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절
2021. 6. 1.

 

 

  아지지는 단말기를 통해 다른 사람들과 방주 내에서 공유한 자료들을 확인했다. 방주를 중심으로 그 근처의 지형들과 특성, 마주친 언더의 종류와 코어의 위치 등이 나열되어 있다. 아지지는 그 정보들을 며칠간 달달 외다시피 했다. 약 한 달 전보다는 훨씬 많은 정보가 축적되어 있었다. 방주에 들러 다른 사람들과 정보를 공유하고 리데레를 만나러 가면, 리데레는 '데이터가 쌓이면' 좋은 일이라고 말했다. 데이터. 아지지는 낯선 단어를 자신이 아는 단어로 치환해 학습했다. 정보가 쌓이고 자료가 쌓이면 실보다 득이 클 터다.

  방주 밖에서 '데이터'를 쌓는 건 아지지보다 알렉이 잘했다. 알렉은 어떤 게 도움이 될 정보인지 자신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분별해냈다. 지표가 될만한 지형을 파악하고 알렉이 다음으로 탐색할 목적지를 정하면 아지지는 따랐다. 간혹 날짐승을 만나기도 했다. 그들은 되도록 짐승을 피해 다녔지만, 가끔은 싸워야 할 때가 찾아왔다. 주로 알렉이 짐승을 제압했고, 아지지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그를 지켜보다 짐승의 숫자가 늘어나면 총을 들었다. 총신에는 미스트레아가 붙여준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끝이 닳은 검은색 스티커는 오돌토돌한 무늬처럼 보였는데, 그 부분을 엄지로 문지르면 마음이 가라앉는 것 같았다. 아지지는 숨을 고르고 자신의 기척을 죽인 후 최대한 알렉과 멀리 떨어진 짐승을 우선적으로 겨냥했다. 자신의 사격 실력을 믿을 수 없었다. 짐승과 맞붙은 날이면 아지지와 알렉은 식량이 될만한 부위를 잘라내 방주로 돌아갔다. 자잘하게 다친 곳을 치료받고 몸을 씻고 캡슐에 몸을 뉘이고 아는 사람의 얼굴을 보고나면, 어느새 알렉이 다가왔다. 그는 늘 아지지보다 빨랐다. 아지지는 알렉과 함께 필요한 것을 재정비하고 방주 밖으로 나섰다.

  그러면 당신은 왜 방주 밖으로 나가는 건가.

  걱정됐거든요.

  무엇이?

  아지지는 자신이 걱정하는 것의 실체를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메드베데프가 그렇게 묻는 순간 모든 것이 엉켰다. 머릿속에는 알렉의 얼굴과 퍼피의 얼굴, 방주에 있는 아는 사람들의 얼굴과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의 얼굴, 노아, CCTV 영상, 언더, 전쟁과 폭동, 고함과 정적이 복잡하게 얽혀 있었다. 그 사이사이에 감정이 끼어들어 있다. 분노, 두려움, 허망함, 막막함, 애틋함, 체념과 욕망, 그리움, …… 염려는 그것들을 하나의 거대한 장막처럼 뒤덮었다. 이 모든 것을 아지지는 설명할 자신이 없었다. 메드베데프는 물론이고 자기 자신에게조차. 어쩌면 이것도 '데이터'가 쌓여야 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러다 보면…… 언젠가는 제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설명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밤이 되면 알렉과 아지지는 미리 설치해둔 천막으로 돌아와 간단하게 식사를 하고, 다음날의 일정을 계획했다. 대개는 알렉이 주도했다. "괜찮겠습니까?" 알렉이 물으면 아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엔 아주 고요한 시간이 찾아왔다. 풀벌레 소리와 야행성 동물들의 노래, 바람소리로 귀가 쉴 틈은 없었으나 두 사람이 입을 다물었기 때문이다. 아지지와 알렉은 직접적으로 '그 일'에 관해 언급하지 않았다. '그 일'이 무엇인지는 모호했다. 알렉산드라에 관해서 말하는 건 오히려 쉬웠다. 그러니까 정말로 말하지 않는 순간은… '버사 씨. 괜찮습니까?' 알렉이 그렇게 묻던 순간이다.

  아지지는 알렉의 무자비한 폭력이 괜찮지 않았다. 알렉도 그를 알 터였다. 아지지는 그날 진심으로 괜찮다고 말한 적이 없으니까. 아지지는 그날 알렉의 사과를 받지도 않았고 안부를 전하지도 않았다. 두 사람 모두 서로가 괜찮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다. 정확히 무엇인지는 몰라도, 껄끄러운 게 남아있다는 걸.

  "주변이 괜찮은지 확인해 볼게요."

  아지지는 단말기를 끄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알렉이 고개를 끄덕인다. 그러면 아지지는 숨을 고르고 몸의 일부는 집어넣고 표면을 날카롭게 벼린다. 자신이 멀어지고 세상이 가까워진다. 날카로워진 감각은 주변의 상황을 지각하기에 적합했고, 아지지는 나날이 자신이 감각하는 범위가 넓어진다는 걸 느꼈다. 지척에서 알렉이 숨을 쉬고 있었다. 아지지는 그를 내려다 보았다. 평소였다면 들리지 않았을 낮고 규칙적인 호흡. 아지지는 바닥을 기어다니는 벌레들과 올빼미의 날갯짓을 지나 갈대소리를 들었다. 아지지가 현재 감각할 수 있는 가장 먼 땅이다. 그곳에서 무언가가 서성거리고 있었다. 아지지는 날카로운 것이 갈대에 긁히는 듯한 소음을 들었다.

  "생체광석인가?"

  "어디입니까."

  그 말에 알렉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지지는 다시 제 몸을 드러내고 동쪽을 가리켰다.

  "아까 지나온 갈대숲에요."

  "확인해 보고 오겠습니다."

  "잠…"

  알렉은 말이 끝나자마자 자세를 잡더니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지지는 한 발을 동쪽으로 둔 채로 멈췄다. 평범한 사람의 속도로 알렉을 따라잡는 건 무리였다. 망연하게 동쪽으로 몇 발자국 걷던 아지지는 다시 이능력을 썼다. 그러자 곧바로 모든 감각을 압도하는 바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건 쏜살같이 달려서…

  "알렉!"

  아지지가 외치면서 몸을 드러냈지만 한 발 늦었다. 알렉 역시 급하게 속도를 줄였으나 코앞의 사람과 부딪히는 걸 피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아지지와 알렉은 옆으로 넘어졌다. 어깨가 얼얼했다. 먼저 일어서는 건 알렉이었다.

  "버사 씨. 괜찮습니까?"

  "난 괜찮아요. 당신은요?"

  "괜찮습니다."

  아지지는 알렉의 부축을 받아 자리에서 일어났다. 몸에 묻은 흙을 털어내고 있는데, 문득 옆에서 조용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죄송합니다."

  아지지는 그 순간 옅은 껄끄러움을 느꼈다. 다른 날 하지 않았던 대화가 지금 이 순간의 대화에 겹쳐졌기 때문이다.

  "왜 사과를 하나요. …같이 실수한 거죠, 친구."

  그러나 대답은 그때와 어울리지 않는다. 아지지는 알렉의 어깨에 묻은 흙을 털어주고 그를 지나쳐 물을 마셨다.

 

 

 

 

 

 

 

  알렉은 갈대숲에서 언더를 찾지 못했다고 말했다. 다만 탈피한 뱀의 껍질을 발견했는데, 어쩌면 그 소리를 들은 것일 수도 있겠다고. 그러나 다음날 갈대숲에 다시 발을 들였을 때, 언더들이 나타났다. 아지지와 알렉은 전투 태세를 갖췄으나 언더들의 뒤에 겹겹이 모습을 나타내는 무리를 보고는 몸을 물렸다. 자칫하다간 포위될 것이다. 아지지는 전투에 관해서 아는 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함정에 빠진 기분이 들었다. 아지지와 알렉의 눈이 마주쳤다. 도망가야 했다.

  "실례하겠습니다."

  "뭘…"

  "꽉 잡으십시오."

  알렉이 아지지의 몸을 안아 올리더니 그대로 들쳐맸다. 아지지는 알렉이 결단을 내리면 곧바로 실행하는 사람이라는 걸, 그리고 알렉이 바람이 되면 무서우리만치 속도가 빠르다는 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잡히는 대로 알렉의 몸을 잡았다. 한숨을 내쉬는 순간 이미 그들은 바람과 한 몸이 되어 있었다. 갈대가 빠르게 몸을 감쌌다 때리고, 언더들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상황이 어떻게 굴러가는지 알기 위해서는 아지지도 이능력을 쓰는 편이 낫겠지만, 엄두가 나지 않았다. 알렉의 바람에 함께 몸을 맡기자 세상은 아지지가 이능력을 쓸 때 보던 것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다가왔다. 아니… 아지지의 시각에서 세상은 아주 쏜살같이 멀어졌다. 입도 열 수 없을 정도로 몸을 얼얼하게 만드는 바람과 꽉 붙잡고 있는 온기만이 아지지가 지금 살아있다는 걸 알 수 있게 했다. 아지지는 손에 힘을 더 주고 이능력을 썼다.

  순식간에 세상이 다가왔다가 다시 멀어졌다. 속도가 아주 느려졌다가 다시 빨라진다. 얼얼한 감각이 멀어지고 굉음이 고막을 때렸다. 바람 소리다. 그 소리가 귀를 찢을만큼 커서 아지지는 황급히 이능력을 풀었다. 세상이 빙글빙글 돌았다.

  "버사 씨."

  몸에 힘이 풀린 걸 알렉이 눈치챘다. "조금만 참으십시오. 언더의 숫자가 많습니다. 아까 본 게 전부가 아니에요." 아지지는 알렉이 어떻게 이런 속도로 달리면서 말할 수 있는 건지 의아했다. '짐이 되고 싶지는 않았는데…….' 아지지는 입을 뗄 수 없었기에 어지러운 머릿속에서만 말을 뱉었다. 방주가 보일 때에서야 알렉이 처음부터 제 최대 속도보다는 한참 줄여서 달렸음을, 지금은 그보다도 속도를 늦췄음을 알게 되었다. "멈추겠습니다." 알렉이 멈춰 섰다. 아지지는 넘어질 거라 생각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잡아준 사람이 있었기 때문이다.

  "고마워요…."

  다시 땅을 밟자 멀미와 안도감이 함께 찾아왔다. 알렉의 낯빛도 좋지 않았다. 평소보다 불안정한 호흡이 한눈에 들어왔다. 주변을 둘러보자 사방에서 언더들이 방주를 향해 오고 있었고, 몇몇 사람들이 엘리베이터 문을 두드리는 것이 보였다. 심장이 크게 뛰었다. 아지지는 일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었다. 언더들의 숫자가 많다. 방주는 '오염'되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과거 버사 아지지 힐이 그랬던 것처럼……. 뺨을 맞은 기분이다. 그때 아지지가 아는 사람의 등이 언더에 의해 꿰뚫렸다. 아지지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총을 손에 쥐고 엄지로 총신을 더듬는다. 오돌토돌한 스티커와 차가운 총의 감촉이 느껴진다. 알렉이 곁에서 물었다.

  "싸울 수 있겠습니까?"

  아지지는 답이 하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래요. 당신은요?"

  "당연히 싸웁니다만, 상황이 썩 좋지 않습니다. 버사 씨를 보호할 자신은 없군요."

  알렉도 이미 손에 단검을 꾹 쥐고 있었다. 멀미가 조금 가시고 현기증이 찾아올 것 같다. 뒷덜미의 땀이 식으면서 온몸이 차가워진다. 아지지는 고민할 새 없이 입을 열었다. 이미 정해진 답을 읽는 것 같은 기분으로.

  "당신은 당신을 지켜요."

  알렉은 그 말의 의미를 되새기듯 짧은 순간 눈을 맞췄다가, 자세를 잡고 앞으로 향했다. 

  "예. 죽지 마세요."

  알렉의 등이 멀어지자 이제 그 뒤로 다가오는 언더의 길쭉한 몸이 눈에 들어온다. 소름이 돋았다. 뒷덜미에서 어깨로, 등과 척추를 따라 내려가 팔을 통해 손끝까지 퍼지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다시 손바닥을 기어가고 핏줄을 거슬러 심장에 도달하기 전에 버사 아지지 힐은 눈을 감았다 떴다. 몸을 기어오르던 감정들이 순식간에 왔던 길을 돌아 뒷덜미로, 다시 머리 끝으로, 보이지 않는 곳으로 움츠러든다. 세상이 용솟음치며 다가온다.

  곧바로 아지지는 자신이 선택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앞과 뒤에서 동시에 언더가 다가오고 있었다. 심장이 목구멍에서 뛰고 손에 땀이 났는데, 그걸 감각한다는 건 안 좋은 신호였다. 아지지는 이능력을 제어하지 못하고 몸을 드러냈다가 감추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시간이 없었다. 아지지는 앞에서 다가오는 언더의 코어를 노려 총을 쐈다. 기념할만한 첫 명중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 뒤에서 언더의 팔이 아지지의 옆구리를 찔렀다. 마지막으로 그 근처를 찔렸을 때 아지지는 죽었다.

  왜 모든 것은 한 방향에서 오지 않는 걸까.

  이능력이 풀리고 고통을 느끼면서 아지지는… 음악을 들었다. 처음에는 환청인 줄 알았으나 아니었다. 먼 곳에서 들을 닮은 머리카락이 나부끼고 있었다. 잔디와 갈대를 닮은 색색의 머리카락. 언더는 멈춰 있었다. 아야네의 음악이 무수히 많은 언더를 속박했다. 아지지는 언더를 향해 총을 연타하고 옆으로 기우는 몸을 지탱했다.

  아직 문은 열리지 않았다.

 

 

#2021

Mission 05. 단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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