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즈의 겁쟁이 사자

 

 

“오즈가 나에게 용기를 줄 수 있을까?” 겁쟁이 사자가 물었다.

“나한테 뇌를 줄 수 있다면 그럴 수 있을 거야.” 허수아비가 말했다.

“나에게 심장을 줄 수 있거나” 양철나무꾼이 말했다.

“날 캔자스로 돌려보내 줄 수 있다면.” 도로시가 말했다.

“그러면, 너희들만 괜찮다면, 나도 함께 가고 싶어.” 사자가 말했다.

“조금의 용기도 없는 인생은 정말 비참하거든.”

 

프랭크 바움, 오즈의 마법사 (The Wonderful Wizard of Oz)

 

 

 

 

 

 

Cowardly Lions of Oz

 

CAST

Dorothy, Joshua

 

 

 

 

 

 

1

 

3학년 때 학교에서 오즈의 마법사를 연극으로 올린 적이 있다. 그래, 오즈의 마법사! 캔자스 소녀 도로시가 회오리바람에 의해 이상한 땅 오즈로 떨어지게 되는 그 이야기 말이다. 그때 라 미아주 소녀 도로시의 이름은 잠깐 화제가 되었다. “도로시”가 언급될 적이면 아이들은 도로시를 돌아보며 웃었다. 저기 봐, 도로시야. 여기에도 도로시가 있잖아!

관심은 금세 사그라들었다. 도로시는 내심 아이들이 조금 더 저를 돌아봐주길 바랐지만, 도로시는 그때도 눈에 띄지 않는 아이였다. 무대 위의 도로시는 에밀리였다. 허수아비, 양철 나무꾼, 겁쟁이 사자, 북쪽 마녀와 오즈도 모두 어울리는 아이들에게로 돌아갔다. 도로시는 무대에 사용될 소도구를 만들었다.

 

조슈아는 겁쟁이 사자 역할을 맡았다고 말했다. 저는 누나랑 그런 걸 많이 했어요. 누나는 도로시였고 저는 겁쟁이 사자였죠. 머리가 갈색이어서요. 그의 말은 기묘하게 위안이 되었다. 더없이 평범해 보이는 사람이어서였을까. 친구가 없어서 혼자 연극을 보러 다닌다는 점이 공감되어서였을까. 그가 도로시 얘기를 꺼내서였을까. 단지 머리가 갈색이었다는 이유 때문이었을까. 처음 만난 사람이었지만, 도로시는 조슈아에게서 모종의 친근함을 느꼈다. 도로시는 바보처럼 웃었다. 저도 도로시예요. 배역으로 따지면 백 퍼센트 겁쟁이 사자겠지만…. 그러니까 ‘진짜’ 제 이름요. 도로시 데커 제닝스.

그날 밤 도로시는 이불을 찼다. 말이 너무 많았어. 처음 만난 사람한테 어디까지 떠들 셈이야? 게다가 겁쟁이 사자라니! 도로시는 오즈의 도로시가 될 수 없지만, 오즈의 사자도 될 수 없었다. 그야 오즈의 겁쟁이 사자는 사자니까. 그는 밀림의 왕이고 그래서 포효 한 번으로 상대를 겁먹게 만들 수 있었다. 실체는 작은 개 토토에게도 겁먹는 겁쟁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태생으로 따진다면 도로시는 절대 사자가 아니었다. 닮은 거라곤 머리가 갈색이라는 것밖에 없잖아.

 

 

 

 

 

 

2

 

도로시가 병실에 들어섰을 때, 조슈아는 아이의 얼굴을 닦아주고 있었다.

 

“오해하지 말아요.”

“오해 안 했어요.”

 

도로시는 조슈아가 들고 있는 물티슈를 보다가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냈다. “필요해요?” “괜찮아요. 다 끝났어요.” 조슈아는 아이의 턱을 마지막으로 닦은 뒤 물티슈를 버렸다. 그의 손길은 그리 다정하지도 거칠지도 않고 자연스러워서 오해할래야 오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고 보면 내 얼굴을 닦아줄 때도 딱 저런 느낌이었지. 도로시는 시계를 확인했다. 제가 늦은 것은 아니었다.

 

“언제부터 있었어요?”

“얼마 안 됐어요.”

 

조슈아는 도로시의 옆으로 와 앉았다. 그리고 기다렸다. 도로시 역시 아이를 살펴보고 싶다는 걸 이미 아는 사람처럼. 도로시는 조슈아의 눈치를 살피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10대 중반쯤 되어 보이는 갈색 머리 소녀가 침상에 누워 있었다. 피멍이 전부 가라앉아서인지 조슈아가 얼굴을 닦아주어서인지 아이는 괜찮아 보였다. 사정을 모르고 본다면 잠깐 잠든 것으로 착각할 정도였다. 그러나 아이는 벌써 몇 주째 눈을 뜨지 않았다.

간혹 그런 경우가 있습니다. 심각한 상황은 넘겼으니 안심하세요.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무얼 안심하라는 거지? 의사가 ‘안심하라’는 말을 할 때마다 도로시는 속이 답답해졌다. 아이의 잠든 얼굴을 보면 더 그랬다. 묻고 싶은 게 많았다. 넌 누구야? 이름은? 그날 왜 그러고 있었어? 보호자는? 왜 아무도 널 찾지 않는 거야? 우리가 네게 지금까지 쏟아부은 돈이 얼마인지 알아? 넌 언제 일어날래. 무수한 질문의 끝에는 원망이 딸려 나왔다. 그래서 병원에 자주 오지 못했다.

 

“도로시.”

“네.”

“좋은 소식이 있어요.”

 

적당한 때 조슈아가 상념을 끊어주었다.

 

“저번에 엘린이 도와주기로 했다고 얘기한 거 있죠? 도와줄 사람을 한 명 더 찾았어요. 미셸 펠레그리노라고….”

“미셸?”

“아는 사이인가요?”

“네. 가끔 만나는데….”

“그럼 잘됐네요.”

 

조슈아는 엘린과 미셸이 병원비를 지원해주기로 약속했다고 말했다. 몇 주간 도로시와 조슈아의 숨을 턱턱 막히게 했던 그 돈을 말이다. “진짜요?” “그럼 가짜겠어요.” 이렇게 쉽게 문제가 해결되다니 믿기지 않았다. 후련하게 기뻐하면 될 일인데 기분이 이상했다.

조슈아는 어떻게 그 두 사람에게 도움을 구할 생각을 했을까? 도로시 역시 미셸을 알았지만, 도움을 요청할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엘린과는 안면만 텄다.) 그 두 사람이 다른 세계 사람이라는 것도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그래, 엘린은 맥스웨더고 미셸은 펠레그리노였지. 제 의지로 기회를 만들어낸 조슈아를, 선선하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위치의 미셸과 엘린을 생각하니 명치가 콕콕 쑤셨다. “그래도 물어는 봐야죠, 이거….” 구겨진 팸플릿이 이토록 초라하게 느껴질 수가 없다. “그럼요.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내요.” 조슈아가 말했다.

 

조슈아는 빈말을 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받을 수 있는 건 다 받아내자는 말도 진심이리라. 그러니까 묻는 말에 사실대로 말해주리라. 만약 묻는다면…

도로시는 가끔 조슈아에게 묻고 싶었다. 그날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느냐고.

 

 

 

 

 

 

3

 

“어디로 가야 하죠?” 조슈아가 물었다.

 

길을 잃은 얼굴이었다. 막막하고 두렵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 아마 제 얼굴도 그와 비슷할 것이라고 도로시는 생각했다. 그럼 나도 저렇게 피투성이일까? 조슈아의 옷은 피에 젖어 있었다. 그의 품에 안긴 아이에게서 나온 피였다. 아이는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덜컥 심장이 내려앉아 도로시는 고개를 돌렸다. 어디에든 기대어 쓰러지고 싶었는데 그럴 수 없어서 제 양팔을 붙잡고 도로변에 섰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호흡이 거칠었다. 몸은 뜨거우면서 차갑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질 것 같다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가 숨이 막혔다가 온갖 생각으로 머리가 어질어질했다.

그 애는 생면부지의 타인이었다. 우연히 성인들에게 구타당하는 아이를 본 조슈아가 도로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피가 많이 난다고, 경찰에 신고해봤자 신경도 안 쓸 거라고, 같이 가달라고. 제 손을 붙잡고 눈을 맞췄다. 그래서 도로시는 거절하지 못했다. 괜찮아요. 괜찮을 거예요. 도로시는 그 말을 강박적으로 읊조리며 그를 따라갔다. 그들은 거짓말을 하고 허리를 굽히고 맞아준 다음에야 아이를 데리고 그 자리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들은 뛰었다. 쫓기는 사람들처럼 계속 뛰고 또 뛰다가 겨우 멈춰 선 게 지금이었다.

숨이 막혔다. 어떻게 하면 좋지? 거짓말이 내 발을 붙잡으면 어떡하지. 그 사람들이 내 얼굴을 기억하면. 저 애는 어떻게 해야 하지. 병원에 가야 할 텐데. 피가 너무 많다. 벌써 죽었으면 어떡하지? 뛰는 게 아니었어. 택시를 잡아야…

 

“도로시, 집으로 가요. 여기서부턴 제가 알아서 할게요.”

 

조슈아는 도로시보다 빠르게 길을 찾았다. 마음에 드는 답은 아니었다. 그의 말을 듣자 설움이 북받치고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었다. 어떻게 나한테 가라고 할 수 있냐고, 내가 그럴 사람으로 보였냐고 외치고 싶었다. 배신감마저 들었다. 그건 이상한 일이었다. 그들은 아무 사이도 아닌데.

 

“아니에요!” 도로시는 버럭 소리를 질렀다. “… 같이 가요.”

 

그날 밤 그들은 무수한 질문에 맞닥뜨렸다. 택시 기사, 데스크 직원, 의사와 간호사는 어려운 질문들을 잘도 던졌다. 가족이에요? 어쩌다 다쳤습니까? 어떤 관계시죠? 아이 나이는요? 어떻게 된 겁니까? 경찰을 부르지 않아도 되겠어요? 보험은 있나요? 두 분은 무슨 관계죠?

아니에요. 잘 모르겠어요. 몰라요. 두 사람은 그런 식의 대답을 반복했다.

 

 

 

 

 

 

4

 

병원 측과는 얘기가 잘되지 않았다. 도로시가 찾아온 복지센터의 지원금을 받기 위해서는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한다고 했다. 직원은 생면부지의 타인을 위해 두 사람은 어디까지 책임질 수 있느냐고, 감당할 여유는 있느냐고 에둘러 말했다. 정 아이를 돕고 싶다면 ‘진짜’ 보호자를 더 적극적으로 찾아보는 게 어떻겠냐는 말을 들었을 때는 울컥 화가 치밀었다. 그걸 우리가 어떻게 하냐고 따지고 싶었지만 참았다. 병원에서 해줄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그래도 미셸이랑 엘린이 도와준다고 해서 다행이에요.”

 

지난한 대화를 끝마친 뒤에야 그 사실이 진심으로 달가웠다.

 

“제도보다 개인의 선의가 빠르다니 웃기는 일이죠. 저희에겐 잘된 일이지만.”

 

조슈아는 특유의 무덤덤한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어쩌겠어요.” 말해 뭐하냐는 듯 도로시도 그의 말에 동의했다. 문득 일전에 그와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그날 도로시는 조슈아의 일곱 살배기 동생 앤서니를 만났다. 앤서니가 자기 형과 영화를 본 적이 있다면서 곰돌이 푸 얘기를 꺼냈다. 같이 봤다길래 조슈아에게도 감상을 물어봤는데 그는 말을 돌렸다. 여기서 이야기하기엔 좀. 그렇게 말하면서.

 

“전에요… 곰돌이 푸 감상 말해주지 않았잖아요.”

“어… 그거요.”

 

조슈아는 갑작스러운 화제 전환에도 당황하지 않았다.

 

“기억은 잘 안 나는데 동물들 조합이 이상하더라고요. 호랑이랑 돼지였나? 영화 끝날 때쯤엔 몇 마리 안 남을 거라 생각했어요.”

“… 진짜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야기였다. 소년, 곰, 돼지, 당나귀, 호랑이, 토끼, 캥거루, …. 도로시는 곰돌이 푸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을 머릿속에 줄지어 세웠다. 그거야 모아두면 이상한 조합이긴 하지만, 동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했다고? 도로시는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웃었는지 얼굴이 빨개질 정도였다. 이래서야… 이래서야 꿈속의 그들이 도로시와 겁쟁이 사자였다는 얘기 같은 건 꺼낼 수도 없지 않겠는가! (이 꿈에서 도로시 배역은 아직도 깨어나지 않고 있는 그 아이에게 돌아갔다.)

 

“도로시. 그만 웃어요.”

 

도로시를 언제나 현실로 잡아 이끄는 목소리가 옆에서 들렸다. 여전히 무덤덤하지만, 조금은 질책하는 것처럼 들리는, 장난기가 스며든 목소리가.

 

“아, 미안해요. 근데 진짜… 진짜 곰돌이 푸를 보고 느낀 게 그거라고요?”

“왜요. 그럴 수도 있죠.”

“아니. 그렇긴 한데….”

 

조슈아는 입꼬리를 올렸다. 어딘가 안심한 미소였다. 그제야 도로시는 조슈아 역시 눈치를 보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다른 사람들도 자신의 눈치를 본다는 걸 도로시는 자주 잊는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도로시가 조슈아에게 후회하냐고 묻지 않았듯이 조슈아도 도로시에게 그 질문을 하지 않았다. 누구도 묻지 않은 질문이 두 사람 사이를 배회했다. 아이를 구한 날로부터 지금까지 두 사람 사이에는 항상 거리가 존재했다. 아주 가까워질 수도 멀어질 수도 없는 거리. 그 애매모호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도로시는 조슈아를 알아갔지만, 아는 게 많아질수록 모르는 것도 많아졌다. 어쩌면 조슈아도 마찬가지일 테다. 도로시가 확신할 수 있는 건 하나였다. 그들 두 사람은 약속을 지킬 거라는 것. 그건 단순히 정의나 선의에 의한 선택이 아니었다. 잠든 아이는 족쇄처럼 느껴질 때가 많았으니까. 혼자였다면 도망쳤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둘이 아니었다면. 둘이서 약속을 하지 않았더라면.

둘이어서 다행이었다. 둘이어서, 도망치지 않아서, 눈치를 볼 수 있어서, 짐을 나눌 수 있어서, 아이를 죽게 두지 않아서… 조금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어서.

 

“그럼 곰돌이 푸에서 한 명만 고른다면 누굴 고를래요?”

“그거 꼭 골라야 해요?”

“됐어요….”

 

도로시는 조슈아를 힐난하듯 바라보며 걸음을 뗐다. 조슈아는 잠시 기다렸다가 그 뒤를 따라갔다.

 

“같이 가요.”

 

 

 

 

 

 

 


 

 

Judy Garland - Over the Rainbow (Alternate Tak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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