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Field
2021. 6. 1.

 

 

  "그럼 버사 씨 생각은 어때요?"

  "글쎄요. 저는 아는 게 없어요."

  "에이. 그렇게 말씀하시지 말고요."

  누군가 장난스럽게 채근한다. 아지지는 말할 생각이 없어 미소 지었다. 그 얼굴 위로 천천히 그림자가 드리운다.

  "그래, 버사. 너 말 잘하더라?"

  다른 누군가가 불쑥 대화에 끼어들었다. 아지지는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알렉산드라 볼코프가 의자의 팔걸이를 붙잡자 아지지는 그림자 밑에 갇힌 것처럼 보인다.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은 입을 다물고 알렉산드라를 쳐다봤다. 분위기가 냉랭해진다. 알렉산드라는 잠시간 긴장된 침묵을 지켜보다, 웃었다. "X나 웃기네. 마저 해, 버사." 아지지의 어깨를 툭 치고 다시 멀어진다. 아지지는 고개를 돌려 그 뒷모습을 눈에 담았다. 알렉산드라가 알렉산드르 볼코프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알렉이 이쪽을 보던 시선을 돌리는 것까지. 맞은편에 앉아 있던 사람이 아지지의 손을 붙잡았다.

  "저 사람 또 그러네요. 괜찮으세요?"

  "네. 별거 아니에요."

  "밖으로 나가면 저런 놈들은 더 기고만장해질 거야. 거긴 노아가 없잖아. 방주에 질 나쁜 새끼들이 얼마나 많다구…."

  오른쪽에 앉아 있던 사람이 목소리를 작게 줄여 소곤거렸다. 그러자 아지지의 손을 붙잡고 있던 사람이 날카롭게 반문한다.

  "노아는 믿을 수 있고요?"

  "그건……."

  "크로포드 사가 별다른 기준 없이 사람들을 모은 것만 봐도 그래요. 기업에서 하는 일에 이유가 없을 리가 없잖아요. 비용을 전부 낸 경우라면 모를까, 돈 없는 사람들까지 받고."

  "그건 그래요…."

  두어 사람이 소곤대다가 갑자기 조용해진다. '돈 없는 사람들'이란 단어가 뒤늦게 귀에 걸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서로의 과거에 관해 몰랐고, 바로 옆에 앉아 있는 사람이 '돈 없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테이블 위에 앉아 있던 사람이 헛기침했다. 불안과 초조함, 긴장이 사람들 사이사이 자리를 잡고 춤을 추고 있다. 언더와의 전투가 마무리되고 며칠이 채 지나지 않아 등장한 새로운 소식 탓이었다. 딘과 라이멕, 다른 몇몇 인물들이 사람들을 불러모아 노아에게서 복원한 영상을 보여 주었다. 용병들이 크로포드 사의 직원들로 보이는 연구원들을 죽였고, 숨겨져 있던 문을 열었다. 그 안에 언더들이 있었다. 영상을 가져온 이들의 설명에 의하면, 연구원들이 언더를 가둔 채 사육하고 있었고, 용병들이 언더들을 풀어준 것 같다고 한다. 용병들의 신원, 크로포드 사의 음모, 믿을 수 없는 방주, 사회실험과 언더, …….진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혼란과 걱정 속에서 매일을 보냈다.

  손을 잡고 있던 사람이 아지지를 보았다. 중재자를 바라보는 시선이다. 사람들 앞에 나서서 목소리를 낸 이후로 아지지를 그렇게 보는 사람이 조금 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아지지가 퍼피 앞에 선 이후로.

 

 

 

 

 

♪ Abel Korzeniowski - The Field (LINK)

 

 

 

 

 

  그 영상은 CCTV라고 했다. 아지지는 논리적인 사고가 머리에 입력되기도 전에 가장 먼저 그 사실에 충격을 받았다. 방주에서의 삶과 죽음이 모두 저런 모양으로 기록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CCTV 속 사람들의 죽음에는 영혼이 없었다.

  상념에 잠긴 아지지에게 퍼피의 목소리는 천천히 스며들었다. 퍼피는 특유의 커다란 성량으로 사람들을 선동하고 있었다. 세상에 조소를 날리고 있는 아이의 목소리가 화염처럼 주변을 휩쓴다.

  "그렇게 다 안주하게 되는 거야~!!!"

  문득 퍼피의 시선이 아지지에게 닿는다. 누군가를 위협하듯 살짝 굽힌 어깨가 굳고, 크게 벌어지던 입술이 닫힌다. 아지지는 기회를 잡은 사람처럼 끈질기게 퍼피에게 시선을 고정했고, 그 애의 입이 다시 열리는 걸 보았다. 목소리는 반항하는 불길처럼 더 격렬해진다.

  "의식주가 다 있단 사실 하나만으로 방주에 머무르려고 한다면, 사육당하고 싶다고 자처하는 꼴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해, 난~!!!!! 인간 사육! 우와! 표현 기깔 난다!!! 그치이~?? 계속 사육당하고 싶다면! 말리진 않을게에~!!! 근데에, 사육당하는 동물들 결말은 다 똑같은 거 염두에 두고 있는 건 맞지??? 지금 여기에 죽치고 있는 건 위험 요소가 아닌 거 같아??? 너우무 익숙하고 편안해진 나머지 위협이라고조차 여기지 않게 된 위기가 제~~일 무서운 거야!!!!"

  퍼피가 선택한 '사육'이라는 단어에 아지지는 가슴 깊숙한 곳이 시큰거리는 것을 느꼈다. 왼쪽에 선 사람의 어깨는 두려움으로 떨리고 있다. 오른쪽에 선 사람의 어깨는 영혼을 다른 곳에 둔 것처럼 공허하다. 뒤에 선 사람은 실소하고 있다. 아지지는… 그들에게서 멀어진다. 한 걸음 한 걸음, 여러 어깨를 지나쳐 보이지 않는 불꽃에 가까이 다가갔다.

  마침내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사람도 존재하지 않을 때 아지지는 걸음을 멈췄다. 퍼피가 웃음을 터뜨린 순간부터 들리지 않는 화재 경보라도 들은 것처럼 사람들이 뒤로 물러난 탓에, 그 애 주변에는 둥그렇게 빈 공간이 생겼다. 아지지는 그 공간의 가장자리에 섰다. 하, 하고 퍼피가 언젠가처럼 실소를 터뜨렸다. 퍼피는 기다리고 있었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아지지는 퍼피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사람들을 둘러 본다.

  "우리 모두 위험하다는 걸 알고 있어요. 하지만 정확히 무엇이 위험한지 확신할 수 있는 사람은 이곳에 없을 거예요. 그렇지 않나요? 우선 지나친 선동은 그만두기로 하죠."

  "…아하학!!!!"

  아지지의 말이 끝나자마자 퍼피가 웃음을 터뜨리며 어깨를 구부렸다. 세상에서 제일 웃긴 말을 듣는다는 듯 몸이 기울고 발이 한 발 앞으로 나온다. 단 한 걸음. 아지지는 그 한 걸음이 아니었더라도 그 애가 자신에게 반격해 올 것을 알았다. 이렇게 앞에 나서는 일이 자신에게 독이 된다는 것 역시 알았다. 사실 자신에게는 사람들을 휘어잡을 말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 그거, 진심이야~~???"

  퍼피가 고개를 들었다.

  불꽃이 도사리고 있는 것처럼 선명한 눈. 아지지는 그 눈이 늘 거슬렸다.

 

 

 

 

 

 

 

  그때 아지지는 많은 말을 하지 않았다. 그저 퍼피의 말에 반격하고, 새로운 방해물을 던지고, 다시 반격하고. 어찌 보면 무용할 소모전은 다른 이들의 도움으로 겨우 끝났다. 아지지는 그동안 의견을 명확히 하는 일을 유보했다. 그러나 코앞으로 닥쳤던 붉은 눈동자와 얼굴 위로 드리운 그림자의 흔적 속에서 아지지는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아지지는 주변의 사람들을 천천히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우리는 집 밖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으니 절대 문을 열면 안 된다고 말하죠. 집 밖에는 어린아이들을 잡아먹는 마녀가 있고, 골목의 그림자에는 살인자가 숨어 있다고요. 지금 바깥에는 언더들이 있지요. 위험과 미지로 가득해요. 그런데… 어떤가요. 집안은 안전하던가요?"

  사람들이 숨을 죽였다.

  "밖과 안, 빛과 어둠, 여성과 남성, 삶과 죽음. 내가 살아있을 때 선택지는 이렇게 두 가지밖에 없었어요. 그렇지만, 정말 그렇던가요. 여기 있는 우리는 어떻게 나고 자랐든 간에 삶과 죽음을 모두 경험하지 않았던가요."

  버사 아지지 힐은 그렇게 말하면서 문득 과거 언젠가 퍼피의 외침을 떠올렸다. '뭘 타고나느냐는 내가 고를 수 없는 거고, 고를 수 있다면 차라리 다른 걸 택했을 거야.'

  아지지는 불꽃을 품은 자들을 알고 있다. 그들이 어떻게 제 몸을 태우며 재가 되어버리는지도. 그런데도 모든 걸 불태우고 싶던 버사 힐에 관해서도, 다른 빛깔로, 그러나 역시 불꽃으로 일렁이던 퍼피의 눈동자도 알고 있다. 그것이 버사 아지지 힐이 퍼피를 가만둘 수 없는 이유이기도 했다. '어떻게 지내니?' 과거 버사 힐은 불꽃을 품은 아이가 산화하는 대신 살아있길 바라며 그렇게 물었다. 그리고 아지지는 방주에서 만난 아이가 불 속으로 몸을 내던지지 않길 바라며 같은 질문을 반복하고 있었다. 아지지는 불꽃이 그 애의 몸과 영혼을 집어삼킬 것이 두려웠다.

  버사 힐과 퍼피는 죽음이 찾아오기 전 서로의 삶의 객석에 앉은 적이 있다. 그들은 그때 닮은 길 위에 서 있었다. 퍼피는 기억을 잃은 듯 보였으나 아지지의 앞에서 때로 입을 다물거나 어깨를 굳히거나 고개를 돌렸다. '어제보단 나은 것 같아.' 찰나, 아주 작은 균열.

  "…그리고 사실 삶과 죽음은 내 선택에 달려 있지 않았어요."

  아지지는 먼 곳을 바라본다. 때로 슬픔과 막막함이 몸을 덮칠 때마다 그는 먼 곳에 감정을 흘려보냈다. 누군가 몸을 뒤척이는 소리에 다시 시선을 돌려 사람들과 차례로 눈을 맞춘다.

  "미안해요. 주제에서 벗어났군요. …본론은, 어느 쪽을 선택하든 우린 위험과 함께 살아갈 거예요. 모르는 게 많다면 더더욱 그렇지요. 다른 식으로 생각해 볼까요. 방주와 크로포드 사의 진실을 모른 채로 바깥에서 생존할 수 있을까요? 밖에 무엇이 도사리고 있는지 모르는 채로 방주에서의 삶을 존속할 수 있을까요? 이 두 세계는 언제든 서로를 위협할 수 있어요. 아마 우리가 모르는 방식으로."

  아지지는 크로포드 사와 노아, 새 몸에 관해서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그걸 고민하기에는 아지지의 사고를 장악한 고민이 너무도 많았다. 그러나 사람들과 혼돈 사이에 앉아서 문득 드는 생각은… 지금 이 순간 그들이 같은 선상에서 무지하다는 사실이다. 그 사실이 아지지의 벽에 금을 가게 만들고, 얼굴이 홧홧해지는 바람을 일으켰다.

  "우리는 이제 막 시작했을 뿐이에요. …나는 알고 싶어요. 모든 게 위험하다면, 대체 무엇이 위험한지 우리가 설명할 수 있길 바라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죽는 건 한 번으로 족하거든요."

  그때, 아지지는 누군가의 뒷모습을 발견하고 말을 멈춘다. "그래서요?" "동감해요. 굳이 방주냐 밖이냐 소모전할 때가 아니에요." "아니, 그렇지만…." 곁에 있던 사람들이 느릿느릿 한두 마디를 보태기 시작한다. 그 사이에서 아지지는 지금 하는 말이 자신에게 하는 말임을 서서히 깨닫는다. 숱한 선택의 기로에 서서, 무언가를 선택하기를 종용받으면서, 혹은 스스로에게 종용하면서, 실은 아무것도 제 의지대로 할 수 없다는 것에 좌절하고 분노하던 사람에게. 무엇을 선택할 수 있냐고 화를 내는 아이에게 기껏해야 붓 몇 획의 서명이 네 것이라고 답해줄 수밖에 없던 초라한 사람에게.

  버사 아지지 힐은 방주에서 눈을 뜨기 전까지도 끊임없이 줄다리기하고 있었다. 제 삶과 영혼을 담보로, 한 치 앞도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신에게 맡겨진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바꿀 수 있는 게임이기를 바라면서.

  "미안하지만 볼일이 있어서 먼저 일어나 볼게요."

  아지지는 작은 균열을 발견했다. 그 균열을 통해 들어오는 바람의 방향을 쫓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선 바람을 알아챌 줄 알아야 했다. 벽을 부술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삶과 죽음이, 사랑과 사람이 뜻대로 되지 않더라도. 이제야 비로소 자신의 손에 세상을 알 기회가 희끄무레하게 들어온 것 같았다… …. 아지지는 자리에서 일어나 익숙한 뒷모습을 쫓았다. 

 

 

#2021

Mission 04. 최초의 갈림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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