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에는 품위가 없다
2021. 6. 1.

 

 

  그날, 아지지는 영화관에 있었다.

  일전의 《스타워즈》 시리즈를 다 본 뒤 아지지는 우주 전쟁 영화들을 종종 찾아보고 있었다. 스크린을 가득 채운 우주에 대한 낭만이 아름답게 비쳤던 것도 이유의 하나였지만, 더 직접적인 이유가 있다면 전쟁이 이해하기 쉬웠기 때문이다. 엉망진창으로 싸우다가도 단순하게 뭉쳐 진영을 이룬 사람들이 승리하거나 실패하는 이야기. 우주 전쟁 영화들은 아지지에게 낯선 곳에서 익숙한 이야기를 했다. 이해하기 쉬운 한편 남의 일처럼 바라볼 수 있다. 그 점이 아지지를 매번 또 다른 우주 전쟁으로 이끌었다.

  그날도 그런 날 중 하나였다.

  스크린의 두 배우는 화해의 의미로 서로를 껴안고 있었다.

  그리고 화면이 꺼졌다.

  아지지는 등을 곧추세웠다. 척추를 타고 머리끝까지 털이 쭈뼛 서는 감각. 아지지는 자신에게 힘이 있다는 사실을 한발 늦게 떠올렸다. 주의를 기울인다. 자신의 몸은 흐려지고 주변은 선명해지도록. 그러나 불이 꺼졌고 주변에는 아무도 없다는 것만 알 수 있었다. 어둠과 정적 속에서 몇 초간 숨죽였을까.

  [괜찮아질 거야.]

  배우의 음성과 함께 스크린은 다시 빛과 색을 입었다. 아지지는 고개를 들어 스크린의 배우들을 바라본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불현듯 영화에 없던 장면이 떠올랐다. 이른 새벽, 앞치마를 두르던 인물은 왼쪽 검지에 거스러미가 났다는 것을 눈치챘다. 별일은 아니었다. 그는 집안의 창문들을 열어 집을 환기하고, 개의 사료를 챙겼다. 마땅히 해야 할 여러 일을 하는 사이에도 거스러미는 그저 사소하게 불편한 일에 불과했다. 그날은 그러니까 아주 평범한 날이었고, 아지지는 그날을 기억할 이유가 없었다. 영국이 독일에 선전포고를 했다는 소식만 아니었다면.

  그때 전쟁은 아지지에게 아직 먼 곳에 있었고, 사실 전쟁의 서막은 다른 곳에서 시작하지만, 아지지는 그날을 기억했다.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미처 모르는 상태로 거스러미를 뜯어내면서 자신의 수첩에 '영국, 독일에 선전포고.'라고 적었던 날을.

  여지껏 능력을 풀지 않았다는 걸 깨달은 아지지가 주먹 쥔 손을 천천히 폈다. 능력의 부작용으로 속이 조금 울렁거렸다. 방주는 모든 것이 통제된다는 점에서 안정적인 거주지였고 지금 이건 통제 밖의 일이다. 불길한 예감으로 몸이 차갑게 식는다. 아지지는 영화를 종료하고 밖으로 나섰다.

 

 

 

 


 

 

 

 

  그날의 정전 이후 식량과 상품의 공급이 끊겼다. 사람들은 공급을 담당하던 일부 기기들이 고장난 것으로 추측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일부 캡슐도 고장났는데, 아지지의 캡슐도 그 중 하나였다. 아지지는 더더욱 캡슐을 싫어하게 되었다. 캡슐을 여닫고 손으로 만져서 움직이게 하는 행위. 그건 아지지가 일평생 해온 일보다 사소하고 쉬웠는데도 아지지의 일상을 번거롭게 만들었다. 노아에게 문제가 해결되었느냐고 물어도 '원인을 검토 중'이라는 답변만을 받을 수 있었다. 아지지는 자신이 노아에게 알게 모르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사람들은 무리를 짓기 시작했다. 이전에도 삼삼오오 가깝게 몰려다니는 무리가 있긴 했으나 위급상황에서의 무리 짓기는 전보다 급박하고 치졸하게 이뤄졌다. 지금 눈에 띄는 무리는 주로 남들을 협박하고 싸움을 거는 이들이다. 아지지는 방주에서 전쟁의 장면들을 목격한다. 바닥에 코를 박는 사람들, 배를 곯는 사람들과 앓아눕는 사람들, 유령처럼 캡슐 안으로 숨어버리는 사람들…. 영화와 달리 방주의 장면들은 선명하다. 이곳이 아지지의 현실이었다.

  공급이 끊긴 이튿날 아지지에게도 어정쩡한 무리가 생겼다. "이쪽으로 와서 같이 있어요." 무리의 우두머리가 그렇게 말했을 때, 아지지는 무리를 둘러보고 자신의 덩치가 이점으로 작용했으리라는 걸 깨달았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과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조용한 무리. 영리한 자들이 몇몇 눈에 띄었고, 대부분은 그저 머릿수를 채우고 있었다.

  "혼자는 외롭지 않아요?" 우두머리가 한 번 더 말했고, "쓸쓸했는데 잘됐네요." 아지지는 우선 머릿수를 채우기로 했다. 무리의 누군가가 수줍게 미소 지으며 아지지를 반겼다.

  반나절을 그들과 시간을 보내면서 알게 된 사실. 이 무리에는 암묵적인 룰이 있다. 무리에 사람을 초대하는 건 우두머리가 한다. 캡슐 밖에서는 무리를 지어 이동하거나 한곳에 모여 있는다. '새로' 구한 식량은 가장 굶주린 자들에게 먼저 나눈다. 눈에 띄는 행동을 하지 않는다. 문제에 휘말리는 사람은 버린다.

  아지지는 운이 없었다.

  "앞을 잘 보고 다녀야지."

  이죽이는 목소리가 등에 꽂힌다. 아지지는 바닥을 짚고 무릎을 세워 천천히 일어섰다. 수줍게 미소 지어주던 이와 눈이 마주쳤지만, 그 눈은 금세 다른 곳으로 향했다. 직전까지 함께 있던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들보다 더 철저하게 아지지를 외면했다.

  아지지는 주변을 살펴봤다. 목소리가 큰 사람이 눈에 띄는 법이다. 며칠 새 다치는 사람들이 많았지만, 실제로 폭력을 행사하는 사람의 수는 많지 않았다. 가장 많은 머릿수를 채우는 건 방관자들이다. 방관자들은 튀는 걸 싫어하고, 튀는 사람은 그들 사이에 소속되기 어렵다. 아지지도 방관자였기 때문에 잘 알고 있었다. 아지지는 실망하지 않았으나 피로했다. 자신에게 반박할 힘이 없다는 점이, 이길 수 없는 싸움에 뛰어드는 건 앞으로의 생활을 고달프게 만들 거라는 점이, 그리고 이런 전쟁통에 또다시 내던져진 현실이.

  "나 당신 때문에 다쳤는데 이거 어떻게 보상할래?"

  발을 걸어 아지지를 넘어뜨린 사람은 이제 아지지를 협박하고 있었다. 비웃음과 위협을 숨길 생각도 없는 목소리가 귀에 꽂힌다. 아지지는 이 사람이 속한 무리가 다른 사람들을 괴롭히는 걸 본 적 있다. 이 자는 덩치가 컸고, 물리적으로든 다른 쪽으로든 자신의 힘을 믿고 있었다. 제 앞에 남들을 무릎 꿇리는 걸 좋아하는 사람.

  어깨를 신경질적으로 치는 손길에 아지지는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마주 봤다.

  "당신은 어떻게 보상할래?"

  "뭐?"

  "당신의 좆 같은 깡패질을 지켜보느라 내가 썩힌 시간, 지금 저 뒤에 있는 사람들이 또 썩히고 있는 귀중한 시간. 난 정말로 다치기도 했어요. 당신처럼 꾀병 부리는 취미는 없고."

  "봐줄 때 말 똑바로 해. 말만 잘 들으면 다시 저 겁쟁이들 사이로 돌아가게 해 줄 테니까."

  상대는 아지지의 멱살을 잡아당긴 뒤 속삭였다. 우악스러운 손아귀의 힘에 심장이 무겁게 뛰었다. 아지지는 자신의 손이 신경 쓰였다. 바닥에 쓸린 손바닥이 연신 따끔거리고 얼얼했다. 어쩌면 손을 떨고 있는 걸지도 모른다. 아지지는 잠깐 후회했다가, 그만둔다. 선택했다면 후회하지 않아야 한다. 벼락이 꽂힐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를 때보다는 무섭지 않았다.

  "당신이나 똑바로 말해. 똥을 무서워서 피하나, 더러워서 피하지."

  무엇보다 아지지는 피로했다. 오래 지킬 수 있는 안위보다 곧 짓밟힐 자존심을 선택할 만큼, 품위를 지키지 못할 거라면 차라리 바닥을 뒹굴어도 좋을 만큼.

  어차피 전쟁에는 품위가 없다.

 

 

#2021

쓰면서 느낀 점: 이 캐릭터... 노골적인 욕설이 굉장히 안 어울린다. 내 손에 안 붙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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