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시는 옷장을 연다. 판에 박힌 평범한 옷들을 헤집던 도로시가 한 군데에서 멈춘다. 그곳에 반질반질한 가죽 재킷이 있다. 거울에 대보는 일은 없다. 이 재킷을 입은 도로시 데커 제닝스가 어떤 모습인지는 이미 잘 알고 있으니까.
아난케가 빌려주었던 가죽 재킷은 도로시의 옷장에서 꽤 오랜 시간을 보냈다. 연락처를 알면서도 섣불리 연락하지 못한 건 왜일까? 이건 그냥 약속이 아니라 도로시가 꼭 지켜야만 하는 약속이었다. 도로시는 이런 약속은 칼같이 지키자는 주의다. 그런데… 그런데 왜….
모르겠다. 상관없어. 오늘은 돌려줄 거니까.
도로시는 워크맨과 가죽 재킷을 종이봉투에 담아 밖으로 나섰다. 오늘은 아난케와 약속이 있는 날이다.
All that Glitters is not Gold, But…
CAST
Dorothy, Ananke
“헉, 헉….”
“벌써 지치면 어떡해! 그래도 전보단 좀 는 것 같다?”
“그, 그래요?”
도로시는 무릎에 손을 얹은 채 가쁜 숨을 뱉었다.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난케가 팔짱을 끼고 도로시를 내려다본다. “좋아하긴 일러. 아직….” 커다란 개가 두 사람 곁을 정신없이 뛰면서 맴돈다. 한창 잘 놀다가 갑자기 멈춘 인간들을 재촉하는 모양새다. “루비. 기다려.” 아난케는 쪼그려 앉아서 루비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나도 힘들어 보이지 않는 아난케의 얼굴과 즐거워 보이는 루비를 바라보며 도로시는 깊게 심호흡했다. 같이 뛰었는데 어쩜 이렇게 다르지? 아난케는 도로시를 기다리다가 벌떡 일어났다. “준비됐지?” 그치곤 오래 기다린 것이지만, 도로시에게는 약간 부족했다. “잠, 잠깐만요….” “안 돼~ 이제 집까지 안 멈출 거야!” 아난케는 장난스럽게 웃으며 가볍게 발돋움했다. “아….” 도로시는 어쩔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아난케의 말처럼 두 사람은 ‘집’까지 뛰었다. 도로시는 아난케를 따라 그림 같은 2층 주택으로 들어갔다.
“물 가져다줄게.”
아난케는 즐거운 양 휘파람을 불며 부엌으로 갔다. 도로시가 힘들어하는 모습이 웃긴 모양이었다. 도로시는 남의 집이라는 것도 잊고 소파에 풀썩 앉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도로시는 제가 들어온 집을 둘러보았다. 이곳은 아난케의 셋째 언니라는 안드레아의 집이다. 안드레아가 집을 비운 동안 아난케는 안드레아의 개 루비를 챙길 겸 이곳에서 머물고 있다고 했다. 이거다! 도로시는 안드레아네 집에 들러서 물건들을 돌려주겠다고 다시 약속했다. 아난케의 예의 ‘아지트’라든가 그의 집이나 일하는 곳… 모두 찾아가긴 영 불편한 공간이다. 그러나 여긴 달랐다. 로얄 썬 베이의 2층 주택에선 무슨 ‘특별한’ 일도 벌어지지 않을 것 같았고 무엇보다 지금은 아난케밖에 없으니까.
“안드레아…는 혼자 사나요?”
“응. 좀 별나지?”
“별날 것까지는…. 몇 살인데요?”
“스물일곱.”
“그 정도면 충분히 독립할 나이죠.”
스물일곱이면 저보다 어린 나이였다. ‘자기 나이가 몇 갠데!’ 문득 베아트리체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도로시는 여전히 엄마들의 집에서 머무는 제 처지를 상기하고 괜히 머쓱해졌다. 하지만 아난케는 나이가 몇 개인지는 신경쓰지 않는 투로 입을 열었다.
“그래? 그래도 우리 집은 다 같이 지낸단 말야. 언니만 혼자 독립해 나온 거라구.”
“아, 그럴 수도 있죠. 그럼 가족들이 섭섭해할 수도 있죠.”
“뭐. 난 별장 생긴 느낌이라 좋지만~ 아. 이리 와 봐.”
아난케는 도로시를 데리고 안드레아의 집을 구경시켜줬다. 따뜻한 우드 톤에 세련된 인테리어가 꼭 드라마에나 나올 것처럼 생긴 집. 여기저기 손 닿지 않은 곳이 없어 보였다. 아난케가 꺼내는 안드레아와의 일화들도 하나같이 좋아 보여서 도로시는 기분이 이상했다. 이럴 때 보면 정말 평범하게 행복한 가족처럼 보이는데.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도로시는 이제 아난케가 누군지 안다. 아난케 고메즈 바르보사. 황금빛 행운! 그는 지하 격투장 몰테 도라도의 스타 선수고 고메즈는 가족 사업으로 돈을 버는 갱단의 이름이다. 화목하고 사이좋은 가족과 무서운 범죄 조직이 동일한 사람들의 집단일 수 있다니. 마피아들이야 패밀리 운운하며 가족들을 끔찍이 여긴다고는 들었지만(이건 영화에서 얻은 지식이다.)… 현실에서는 좀처럼 상상하기 어려운 그림이었다. 따뜻한 아이스 아메리카노 같은 거랄까. 도로시는 아난케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아직 갈피를 못 잡고 있다. 지하 격투장에서 싸우는 아난케의 모습을 구경하러 갈 생각도 없다. 그가 위험한 사람이라는 걸 처음부터 알고 만났다면 피했을 텐데. 도로시의 눈에 아난케는 여전히 화려하게 빛나는 사람이다. 또 유쾌하고 함께 있으면 즐거운….
도로시는 장식장 앞에서 멈춰 섰다. 한눈에도 비싸 보이는 장신구들이 눈길을 사로잡았다. 저런 걸 걸치는 사람은 어떤 사람일까? “안드레아는 직업이 뭐예요?” 아난케는 그가 몰테 도라도 소속의 주치의라는 대답을 돌려줬다. 젊은 나이에 주치의라니. 이 집안사람들은 왜 전부 잘났지? 도로시는 루비가 박힌 귀걸이를 하고 일하는 안드레아를 상상해본다. 그는 아름답고 세련됐으며 현명하다. 선수들의 부상을 대하는 거라면 강단이 있어야 할 테고… 일하는 중에는 귀걸이 같은 건 빼둘지도 모르겠다. 도로시의 시선을 눈치챈 아난케가 옆으로 와서 루비 귀걸이를 가리켰다. 우아하고 고급스러운 디자인이었다.
“이건 내가 선물한 거.”
“그래요?”
“응. 독립 축하 선물로. 예쁘지?”
“네. 예뻐요. 안목이 좋네요, 아난케.”
“그래? 그렇지?”
아난케가 기분 좋다는 듯 웃었다. 도로시는 그런 아난케를 바라본다. 장식장 옆 유리문에 두 사람이 나란히 비쳤다. 도로시는 새삼스러운 진실을 깨닫는다. 아난케 고메즈 바르보사는 도로시 데커 제닝스와는 다른 사람이라는 것. 그가 어느 곳에 있든 저보다 빛나리라는 것. 그건 절대 변하지 않는 진실이었다.
이상하다. 명치가 답답하다.
도로시는 제게 어울리지 않는 것들 앞에 서면 불안하다. 분수에 맞지 않는 옷, 분수에 맞지 않는 꿈, 분수에 맞지 않는 돈, 분수에 맞지 않는 사람. 도로시가 불안에 대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다. 도로시가 애용하는 방법은 피하는 것이다. 가죽 재킷을 벗어 던지고 영화감독 따위는 꿈꾼 적도 없다고 말하고 저런 사람들과는 친구가 될 수 없다고 선을 긋고 문밖에서 들리는 비명을 모르는 척하고…. 그렇게 보통의 도로시는 비겁한 사람이 되길 선택한다.
두 달 전부터 도로시는 돈을 쓰기 시작했다. ‘토요일 밤’의 부수입이 도로시에게는 너무 버거웠기 때문이다. ‘토요일 밤’의 부수입은 들쑥날쑥하다. 어떤 때는 하루 봉급과 맞먹고 어떤 때는 빈손이며 아주 가끔은 새 워크맨을 살 수 있을 정도의 돈을 받는다. 액수가 클수록 무서웠지만, 액수만이 문제였던 건 아니다. 돈을 받아오는 토요일이면 도로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그 돈은 찝찝했다. 꼭 서랍에 쌓인 모래알이나 지워지지 않는 옷의 얼룩처럼. 불안했다. 그러나 그 돈으로 산 것들은 조금 달랐다. 새 물건에는 얼룩이 없었다. 꺼끌꺼끌한 모래알이 붙어 있지도 않았다. 그것들은 온전한 제 것이었다. 도로시의 불안은 자주 명치를 괴롭혔는데, 새 물건을 사고 나면 불안감 옆에 기묘한 만족감이 들어찼다.
불안과 만족을 한데 버무린 덩어리. 도로시는 그 기묘한 덩어리를 옛날부터 알고 있었다. 다니엘의 재킷을 뺏어 입고 다른 사람이 된 양 해변에 놀러 가던 나날들. 제스에게 자신을 영화감독이라고 소개했던 순간. 그때 명치를 괴롭혔던 덩어리도 그것이었다. 그 덩어리는 명치에 둥지를 틀고 나날이 몸집을 불리고 있었다. 불안감이 만족감보다 훨씬 몸집이 크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도로시는 살이 뒤룩뒤룩 찐 불안을 덮기 위해 뭐라도 해야 했다.
그러니까 이건 전부 그 덩어리 때문이다. 가죽 재킷을 돌려주기 싫었던 이유도, 반짝거리는 루비 귀걸이를 주머니에 넣는 이유도. 다른 이유가 있어서가 아니다. 전부 그 몹쓸 덩어리 때문이다.
“자기, 이거!”
아난케가 멀리서 소리쳤다. 도로시는 화들짝 놀라 장식장을 닫았다. 잠깐. 내 손에 지금… 내가 귀걸이를 손에 들고 있지 않았나? ‘다시 돌려두면 되잖아.’ 머릿속 목소리가 도로시에게 속삭였지만, 도로시는 그걸 무시했다. 왜인지는 알 수 없었다. 도로시는 자연스럽게 루비 귀걸이를 주머니에 집어넣고 아난케가 부르는 곳으로 걸어갔다. 명치가 갑갑하게 조여오고 심장이 목구멍에서 뛴다.
“네. 가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엉망이 되어가고 있다.
Labi Siffre - I Got Th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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