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타주 E, D, F

 

 

Montage E

Ananke, Beatrice

 

 

 

 

 

“전부 그 사람 잘못인 걸요.”

 

용의자 E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전해 들었을 때 도로시는 E가 궁금해졌다. “현재로서는 D랑 E가 유력해 보이긴 해요. 범행 동기가 있잖아요.” 미셸에게는 그렇게 말했지만, 글쎄…. 사실 도로시의 깊은 내면은 E가 범인이 아니길 바랐다. 릭 마이어의 성 추문에 휩쓸렸다던, 평소에도 시장에게 앙심을 품고 있었다던, 사건 당시 급하게 도망쳤다던 종업원. 도로시는 후자보다 전자에 마음이 쓰였다. 그의 처지가 저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도로시는 만나기도 전부터 E를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는 착각에 휩싸였다. 전부 그 사람 잘못이에요. 도로시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총을 든 도로시가 방아쇠를 당기는 순간이 머릿속에 재생된다. 전부 그 사람들 잘못이야. 도로시가 말한다.

도로시는 이렇게 말할 생각이었다. 우린 당신을 추궁하러 온 게 아니다. 이야기를 듣고 싶다. 어쩌면 대화가 정말 잘 통해서 E가 생각 이상의 이야기를 들려줄 수도 있다. 그와 릭 마이어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 하고 싶었던 말들, 그가 얼마나 힘들었는지…. 그러면 상상 속 도로시는 E의 손을 잡아주면서 이렇게 말한다. 이해해요. 저도 그런 생각을 할 때가 있어요…. 물론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도로시의 상상은 자주 멀리 간다.

 

 

 

 

 

 

“뭘 그렇게 걱정해? 내가 지켜준다니까!”

 

아난케가 어깨를 부딪쳐왔다. 도로시는 어색하게 굳어 있던 얼굴을 풀려고 애썼다.

 

“나도 지켜줄 거지 자기?”

 

베아트리체가 아난케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그를 흘겨보았다.

 

“당연하지! 자기들은 내 등 뒤에 있어. … 음. 근데 걱정 안 해도 될걸? E는 키가 한 이만하다고 그러던데?”

“그런 건 어디서 들었대?”

“다 아는 수가 있지!”

 

아난케가 웃으며 도로시와 베아트리체 쪽으로 윙크했다. 도로시는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렸다. “저쪽이네, 저쪽.” 순간 어색해질 뻔한 공기를 베아트리체가 무마했다. 베아트리체의 시선이 도로시의 정수리에 닿았다가 멀어진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일이냐면… 세 사람은 지금 E를 만나러 가고 있다.

 

그리고 도로시는 두 사람이 불편하다. 이제 겉만 보고 불편해할 시기는 지나지 않았느냐고? 그건 맞다. 도로시는 두 사람에게 옅은 친밀감을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바로 얼마 전에 도로시가 읽었던 그 책을 떠올려보라. 뜻대로 되지 않는 게 인생이다! 인간관계 역시 마찬가지였다. 도로시는 서로 다른 이유로 두 사람에게 거리감을 느끼고 있었다. 베아트리체는 도로시가 지금 상황을 불편해한다는 걸 눈치챈 모양이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에게 미안한 일이 있던 도로시는 더더욱 마음이 불편해졌고…. 불편하긴 해도 베아트리체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분위기가 더 어색해지지 않을 수 있으니까! 지금의 도로시는 아난케보다 베아트리체가 편했다. 아난케는… 아난케가 눈치채진 않았겠지? 도로시는 아난케에게 숨기고 싶은 게 몇 가지 있다. 제가 숨기는 게 발각되면 안 된다는, 제가 그 일들로 불편해한다는 걸 들키면 안 된다는 생각이 강박적으로 도로시를 괴롭혔다. 도로시는 아무렇지 않은 척 두 사람과 대화하려 애썼다.

 

하지만 말이야. ‘아무렇지 않은 척’은 진짜 너무너무 힘들다. 도로시는 베아트리체와 아난케를 흘긋 돌아봤다. 난 분위기도 망치고 저 두 사람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E의 생각은 어떻게 알겠어? E 앞에서 제대로 말이나 할 수 있겠어? 그 사람이 아무 말도 하기 싫다고 하면 어떻게 할래? 아, 내가 무슨 말을 하기로 했더라…. E와 만나기로 한 카페테리아 앞에 섰을 때 도로시가 챙겨왔던 작디작은 자신감은 아예 증발했다.

 

“세상에. 자기야, 그 드레스 어디서 났어?”

“안~녕.”

 

E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이는 베아트리체와 아난케를 보면서 도로시는 생각했다. 그래도 두 사람이 옆에 있어서 다행이다. 진심으로.

 

“조금만 물어볼게요….”

 

도로시는 E와 아난케와 베아트리체를 지켜보다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Montage D

Arta Lewis, Carrie

 

 

 

 

 

용의자 D는 히어로였다. 이야기는 뻔하다. 제대로 듣지는 않았지만, 대충 이런 내용이리라. 그러니까… 일단 망가진 부족을 다시 세우기 위해 나선 왕자가 등장한다. 왕자는 마법사로부터 전사의 검을 받고 그것으로 위대한 영웅의 힘을 부릴 수 있게 된다. 왕자가 검을 들고 주문을 외친다. 영웅의 힘이여 나에게 오라!!(대충 비슷한 대사다.) 이 대목이 중요하다. 웅장한 음악(“두구두구두구”)과 함께 무지개무늬의 허접한 가림막이 D를 가리고… 다시 나타난 D는 영웅의 모습이다. 빨간색 드로즈, 십자 무늬 장식이 달린 하네스. 어마어마한 대흉근이 돋보이는 근육질 몸! 아이들은 이 장면을 가장 좋아했다. D가 목검을 비장하게 휘두르면 사방에서 웃음소리와 박수가 쏟아진다.

 

“아이들도 몸 잘생긴 외계인을 좋아하네요.”

 

캐리가 속삭였다. 도로시는 비실 새는 웃음을 참지 못했다.

 

“뭐야 뭐야. 둘이 무슨 얘기야?”

“그… 슈X맨 보셨어요? 왜 거기도 몸 잘생긴 쫄쫄이 외계인이 주인공이잖아요….”

 

아르타가 두 사람에게 고개를 기울이면 이번엔 도로시가 속삭였다. 〈슈X맨〉 * . 파란색 쫄쫄이와 빨간색 드로즈를 입은 외계인 히어로가 나오는 영화. 캐리가 쌔러데이 나잇에서 빌린 적 있는 그 영화는 유명했다. “아~ 알지.” 일단 그 외계인 히어로는 몸도 마음도 얼굴도 무척 잘생겼고…. 아르타가 입꼬리를 올리면 세 사람은 의미심장한 표정을 주고받는다. “쉿!!” 오늘의 영웅 앞에서 감히 다른 드로즈 영웅을 생각하고 있던 세 사람은 어린이 관객의 주의를 받고 조용해졌다.

 

무대도 철거했고 용의자로 의심받는 와중에 연극이라니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이냐고? 그러니까 말이다. 연극이 끝났는데도 D는 여전히 연극을 하는 것 같다. 그 점이 도로시의 흥미를 끌었다. 그의 히어로 코스튬은 영웅 연극을 잇기에 효과적이었고 어린이 관객 몇몇은 구경하듯 D를 쫓아다녔다. 뭐, 그게 아니더라도 눈에 띄긴 했을 테다. 빨간색 드로즈에 하네스까지 하고 돌아다니는 사람이 흔하지는 않으니까. 어딜 가든 스포트라이트가 D를 따라다닌다.

도로시는 아르타를 곁눈질로 보았다. 아르타는 클럽에서와는 상이한 차림이었다. 차림새뿐만이 아니라 제스처도 표정도 조금씩은 다르다. 이상할 일은 아니었다. 아르타의 클럽에 놀러 갈 때는 도로시도 평소와 달랐다. 조금 우울한 날, 특별하게 보내고 싶은 날, 차려입은 날, 괜히 목소리를 높여도 될 것 같은 날. 사람들은 때때로 다른 사람이 되곤 한다. 누구나 자신만의 무대가 있다. 그러나 그렇다고 아주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다는 걸 도로시는 뼈아프게 배웠다. 아르타와 캐리 옆에 있던 제스가 어색하게 자리를 떠나는 모습이 머릿속에 떠오른다….

 

“이 사람 거짓말만 한다는 소문이 있던데.”

 

캐리가 입가를 살짝 가린 채로 속삭였다. 도로시는 그의 손에서 반짝이는 반지를 흘긋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대꾸했다.

 

“음… 그래도 물어는 보죠. 혹시 모르니까.”

“그래. 슬슬 지루해~! 얼른 얘기 끝내고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루이스의 윙크가 신호탄이었다. 그들은 약속이라도 한 듯 동시에 일어나서 D에게 다가갔다. 우주의 정의로운 영웅, 위대한 전사, 오늘의 배우! D가 그들을 돌아본다.

 

 

 

 

 

 

 


 

 

Montage F

Arta Lewis

 

 

 

 

 

잠시 〈택시 드라이버〉 로 돌아가 보자. 택시 운전사 트래비스가 택시를 몰고 밤거리를 쏘다닌다. 뿌옇게 번지는 밤의 조명. 거리를 돌아다니는 사람들. 트래비스는 밤거리의 인간군상을 차창 너머로 구경하며 독백한다…. “….” … 트래비스의 눈으로 바라보는 이 도시는 ‘냄새나는 하수구 같은’ 곳이다.

트래비스를 이해할 단서들은 영화에 조각나 펼쳐져 있다. 그는 사람들과 편안하게 대화를 나누는 게 어렵다. 그는 불면증을 앓는다. 그는 극장에서 성인 영화를 본다. 연인들이 자주 보는 영화는 싫다. 모히칸 스타일로 깎은 머리카락, 올리브 색 재킷. 그의 재킷에는 군대식 와펜이 잔뜩 붙어 있다. 그는 군인이었다. 어쩌면 그 시절의 경험으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를 겪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그는 거울을 바라보며 사방으로 총을 겨눈다. “나한테 말한 거야? 나한테 말한 거야? 나한테 말 건 거냐고? 대체 누구한테 말하는 거냐고? 나한테 말하는 거야? 글쎄, 여기 있는 건 나 하나야. X발 도대체 누구한테 말하는 거냐고?” *

그는 연설을 듣는다.

그는 도망친다.

그는 피투성이로 소파 위에 누워 있다.

그는…

대체 그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사실 이건 영화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아마도.

 

 

 

 

 

 

용의자 F는 트래비스를 떠올리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그의 몽타주를 봤을 때, 도로시는 그가 자아도취가 심한 영화광일 거라 생각했다. 그런 사람들에게 영화 같은 삶은 허락되지 않는다. 그러니 저 혼자 망상이나 하는 사람이겠지. 도로시는 F의 몽타주 하나로 그를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나 F가 남긴 흔적은 공교롭게도 계속해서 트래비스를 연상시킨다. 신이 그에게 영화를 허락한 건지, 아니면 본인이 끈질기게 트래비스를 쫓는 건지, 둘 다인 건지…. 도망친 F가 피를 흘리는 채로 발견되었을 때 도로시는 거북해졌다. 피가 너무 많다. 삶은 영화가 아니지만, 어떤 장면들은 영화처럼 반복된다. 차라리 이 모든 게 자아도취가 심한 어떤 영화광의 망상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아르타가 다치던 순간에도 도로시는 있었다. 그때는 어떤 불길한 생각도 하지 않았는데. 불길한 생각 따윈 잊고 사람들 틈바구니에 껴 있다가 아르타에게 인사 한 번이나 하면 족한 하루였는데. 그때도 피가 흘렀다. 아르타만 있어야 할 스포트라이트 밑에 누군가 들어왔다. 비명이 들렸다. 사람들의 몸이 서로에게 부딪히고 밀치고, 당기고, 밀고, 넘어지고, 아우성을 치며 클럽을 벗어나기 위해 애썼다.

 

“계속 물어보고 싶었는데… 퇴원하신 거예요? 그때 많이 다치셨잖아요. 그러니까 그때, 클럽에서….”

“거기 있었어? 아 미안해지네~ 많이 놀랐지?”

“놀라긴 했지만…. 그래도 저보다는 많이 놀라셨겠죠. 몸은 좀….”

 

도로시는 말을 잇다 멈췄다. 루이스가 비밀 얘기라도 하듯이 제 쪽으로 고개를 숙였기 때문이다.

 

“실은… 아직 퇴원한 건 아냐.”

“네??”

“쉿. 비밀이다?”

“아니, 저기, 아프시면 병원에 계셔야죠. 왜 이러고 계세요!”

“F보단 내가 멀쩡할걸?”

 

루이스가 능청스럽게 윙크했다. 그래 보이긴 했다. 하지만… 머리를 다쳤잖아. 혹시 모르는 건데, 무리해서 움직이면 안 되는데… 아니 그런데 환자랑 함께 환자를 보러 왔다니.

 

“아 정말~!!”

 

도로시는 처음으로 루이스에게 큰 소리를 냈다. 코앞에 F가 있다는 것도 모르고.

 

“시끄러워….”

 

F가 얼굴을 찡그렸다. 그가 소음을 싫어한다던 얘기를 기억한 도로시는 곧바로 목소리를 줄였다. F는 루이스 쪽을 힐끔거리며 봤다. “우린 구면이지? 안녕~” 루이스가 미소를 지었다. 도로시도 루이스를 힐끔 돌아봤다. 그래, 시끄러운 곳을 싫어한다는 얘기는 루이스가 전해줬다. 그와 더글라스가 F와 얘기를 나눈 뒤 얻은 정보들이 있었다. 나는 원래 평화로운 걸 제일 좋아하는 여자라고? 루이스는 그렇게 말했고 도로시는 루이스를 믿는 편이었지만….

 

그때 ‘좋은 말’로 물어보신 거 맞나요?

거짓일 수도 있겠군요….

 

더글라스는 중얼거리며 얼굴을 붉혔다. F에게 오기 직전 더글라스와 나눈 대화에서 도로시는 익숙한 감정을 읽어냈다. 그건 부끄러움이었다. 도로시는 세 사람의 대화가 부드럽지만은 않았으리라 예상했다.

 

“또 무슨 얘기가 필요해서 온 거야…?”

 

도로시는 F와 거리를 두고 앉았다.

 

“죄송해요. 시끄럽게 안 할게요. 그냥… … 그쪽이 궁금해서 온 거예요.”

“뭐가?”

“그냥….”

 

그러게. 난 무엇이 궁금해서 이 사람을 찾아왔을까? 도로시는 F가 다친 자리에 시선을 두다가 입을 열었다.

 

“뭐든지… 무엇이든 상관없어요…. 그쪽도 이런 건 싫잖아요? 도와줄 수 있어요. 그쪽이 얘기를 해준다면… 그러니까 거짓말 말고 진짜로 하고 싶은 얘기를요….”

 

 

 

 

 

 

 

 

 


 

* 〈슈퍼맨〉 (Superman, 1978)

연극 줄거리는 우주에서 가장 강력한 남자! ‘히맨(He-Man)’을 살짝쿵 참고

 

* 〈택시 드라이버〉 (Taxi Driver, 1976)

원문: You talkin' to me? You talkin' to me? You talkin' to me? Then who the hell else are you talkin' to? You talkin' to me? Well I'm the only one here. Who the fuck do you think you're talking to?

 

+ 커뮤 이벤트로 살인범을 찾는 거였는데 용의자들이 대중문화 캐릭터 오마쥬여서 영화 오타쿠 컨셉 캐릭터로 그냥 넘어갈 수 없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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