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아수라장 속에서도 사람들은 새로운 규칙과 법을 만들 것이다. 각자의 가치를 증명하고 혼돈을 통제하려는 욕구는 인류의 유구한 본성이었다. 그리고 빅터는 그 혼돈을 염려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언제나처럼. 파티마는 빅터를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만큼 선선히 그의 결정을 받아들였다. 그들 사이에 깊은 이해가 필요하지는 않았다. 미련한 게 하루 이틀 일인가.

“그럼 잘 부탁해.”

“퍽이나.”

빅터는 피식 웃고는 등을 돌렸다.

다니엘 로스는 누구보다 열심히 사람들의 의견을 묻고 다녔다. 그는 파티마가 코어에 갈 것이라는 얘기를 듣자 놀란 표정을 지었으나 말리지는 않았다. 붙잡지 않았지만 다니엘은 사람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새겼다.

 “우리가 안 갔으면 좋겠어?”

 “마음 같아서는 혼자 다녀오고 싶어요.”

그럴 수 없으니까 따라간다는 듯한 태도였다. 파티마 씨도 제게 소중해요. 다니엘이 며칠 전 했던 말을 생각하자 파티마는 그가 왜 저를 찾아왔는지 알 수 있었다. 가는 사람들의 얼굴을 되새기고 여차할 때 그들을 책임지고 싶은 것이다. 파티마는 기가 찼다. 웃겨. 누가 누굴 걱정하고 책임져. 제 몸뚱이 하나 건사 못할 것 같은데. 파티마의 눈빛을 의식했는지 다니엘은 곧바로 ‘조심할 것’이라며 변명하듯 말을 늘어놓았다.

“그래. 혼자 가서 뭘 해? 사람 많으니까 이상한 짓이나 하지 마.”

“이상한 짓 하지 않을게요.”

파티마는 다른 사람들이 그를 책임져야 할 경우의 수를 생각했다. 파티마는 다니엘을 신경 쓸만한 사람들을, 그의 또래들을, 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을 하나씩 떠올리다 말았다.

다니엘 로스는 사랑을 증명하고자 한다. 빅터 모렐리는 자신의 신념을 증명하려 한다. 바르톨로는 새로운 시대의 가능성을, 나데즈다 사이코는 정의를 증명하고 싶다.

파티마는 카란에게 네 가치를 증명하라고 요구한 적이 있다. 사람의 가치. 그것은 파티마 사이코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것 중 하나였다. 무언가를 증명하기 위해서는 타인이, 세상이 필요하다. 그건 파티마 사이코에게도 마찬가지였다. 파티마에게는 제가 이길 수 있는 세상이 필요했다. 결승선을 지났을 때 누가 승리를 거머쥘 것인지가 중요했다.

그러나 동시에 파티마는 이 일에서 자기가 이길 수 없으리란 걸 깨달았다.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이 경주였다면 파티마는 커다란 버스 좌석에 앉아 있는 승객의 하나일 뿐이다. 도로가 깔리지 않은 바닥은 울퉁불퉁하고 만석 버스는 가는 내내 덜컹거린다. 각자 다른 얘기를 하는 통에 오디오가 빌 일도 없다. 누군가는 멀미를 하고 누군가는 창밖을 구경하고 누군가는 제대로 운전하라고 윽박지른다. 버스 레이스라니 그런 게 가능한가? 웃기는 일이지만 그들이 벌이고 있는 일이 그랬다. 이 길 위에는 표지판도 끝도 없다. 애당초 파티마는 삶에서 완벽하게 이겨본 적이 없었다. 자신의 가치를 세우기 위한 레이스에는 처음부터 끝이 없었다.

그러나 멈출 수는 없었다. 어려운 싸움에서 이기기 위해서는 자신을 내걸어야 한다.

다음날, 몇 대의 검은 리무진이 약속 장소에 도착했다. 키라나 와히드가 가장 먼저 차에 올라탔다. 그다음으로 또 한 사람, 한 사람.

한 치 앞도 모르면서 사람들은 자리에 앉았다. 이제껏 그래왔듯이.

Ch 4. On the road

; 길 위에서

“어떻게 됐습니까?”

“잘 끝났어요. 어머. 그러고 보니 당신이 운전대 잡는 거 처음 있는 일 아냐?”

“오늘만입니다. 운전사는 언제 뽑습니까?”

“아, 몰라… 일단 가요. 얼른. 얼른.”

파티마가 안톤을 재촉했다. 안톤은 창밖을 흘긋 보고 출발했다. 잠깐만요, 사이코 씨! 창가에 딱 달라붙어 있던 기자의 외침이 물에 잠긴 듯 멀어진다. 파티마는 구두를 벗고 조수석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창 너머로 다양한 색채를 띠는 풍경이 길을 따라 가까워졌다 멀어지길 반복한다.

12월. 연말의 거리는 유독 시끄러웠다. 곧 있을 선거 때문인지 어딜 가나 선거 팜플렛이 보였다. 개중에는 아웃스커트를 정식 거주구로 승격하겠다는 공약도 있었다. 아웃스커트의 정식 거주구 인정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이는 사람들도 보였는데 파티마는 조금 웃어버렸다. ‘아웃스커트에도 삶이 있다.’ 누군가 그렇게 적힌 패널을 들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사냥꾼들과 일부 에스퍼들이 코어로 진입했던 그날로부터 몇 달이 흘렀다. 통제탑 최상부에 진입한 일행은 호루스의 눈을 파괴했다. 알키마드의 통제탑은 그 기능을 잃었다. SNS나 아웃스커트의 지역신문을 중심으로 발 빠르게 현 상황에 대한 고발과 정부비판적인 기사가 퍼지기 시작했다. 세상이 뒤집어졌다. 이어진 일들은 아주 급작스럽게 여겨지기도 자연스러운 수순으로 느껴지기도 했다. 여론이 들끓자 엘레노어 덴버는 치안국장에서 자진해서 사퇴했다. 다른 관료들도 차례로 사퇴하며 연말에 총선거가 치러지게 되었다. 특수부 역시 폐지될지 모른다는 얘기가 나오고 있었다. 원광교는 전보다 더 인기를 얻었다. 두앗의 존재도 밝혀졌는데 유민의 유입이 급격하게 늘고 있다고 했다. 혼란스러운 시기였다.

파티마는 데이터정책부 관료의 횡령 건과 관련하여 증인으로 재판에 참석한 참이었다. 비슷한 일이 그달에만 두 번 있었다. 빅터가 대뜸 조심하고 다니라고 일러준 걸 보면 누군가가 저를 주시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경찰부로 복귀한 빅터 모렐리는 전보다 연락이 잘 안됐다. 그래도 무소식이 희소식이겠거니 생각한다. 섀넌한테 변호사를 소개받긴 했는데. 어쩌면 홀로 여행을 떠나겠다는 그의 계획을 벤치마킹하는 게 좋았을지도 모른다. 피곤이 몰려왔다.

“나 잠깐 눈 붙여도 돼요?”

“예. 도착하면 깨워드리겠습니다.”

눈을 감자 금세 밤이 찾아왔다. 그는 길 위에 서 있었다. 선배, 이쪽이에요. 라이라가 팔짱을 낀 채 어딘가로 걸어갔다. 제가 알아봤는데 여기가 그렇게 맛집이래요! 라이라는 최근 동네를 탐방하는 데 재미를 들인 모양이었다. 집을 구하는 걸 도와주겠다고 했더니 ‘선배 집 근처’를 첫 번째로 꼽길래 웃어버렸던 기억이 났다. 그들은 체리가 토핑으로 올라간 컵케이크를 먹었다. 고개를 들었더니 맞은편에는 아무도 없었다. 한낮이었고 라야의 카페에 놀러 간 날이었다. 라야에게 손을 가볍게 흔들자 라야가 환하게 웃는 얼굴로 화답했다. 라야의 얼굴은 곧 차분하게 가라앉는다. 그의 얼굴은 다니엘의 것으로 변한다. 그리운 사람들이 나타나는 꿈을 꾸긴 하죠. 그게 악몽인가? 저에게는 가끔 그래요. 구체적으로 어떤 식?

이런 게 정말 중요한가요? 다니엘이 물었다. 그러다 곧 그의 얼굴이 격동하는 이의 것으로 바뀐다. 마리에케가 소리쳤다. 당신 앞에선 내가 초라해져. 그래서 불편하고, 그래서 피하는 거야. 됐어? 이제 알면 좀 꺼지라고! 문이 닫힌다. 파티마는 다른 길로 접어든다. 이상해서요. 아무 일도 없다는 게 이상해요. 찬이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한다. 익숙해질 거야. 산 사람은 살아야지. 넌 잘 살 거잖아. 파티마가 말했다.

다시 길 위에 서서 그는 화분을 고르고 있다. 오마리와 마이나가 그를 반긴다. 골목길에서 불쑥 나타난 에리니스가 팔을 붙잡는다. 록산나와 커피를 마신다. 사무실의 짐 더미 사이에서 마르셀이 투정을 부린다. 바르톨로가 거실에서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다. 옆에는 카란이 있었는데 파티마는 두 사람이 다투듯 놀리듯 대화하는 걸 지켜보다가 치킨을 시키자고 제안한다. 하릴 무사와 콰디라 무사가 초대한 저녁 식사가 있었고 에메릭의 가족과 함께했던 밤이 있었다.

차창 너머로 사라지는 풍경처럼 시간이 쏜살같이 흘렀다.

“다 왔습니다. 저기 있네요.”

안톤의 목소리에 파티마는 눈을 떴다. 어깨가 뻐근했다. 물을 마시고 기지개를 펴는 동안 안톤은 가만히 파티마를 기다려주었다.

“아, 피곤한가. 꿈을 꿨네.”

“무슨 꿈을요.”

“비밀, 은 아니고 사실 기억도 안 나네요. 당신이랑 베라랑 사고 났던 날 꿈 꿨던 것 같은데.”

“왜 하필 그날입니까. 불길하게.”

안톤이 한숨을 쉬었다. 파티마는 웃으면서 차에서 내렸다. 오프로드용 SUV 앞에 세 사람이 서서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

“야, 너티. 더 밟아!”

“뭘 밟아.”

거나가 운전석에 앉은 월터의 등을 콕콕 찔렀다. 월터는 꿈쩍도 하지 않은 채 운전대를 옆으로 돌렸다. 거나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과자를 집어 먹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월터가 운전하는 차는 한곳에서 정차했다.

“여기가 전에 얘기했던 곳이야.”

“그래?”

“아직 피곤해 보이는군.”

“괜찮아. 아까 좀 잤어.”

파티마는 하품하며 월터가 가리킨 곳을 보았다. 과거 교회였던 건물의 뾰족한 첨탑 위로 모래가 쌓여 있었는데 그것이 멀리서는 꼭 산처럼 보였다. 월터는 근래 모래 바다를 조금씩 탐험하고 있었다. 파티마는 월터에게 괜찮은 게 있으면 보여달라며 카메라를 선물했는데 이 첨탑이 월터가 사진으로 보여줬던 것 중 하나였다. 오늘은 월터가 같이 나가보지 않겠냐고 제안해서 드라이브를 나왔다. 둘 옆에서 함께 창밖을 구경하던 도미노가 물었다.

“트럭 면허는 왜 딴 거야?”

월터를 두고 하는 질문이었다. 월터가 1종 트럭 면허를 땄다는 얘기가 며칠 전 그들의 대화방 주제였다.

“그럴 일이 있었다.”

“음. 그럴만한 일이 있었지.”

파티마가 웃으며 거들자 거나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러고는 기다렸다는 듯 투덜거리기 시작했다. 아, 또 둘만 아시겠다. 그래서 그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정말 얘기 안 해줄 거냐. 고용주님도 너무하다. 뭐 그리 어렵다고. 이미 다 알려진 거. 저번에 보니까 인터뷰도 하셨더만.

“저도 궁금하긴 합니다.” 조용하던 안톤이 거들었다.

“다들 벼르고 있었나 봐?”

“좀.”

“난 뭐 얘기하고 다니는 성격이 아닌데.”

파티마가 말하자 세 사람은 월터를 향해 눈을 돌렸다가 그냥 창밖을 봤다. “뭘 바라.” “안 바랐어. 응.” 월터와 거나의 익숙한 대화가 이어졌고 파티마는 웃음을 터뜨렸다.

“다시 출발할까.”

“그래. 어디까지 갈 거야?”

“갈 수 있을 만큼.”

월터가 대답했다. 그러나 3초 후 헛바퀴 도는 소리가 다섯 사람의 귀를 메웠다. 차가 앞으로 나가지 않았다. 월터가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지금은 안 되겠군.”

“실화야?”

“내려서 밀어야겠어.”

차 안에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바퀴가 돌 때마다 모래 먼지가 그들을 비웃듯 파도처럼 넘실거렸다.

 


Eurythmics, Annie Lennox, Dave Stewart - Sweet Dreams (Are Made Of Th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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