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간의 방주 내외부의 조사가 끝난 뒤, 방주의 혼란은 일부분 가라앉았다. 다시금 찾아온 고요는 마치 폭풍의 눈 같았다. 아지지는 숱한 사람들에게서 불안과 슬픔, 혼란과 두려움을 발견했다. 자신의 얼굴에서도 그것들을 볼 수 있었다. 식량 공급이 안정화되자마자 술을 찾았다. 규하나 리데레처럼 달가운 이들과 술잔을 기울이기도 했지만, 혼자서도 마셨다. 실은 혼자서 더 많은 술을 마셨다.
위험지대로 갔다가 돌아오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다. 몇몇 사람들이 실종자들을 추모해야 하는 게 아니냐고 했고, 다수의 사람이 그건 너무 섣부른 결정이라고 말했다.
매일같이 시비를 거는 사람이 생겼다. 아지지는 그의 괴롭힘이 얼마나 갈지 지켜보기로 했다.
12세의 버사가 캡슐 문을 두드렸다. 많은 이들의 어린 유령이 방주 안을 돌아다녔다. 만질 수 있고, 대화할 수 있었으며, 꼭 살아있는 사람 같았다. 빛무리가 되어 사라지지만 않았다면 끝까지 착각했을 정도로.
노아는 설명하지 않았다.
10월 5일. 노아가 언더들이 방주로 다가오는 홀로그램을 보여주었다.
[최근 있었던 일련의 조사과정에서 발생한 흔적이 방주의 위치를 특정하게 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게… 언더들에게 그 정도의 지능이 존재하나요? 왜죠? 왜 여기로 오죠?"
[인간을 향한 본능적 살의가 바탕이 된 것이라 추측합니다.]
아지지는 침묵했다. 언더, 지능, 본능, 살의. 그것들을 한 데 묶어서 옳은 답을 낼 수 없었다. 그러나 더 묻지 않는다. 아지지는 노아를 믿을 수 없다는 사실을, 노아에게 온전히 의존할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거울을 향해 고개를 들자 숨기지 않은 감정이 무표정 밑에서 넘실거린다. 혼란과 두려움, 불신. 눈동자가 눈동자를 들여다보다 문득 작은 구멍이 뚫린 귓불에 닿는다. 아지지는 장신구를 넣어둔 함을 열었다. 그 안에는 며칠 전 새로 생긴 것이 하나 있었다. 장미 모양의 귀걸이 한 쌍이다. 아지지는 그걸 선물한 사람을 떠올렸다. 딘 하디. 방주의 사람들을 동면에서 깨워낸 장본인 중 한 명이라는 이유로 어린 나이에 과중한 책임을 안고 있는 사람. 그 이상은 알지 못했다. 그들 사이에는 교차점이 없었다. 아지지의 삶은 세상의 변두리에 있는 반면 딘 하디는 중심부가 어울리는 사람이다.
그러나 아지지는 딘 하디가 화를 잘 내는 치기 어린 청년임을 알게 되었다. 그냥 모르는 척 지나칠 수 없이, 같은 삶의 장면을 공유해버렸다. 왜냐하면 그들 사이에서 유리가 깨졌기 때문에…… 아지지는 앞으로도 딘 하디를 생각하면 유리 파편을 밟는 감각과 빨간 손등을 잊을 수 없을 터다.
아지지는 함을 닫고 문을 열었다. 혼란 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To Live
살아남기 위해
♪ Savages - Adore (LINK)
"서쪽이라면 그때 숲 근처에서 돌아왔던 곳입니다."
"기억해요. 황무지라서 별것 없을 줄 알았는데 지뢰라니. 역시 한 치 앞도 알 수 없군요."
캡모자를 벗고 짧은 머리카락을 드러낸 알렉산드르 볼코프가 아지지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들은 며칠 전까지 방주 밖을 조사하는 길에 자주 동행했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아지지는 알렉이 저런 식으로 볼 때는 할 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선택을 재고하시는 게 어떻습니까. 버사 씨의 능력은 높이 사지만, 언더들을 유인하는 일이 틀어질 때 생사를 가르는 건 전투능력입니다."
그리고 알렉산드르 볼코프는 대개 할 말을 한다. '뛰고 싶어서요.' '내가 당신에게 안 보여 준 능력이 있는데….' 아지지는 농담을 몇 개 떠올리다가 그만둔다.
"내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거든요. 뭐든지. …아니. 무턱대고 달려들겠다는 건 아니니 걱정 말고요."
알렉산드르가 미간을 좁히는 걸 보고 아지지는 단서를 덧붙였다.
"당신 같은 사람들이 앞장서서 언더들을 몰고 가겠죠. 그럴만한 능력이 있는 사람들요. 나는 조금 떨어져서 자기 갈 데를 못 찾는 놈들을 무리로 보낼 겁니다. 사실 유인조에 합류한다고 보기도 어렵죠. 하지만 내 능력은 상대가 소수일 때는 제법 쓸만하니까. 어중간한 녀석들을 다루는 데는 자신있기도 하고."
결국 농담을 한마디 하고 만다. 그러나 알렉산드르는 진지한 얼굴로 아지지의 말을 곱씹어 소화했다.
"…버사 씨의 판단을 믿습니다. 다만 만일의 경우 표식이 있는 나무를 기억하세요. 그 나무에서 오른쪽으로 돌면 지뢰밭이 나올 겁니다. 조금 더 오른쪽으로 돌면 방주 방향입니다. 일이 틀어지면 그쪽으로 뛰세요."
이윽고 흘러나온 음성은 망설임, 혹은 불안으로 시작하다 확신으로 끝난다.
"기억할게요. 당신도 몸조심하고요."
"예. …무사하세요."
아지지는 알렉산드르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린다. 알렉산드르는 고개를 한 번 끄덕였다. 이걸로 충분하다. 아지지는 알렉산드르 볼코프와 잠깐 눈을 맞추고 그를 먼저 보내 주었다.
그리고 언젠가처럼 가만히 선다. 전투복을 입고 언더와 싸울 준비를 하는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아지지는 지금 자신이 어디에 와 있는지 생각한다. 사람들은 조를 나누어 언더와 싸우기로 했다. 나타샤와 알버트가 일전에 찾아둔 지뢰밭이 중요한 역할을 할 터다. 몇몇 사람들은 그곳으로 언더를 유인하기로 했다. 아지지는 세상이 참 빠르게 돌아간다고 생각했다. 이 작은 세상에서도, 모든 것이 자신을 두고 빠르게 돌아간다고. 어쩌면 이곳에서 가장 어린 얼굴을 한 사람은 그 자신일지도 몰랐다. 그때, 타인의 목소리가 상념을 두드린다.
"당신의 판단력이 있으면 어느 쪽이든 믿을 만하겠네."
"그쪽은…?"
"무례한 사람 등장이야. 오늘도 더~ 무례해지기 위해서 지금 당신의 전투복에 손 쓸 생각이지."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와 손목을 잡는 온기가 느껴진다. 아지지는 미스트레아에게 이끌리면서 그제야 제가 권총을 꽉 쥐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미스트레아는 누구도 다치지 않도록 총구를 밑으로 향하게 하고 총신에 검은색 스티커를 붙였다. 손과 손이 닿자, 자연스럽게 힘이 느슨해진다. "이게 무엇인가요?" "부적?" 시선을 들자 미스트레아의 뒤에 선 시안이 미묘하게 장난스러운 낯으로 눈인사를 건넸다. 장난스러운 기류를 눈치챈 터다. "미레아가 그렇다니까요." 시안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미스트레아가 시안을 흘겨보았다. 아지지는 말 안 듣는 아이를 둔 어른들처럼 시안과 지긋이 서로를 바라보다, 다시 미스트레아를 보았다.
"이런 식으로요? 오늘은 제법 무례하군요."
"그렇지? 내가 말했잖아~ 무례한 사람이라고."
"하지만 아직 부족해요."
"같이 어울려 줄 생각 있으면 무사히 돌아와. 그땐 어마무시하게 무례해질 테니까!"
"누구 마음대로요?"
"당연히 내 마음대로지."
"…꼭 안 붙인 것 같네요."
"그래도 당신 눈엔 보일 테니까."
농담 섞인 대화가 빠르게 흩어지다 천천히 손 위로 가라앉는다. 실제로는 무례함보다 다정함이라는 단어가 어울릴 사람의 손이 아지지의 손을 덮었다가, 두어 번 묵직하게 두드린 뒤 떨어졌다. 그들은 가볍게 웃은 뒤 손을 내렸다. "고마워요." 진심을 담은 두 쌍의 눈동자가 상대를 바라본다. 그들은 침묵을 강물처럼 흘려보낼 줄 알았다.
"무사히 다녀와."
"그럴게요. 당신도 무사해요."
어디서든 무사하길 바라는 마음으로, 아지지는 미스트레아의 팔을 가볍게 문질렀다 뗀다. "물론이야." 선선히 답하는 음성. 미스트레아는 돌아서고, 시안이 그 뒤에서 아지지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아지지도 고개를 까딱인다. 이제 손에는 검은색 스티커가 붙은 총과 희미한 온기만이 남는다. 마침내 다시 나가야 할 순간이 왔다.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뜬다. 아지지의 이능력은 자신을 사라지게 만드는 데에서 시작한다. 실제로 사라지는 건 아니지만, 아지지는 그렇게 느꼈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쉴 때마다 자신은 사라지고 세상은 선명해진다. 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총신을 잡은 손에서 나왔던 땀이 휘발된다. 털이 쭈뼛 섰다가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지는 순간.
세상이 다가온다.
오른쪽의 숲 너머 어딘가에서 커다란 웃음소리가 들렸다. 아지지는 그것이 아는 목소리 같다고 생각한다. 착각일지도 모른다. 무언가 나무에 부딪히는 소리. 숲에 있던 새들이 일제히 하늘 위로 날아오른다.
정면. 먼 곳에는 인간이 끼어들 엄두를 낼 수 없는 거대한 생물들의 싸움판이 벌어지고 있다. 아지지는 조금 늦게 나온 터라 다리가 여섯 개 달린 개의 형상을 한 그 생물들이 언더에 대항하고 있는 상황을 이미 전해 들었다. 아지지는 숲 가장자리로 몸을 피했다. 희미해졌던 자신의 몸이 불쑥 튀어나와 심장 소리를 정수리 끝까지 전달했다. 쿵. 쿵. 쿵. 그 소리는 발바닥에서부터 올라왔다. 아지지는 폭력과 비명이 난무하는 땅을 밟고 빠르게 움직였다.
무서운 기세로 언더들과 싸우는 자들, 땅 위에서, 허공에서, 혹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언더들을 교란하고 유인하는 자들이 보였다. 간혹 사상자들을 찾아내 안전한 곳으로 이송하는 자들도 보였다. 아지지는 의식을 잃은 부상자 두 명을 후방지원조에게 알려 돌려 보냈고, 숲에서 방황하던 언더 세 마리를 중앙의 무리로 유인했다.
아지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 많거나 크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 처음부터 대단한 것을 바라지 않았다. 인류의 희망이나 영웅의 도리에 관해 고찰할 겨를도 없었다. 살아 있으니 숨을 쉬었고 힘이 있으니 사용해 보았고 문이 열렸으니 나왔다. 그게 지금까지 아지지가 살아온 방식이었다.
나무에 몸을 기대고 이능력을 푼다. 현기증과 구토감, 무언가에 맞은 듯 미약하게 떨리는 몸이 짜증스럽다. 땀으로 번들거리는 얼굴을 소매로 닦는다. 멀어진 풍경과 소리, 냄새는 잠시간 세상이 사라진 것 같은 착각을 안겼다. 아지지는 깊은 숲으로 들어가지 않았고, 싸움 한복판에 떨어지지 않도록 조심했다. 그래서인지 이능력마저 푼 지금은 자신이 전쟁터에 있는 게 아닌 것 같다. 사위가 순식간에 고요해졌다. 아지지는 숨을 고르고, 눈을 감았다 떴다.
늑대의 머리가 두 개 보였다. 갈라진 머리 두 개 사이를 촘촘히 메운 날카로운 광석은 짐승의 몸체 곳곳에서 반짝이고 있었다. 흉부는 지나치게 컸고, 다리는 일곱 개였다. 논리적으로 설명되지 않는 기형의 몸체. 두 개의 머리가 입을 벌리면서 기괴한 울음소리를 냈다. 울음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지기 시작한다.
하나가 아니다.
그것들이 발을 땅에서 떼는 순간, 아지지도 몸을 돌렸다. 달린다.
시야가 어지러웠다. 뒤에서 울부짖는 소리와 땅의 울림에 맞춰 몸이 떨렸다. 나뭇가지나 풀잎, 거미줄 따위가 머리카락과 얼굴에 달라붙었다 떨어졌다. 어떤 건 떨어지지 않았고 어떤 건 피부에 생채기를 남겼다. 문득 시야가 탁 트인다. 거대한 개가 언더를 물어뜯는 광경이 코앞에 보인다. 아지지는 자신이 어디로 왔는지 알아챘다. 이곳은 유인조가 언더 무리를 지뢰밭으로 몰고 있는 경로였다. 아지지는 제 발로 중심부로 걸어들어왔다. 뒤에서도, 오른쪽에서도 언더들이 달려오고 있다. 갈 수 있는 곳은 정해져 있다. 숨이 벅차올라 호흡을 고르는 건 무리였다. 눈을 꾹 감았다 뜬다.
한 번. 땅을 딛는다. 두 번. 떨리는 무릎이 무너지지 않도록 세운다. 세 번. 세상이 다가온다.
바람의 흐름에 몸을 싣는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뜀박질하고 당장에라도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다. 감각은 지나치게 선연하다. 쿵. 쿵. 쿵. 지금 들리는 건 심장 소리가 아니다. 인간의 형체를 닮은 언더, 곰과 늑대, 개를 닮은 언더들, 형체가 불분명한 언더들이 땅을 밟고 뛴다. 포효. "어디로 가는 거야, 이 멍청한 것들아!" 귀를 아프게 때리는 누군가의 음성. 휘파람 소리. 이제는 익숙해진, 멀리서 엄청난 속도로 달리고 있는 어지러운 존재. '표식이 있는 나무를 기억하세요.' 총 소리. 고함과 살이 찢기는 소리. 아지지는 달리고 있었다. 숲의 풀들이 스치는 소리와 새의 울음소리가 점차 뒤로 멀어지고 앞에서는 폭음이 들린다. 황무지에서 모래바람과 살덩이, 피가 먼지처럼 휘날린다. 언더의 비명과 사람들의 고함이 섞인다.
생각은 단순해진다. 아지지는 단 하나를 기억했다. '기억하세요.' 나무. 표식이 있는 나무.
무릎을 당기고 턱에 힘을 준다. 바닥을 딛는다. 나무가 보인다. 앞으로 달린다. 표식이 있는 나무에서 오른쪽으로. 다시 앞으로. 달린다. 황무지가 눈앞에 보였다. 지뢰가 시작하는 지점을 아슬아슬하게 밟았다가 다시 오른쪽으로 꺾는다. 지뢰밭 정면으로 유인하는 자들이 남아 있었다. 등 뒤로 지뢰가 터지는 소리가 들렸다. 세상의 모든 소음이 몰려들었다가 다시 귀가 먹먹해졌다. 그리고 오른쪽에서 다가오는 짐승의 포효.
권총을 양손으로 붙잡고 몸을 돌려 한 발을 쏜다. 몸이 뒤로 밀리고 무릎이 꺾인다. 하지만 아직은 멈출 때가 아니다. 아지지는 생체 광석이 상처를 뒤덮고 언더의 몸을 다시 재구성하는 광경을 보았다. 살아있는 울음소리를 듣는다. 제 몸 같지 않은 무릎을 잡는다.
살기 위해 뛴 적이 네 번 있다.
첫 번째, 가파른 언덕을 있는 힘껏 뛰어오르던 어린 시절.
두 번째, 물리적인 힘에 공포를 느꼈다. 뛰고 있었지만 뛰는 것 같지 않았고 목구멍에 걸린 심장을 뱉어내고 싶었다.
세 번째, …죽었다.
네 번째. 죽을 것 같다. 무릎을 당기고 턱에 힘을 준다. 바닥을 딛는다. 어금니를 물고 몸을 옆으로 꺾는다. 다시 앞으로. 달린다.
달려야 했다. 살기 위해 뛰었던 지난 생처럼.
앞으로 몇 번이고 다시 살아남기 위해.
#2021
Mission 03. 살아남기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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