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Christmas
2021. 8. 2.

 

1

 

 

  한 달이 지났다.

  2638년 12월, 사람들은 단서를 조합한 끝에 쪽지에 적힌 '최후의 수단'을 찾으러 가기로 한다.

  방주 내에서 강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조사대가 만들어졌다.

  아지지 버사 힐도 조사대에 합류했다.

  "미쳤어요?" 하선은 아지지에게 화를 냈다. 한 달 전 아지지는 하선에게 당분간은 나가지 않겠노라고, 걱정시켜서 미안하다고 하선에게 말했다. 그러나 이제는 아무렇지 않게 나간다고 말했다. "약속을 이렇게 쉽게 어기는 분인 줄은 몰랐네요." 하선은 아지지가 약속을 어겼다는 점에 화를 냈지만, 아지지가 고집을 꺾을 기세가 아니자 이내 포기했다. 아지지는 자신이 친구를 잃었다는 걸 알았지만 하선을 붙잡지 않았다.

  그럴 수 없었다.

  "나 나가."

  어느날 퍼피가 다가와 이렇게 말한 순간 버사 아지지 힐의 답은 정해졌다.

  "그래. 밖에서 또 보겠구나."

 

 

 

 

 

 

 

2

 

 

  "여기서 30분 쉽시다!"

  선봉에 섰던 사람이 외치자 여기저기서 앞다퉈 숨 돌리는 소리가 들린다. 빽빽하게 모여 있던 사람들이 흩어져 쉴 자리를 찾는다. 아지지도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짐을 내려놓고 풀 위에 앉자 살 것 같았다. 아무리 몸이 좋아졌다지만 적절한 이동수단도 없이 매일 닦이지 않은 길을 걷는 건 고된 일이었다. 게다가 여기까지 오면서 조사대는 몇 번이나 몸집이 큰 짐승들을 만났다. 인간이 사라진 세상에서 동물들은 그 몸집을 불렸고, 이방인들을 자주 위협했다. 물론 이 이방인들에게는 '힘'이 있었고 싸움에 능한 사람도 많아 큰 문제는 되지 않았지만, 미지에 대한 두려움은 폐부 밑으로 깊숙이 새겨졌다.

  방주 밖은 막막하고 아름다웠다. 아지지는 어릴 적 동화 속에서나 보던 거대한 평야에 있었다. 얼마나 오랜 세월 동안 사람의 발길이 끊겼을지 알 수 없었다. 나방이 아지지의 얼굴을 덮어버릴 것처럼 큰 날개를 펼치며 나뭇잎 사이로 날아간다. 날개가 눈부셨기에 아지지는 반사적으로 나방을 쫓았다.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젖히고 위를 올려다 보자 높은 하늘과 울창한 나무들 사이로 알 수 없는 동물과 곤충들이 부산하게 움직이는 그림자가 보였다. 앞으로 걷고 뒤로 걸으면서 나방을 찾아보려 했지만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너무 먼 곳으로 날아간 모양이다. 그러나 아지지가 고개를 내리고 다시 자리에 앉자, 같은 종의 나방들이 쉬고 있는 사람들 옆에서 춤을 추듯 날아다니는 것이 보였다. 아지지는 웃었다. 검은색 날개에는 세상의 모든 빛깔을 모아둔 비늘 같은 문양이 새겨져 있다. 아지지는 가방에서 수첩을 꺼내 그 날개와 몸을 스케치했다. 색칠할 수 있는 도구를 가져오지 않은 것이 아쉬웠다. '색이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나방들이 모두 눈앞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아지지는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걸 기억해냈다. "자, 조금만 더 힘냅시다~!" 누군가 손뼉을 친다. 아지지는 수첩을 가방에 넣고 다시 일어났다.

  아지지는 대열의 중간에서 조금 뒤처진 자리에서 걷곤 했다. 조사대가 밖에서 보낸 시간이 길어지자 대열은 어느 정도 고정되었다. 아지지는 대열의 뒤에 서는 사람들과 자주 얘기를 나눴다. 때로 대열은 섞이고 흐트러지기도 했는데, 쉬었다 다시 출발할 때가 그랬다.

  "아지지~ 아지지~"

  노래를 부르는 것 같은 목소리에 아지지는 옆으로 고개를 돌린다. 코끝이 빨개진 리데레가 웃으면서 어깨를 붙였다가 떨어진다.

  "리데레~ 어디 있었어요?"

  "나? 아까 수다 떠느라고 저쪽에 있었는데~ 네가 보여서 달려왔지."

  "나를 위해 달려오기까지, 영광이군요."

  "그럼~ 우리 자기는 특별취급해줘야지~"

  리데레가 장난스럽게 말하며 킥킥 웃는다. 아지지도 조금 웃고는 리데레에게 자신이 봤던 나방에 관해 얘기해줬다. 조사대에 참가한 뒤로 아지지는 틈이 날 때마다 바깥의 풍경들을 수첩에 스케치로 남겼고, 리데레는 그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색이 없어서 아쉬웠다고, 사진으로 남길걸 그랬다고 말하자 리데레도 함께 아쉬워했다. 그러면서도 여러 가지 색을 하나의 펜에 담은 것도 있다면서 다음엔 그걸 챙기라는 조언도 잊지 않았다. "그런 게 있어요?" 아지지가 놀라면 리데레는 즐거워하며 신문물을 알려줬다. 그렇게 리데레와 나란히 얼마나 걸었을까. 불현듯 누군가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눈이다!"

  "헐. 정말."

  "어디?"

  "나 맞았어요."

  "나도. 빨리 움직여야겠는데."

  "금방 그칠 수도 있잖아요…."

  사람들이 웅성거렸다. 눈이 정말로 내리는 건지 하늘을 보느라 멈춰 선 사람들이 많았다. 아지지도 고개를 젖혔다. 1초, 2초, … 속으로 7초를 셌을 무렵 차가운 눈이 이마에 닿았다가 스며들 것처럼 자취를 감췄다.

  "화이트 크리스마스네." 리데레가 조용히 말했다.

 

 

 

 

 

 

 

 

3

 

 

  눈발은 순식간에 굵어졌고, 조사대는 황야에서 발이 묶였다. 작은 침엽수림 근처에 캠프를 마련하고 찌뿌둥한 몸을 푸는 사이 사람들의 마음에 눈처럼 하나의 단어가 쌓였다. 크리스마스. 오늘은 12월 24일이고 내일이 크리스마스라는 소식이 이 사람에게서 저 사람에게로, 저 사람에게서 또 아지지에게로 전달되었다.

  누군가 캠프 근처의 커다란 구상나무 꼭대기에 빛나는 플라스틱 별을 달았다.

  언제쯤 눈발이 가실지, 좌표로 가면 무엇이 나올지 모여서 토론한 다음 다시 봤을 때는 구상나무에 리스가 걸려 있었다.

  다음날 아침 다시 봤을 때 구상나무는 쪽지나 나뭇가지, 오너먼트를 주렁주렁 달고 있었다. 사람들은 삼삼오오 모여서 웃었다.

  크리스마스였다.

 

 

  "아지지~ 눈사람 만들어봤어?"

  "당연하죠. 만들어 볼까요?"

  "응! 이리 와. 저쪽 눈이 깨끗해."

  리데레가 아지지에게 손을 내민다. 아지지는 수첩을 가방에 넣고 리데레를 따라갔다. 캠프에서 조금 떨어진 곳으로 걸어가자 어지럽게 얽힌 발자국들 사이로 작은 공터처럼 깨끗한 눈만 쌓인 공간이 나왔다. 리데레는 먼저 쪼그려 앉았다.

  "뭐 그리고 있었어?"

  "비밀이에요."

  그 옆에 쪼그려 앉으면서 아지지는 어깨를 툭 부딪친다. 리데레는 벌써 눈을 만지다가 어이없다는 듯 웃음을 터뜨렸다. 아지지는 리데레가 눈사람을 어떻게 만드나 먼저 봤다. 리데레는 양손으로 눈을 모아 꾹꾹 누른 뒤 동그랗게 모양을 내기 시작했다. "작은 눈사람이네요?" 아지지가 묻자 리데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넌 어떻게 만들 거야?"

  "따라해 보려고요."

  아지지는 리데레가 한 것처럼 양손으로 눈을 모았다. 눈이 많이 빠져나가지 않도록 잘 모아 꾹꾹 누르자 리데레의 것보다는 조금 큰 눈덩이가 만들어졌다. 리데레는 그걸 보고 피식 웃었다. 둘은 시답잖은 농담을 하며 눈덩이를 동그랗게 만들었고, 조금 더 작은 눈덩이를 만들어 먼저 만든 눈덩이 위에 올렸다. 두 개의 눈사람은 각자의 한손에 올릴 수 있을 정도의 크기였는데, 만든 사람들이 눈덩이를 매끈하게 만드는 데 얼마나 공을 들였던지 균형 잡힌 원형의 몸통을 갖고 있었다. 리데레는 눈사람의 팔이 되어줄 나뭇가지를 들고 왔고, 아지지는 잘 부스러지지 않는 잎사귀를 들고 와 눈사람의 머리에 꽂아 주었다. 그 사이 손을 다 감싸지 않는 장갑 사이로 드러난 리데레의 손끝은 새빨개졌다.

  "장갑 바꿀까요?"

  "괜찮아~"

  리데레는 어깨를 으쓱이다가 갑자기 장난스럽게 눈을 빛냈다. "아지지~ 잠깐 고개 좀 숙여봐." 아지지는 장난이 돌아올 것을 예감하면서도 허리를 숙였다. 곧 리데레가 차갑게 언 자신의 손을 아지지의 목덜미에 가져다 댔고, 아지지는 소리를 질렀다. 그들은 작은 눈사람을 두고 엉성한 술래잡기를 했다. 이른 오전이었고 눈이 그칠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오후에 아지지는 휴고를 도와 크리스마스 음료를 만들었다. 마실 사람이 많다 보니 아지지 말고도 여럿이 천막에 모여 재료를 손질하고 음료를 데웠다. 에그노그와 뱅쇼의 달큰한 향이 천막 안을 메우고 쉬는 시간이 되자 휴고가 아지지의 곁으로 다가와 가볍게 인사했다.

  "고마워요, 아지지."

  "별말씀을요. 미식가를 만족시킬 수 있었으면 좋겠군요."

  "그럴 거예요. 훌륭한 원재료와 뛰어난 요리사의 조합이 안 좋을 리가 없죠."

  언젠가 했던 농담을 잇는 농담을 주고받고 그들은 제각기 쉬기 위해 걸음을 옮겼다. 눈 내리는 크리스마스에 달큰한 술을 마시고 있자니 캠프의 분위기가 점점 느슨해졌다. 안 그래도 조사대원들 사이에는 방주 내의 사람이라는 것보다는 조금 다른 유대감이 생기고 있었는데,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낸다는 사실이 거기에 색다른 빛깔을 더했다. 유대의 실은 어떤 사람에게는 곧 끊어질 듯 희미하고 어떤 사람에게는 단단하고 굵었지만, 그래도 끊어지지 않고 그들 모두를 미약하게나마 감싸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적어도 이날만큼은.

  미지근한 취기가 사람들 사이를 맴돌 무렵, 아지지는 뱅쇼를 마시다가 메이즈를 발견해 인사했다. 웬일인지 그는 눈이 마주치자마자 웃었는데, 그 모습이 아주 이상했다. 아지지는 기묘한 표정으로 메이즈의 앞에 섰다.

  "취했어요? 메이즈."

  "아뇨? 왜 그러십니까? 옆에 앉으세요."

  "네. 그러려고요. 그런데 당신 옷에서 에그노그 냄새가 나요."

  아지지는 메이즈의 옷을 빤히 바라보았다. 방금 막 흘렸는지 검은 옷 위로 색이 묘하게 다른 얼룩이 져 있었다. 게다가 겉옷의 흰 털 부분에도 연노랑 빛 점이 찍힌 게 분명 마시다 흘린 모양이었다.

  방주에서 메이즈가 아지지를 이끌고 옷 가게에 간 적이 있었다. 사유는 아주 간단했는데, 아지지가 드레스 소매에 작은 점 같은 얼룩을 묻히고 있었기 때문이다. 얼룩을 가만히 옆에서 보고 있기에 아지지는 걷는 동안 어쩌다 얼룩이 묻었는지 얘기했다. 메이즈는 적당히 대꾸하다가 옷 가게에 도착하자 어울리는 옷을 추천해주겠다고 했다. 깔끔한 정장이었다. 새 정장을 다 입고 밖으로 나오자 메이즈는 왠지 안심한 얼굴이었다. 설마 정말로 얼룩 때문에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건가 싶어, 아지지는 조금 웃고 싶어졌다. 이제 안심인가요? 아지지가 묻자 메이즈가 웃었다. 네, 안심입니다.

  그러니 지금의 라파엘 메이즈는 아주 이상했다.

  "에그노그? 안에 에그노그 많아요."

  "아뇨. 옷에 묻었다니까요."

  "아…"

  아지지가 얼룩을 직접 손으로 가리키자 메이즈가 그제야 자신의 옷을 내려다봤다. 코로 냄새를 맡는가 싶더니 여전히 환하고 조금은 실없는 얼굴로 고개를 든다.

  "묻었네요. 옆에 앉으세요."

  결국 아지지는 소리를 내 웃었다. 메이즈는 자신이 무슨 짓을 하는 줄도 모르고 따라 웃었다. 그 모습이 또 웃겨서 아지지는 메이즈의 옆에 앉아 한동안 실없는 말장난을 했다. 주로 메이즈의 이상한 답변을 듣고 재밌어하느라 바빴지만.

 

 

 

 

 

 

 

4

 

 

  모닥불 근처에서는 이야기와 놀이가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밤이 늦어지고 추위가 거세지면서 모여 앉아 있던 사람들도 슬슬 천막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아지지 역시 자리에서 일어났다. 흘긋 주변을 둘러보자 사람이 얼마 남지 않은 가운데 엡실론이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 어차피 잠도 잘 안 오니까… 너는 들어가." 다른 이에게 그렇게 말하며 앉아 있는 사람의 얼굴은 헬멧으로 감싸여 있다.

  아지지가 다시 천막 밖으로 나왔을 때 모닥불 앞에 앉아 있는 건 한 사람이었다. 주변이 무척 고요했기에 아지지는 잠시 이능력을 써 기척을 숨겼다. 주변에 달리 위협요소가 없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숨죽이고 감각을 곤두세우자 눈이 바닥에 점점이 쌓이는 게 느껴진다. 야행성 동물들이 정적은 거짓이었다는 듯 활개 치고 있었지만 맹수는 없는 것 같다. 그리고 멀지 않은 곳에서 기묘한 향이 느껴졌다. 모닥불 앞에 있는 이에게서 나는 향 같았다.

  아지지는 이능력을 풀고 모닥불 쪽으로 걸어갔다. 앉아 있는 사람은 조용했다. 고개를 숙이고 양손을 마주 잡은 자세로. 처음에 아지지는 그 사람이 기도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에게 방해가 될까 잠시 걸음을 멈췄다. 그 사람은 아지지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엡실론이었다. 매끈한 헬멧에 불빛이 닿자 그는 석상처럼 보였다.

  "왜 나왔어?"

  "잠이 안 와서요. 당신은 왜 혼자 있나요."

  "잠이 안 와서… 날이 추우니까 넌 들어가 봐."

  방금 전 얼핏 들었던 말과 비슷한 말이었다. 아지지는 엡실론의 헬멧이 불빛을 받아 빛나는 부분을 바라보다 옆에 앉았다.

  "밤은 너무 조용하니 말동무라도 있는 편이 낫지 않겠나요."

  "으음. 알겠어. 그럼…"

  엡실론은 그때까지 쥐고 있던 양손을 풀더니 품에서 무언가를 꺼내 아지지의 손에 쥐여 주었다. 일회용 손난로였다. "고마워요." 아지지는 그걸 양손으로 겹쳐 잡았다. 그 모습이 꼭 기도하는 것처럼 보인다고 생각하니 우스워 작게 웃는다. 장갑 위로 천천히 퍼지는 온기가 느껴졌다.

  "옛날에는 눈이 오는 게 제일 좋은 선물이었는데."

  "옛날― 옛날요?"

  아지지가 '옛날'을 두 번 연달아 말하자 엡실론은 고개를 기울였다가 이해했다는 듯 말을 이었다.

  "응. 어릴 땐 눈 오면 놀기 바빴으니까…."

  "그러게요. 나는 눈사람 만드는 걸 좋아했던 것 같군요."

  "잘 만들었어?"

  "끝내줬죠."

  "크리스마스에도?"

  "네. 오늘도 만들었어요. 한 번 볼래요?"

  엡실론은 수다스러운 사람은 아니었지만 말을 잘 들어줬다. 오래 듣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인 뒤 신중하게 이어질 말을 고르는 사람. 헬멧 때문인지 목소리에는 기계음이 섞였지만 낮고 느린 목소리가 사람을 차분하게 만들어줬다. 아지지는 자신이 보냈던 어떤 크리스마스에 관해 얘기했고, 엡실론은 행복한 기억인 것 같다고 말했다. 행복한 기억. "그렇군요." 아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엡실론이 추위에 움츠러든 어깨를 다시 펴면서 말을 이었다.

  "선물은?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은 건 있어?"

  "맛있는 식사면 충분했던 것 같군요."

  "방주에 돌아가면… 파티라도 해야 할까 봐. 다들 좋아할 것 같고…."

  엡실론이 크리스마스 트리처럼 꾸며진 구상나무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당신은요?"

  "어?"

  "크리스마스 선물로 받고 싶은 것이 있나요?"

  아지지가 묻자 엡실론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글쎄…. 선물 받을 나이는 지난 지 오래라 잘 모르겠는데…."

  무엇을 생각하는 건지 그가 입을 다물고 정적이 흐르는 동안 아지지 역시 어둠 속에 어렴풋이 형체만 보이는 구상나무를 바라보았다. 답은 예상치 못한 순간 돌아왔다.

  "너한테 맛있는 식사 대접하기…."

  아지지는 입꼬리를 올리고 웃었다.

  "지나가던 산타가 웃겠는걸요."

  "산타도 웃겼으니까… 선물은 확실하게 받을 수 있을 거야."

  아지지는 슬슬 얼얼해지는 무릎을 펴 다리를 앞으로 뻗었다. 엡실론이 준 손난로는 효과가 좋은지 아직도 따뜻하다.

  "사실 크리스마스에 식사를 대접받은 기억이 없어요."

  "그랬어?"

  "네. 다른 사람들의 식사나 파티를 준비하는 게 내 몫이었거든요. 그러니까 당신이 내 산타가 되어줄 생각이라면, 정말 기대할지도 모른다는 말이죠. 조심해요, 엡실론."

  그 말에 이제는 엡실론이 고개를 돌린다. 헬멧이 다시 아지지의 얼굴을 향한다.

  "큰 파티도 좋지만… 크리스마스엔 역시… 가까운 사람들이랑 하루종일 있는 게 좋은 것 같아."

  얼굴도, 표정도 알 수 없는데도 위안을 주는 시선을 느끼며 아지지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도 그래요."

  엡실론은 교대해주러 다른 사람이 나왔을 때도 자리를 지켰다. "괜찮아. 난 좀 더 있을 거니까… 먼저 들어가." 아지지는 그래서 엡실론이 줬던 손난로를 다시 돌려주려고 했다. 엡실론은 품에서 손난로 하나를 꺼내서 보여주며 자기는 많이 갖고 있으니 괜찮다며 아지지에게 손난로를 하나 더 건넸다. "돌아가는 길도 추울 거야. …가져가."

  눈이 끊임없이 내린 탓에 엡실론의 옷도 불빛을 비추면 새하얗게 보였다. 아지지는 그의 옷을 가볍게 털어주었다.

  "다음엔 맛있는 식사 기대할게요. 그래도… 당신을 위한 다른 선물을 하나 더 생각해봐요. 그래야 나도 보답할 수 있을 테니까."

  "음. 노력해볼게…."

  아지지는 추위에 코를 한 번 훌쩍이고 다시 인사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잊지 못할 크리스마스가 되리라고 생각하며.

 

 

 

 

♪ Low - Just Like Christmas (LINK)

#2021

Mission 07.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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