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 음절 〉
그 자는 깔끔하게 재단된 옷을 입고 친절한 미소로 다가왔다. 이름은 에드워드 홀트. 첫인상은… … 좋지 않았다.
"경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영광을 차지할 수 있게 되어 기쁘군. 의상을 고르고 있었는가? 내가 크게 도움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 최선을 다해보지."
"고마워요."
"흠. 어떤 사람으로 보이고 싶으냐에 따라 달라질 것 같군. 하나로 된 옷은 조금 더 힘찬 느낌을 자아낼 것 같고, 검은색 옷은 조금 더 카리스마 있어 보일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 이 정도면 조금 도움이 되겠는가?"
아지지는 옷을 고르는 데 도움을 달라고 요청했다. 에드워드는 녹색 눈을 들어 아지지를 본다. 아지지는 속으로 에드워드 홀트를 분류했다. 청년, 신사, 예법, 영국. 어쩌면 자신과 비슷한 시대를 다른 방식으로 살아온 자. 그리고 무슨 이유에서인지 몰라도 '경'이라는 호칭을 사용하는 자.
경.
그 한 음절에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참고할게요."
아지지는 에드워드의 크라바트를 바라보다가 뒤늦게 눈을 맞춘다. 미미한 반항심 같은 게 고개를 들었다.
"아지지예요. 경은 아니고요."
"에드워드 홀트라고 하네. 마찬가지로 '경'은 아니었네만. 만약 그리 부르는 것이 불편하다면 원하는 걸 말해 보게."
신사는 매끄럽게 다음 수순을 밟는다. 반면 아지지는 그렇지 못했다. 가벼운 대화를 잇고 두 사람이 자리를 옮기는 와중에도 아지지는 순간적으로 자신이 시선을 내렸다는 걸 되새김질했다. 에드워드의 이름을 발음하는 데 평소보다 늦게 입술을 뗀 자신을 의식했다.
그 뒤로 아지지는 에드워드와 함께할 때마다 그의 몸에 밴 과거의 습관을 눈여겨 보았다. 에드워드는 그걸 눈치챘으나 티내지 않았다. 대신 미묘하게 사려 깊은 태도로 아지지를 대했다.
〈 어색한 동작 〉
생전 버사 아지지 힐은 '아지지'나 '힐'로 불리지 않고 언제나 '버사'로 불렸다. '아지지'라는 이름을 알고 있는 사람은 다섯 손가락에 꼽히고, '힐'은 어쩌다 얻어걸린 성, 그러나 부를 수 없는 성으로 아지지의 그림자에 숨었다.
사람들은 호칭을 붙여 서로를 높이길 좋아했다. 선생님, 레이디, 경, 도련님, …. 그 중 어느 쪽이냐 묻는다면, 아지지는 어느 쪽도 아니다. 아지지는 호칭을 입에 올리는 사람이다. 남들의 위치를 입에 올리고 그림자 저편으로 숨는다. 간혹 듣는 멸칭을 제외한다면 '아주머니' 정도가 아지지에게는 익숙했다.
27세기에 깨어난 아지지는 사람들이 가까운 친구가 아니더라도 이름 혹은 성만으로 서로를 부를 수 있다는 것을 천천히 익혔다. 그게 가능하다는 것을 아는 것과 몸에 익히는 것은 전혀 다른 일이었다. 아지지는 새로운 시대에 걸맞은 인물이 되고 싶었으나 아지지 버사 힐의 머리와 입술은 마치 1919년에 고정된 것처럼 뻣뻣했다. 그럼에도 시간은 흘렀고 아지지는 이제 타인의 이름을 입에 올렸다. 처음에는 반항심, 그다음에는 쾌감을 느꼈고 지금은 아무런 감정도 느끼지 않았다. 익숙해진다는 건 그런 거니까.
그러나 에드워드 홀트의 앞에서 아지지는 단 한 음절이 자신의 머리와 입술을, 몸을 순식간에 1919년으로 되돌려 놓는 것을 느꼈다. 마법처럼 간단하고 쉽게.
그 한 음절은 농담으로라도 자신과 어울리는 호칭이 아니었고, 아지지는 그게 다름 아닌 에드워드의 입에서 나왔다는 걸 참을 수 없었다.
하루는 에드워드와 훈련을 함께한 적이 있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모여있던 사람들 사이에서 슬슬 '언더'와 싸울 준비를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 나왔고, 누군가는 진심으로 누군가는 장난으로 훈련을 제안했다. 둘씩 붙어서 서로를 봐주기도 했고, 신체 능력이 좋은 한 명이 여럿을 모아두고 자세를 가르쳐 주기도 했다.
아지지는 형편없는 싸움꾼이었다. 어릴 적엔 몸싸움을 해 본 적이 있었고, 어른 행세를 한 뒤로도 악력이나 힘은 달리지 않는다고 생각했지만, 목숨이 달린 싸움에서 이길 자신은 없었다. 아지지는 싸움에 관해서 배운 바가 없었다. 에드워드는 발을 쓰지 않겠다고 자진해서 핸디캡을 가졌다. 그들의 훈련은 설렁설렁 움직이며 아지지의 자세를 에드워드가 교정해 주는 것에 가까웠다. 시작은 그랬다.
아지지는 에드워드가 가르쳐 준 급소를 향해 달려들었고, 에드워드는 몸을 피하면서 반대로 아지지의 몸을 뒤집으려다… 멈췄다. 아지지는 그 순간 망설이던 에드워드의 눈동자를 기억한다. 급소는 피했지만 몸이 부딪혔다. 두 사람은 볼품없는 꼴로 넘어졌다. 아지지는 무릎을 바닥에 찧었다. 와중에도 에드워드가 아지지를 보호하는 쪽으로 황급히 자세를 고쳤기 때문에 크게 다치지 않았다. 작은 신음의 주인은 에드워드였다. 아지지는 에드워드의 몸을 일으켰다.
"왜 멈춰요. 별 거 아니었는데."
"실수했군."
평소보다도 단정 짓는 어투로 말을 뱉었지만, 에드워드는 여전히 전과 같았다.
"의무실은?"
"그 정도는 아니니 걱정 말게."
"…미련하긴. 일단 가보죠."
아지지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곤 에드워드를 의무실로 이끌었다. 속이 답답했다.
〈 유물을 안고 〉
"아지지… 경. 괜찮나?"
거구의 행인이 쓰러지고 빈자리에서 에드워드가 나타났다. 마치 유령이 갑자기 사람의 형체를 가진 것처럼 급작스러운 모양새였다. 아지지는 비슷한 이능력을 갖고 있었기에 에드워드의 이능력을 추측할 수 있었고, 그래서 놀라지 않았다. 다만 이런 상황에서도 호칭 앞에서 머뭇거리는 에드워드의 친절한 태도가 조금 우스웠다. 아지지는 아직 에드워드에게 자신을 부를 때 적절한 호칭을 알려주지 않았다.
아지지의 볼에 난 생채기를 발견한 에드워드는 한숨을 쉬며 손을 내밀었다.
"다쳤군. 이쪽으로 오게."
손을 잡자 부드럽게 당기는 힘이 아지지를 반대편으로 이끈다. 아지지는 쓰러진 행인의 몸을 넘어 에드워드의 옆으로 갔다.
"혼자 있으면 표적이 되기 쉽지. 괜찮은가?"
아지지는 에드워드가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려는 동작을 취하다 멈추는 걸 지켜본다. 찾는 게 손수건이라는 걸 눈치채는 건 어렵지 않았다. 보통 손수건을 수납하는 자리였으니까. 종일 돌아다니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손수건을 건네고는 그마저 잊어버린 것일 테다. 에드워드는 난감한 얼굴로 아지지의 안색을 살폈다. 그가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아지지가 먼저 입을 연다.
"크라바트, 흐트러졌어요."
"그렇군. 알려줘서 고맙네."
"별말씀을."
"저 자는…."
"가끔 저런 놈들이 있죠."
잠시 정적이 흐른다. 숨을 고르는 것만으로도 진력났다. 에드워드도 비슷한 상태인지 둘 중 누구도 정적을 깨지 않았다. 그의 반듯한 얼굴도 며칠만에 부쩍 수척해졌다. 아지지는 정전 이후 에드워드가 여자와 아이들, 노약자를 찾아다니던 걸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훈련할 때 에드워드가 머뭇거린 이유에 관해서도 짐작되는 바가 있었다.
"전에 당신이 물었잖아요. 어떤 식으로 삶을 살고 싶냐고."
"…당신은 '나답게 살고 싶다'고 답했지."
"그랬죠. 그런데 그게 참 어렵더군요. 나다운 것은 대체 무엇인지. 나는 나에게서 도망치려고 한 적은 없는지…."
"…."
"이 나이를 먹고도 젊은이 질투나 하는 게 나다운 걸까. 그런 건 참 싫다. 이런 생각도 했죠."
에드워드는 대답하지 않고 아지지를 바라본다.
"나는 이름만 부르거나… 당신이 원하는 대로 불러요."
"정말 괜찮은가?"
"괜찮지 않을지도 모르죠. 그때는 말할게요. 당신은 내가 싫다는 걸 고집하지는 않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해 준다면… 더할 나위가 없지. 고맙네."
에드워드의 목소리에는 옅은 안도가 묻어나온다. 아지지는 피곤한 눈가를 쓸었다.
에드워드를 질투했다. 깔끔하게 재단된 옷과 수제화, 바른 자세. 몸에 밴 친절과 신사도. 무엇보다 그 모든 과거의 유물을 온몸으로 보여 주면서도 그 자신으로 온전히 서 있을 수 있는 당당함. 아지지는 에드워드 홀트의 존재감을 시기하고, 그리고… 연민했다. 에드워드 홀트처럼 버사 아지지 힐도 유물이 된 시대에서 왔으므로.
그들은 언제든 넘어질 수 있는 사람들이다. 이전에 두 사람을 넘어뜨린 것이 에드워드의 예절이라면 다음에는 아지지의 전략이 두 사람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 그들은 그런 사람들이니까. 유물을 안고 사는 사람들이니까.
"당신이 아니라면 힘들었을 거예요. 고마워요."
아지지는 자신을 협박하던 행인의 뒤통수에 눈길을 주었다가 에드워드에게로 시선을 옮긴다. 삐뚤어진 크라바트, 평소보다 무질서하게 흘러내린 이마 위의 머리카락을 지나 연한 녹색 눈을 바라본다. 에드워드도 이 인사가 지금 이 순간을 뛰어넘은 인사라는 걸 알까.
질투와 연민을 모두 벗겨내면 그 밑에는 오래된 유물에 대한 감상이 남아 있다. 익숙함, 안도, 상대를 넘어서 먼 곳을 그리는 그리움. 기이하고 옅은 동질감.
그리고 그것들을 모두 덮어내면 다시, 그들은 2638년 위에 서 있다. 마음에 들지 않는 언어, 형편없는 몸과 어색한 동작, 과거의 옷과 핸디캡을 안고.
아지지는 느리게 입술을 뗀다.
"이번엔 당신이 말해 봐요. 당신을 어떻게 부르면 좋을지. …당신은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 이럴 때 묻는 건 조금 얄궂은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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