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약~간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Life is Beyond Our Script

 

CAST

Dorothy, (Jess)

 

 

 

 

 

 

“택시 드라이버?”

“네. 몇 년 전에 본 기억이 있는데 문득 생각나서요.”

 

제스가 카운터에 비디오를 올려두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오늘은 그 스토커 없어요?”

“아… 네. 아직 출근 안 했어요.”

“음… 있으면 옆에서 도끼눈 뜨고 봐줄까 했는데. 좀 아쉽네. 도티, 그보다 오늘 끝나고 시간 어때요? 괜찮으면 같이 저녁 먹어요.”

“좋아요.”

 

도로시는 웃으며 비디오를 제스에게 돌려주었다. 루미를 벌써 몇 달째 스토커로 만드는 건지. 명치가 아팠으나 그 정도는 감수할 수 있었다. 아니, 사실 아니다. 도로시는 제스에게서 자주 도망치고 싶다. 제스와 함께하는 시간은 즐겁지만, 함께하는 동안 내내 물을 엎지르고 그걸 모르는 체하는 기분이다. 제가 엎지른 물을 제스가 발견하는 것도 시간문제 같다.

나는 언제까지 이 거짓말을 감당할 수 있을까.

 

 

 

 

 

*

 

 

 

 

 

택시 운전사 트래비스가 택시를 몰고 뉴욕의 밤거리를 쏘다닌다. 뿌옇게 번지는 밤의 조명.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트래비스의 눈으로 바라보는 뉴욕은 ‘냄새나는 하수구 같은’ 도시다. 트래비스는 밤거리의 인간군상을 차창 너머로 구경하며 독백한다. “쓰레기는 밤에 쏟아져 나온다. 매춘부, 깡패, 남창, 호모, 게이, 마약 중독자… 인간 말종들. 언젠가 저런 쓰레기들을 씻어내 버릴 비가 쏟아질 것이다.” … 영화 〈택시 드라이버〉의 초반부다. 이 영화에는 44구경 매그넘이,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정치인이, 냄새나는 도시가, 그리고 붉은 피가 등장한다.

 

냄새나는 하수구 같은 이 도시를 청소해 달라고 대통령 될 사람한테 당부하고 싶어요. 어떨 땐 인간쓰레기 냄새가 너무 심해서 두통으로 미쳐버릴 정도죠. 대통령이 화장실 물 내리듯 말끔히 씻어내려야 합니다.*

릭. 마이어를. 끌어내려야. 합니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에게. 복수합시다.

친애하는 시민 여러분. 라 미아주는 지금, 음해와 왜곡의 먹구름에 삼켜졌습니다. 저, 릭 마이어는….

 

릭 마이어가 연설대에 올랐을 때 도로시는 트래비스를 떠올렸다. 40인의 집요정을, 쌔러데이 나잇의 한정판 진열대에 진열된 ‘선전 연상’과 밴 카운슬러의 머리를. 복잡한 머릿속에는 다른 여러 장면이 함께 겹쳐졌지만… 지금은 여기까지만 얘기하도록 하자. ‘아무 일도 없겠지?’ 도로시는 왠지 모를 불안감에 사로잡혔다. 어떤 예감 따위가 찾아온 건 아니다. 따분한 도로시가 늘 그렇듯 최악의 장면을 상상했을 뿐이다.

릭 마이어의 지루한 연설이 이어지는 동안 도로시는 사람들 사이에 껴서 숨 막혀 하고 있었다. 그날따라 유난히 햇볕이 뜨거웠고, 가까이 붙어 선 사람들 때문에 답답했다. 도로시는 다시 생각했다. 여길 빠져나가야겠어. 빠져나가서…. 그때 귀를 찢을 것 같은 소음이 울렸다.

 

탕!

 

그리고 총성. 도로시는 그 자리에서 얼었다. 총소리보다 무서웠던 건 사방을 뒤덮은 비명이었다. 사람들의 몸이 서로에게 부딪혔다. 밀치고, 당기고, 밀고, 넘어지고, 사람들이 아우성을 치며 광장을 벗어나기 위해 애쓴다. 도로시는 썰물에 휩쓸려 가면서 단상 위를 바라보았다. 릭 마이어의 반짝이는 머리는 마이크에 처박혔다. 비현실적인 붉은 액체가 계속해서 흘러나온다. 영화가… 아니 현실이 반복되고 있다.

 

 

 

 

 

 

제스는 그날 어디에 있었을까. 영화는 봤을까. 나와 비슷한 생각을 했을까?

 

도로시는 침대에 앉아 문득 제스를 떠올렸다.

제스와 연락하지 못한 지 며칠이 지났다. 테러로 엉망이 된 도시에 대한 각본도, 각본을 쓰기 위해 라 미아주에 내려온 감독에 대한 각본도 이제는 없어졌다. 어느 비 오는 날 못난 변명이나 읊으면서 울던 것이 연극의 마지막 장이었다. 거짓말이 들통나면서 연극은 끝났다. 제스는 이제 도로시 데커 제닝스가 얼마나 별 볼 일 없는 사람인지 알았다. ‘나보다 낫고 못한 사람 같은 건 세상에 없어요.’ 상냥한 제스는 그렇게 말해줬지만, 도로시는 그 말을 완전히 믿을 수 없었다. 제스는 분명 저보다 나은 사람이니까. 그래. 그런 부분에서 도로시는 트래비스를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사람을 구분하는 방식이 편견과 혐오에 물들어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처럼 될 생각이 없으면서도. “여길 빠져나가 무언가 하고 싶어.” 도로시는 트래비스와 같은 대사를 살면서 여러 번 읊었다. 사람은 누구나 나은 사람이 되고 싶어 하니까….

 

“도로시. 제스랑 얘기해봤어?”

 

다니엘은 ‘거짓말쟁이 도로시와 제스’ 연극의 마지막 장에 잠깐 등장했다. 그래서 도로시가 제스에게 큰 잘못을 했다는 걸, 그게 거짓말과 관련이 있다는 걸 눈치챘으면서도 그것에 관해 자세히 묻지 않았다. 도로시도 그 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날의 제스가 어머니에게 꼭 사과하라고 말했는데도…. 다니엘이 제스의 얘기를 꺼낸 건 처음이었다. 기다리다 못해서 꺼낸 거겠지. 이거 봐요, 제스. 난 당신보다 못한 사람이라니까요.

 

“도라.”

 

다니엘은 한숨을 내쉬며 도로시를 안았다. 제가 울고 있다는 걸 도로시는 그제야 알았다. 따뜻한 몸이 저를 안자 눈물이 계속 계속 쏟아졌다. 둑이 터진 것처럼. “괜찮은 거야? 얘기가 잘 안됐어?” 다니엘이 안타깝다는 듯 등을 쓸어주었다. 도로시는 ‘거짓말쟁이 도로시와 제스’보다 더 많은 것을 떠올렸다. 무수한 장면이 마음을 할퀴고 지나갔다. 다니엘에게 하지 못했던 모든 얘기를 꺼내놓고 눈물이 바닥날 때까지 울고 싶었다. 어리광을 부리고 싶었다.

 

“더는 사람이 죽는 걸 보고 싶지 않아….”

“… 너 그때 광장에 없었다고 했잖아. 무슨 일이야. 괜찮은 거야?”

“거짓말이야… 봤어. 내가… 내가 두 눈으로….”

“왜 말을 안 했어! 무서웠겠네.”

“… 몰라. 난 왜 자꾸 거짓말을 할까? 제스도… 제스도 그래서 내가 더는 안 보고 싶은 거면. 그러면 어떡하지? 나는….”

 

제스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40인의 집요정에 대한 추측, 트래비스에 관한 해석, 택시 드라이버에 대한 감상을 나누고… 그리고 말하고 싶었다. 영화가 현실의 이해를 돕는 것뿐 아니라 현실이 영화의 이해를 돕기도 한다고. 하지만 어떤 건 영원히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현실이 어떤 식으로 영화를 뛰어넘는지 알아요, 제스? 난 알고 싶지 않았던 것 같아요. 그날 광장에 있었어요? 난 그때 택시 드라이버를 떠올렸는데 혹시 제스도… ‘아니야, 도로시? 넌 날 이해할 수 있어….’ 누군가의 목소리가 떠올랐고 도로시는 우울해졌다. 저 역시 그 사람처럼 타인의 무조건적인 이해를 바라고 있다. 제 잘못 같은 건 생각도 하지 않고, 염치도 없이….

 

그날 밤 도로시는 책을 읽었다.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이 인생이다.』, 하프타임의 점장이 추천한다는 책이었다. 흔한 자기계발서 제목 같았는데 웃겼던 건 그 옆에 점장이 남긴 쪽지였다. ‘기대하신 고객님께 사과드립니다.’ 그걸 보고 도로시는 생각했다. 이러니까 꼭 ‘잘난 인생을 기대하신 고객님께 사과드린다’ 같다고. 인생은 정말 뜻대로 되지 않는다. 도로시는 제스에게 연락하지도, 다니엘에게 모든 얘기를 꺼내놓지도 못했다. 어떤 이야기들은 이제 다이어리에 적지도 못한다. 이런 건 원한 적 없는데. 위로도, 이해도 구할 수 없는 인생은 정말로….

 

책은 그다지 재미가 없었다.

 

 

 

 

 

 

 


 

 

Bernard Herrmann - I Still Can't Sleep / The Cannot Touch Her (Betsy's Theme)



*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1976)
대사를 일부 가져왔습니다.

 

'로그 > Boring Dorothy'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 캐서린을 죽였을까  (0) 2025.06.06
몽타주 E, D, F  (0) 2025.06.06
리미티드 에디션  (0) 2025.06.06
빛나는 모든 것이 황금은 아니지만  (0) 2025.06.06
지금도 카메라는 돌아가고 있다.  (0) 2025.06.06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