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주 술을 마시고 싶어졌다. 이런 시기에 술을 마시고 취해버리면 꼴불견이 될 테니 아지지는 대신 뛰었다. 체력단련실에는 전보다 사람이 적었다. 아지지는 매일 체력단련실을 찾으면서 이곳에 오는 사람들의 얼굴을 익혔다. 그중에는 아지지가 이미 아는 사람들도 있었다. 대개는 체력이 좋은, 누군가의 말처럼 전투 인력으로 분류될 사람들이다. 아지지는 맨 가장자리의 러닝머신에서 뛰었다. 뛰고, 뛰고, 또 뛰다 보면 불안감을 지울 수 있을 것 같다. 불안감. 정체 모를 불안이 아지지의 영혼을 장악하고 있었다.
몸이 진자처럼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기운다. "왐마야~"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넘어질 것 같다. 반사적으로 팔로 기계를 잡았으나, 몸은 중심을 잃고 옆으로 떨어졌다. 아지지는 자신이 기계의 정지 버튼을 눌렀다는 걸 깨달았다. 빠른 속도로 달리던 것을 갑자기 멈춰버리니 몸이 기우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누군가 기울어지는 자신을 붙잡았고, 그 목소리의 주인은 아지지에게 익숙한 사람이었다.
"어라, 이걸 원한 건 아니었!"
요란한 소리와 함께 팔과 팔이 부딪히고 엉덩이가 바닥을 찧는다. 허리로 통증이 올라와 시큰거렸다. 아지지는 앓는 소리를 내다가 옆으로 고래를 돌렸다. 역시 허리를 매만지고 있는 리데레에게 손을 내민다.
"미안해요. 다쳤어요?"
상황이 우스워 옅은 웃음이 났다. 리데레 역시 낮게 소리 내 웃고 손을 잡는다.
"허리 박은 것 같애~ 근데 괜찮아. 너는 어디 안 다쳤어? 갑자기 기울어져서 놀랬네."
"허리가요? 저런… 삐끗했다면 말해줘요, 리데레. 나는, 뭐… 엉덩이가 커서 살았죠."
그들은 함께 일어나서 배려심 없는 기계를 욕했다. "머신 정지할 때 서서히 멈추는 것도 아니고 갑자기 띡 멈추는 거 좀 당황스럽지 않아? 참내~ 시작할 때는 서서히 시작하면서 말이야~" 리데레가 말하면, "맞아요. 배려가 부족한 기계였어요. 괘씸하니, 지금은 보고 싶지 않군요." 아지지가 받았다. 무얼 하고 있냐고 질문하니 리데레는 뭐라도 하려고 걷던 중이라고 했다. 두 사람은 짐볼 위에 앉았다. 이번에도 앞으로 한 번, 뒤로 한 번 몸을 기울였지만 속도는 아주 느렸다.
"겨울이 다가오니, 준비하는 동안에는 이렇게 조용할 것 같군요."
"그런가? 여태 봐오길, 가만히 있을 애들이 아니니 무슨 일 하나 더 생길 기분인데."
"감당할 수 있는 일이었으면 좋겠군요."
"뭐든 감당 가능한 선에서 찾아올 거야. 그게 얼마나 힘드냐의 차이겠지~?"
"넘을 수 있는 산이라는 거군요. 얼마나 높든."
"그래애. 다 같이 하면 안 될 거 없지 않겠어?"
늘상 장난스러워 보이는 리데레의 입술은 이럴 때는 당당해 보인다. 짐볼 위에서 앞뒤로 기우뚱거리다가 문득 아지지는 머리가 산뜻해졌음을 깨달았다. 자신의 서툰 뜀박질 때문은 아니었다.
리데레는 아지지를 데리고 자신이 그린 벽화를 보여주었다. 자기계발실 안으로 들어가자 벽면을 가득 채운 그림이 보였다. 잔디밭이 넓게 펼쳐져 있고, 옆으로는 물이 흐르고, 그 위를 대교가 가로질러… 높은 건물들 사이로 향한다. 저녁 노을빛이 그 위에 짙게 깔렸다. "브루클린 브릿지! 의뢰랄까, 부탁이랄까. 받아서 말이지이." 아지지는 의뢰인이 누군지 알 것만 같았다.
당신은 잘할 수 있을 거예요.
미지로의 탐험은 항상 두려움을 안겨줍니다.
실없는 소리와 함께 가상체험관에서 환경을 설정하던 두 명의 서툰 사람들이 있었다. 아지지는 그때 가상체험관을 처음 찾았고, 베릴리오는 두 번째였다. 베릴리오는 옆에서 지켜봤던 게 전부라고 했지만 어렵지 않게 환경을 설정했다. 그가 설정한 풍경이 곧 두 사람을 둘러쌌다. 잔디밭과 바다, 높은 건물들, 그 모든 풍경을 가로지르는 거대한 대교. 베릴리오 클로실은 그곳이 고향에 있던 장소였다고 말했다. 700년 전 떠나온 고향. 그중 대부분의 시간은 베릴리오가 체험할 수 없었던 시간이지만, 방주에서 눈을 뜬 자들은 그런데도 시간의 간격을 세곤 했다. 버사 아지지 힐과 베릴리오 클로실이 그런 사람 중 하나였다. 둘은 베릴리오가 떠나온 고향의 대교를 한동안 감상했다. 그리고 아지지는 베릴리오가 했던 것을 따라서 환경을 바꾸어 보았다. 물과 풀, 빌딩이 사라지고 주변을 가두는 벽이 생긴다. 벽지와 가구, 고풍스러운 집.
여긴 당신이 그리워하는 장소인가요?
그렇진 않아요. 하지만 방주보다는 그곳에 가깝죠.
그 집은 아지지가 한 번도 본 적 없는 집이었으나 어떤 면에서는 익숙했다.
베릴리오 클로실은 자신이 '그리워하고 싶지 않으니 중요치 않다 되뇌이는' 거라고 했다. 그 말은 기묘하다. 왜냐하면 베릴리오 클로실은 아지지의 앞에서 많은 것이 중요치 않다고 되뇌었기 때문이다. 고향. 지위. 타인의 인정. 자신의 의사.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제 생각을 믿지 못하겠거든요. 그는 자신마저 지우고 싶어하는 사람처럼 보인다.
잊고 싶나요.
잘 모르겠습니다. 어떻게 정리하면 좋을지 모르겠네요.
당신은 모르는 게 많군요. …사실 나도 다르진 않죠. 가끔 남은 시간이 지나치게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들은 그립고 그립지 않은 풍경 속을 거닐다가 다음을 기약했다.
다음에도 보여줄래요? 그때도 정리하지 못했다면.
그럴게요. 정리한다고 해도, 잊을 리는 없으니.
아지지는 리데레의 손에서 다시 벽으로 옮겨간 브루클린 대교를 바라보며 향수를 느꼈다. 베릴리오와 함께 대교를 보았을 때, 자신이 진정으로 속한 적 없는 집을 보았을 때 느꼈던 감상과도 비슷했다. 그때는 자신이 그리워하는 것의 정체를 몰랐으나 리데레의 그림을 보면서는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아지지는 처음부터 정체 없는 것을 그리워하고 있었다. 저물어버린 모든 과거에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더는 잡히지 않는, 유령과 유물로 남아버린 모든 것들에.
"전에 브루클린 대교를 본 적이 있어요. 실제로 본 것은 아니었지만… 멋진 그림이에요, 리데레."
그리고 아지지에게는 '그림'이 곧 그렇기도 했다. 다양한 색채로 물든 리데레의 그림은 아지지에게 자신이 잃어버린 것들을 떠올리게 한다. 정리해야 하는 것들 역시. 베릴리오 클로실의 말처럼 그것들을 정리한다고 해도 잊을 리는 없을 터다.
아지지는 리데레와 함께 '싸인펜'을 구경하고, 리데레가 그려둔 그림들을 구경했다. "원하는 만큼 써봐도 돼, 잉크가 다 닳으면 또 달라고 하면 되니까." 리데레의 스케치북에는 연필로, 물감으로, 싸인펜으로 그린 그림들이 빼곡하게 채워져 있었다. 아지지의 손에는 파란색 싸인펜이 들려 있다. 방주에 와서는 처음으로 아지지는 타인의 앞에서 그림을 그렸다. 낯선 도구였으나 두렵지 않았다. 리데레의 앞이어서일까, 부담이 없었다. 처음에 아지지는 연필로 하듯이 눕혀서 그렸는데, 선이 중간중간 끊겼다. 리데레의 조언을 들은 뒤엔 각도를 달리 해서 조금 더 힘있게 손목을 움직였다. 그리는 대상은 리데레였다. 리데레의 얼굴과 머리카락의 윤곽을 그린 아지지는 분홍색 싸인펜을 가져와 리데레의 눈동자를 색칠했다. 아주 꼼꼼하게.
"흠. 흠~~"
민망한지 심심한지 리데레가 흥얼거리는 목소리가 정적을 메웠다. "아지지~ 아지지~ 다 됐어?" 리데레가 불쑥 고개를 내밀었다. 아지지는 스케치북을 그에게 보여주었다. 서툰 부분이 있지만 선은 간결했고, 그림을 오래 그려본 사람의 솜씨다. 다만 눈동자 색은 진하게 번져 있었다.
"색칠은 못 하겠군요."
아지지는 조용히 웃으며 제 친구의 판결을 기다렸다.
스케치북 속의 리데레는 비밀을 간직한 사람처럼 웃고 있다.
2
CCTV 영상이 공개되고 며칠 뒤, 아지지의 주변에 맴돌던 사람들은 대부분 떨어져나갔다. "저기요. 어렵게 말할 거 있어요? 그냥 심플하게 가자고요. 누가 오래된 거 티내나…." 누군가 포문을 열자 다음부터는 쉬웠다. 아지지의 말투, 단어, 시각, 모든 것에서 아지지가 오래전 냉동된 사람이라는 게 티가 났다. "일단 신선한 사람들 말부터 들어 보자고요." 방주 내에는 사람들의 냉동 시기를 비교하는 말이 생겨난 지 오래였고, 어떤 사람들에게 아지지는 구시대의 잔재나 다름없었다. "아… 아무래도 신선한 사람들이 아는 게 더 많으니까요." 친절한 자들조차 은근한 조롱을 내보일 때가 있다.
"알죠." 아지지는 침묵했다.
단 한 사람만이 여전히 아지지에게서 무언가를 배우려 했다. 그의 이름은 '하선'으로 21세기에 한국에서 살다가 냉동되었다고 했다. 하선은 방주에 정전이 일었을 때 아지지를 외면했던 무리 중 한 사람이었는데, 언더가 방주까지 밀고 들어오던 즈음 그 일을 사과하며 아지지에게 다가왔다. 하선은 타인에게 공감을 잘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돈 없는 사람들'에 대한 경멸이 경멸인 줄을 몰랐고, 아지지에게 볼코프 형제에게서 멀어지는 게 낫겠다고 말한 사람이기도 했다. "걱정되어서 그래요." 하선은 자주 아지지의 손을 잡았다. 아지지는 그의 악의 없는 언사가 종종 거슬렸다.
방주 밖을 탐사 및 정찰하기 위한 탐사조가 꾸려지고 있다는 소식이 금세 나돌았다. 하선은 개인 단말기에 겨울을 나는 데 필요한 리스트를 작성하면서 그 얘기를 꺼냈다.
"어쩌면 그렇게들 자기 목숨 아까운 줄을 모를까요? 단 며칠도 못 참고 정말이지 이해가 안 된다니까요? 조금만 더 준비하고 나가도 되잖아요?"
"목숨을 아끼니까 밖으로 나서는 걸지도 모르죠."
"그건…… 잠깐. 혹시 아지지 씨도 나가는 건 아니죠?"
하선은 눈치가 빨랐다. 아지지는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는 강렬한 시선을 느꼈다.
"잠깐 다녀오려고요. 당신이 말한 사람들과 함께는 아니지만."
"설마…."
"하선. 별일 없을 거예요."
아지지는 하선이 볼코프 형제의 험담을 꺼내기 전에 말을 잘랐다. 하선은 불만스러운 낯이었으나 곧 얼굴에 염려를 띠고 아지지의 손을 잡았다.
"걱정되어서 그래요, 밖에 뭐가 있을지도 모르고… 솔직히 우리 같은 사람들은 전투인력은 아니잖아요. 원래도 그렇고, 이능력도 그렇고. 좀 불공평하지만 어쩔 수 없죠…. 솔직히 나가서 할 것도 없잖아요? 아니, 정말 나가실 거예요?"
"네. 내일은 얼굴 못 보겠네요."
"아니, 그렇게 빨리요??"
하선이 목소리를 높이려 들자 아지지는 고개를 가볍게 젓는다. 거기까지 하라는 뜻이었다. 잠시 정적이 흐른다. "슬슬 준비도 필요하고요." 아지지는 하선의 단말기 옆에 놓인 자신의 단말기 위의 홀로그램을 껐다. 이동하려는 것처럼 움직이자 이제 아지지와 하선 사이에는 애매한 거리가 생겼다.
"바쁘지 않다면 커피 한잔하지."
그때 메드베데프의 목소리가 하선과 아지지의 사이로 자연스럽게 밀고 들어왔다. 하선은 낯선 이에게 방해받아 불편해 보였으나 아지지는 그에게 양해를 구하고 메드베데프를 따라나섰다. "고마워요." 가는 길에 인사하자 메드베데프는 묵묵하게 앞을 보면서 대꾸했다. "뭐가 고마운지 모르겠군."
메드베데프는 아지지가 볼코프 형제와 무슨 관계인지 궁금해 보였다. 아지지 역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들의 대화는 볼코프 형제를 중심에 두고 시작했다. 아지지는 그가 형제의 보호자처럼 보였던 한편으로 폭력에 익숙해 보였던 걸 기억했다. 그날 자신을 바라보던 메드베데프의 눈동자는 날카로웠다. 지금은 그저 종잡을 수 없는 눈동자 하나를 마주하고 있을 뿐이나, 알렉산드르 볼코프처럼 메드베데프의 얼굴에도 흉터가 남아 있다. 메드베데프는 볼코프 형제와 생전에 오래 알던 사이라고 말했다. 아지지는 볼코프 형제가 궁금했고, 그만큼 메드베데프에게도 호기심이 생겼다.
"왜 산드라가 당신을 귀찮게 구는 겐가."
"글쎄요. 알렉의 말대로라면 알렉 때문이고, 키튼의 말대로라면 제가 재밌어서라고 하는데… 당신 생각엔 어떤가요?"
"성격 때문인 것 같군."
메드베데프는 간결하게 답했다. 아지지는 메드베데프에 관해서도 여러 질문을 던졌다. 메드베데프는 곧잘 대답했으나 과거에 관해서는 함구하는 편이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아직 당신을 믿을 수 없어서 말 못 하겠네."
아지지는 재밌다는 눈으로 메드베데프를 바라보았다.
"당신… 알렉과 닮은 것 같군요."
메드베데프의 표정이 바뀐다. 내내 침착해 보였던 얼굴이 순식간에 다채로운 빛깔을 띤다. 그게 메드베데프의 매서운 인상을 누그러뜨리는 모습을 아지지는 내심 즐겁게 바라보았다. 메드베데프는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다.
"내가?"
"네."
"그런 식으로는 생각해본 적 없네만."
"가볍게 생각해요. 인간은 모두 하나의 덩어리에서 나왔다는 말도 있지 않나요."
"할말 없게 만드는군."
메드베데프는 짧게 앓는 소리를 냈다. 아지지는 잠시 망설이다 고개를 까딱였다.
"그때 당신이 있어서 다행이었어요."
"뭘."
메드베데프는 별일 아니라는 듯 주제를 돌렸다. 대화는 자연스럽게 아지지에 관한 이야기로 흘러갔다. 메드베데프 역시 궁금한 게 있는지 여러 질문을 던졌고, 아지지는 충실히 대답했다. 대화의 주제는 아지지에서 다시 메드베데프로, 메드베데프에서 볼코프 형제에게로 향하다가 다시 두 사람에게로 돌아왔다.
"당신은 어느 시대 사람인가?"
"흠. 시대라 하면… 1919년에 죽었어요."
"전쟁이 끝나는 걸 봤겠군."
"그렇지요. 내가 끝을 보긴 한 건지 모르겠지만."
"그건 어떤 의미지?"
"아직은 나도 여기까지만 답하는 걸로 하죠."
아지지는 메드베데프의 말을 기억해 장난으로 되돌려 주었다. 초연한 얼굴 때문에 진담으로 보이기도 했다. 커피가 손안에서 식는 동안 그들은 얕은 대화를 이어갔다. 차분하게 서로를 가늠해 보기도 하고, 무덤덤하게 말을 넘기기도 하고, 가끔 서로의 말이나 감정에 동조하기도 했다. 커피를 노아에게 시켜 처리하고 다시 복도로 나설 때 즈음 메드베데프는 불쑥 찌르고 들어왔다.
"당신도 나간다고?"
"네. 그렇게 되었군요."
"당신이 알렉에게 짐이 되지 않을 수 있나?"
그저 간단한 사실판단을 하는 듯한 태도. 아지지는 그의 그런 면이 알렉을 닮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그 외의 메드베데프에 관해서는 아는 게 없었다. 대화를 나눈 지금도. 지금 이 순간 서 있는 두 사람의 눈높이가 아주 비슷하다는 점만이 아지지에게 새롭게 다가왔다. 아지지는 메드베데프가 자신보다 클 줄 알았다. 그리고 아지지는 그의 질문에 관해서도 답하기 어려웠다.
"그건… 잘 모르겠어요. 내가 짐이 될지 무엇이 될지."
"그러면 당신은 왜 방주 밖으로 나가는 건가."
"걱정됐거든요."
"무엇이?"
아지지는 잠시 먼 곳을 바라보았다가 메드베데프와 시선을 맞춘다.
"글쎄요. 당신은 알렉이 걱정되나요?"
메드베데프의 미간이 움찔거린다. 그는 답하지 않고, 아지지를 살짝 빗겨 지나가 뒤에 떨어져 있던 음료를 주워든다. 그새 카페테리아에 사람들의 숫자가 늘었다. 그들을 흘겨 보며 메드베데프는 말을 돌렸다.
"시간이 벌써 이렇게 됐는가. 당신도 나가려면 자야겠지."
3
그런데… 생각해보니, 밤이 긴 것을 좋아한 적도 있어요.
그러셨습니까…? 저도 그런 적이 아주 없진 않았던 것 같네요. 당신은 언제였습니까?
베릴리오가 물었을 때 아지지는 채 정리하지 못한 과거로 돌아갔다.1919년. 전쟁이 끝나고 제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던 때로.
제국의 전쟁은 끝났으나 '그들'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많은 젊은이들이 하녀 일을 버렸다. 그보다 많은 젊은이들이 거리로 나갔다. 19세기가 저물 무렵에도 가끔씩 파업과 폭동이 일었으나, 1910년대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다. 아지지의 지인들의 딸과 아들, 남편 중 일부가 거리로 나갔다. 때로는 아지지의 친구가 직접 거리로 나가기도 했다. 아지지는 방주의 역사관에서 자신이 목격하지 못한 운동의 끝을 찾아보려고 했다. '전쟁 전후 노동계급의 운동'…… '성과와 타협, 제국의 기만'…… '여성들이 투표권을'…… 아지지는 그때 거리로 나가지 않았다. 아니, 그때만 그런 것이 아니다. 버사 아지지 힐은 살면서 자신을 괴롭히는 벽을 단 한 번도 부수려 해 본 적이 없다. 아지지는 늘 벽 너머에서 타인의 불길을, 바람이 된 사람들의 외침을, 쇠가 부딪히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불길은 늘 아주 깊은 곳에서 일렁거리다가 꺼졌다. '문밖엔 어차피 내 자리가 없어.' 아지지는 그렇게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한 번 나가면 다신 돌아올 수 없을 텐데…' 답답했다. 그 시기의 역사서를 한참 뒤적거리다가 아지지는 자신을 일컫는 구절을 찾아냈다. '많은 하인들이 스스로 갇혀 있었다……' * 아지지는 책을 찢고 싶은 충동을 참느라 애썼다.
예고 없이 생이 끊어지기 전, 아지지는 자의와 타의로 작은 집에 유배되어 있었다. 그곳을 자신의 유배지로 삼고 낡아가는 육신 속에 갇혀 성을 내는 노인의 수발을 들었다. 그 시절은 밤이 좋았다. 낮은 너무 길고 시끄럽고 혼란스럽다.
아지지는 드물게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피곤할 때 그렇더군요. 밤이 되면 쉴 수 있을 것 같잖아요. 그렇지 않나요?
맞는 말이군요.
그러나 베릴리오의 말대로 밤이 너무 긴 것보다는 낮이 긴 편이 나을 것이다. 지금 아지지는 긴 밤의 대가를 치르고 있는 것 같았다. 너무 오래 밤에 머무른 탓에 밤이 찾아오지 않는 것이다.
4
"흠… 그래서 나간다고?"
"네, 근데 눈도장 찍으러 자주 올 거예요."
"너 없는 동안 새 간식 친구나 만들어야지."
"엣. 진짜…?"
"바보. 그~짓말이야. 잘 다녀오기나 해~."
"진짜 거짓말 맞죠…?"
리데레가 비밀스럽게 미소를 짓는다. 리데레가 살짝 고개를 기울이자 그 뒤로 작은 빛이 깜빡였다. 오래 전 태양과 더가깝게 살던 때의 한낮이 연상되는 빛이었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건 바닥에 떨어져 있던 단말기였다. 누군가 잃어버린 모양이다. 아지지는 리데레에게 그걸 말했으나 둘 중 누구도 단말기를 줍지 않았다. "노아." 기계를 부르는 걸로 충분했으니까. 아지지는 리데레에게 새 간식 친구를 만들지 말라고 신신당부를 한 뒤 밖으로 나섰다.
* '여전히 더 많은 하인들이 스스로 갇혀 있었다. 고용주는 공손함의 표현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들의 침묵은 사생활이 지속적으로 침해당하는 일터에서 드러내는 반감의 표시일 때가 더 많았다.' 42쪽, 셀리나 토드, 『민중』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