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아지지는 눈을 떴다. 나무로 된 직사각형 문과 문고리 대신, 투명하게 바깥이 비쳐 보이는 풍경. 이럴 때는 잠시 적응하는 시간이 필요하다. 아지지는 아침에 일어나면 손가락을 움직여 의식을 바로잡곤 한다.
오늘은 그러지 못했다. 코앞에 누군가 서 있었고, 그 사람의 얼굴이 어린 자신의 얼굴이었기 때문이다. 아지지는 숨을 들이켰다.
"노아?"
[네, 아지지 님.]
"저게 뭐죠? …아니. 저 꼬마가 내 눈에만 보이는 건 아니라고 믿고 싶군요."
[시스템 오류입니다.]
"뭐라고요?"
[죄송합니다, 아지지 님. 시스템 오류입니다.]
다시 문을 두드리는 소리.
어린 아지지의 모습을 한 아이는 참을성이 없어 보였다. '그야 그랬지.' 아지지는 생각하면서 눈앞의 꼬마를 바라보았다. 아이는 낡은 잠옷 바람이었다. 아지지는 그게 자신이 10살 때 옆집의 마젠카의 옷을 물려받은 것이라는 걸 기억했다. 그럼 10살인가? 하지만 그 옷은 몇 년간 입었다. 무릎 밑으로 내려오던 치마가 무릎 위로 올라갈 때까지.
"이런 걸 왜 만든 거죠?"
[죄송합니다, 아지지 님. 시스템 오류입니다.]
순간 아지지는 아이와 눈이 마주쳤다고 생각했다. 밖에서는 안이 보이지 않을 텐데도, 아이는 당돌하고 직선적인 눈동자로 아지지를 바라보는 것 같다. 호기심이 어린 눈동자와 무표정한 얼굴. 곱슬거리는 머리카락은 목덜미에서 겨우 묶었다. 그 머리카락을 보자 되살아나는 기억이 있었다. 아지지는 11세에 머리카락을 짧게 잘라냈다.
"11살은 지났겠군."
아지지는 문을 열었다.
문 앞의 어린이는 기억과 몸짓, 표정과 태도까지 어린 시절의 자신과 판박이였다. 소름 끼칠 정도였다. 버사는 자신이 12세 생일을 막 지났다고 말했다. 그 외에는 뭐 하나 친절하게 말해 주는 게 없었다. 버사는 아지지의 외관에 충격을 받는 동시에 안도하는 듯 보였다. 자신에 관한 이야기보다는 45세의 아지지에 관해 이야기하려고 했다. 잘 먹고 잘사나 보네. 근데 여긴 어디야? 부자 동네? 사람이 너무 많은데. 가난한 동네나 사람이 많은 건데. 파티 같은 건가? 집이라면 대단하네. 주변을 둘러보던 버사는 문득 말을 멈추고 미간을 좁혔다. 소매를 신경질적으로 내리는 버사의 옆얼굴을 보고 아지지는 그 애가 자신의 옷차림을 수치스러워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지지는 버사에게 새 드레스를 입힌 후 카페테리아로 데려갔다.
버사는 금세 샤베트를 먹어치우고 하나를 더 주문했다. 버사는 복도에서 마주치는 어른들의 눈치를 조금 보는가 싶더니, 단 둘이 되자 언제 그랬냐는 듯 편하게 굴었다. 이곳이 꿈이고 눈앞에 앉은 이가 자신의 미래라고 생각하자 예의와 가식은 눈곱만큼도 챙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어떻게 살았어?"
"근근이 먹고 살았지. 결혼은 안 했지만, 딸 같은 아이가 한 명 있었고."
"넌 유명해지지는 못했나 보네."
버사는 씁쓸하게 자신의 미래를 가늠하는 낯이었지만, 아지지는 버사가 오해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버사, 친구. 난 메이드야. 아니, 메이드였지."
"뭐?"
버사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순식간에 분노가 올라왔고, 온 감정이 곧바로 정수리 뒤로 내려갔다.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다가도 차갑게 가라앉은 얼굴. 그 얼굴로 버사는 아지지를 노려보았다.
"거짓말하지 마."
"내가 네게 왜 거짓말을 해?"
"기분 더러워. 왜 이런 꿈을 꾸지?"
"나도 기분이 좋진 않구나."
천천히 대꾸하면서 아지지는 한숨을 쉬었다. 저런 얼굴이라니. 아지지는 자신의 어린 모습을 마주하는 일이 쉽지 않다는 걸 인정했다. 아지지는 샤베트를 하나 더 시켰다.
"어린애 취급하지 마."
"너는 날 어른으로 대해도 괜찮단다."
"웃기네. 너는 나잖아."
버사는 코웃음을 쳤다. 기죽지 않는 반응에 아지지는 조금 웃었다.
"이런 거 넌 못 먹잖아. 네가 '시스템'이 만든 거라 하더라도… 내 욕심인 거지. 너 레몬 맛 좋아하지?"
그러자 버사가 미묘한 미소를 지었다.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난 레몬 싫어해."
"그럴 리가 없는데."
"아니, 진짜 싫어해. 어떻게 그것도 몰라? 넌 아는 게 뭐야?"
아지지와 버사 사이에 정적이 찾아왔다. 버사는 샤베트를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됐다. 너보단 다른 애들이랑 노는 게 재밌겠어."
"거기 레몬 들었거든. 네가 좋아할 줄 알고 시킨 거야."
"몰랐어."
버사는 떨떠름한 얼굴로 샤베트를 내려두고 아지지를 바라보았다.
아지지도 버사를 바라보았다. 어린이들을 많이 보아왔지만 어린 자신의 얼굴을 마주하는 건 오랜만이었다. 사실 처음이라고 해도 좋았다. 어린 시절의 기억은 변색한 지 오래였고 거울을 들여다보는 건 언제나 어려운 일이니까.
세상에 날을 세우는 어린애들에게 눈길이 갔다. 좌절하는 청년들을 보면 마음이 쓰라렸다. 아지지는 자신이 오래도록 어린 시절의 자신을 연민했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런데 우습게도… 그토록 연민하고 잘 대해주고 싶던 사람이 눈앞에 서 있는데, 아지지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마침내 마주한 어린 자신의 얼굴은 지나치게 조숙하고, 욕심과 분노는 꺾이지 않을 것처럼 보였다.
그들은 서로를 모른다. 서로를 알기 위한 시도는 실패를 거듭할 것이다. 그들은 서로의 기대와 짐작을 계속해서 배반할 것이기 때문에.
"좀 더 잘 살아 봐."
버사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를 눈동자로 아지지를 한참 바라보다 이렇게 말했다. 그리고 아주 깔끔하고 냉정한 동작으로 등을 돌렸다. 뒤를 돌아보지 않는 뒷모습. 멀어지는 버사의 등을 보면서 아지지는 그 애가 다신 돌아오지 않으리라고 생각했다.
2
내 어른은 늙은 마녀야. 그러니까 그걸 신호로 정하자.
무슨 신호?
네 천사를 만나면, 바로 도망가면 안 돼. 우리는 배가 고프잖아.
마녀는 배고파? 난 안 고픈데.
아니. 나도 안 고픈데 맛있잖아. 그러니까 천사가 먹을 걸 사 주면 그걸 먹고… 방심했을 때 도망가는 거야.
좋아. 난 과자 먹고 싶어.
좋아. 사달라고 하자. 이것만 기억해. 늙은 마녀야, 비밀.
응.
그러면 유령들이 도와줄 거야.
버사는 '비밀'을 휴게실 모퉁이에서 발견했다. '비밀'은 모퉁이에서 튀어나와 버사와 부딪혔다. 얼마나 빠르게 달려왔던지, '비밀'이 작지만 않았더라면 틀림없이 둘 다 넘어졌을 거다. '비밀'은 작은 몸 위에 흰 천을 뒤집어쓰고 있었는데 눈구멍이 두 개 뚫려 있어 제법 웃겼다. 버사가 '비밀'을 붙들자 천과 눈구멍이 옆으로 기울었고, '비밀'은 천의 반대편을 잡아당겨 눈구멍을 제 위치에 오게 했다. 그리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뭐야?"
"비밀이야. 도망가!"
천 밑으로 긴박한 목소리와 웃음소리가 섞여 나왔다. 그런 소리에는 전염성이 있어 버사는 발에 불난 것처럼 '비밀'을 쫓아 뛰었다. 체격차 때문인지 금방 앞서게 되어, 다시 뒷걸음질 쳐 '비밀'의 옆으로 붙었다.
"그래서 어디로 가는데?"
"비밀!"
'비밀'은 오늘이 할로윈이라서 이름을 알려줄 수 없다고 했다. 할로윈에는 그런 법칙들이 있다. 이름이 비밀이라면 비밀인 거고, 유령이면 유령인 거고.
"그럼 넌 유령 할래, 비밀 할래?" 버사가 물었다.
"비밀이 좋아." 비밀이 답했다.
그래서 비밀의 이름은 비밀이 되었다. 비밀은 자신이 악마에게서 도망 다니고 있다고 했다. "그런데 할로윈 유령이면 천사한테서 도망 다녀야 하는 거 아냐?" 버사가 반문하자 비밀은 잠시 고민했다. "천사로 바꿀래." "좋아." 버사와 비밀은 천사에게 들키지 않도록 조심하면서 꿈속을 돌아다녔다. 사실 공간이 너무 넓고 사람도 많고 놀 거리도 많아서 천사의 존재는 금세 잊혔다. 버사와 비밀은 자유롭게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면서 친구를 만들었고, 천사를 진짜로 마주칠 거라곤 꿈도 꾸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은 꿈이고 그들은 방심했다!
"찾았다."
비밀의 천사는 키가 매우 컸고 얼굴 위에 가면 같은 걸 쓰고 있었다. 버사는 이곳 어린이들의 보호자가 대부분 그들의 미래라는 걸 알았기 때문에 작은 비밀과 큰 천사를 번갈아 보았다. 천사는 온통 까만 옷을 입고 있었다. 버사는 비밀이 왜 천사를 악마라고 불렀는지 알 것 같았다. 버사의 동네에서도 악마는 새까만 색이다. "잡혔다!" 비밀은 꽥 소리 질렀다. 버사가 비밀을 붙잡았을 때처럼 긴박한 목소리에 웃음소리가 섞여 있었다. 버사는 다급하게 비밀과 유령천의 눈구멍 사이로 시선을 교환했다.
천사의 이름은 엡실론이었다. 천사는 '비밀'의 손을 잡고 비밀스럽게 주의를 시키더니, 버사와 비밀을 데리고 카페테리아로 갔다. 버사는 이곳에 오늘 세 번째 오는 것이라는 말은 하지 않고 자리에 앉았다.
"비밀이 아니네요?"
"어? 어…"
"할로윈이잖아요. 얘는 '비밀', 저는 '마녀'. 아. '엡실론'이 악마 이름이에요?"
"아…. 아냐. 어른들은 할로윈 이름이 없어."
"가면 썼으면서. 할로윈이라서 그렇게 한 거 아니에요?"
버사와 비밀이 엡실론의 헬멧을 빤히 바라보았다. 엡실론은 헬멧 안에서 난처한 기색으로 두 꼬마를 번갈아 본다.
"응… 엡실론도 할로윈 이름이야."
"엡실론!"
결국 할로윈에 동참하자 그의 어린 비밀이 웃으며 외쳤다. 버사는 비밀의 머리를 천 위로 가볍게 두드려 주다가 문득 한 곳을 뚫어지게 보았다. 엡실론은 아이의 시선을 쫓아갔다. 아이와 닮지 않았으나 닮은 어른이 걷고 있었는데, 아직 이쪽을 발견한 것 같진 않았다. '저 사람인가?' 엡실론이 그 사람을 바라보고 있을 때 뒤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렸다. 아주 비밀스럽게.
"늙은 마녀야, 비밀."
"응."
불길한 예감에 고개를 돌렸을 때, 두 어린이는 손을 잡고 저만치 뛰어가고 있었다.
"잠… 잠깐. 얘들아!"
엡실론이 엉거주춤 일어나자 '마녀'는 천을 가져와 뒤집어썼고, 다른 유령들이 하나 둘 달려와 마녀와 비밀을 둘러싸기 시작했다.
아이들이었다. 눈구멍을 뚫은 천을 뒤집어쓴, 제각기 키가 다른 어린이들이 엡실론을 보고 왁자지껄 웃으면서 멀어졌다.
"얘들아?"
술래가 정해졌다.
#2021
어린이날 이벤트로그
두 번째 로그는 커뮤 친구랑 어린이ver 빌려서 썼는데 재밌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