럼. 바다 사람들의 술.
아지지는 럼을 비좁은 다락에서 처음 마셨다. 아지지는 어렸고, 앞에 앉아 있는 아이도 마찬가지였다. 둘 중 누군가가 말했다. "왜 해군들이 럼을 마시는 줄 알아?" 제국이 해군에게 럼을 지급하던 때였고, 두 아이는 새로 얻은 지식을 서로에게 뽐내기에 바빴다. 어른들의 세계, 어려운 어휘와 복잡한 지식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던 시절.
"육지를 잊으려고 마시는 거야."
채 소화하지 못한, 분명히 주워들었을 문장을 뽐내던 목소리가 기억난다. 약속이나 한 것처럼 술을 마셔보자고, 무섭냐고 서로를 자극하던 표정도. 처음 럼을 마신 뒤 두 아이는 쓰린 배를 부여잡고 구역질을 했다. 냄새나는 나무 바닥을 문질러 닦아야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둘은 킬킬대며 누가 먼저 나가떨어졌는지 토론했다.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그 일화를 이야기하자 해군 출신이었던 칩이 요란하게 웃었다.
"버사, 친구. 럼을 제대로 배웠구만! 우리도 바닥을 자주 닦았어."
"당신은 분명 매일 바닥을 닦았을 거야."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런데 그거 알아? 배 위에서 취해도 땅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라고! 누가 바다에 집어 던지기 전까지는 여기가 바다인지, 육지인지, 하늘인지, 알 수가 없단 말이지."
"바다라는 걸 알게 되었다면 큰일났을 텐데, 맥주병 씨."
장난스러운 시선이 오간다. 칩은 킬킬 웃다가 검지를 들어 보였다. "잠깐만." 가벼운 걸음걸이로 가게 안쪽으로 들어간다. 잠시 후 칩은 럼 한 병을 들고 돌아왔다.
"그래, 럼은 취하고 토하려고 마시는 거지. 뱃멀미가 없는 친구들도 굳이 럼을 마시고 멀미 체험을 하시고~ 마시고, 토하고."
"그래서 지금 나보고 전부 게워내라고?"
아지지가 말하지 않은 말도 용케 알아채곤 하던 친구는 짓궂게 웃으며 아지지의 잔에 럼을 채워줬다. 지쳐서 그저 붙잡고만 있던 잔에 미지근한 액체가 담긴다.
"그래. 전부."
육지를 잊어. 감정을 게워내. 전부 바다로 흘려보내.
일순 기억이 밀려들었다가 포말을 남기며 흩어진다.
"노아. 아무거나 틀어줘요."
[아지지 님. '아무거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부탁입니다.]
"정말… 아무거나. 뭐든 상관없어요."
노아의 네모난 기계가 우는 표정을 짓는다. 아지지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상영관에 불이 들어오길 기다렸다가 안으로 들어간다. 좌석을 손으로 짚어가면서 자리를 찾아 앉았다. 물먹은 솜처럼 눅진한 몸이 의식과 함께 깊숙이 가라앉았다. 곧 상영관이 어두워지고 스크린이 반짝거리기 시작한다. 번쩍거리는 빛, 상영관의 명암, 귀를 때리는 소음. 몽롱한 의식 속에서 그것들은 때로 폭죽 같고 때로는 물거품 같다.
방주에서 처음 럼을 마신 건 5월이다. 몸에 닿는 드레스의 질감과 누군가의 담배 냄새, 과거의 흔적을 담고 있는 사람들을 참을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오기 시작했다. 익숙한 것들은 버사 아지지 힐의 문지방을 쉽게 넘나든다. 그리고는 돌아갈 수 없는 곳을 그리워하게 만든다. 몸에 스며든 기억으로 손끝이 저릴 때까지. '육지를 잊으려고 마시는 거야.' 선택의 순간은 아주 짧았다. 조금만. 조금만 더. 아니. 더. 더 많이.
이능력을 사용할 때면 세상이 지나치게 가까워진다. 아지지는 그게 싫지 않았다. 그 세상에서 자신은 희미해졌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신이 없는 세상도 폭력으로 점철될 수 있다는 걸 아지지는 전쟁터에서 깨달았다. 몸을 의탁할 방주를 잃어버린 기분이었다. 언더에게서 도망칠 때, 아지지는 세상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었다. 이능력을 풀고 싶었다. 끝내 놓지 않았던 한 줄기의 정신이 '지금 놓는다면 넌 무너질 거야.' 하고 말했기에 이능력을 풀지 않았다.
이능력을 푸는 순간 끔찍한 멀미가 닥칠 것을 알고 있었다. 세상과의 간격이 갑자기 바뀌면 평범한 사람은 놀라기 마련이다. 땅을 딛고 살던 사람들이 배에 오를 때처럼, 낮은 지대에 살던 사람들이 높은 산에 오를 때처럼, 1919년의 사람이 2638년에 도착해버렸을 때처럼. 인간의 몸은 참 연약하다. 조금만 환경이 달라지면 발 디디는 법을, 숨 쉬는 법을, 앞을 보는 법을, 심지어는 사는 법을 잊기도 한다.
1919년과 2638년. 나무문이 있는 집과 밖이 훤히 비치는 캡슐. 방주. 노아. 언더. 전쟁. 아지지는 돌아갈 수 없는 곳에서 잃은 사람들과 방주가 되어주지 않는 방주에서 사라지는 사람들을 생각한다. 인간은 왜 이다지도 약한지를 생각한다.
그는 숲에 서 있다. 나무가 울창하고 하늘이 높다. 지독히도 선명한 풀 내음과 녹음. 발밑에는 조금은 축축하고 단단한 풀과 낙엽, 작은 돌멩이들이 있다. 등에 닿는 나무의 결이 거칠다. 새의 울음.
쿵. 쿵. 쿵. 아득히 먼 곳에서부터 들려오는 소리가 있다. 갑자기 속도가 빨라진다. 그것들이 다가온다. 코앞에 있다. 뒤틀린 목에서부터 자라나는 날카로운 광석. 등을 돌려 도망친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뜀박질하고 당장에라도 몸이 앞으로 고꾸라질 것 같다. 휘파람 소리. 총소리. 고함과 살이 찢기는 소리.
그는 멈춰 선다. 모래바람과 살덩이, 피가 폭음과 함께 공중으로 휘날린다. 귀를 가득 메우는 폭음이 세상을 뒤덮는다.
그의 손은 땅을 짚고 있다.
육지가 너무 가깝다.
'칩은 돌아오지 못했어….'
'그레이스. 이제 너와 나뿐이구나.'
'그 애가 어떻게 됐다고?'
'버사. 죽지 마! 눈을 떠!'
타인의 목소리와 자신의 목소리가 엉키면서 고막을 아프게 찌른다.
버사는 불현듯 자신이 홀로 살아있음을 깨닫는다.
쾅!
폭음 때문에 아지지는 선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떴는데도 시야가 새까맣다. 끔찍한 고요와 어둠. 아지지의 몸은 반사적으로 공포에 질려 굳었다. 의식할 새도 없이 눈물이 한 방울 흘렀다. 물이 꽉 찬 나무통에 누군가 흠집을 낸 것처럼, 아주 자연스럽게. 어느 것 하나 그 자신의 의지대로 통제되지 않았다.
빛이 서서히 들어온다. 정전은 아니었다. 아무것도 터지지 않았고, 아무것도 사라지지 않았다. 허무할 정도로 금세 사위가 밝아진다. 스크린 위로 영화의 크레딧이 올라갔다.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