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erry Christmas, Merry.
2021. 8. 2.

 

1913년 12월 25일

 

 

  1913년의 성탄절, 뷰캐넌 가의 하루는 일찍 시작했다. 뷰캐넌 부부와 딸은 이른 시간 일어나 미사를 드리고 왔다. 아침 식사는 간단히. 오후에 그들은 외출했고, 식사 시간이 되자 돌아왔다. 저녁 식사는 성대했다. 뷰캐넌 부인은 크리스마스 푸딩을 두 개나 먹었다. 더 먹고 싶은 눈치였으나 그들에게는 후식이 남아있었으므로 참아야 했다. 파이까지 먹고 나서 그들은 잠시 쉬다가 자리를 옮긴다. 그들은 큰 방으로 갔다. 곳곳에 접시와 음료를 놓는다. 접시 위에는 크리스마스 푸딩과 민스파이, 레몬 파이가 놓여 있었고, 음료는 대부분 술이었으나 술을 마시지 못하는 이들을 위한 주스도 준비했다. 마지막으로 전축을 튼 뒤 그들은 옷을 갈아입었다. 크리스마스의 밝은 실내에는 어울리지 않을 검은색 옷이었는데, 뷰캐넌 부인과 딸은 앞치마를 두르기까지 했다. 뷰캐넌 씨는 자신의 아내와 딸에게 눈짓을 보낸 뒤, 계단을 반 층 내려갔다. 그리고 그곳에 모여 있는 사람들 앞에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다. "준비되었으니 올라오시죠, 손님들." 뷰캐넌 씨를 보고 누군가 작은 웃음소리를 냈다가 옆 사람이 옆구리를 치는 손길에 헛기침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 심지어는 뷰캐넌 씨마저도 옅은 웃음기를 머금고 있었다. 다만 티를 내지 않으려 노력할 뿐이다. 이제 모두 무대로 올라가야 할 시간이니까.

 

 

 

  버사는 이사벨과 소파에 나란히 앉아 술을 홀짝였다.

  "크리스마스네."

  "크리스마스지."

  둘은 나지막이 말하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따뜻한 벽난로와 크리스마스트리, 그 옆의 커다란 양말들까지 실내에는 크리스마스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크리스마스를 기념하듯 단정하게 차려입은 사람들이 작은 목소리로 떠들고, 고급스러운 전축에서는 찬송가가 흘러나오고 있다. 온종일 일하다 소파에 앉아 술을 마시고 있자니 노곤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그대로 잠들어도 좋겠다 싶었는데, 이사벨의 목소리가 버사를 일으켰다.

  "나도 내년엔 전축을 하나 들일까 해요."

  '그렇게 나온다고?' 눈빛으로 묻자 이사벨은 비밀스러운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인다. 버사는 그에 호응하기로 하고 여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좋은 생각이에요, 제럴드 부인. 전축은 일찍 들이면 들일수록 좋답니다."

  "남편과는 다르게요."

  "그럼요. 전축은 아내들을 위한 것이니 남편보다는 예쁜 자식을 닮은 게 아니겠나요."

  "힐 부인은 농담도 참. 제 자식은 이제 다 커서 징그럽기만 하답니다."

  "그렇다면 제게는 남은 패가 없군요. 제럴드 부인이라면 어디에 빗대시겠나요."

  "글쎄요, 어디…."

  이사벨이 고개를 들어 사람들을 느릿하게 훑어봤다. 둘의 대화가 여기까지 이어지자 실내의 사람들이 귀를 열고 다음 말을 기다렸다. 때맞춰 메이드가 아부라도 하듯 민스파이가 든 접시를 이사벨의 곁으로 내밀었다. 이사벨은 우아하게 민스파이를 들어 천천히 먹더니, 이렇게 말했다.

  "어머. 이 민스파이 굉장히 맛있군요. 이 파이를 만든 메이드가 우리 집에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겠어요. 전축도 그에겐 비견하지 못할 것 같아요."

  사람들이 일제히 웃음을 터뜨렸다. 이사벨이 민스파이를 만든 메이드였기 때문이다. 정장을 입은 사용인들이 키득거렸고, 메이드복을 입은 뷰캐넌 부인은 고맙다는 듯 이사벨과 버사를 향해 고개를 까딱였다. 뷰캐넌 부인이 뒤로 물러나자 이사벨은 버사에게 ―다른 이들에게도 들리도록―귓속말을 했다.

  "버사. 게다가 이 메이드는 아름답기까지 하다구요. 어디서 이런 사람을 구한 거예요?"

  "나는 운이 좋았죠. 저 이는 집사장이 직접 뽑은 사람이랍니다."

  집사복을 입은 뷰캐넌 씨가 뒤에서 가볍게 헛기침을 한다. 뷰캐넌 부인은 잠시 버사를 뚫어지게 보았으나 버사는 그를 외면했다. 이사벨과 버사는 앉은 자리에서 조금 더 연극을 이어나가다 뷰캐넌 부인에게 순서를 넘겼다. 처음부터 끝까지 각본이 있는 연극이었다면 메이드가 피아노 앞에 앉는 일은 없었겠지만, 뷰캐넌 가의 연극은 즉흥극이었기에 뷰캐넌 부인은 메이드복을 입고 피아노 앞에 앉았다. 피아노 선율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취기를 가라앉히며 기분 좋은 휴식을 즐겼다. 다시 전축이 켜졌을 때는 그들 모두가 뒤섞여 대화하고 간간이 장난처럼 춤을 췄다.

  사용인들은 모두 칙칙한 검은 옷을 벗고 각자가 가진 좋은 옷을 입고 있었고, 뷰캐넌 가족은 사용인의 복장을 하고 그들의 사용인의 잔에 와인을 따라주었다. 크리스마스의 가벼운 역할 놀이였다.

  "저길 봐, 버사."

  벽에 붙어 쉬는 사이 이사벨이 버사에게 속삭였다. 이번엔 연극에서 빠져나와 누구도 들어선 안 될 비밀을 말하는 목소리로. 버사는 이사벨의 시선을 쫓아갔다. 뷰캐넌 부부의 딸, 메이드복을 입은 아리아드네 뷰캐넌이 키가 큰 젊은이의 얼굴에 생크림을 묻히고 있었다. 장난기가 다분한 손길이다. 그러자 맞은편의 사람은 생크림을 묻힌 채로 입술을 벌려 기분 좋게 웃어버린다. 웃음은 해사했다. 버사는 그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사벨이 작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야 나이가 들었으니 분수를 알고 닥치고 사는 거지. 저 아이는……. 버사, 난 어린애들이 우리처럼 안 살았으면 좋겠다."

  이사벨은 그렇게 말하면서 실내의 다른 젊은이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사용인 중에 가장 어린 주디는 레이스가 달린 감색 드레스를 입고 뷰캐넌 씨와 춤을 추고 있었다. 춤 추는 걸 얼마나 좋아하는지 가끔 휴일을 얻으면 댄스 플로어로 향하곤 했지만, 최근엔 가족들의 사정이 나빠져 작은 여유도 즐기지 못하고 얼마 되지 않는 급여를 모두 집으로 보내면서도 전전긍긍했다. 그 애는 이제 17살이었고 저녁 식사 전까지도 이사벨과 버사와 함께 크리스마스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나도 그래, 벨."

  버사도 숨을 죽여 읊조렸다. 사라 뷰캐넌이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그들은 더 말하지 않았다.

  "이사벨. 오늘 애써줘서 고마워요. 맛있게 먹었어요."

  "아닙니다, 부인. 저야말로 덕분에 즐거웠어요."

  "뭘요. 이사벨 선물은 침대 위에 따로 준비해뒀으니 혼자 확인해 봐요. 오늘은 슬슬 치울까요. 그래야 여러분도 일찍 쉴 수 있을 테니까요. 그리고…"

  곧고 우아한 자세로 사라가 버사를 바라본다. 사라 뷰캐넌에게는 옷에 갇히지 않는 품위가 있었다. 버사와 이사벨은 익숙하게 시선을 내렸다. 세 사람은 잠시 연극에서 떨어져나와 평소의 그들로 돌아갔다.

  "버사. 한 가지 부탁할 일이 있는데, 대화가 마무리되면 와 주겠어요?"

  "네, 부인."

  사라 뷰캐넌은 이사벨과 버사에게 조금 더 인사치레를 건네고 멀어졌다. 그가 사라지자 이사벨은 버사를 잠시 흘겨보았지만, 버사는 고개를 저었다. "금방 올게. 혼자 정리하지 말고 기다려." 사라에게 가기 전 버사는 이곳에서 가장 값비싼 옷을 입고 있는 젊은이의 어깨에 툭 손을 얹었다.

  "잔이 비었구나, 펍. 더 달라고 하렴."

  "어… 어? 응."

  그러자 퍼피가 어색한 표정으로 빈 잔을 든다. 맞은편에는 메이드복을 입은 아리아드네 뷰캐넌이 서 있다. 버사의 말을 들었을 테지만 그는 개의치 않고 퍼피가 말할 때까지 기다렸다.

  "잔, 잔이 비었는데…"

  퍼피가 말하자 아리아드네가 느릿하게 와인병을 들고 왔다. 그러나 퍼피는 이상한 것을 보는 듯이 눈을 굴리다가 결국 와인병을 잡아들고 병째로 들이키기 시작했다. 고장난 사람처럼 구는 퍼피의 모습에 버사와 아리아드네가 동시에 웃다가 눈이 마주친다. 버사는 사라 뷰캐넌과 똑 닮은 초록색 눈동자를 바라보다 먼저 시선을 돌렸다. 뷰캐넌 부인을 너무 오래 기다리게 둘 수는 없었으므로 버사는 퍼피와 아리아드네를 두고 자리를 떠났다.

 

 

 

 

 

 

 

 

2638년 12월 25일

 

 

  2638년의 성탄절, 버사 아지지 힐은 낯선 사람들과 함께 황야에 있었다. 아지지는 전투할 때 종종 입던 테크웨어 위에 겉옷을 껴입고 장갑까지 착용했다. 보온성 겉옷과 장갑은 아주 따뜻했다.

  아침에 아지지는 왼쪽으로 돌아눕다가 귀가 아파서 일어났다. 하필 밖으로 나오기 전에 피어싱을 뚫은 곳이 말썽이었다. "메드베데프. 이건 언제까지 아픈 거죠?" 아지지는 자신의 피어싱을 골라준 메드베데프에게 아침부터 투덜댔다. "사람마다 달라서 나도 모르네." "너무 성의 없이 답하는 거 아닌가요? 당신이 골라줬잖아요." '당신'을 강조하자 메드베데프가 앓는 소리를 낸다. 아지지는 그가 골라준 게 하필 링 형태라 더 아픈 거라면서 툭하면 메드베데프를 괴롭혔는데, 실은 그저 놀리는 게 재밌어서였다. "됐어요, 그럼. 그보다…" 그를 한참 놀리다가 아지지는 리데레를 만나서 눈사람을 만들었다. 작은 눈사람 두 개를 만들고 서로 가벼운 장난을 쳤다. 그러다 나무를 잘못 건드려서 쌓인 눈을 한바탕 뒤집어쓰는 일이 생겼다. "여기 커다란 눈사람 있네~!" 리데레가 웃으면서 아지지를 놀렸다. 지나가던 로엘이 그 모습을 발견한 바람에 아지지는 리데레와 로엘 사이에 우뚝 선 눈사람으로 사진에 남았다. 점심을 먹을 때는 딜라일라와 한담을 나눴고, 식사 후에는 적당한 곳에 앉아 그림을 그렸다. 알렉과 마주쳐 인사를 나눈 적도 있었지만 오래 대화하지는 못했다. 알렉과의 기묘한 냉전은 한 달 가까이 이어지고 있었다. 아지지는 조금 심란해졌다. 그러나 휴고를 도와 크리스마스 음료를 만들었고, 술을 마시며 메이즈를 놀리고, 다시 사람들과 사소한 장난과 대화를 나누며 시간을 보냈다.

  "크리스마스군요." 사람들 사이에서 조금 멀어졌을 때 아지지는 곁에 있던 에드워드에게 이렇게 말했다. "화이트 크리스마스지."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에드워드가 답했다. 아지지는 깊이 숨을 들이마셨다. 심장과 폐로 시원한 공기가 들어가 온몸에 퍼지는 느낌이 든다.

  아지지는 구상나무를 구경했다. 색색의 장식품, 겨우살이 장식, 나뭇가지와 무엇인지 모를 물건들이 여기저기 구상나무에 얹혀 있었고, 꼭대기로 올라가면 예쁘게 빛나는 플라스틱 별이 있다. 구상나무에 소원을 적는 사람들이 있었다. 무슨 소망이 담겨있을지 모를 흰 쪽지들이 어떤 모양으로 접혔는지 바라보다 아지지는 1913년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렸다. 그때가 전생에서 크리스마스다운 마지막 크리스마스였다.

  1913년의 크리스마스, 뷰캐넌 가에서 버사 아지지 힐은 그들의 고용주의 말을 따라 고용주의 흉내를 냈다. 간혹 사용인과 고용인의 역할을 반전하는 놀이를 즐기는 집이 있었다. 달콤하지만 먹어선 안 될 것을 먹는 불편한 기분을 느끼며 버사는 그 시간을 즐겼다. 모든 연극이 끝난 밤. 작업복도, 가면도 벗은 뒤 부엌에 이사벨과 주디와 모여 남은 음식을 먹으면서 술잔을 기울일 때가 되어서야 버사는 진심으로 웃었다. 크리스마스트리 옆에 양말을 달아두지는 못했지만, 그들은 각자의 방문 앞에 양말을 달아두고 서로 작은 선물을 교환했다. 그리고 그 집에는 퍼피도 있었다.

  퍼피.

  아지지는 그 이름을 읊조릴 때마다 애석했다. '함부로 판단하지 마. 그런 동정, 당신에게나 나에게나 도움 될 거 하나 없어.' 퍼피의 말은 아지지의 정곡을 찔렀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버사 아지지 힐은 퍼피를 아이로 두고 다시금 그 애를 판단하고, 동정하며, 일방적인 소망을 고백했다. 기억하렴, 퍼피. 1913년의 크리스마스에도 버사는 퍼피에게 선물을 보냈다. 그때 보낸 작은 선물에는 실낱같은 소망이 담겨 있었다. 사람의 감정을 나무에 빗댈 수 있다면, 버사 아지지 힐에게는 자신에 대한 연민을 뿌리로 삼아 퍼피에 대한 연민으로 뻗어 나간 가지가 있다.

  "잔이 비었네~!!"

  갑자기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아지지는 고개를 홱 돌렸다. 퍼피가 아지지의 손에 들린 빈 컵을 낚아채고 냄새를 맡았다.

  "이게 취향이야~~?? 난 당신이 다른 거 먹을 줄 알았는데~"

  "다른 거라면 에그노그?"

  "그래, 그거!"

  "그것도 나쁘지는 않지. 그건… 혹시 또 인질이니?"

  아지지는 퍼피의 손에 들린 컵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들 두 사람만 기억하는 순간에 관한 말이었다. '인질이라고 치자~!!!' 퍼피가 아지지의 텀블러를 빼앗고는 퍼피는 잊어버렸지만 아지지는 기억하고 있는 시절에 관해 설명을 요구하던 순간.

  퍼피는 눈썹을 움찔거리더니 컵을 뒤로 던져버렸다.

  "아니~?? 내가 왜? 어차피 다 마셨잖아!!"

  "그럴 것 같았어."

  불현듯 아지지는 웃음이 났다. 와인을 더 달라는 말을 하지 못해 버벅거리던 그 아이를 2638년에 다시 만나 두 번이나 손에 든 걸 빼앗긴 것이 우스웠다. 죽은 뷰캐넌이 그들에게 남긴 상흔과 유령이 2638년을 맴도는 것도 우습고, 연민의 가지는 줄어들지 않고 더 길게 자라나는 것도 우스웠다. 무엇보다 자신은 기억하고 퍼피는 잊어버린 존재가 아지지를 웃게 했다. '하필 오늘이 크리스마스니까…' 애꿎은 날짜를 탓하며 아지지는 웃었다. 어쩌면 슬픈 건지도 몰랐지만, 크리스마스의 마법은 슬픔도 웃음으로 화하게 했다.

  퍼피는 또 혼자만 아는 이야기를 떠올리며 웃는 아지지에게 화가 난 모양이었다. 또 왜 그러느냐고 인상을 쓰는 퍼피를 두고, 아지지는 숨을 내쉬었다. 피곤함과 만족감, 슬픔과 즐거움, 두려움과 안도가 섞인 기나긴 숨이었다. 이제 퍼피는 미간을 약간 좁혔다. 마치 다음에 이어질 말이 위험할 걸 예견하는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우스워서 웃었단다. …그 사람들은 죽고 우리는 여기에 있잖니.*"

  아지지는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캐롤을 귀 기울여 듣고 눈을 감았다 떴다. 심장이 간질간질했다. 손바닥에서 심장으로,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발끝까지 굴러떨어졌던 존재를 불러 일으키고 싶었다. 아니, 아무것도 일어나지 않아도 좋았다. 그저 언젠가의 버사 아지지 힐이 돌아오는 크리스마스에는 꼭 해보고 싶었던 말을, 상대가 기억하지 못한다는 걸 이유로 함부로 내밀어보는 것이다. 영문도 모르는 아이를 앞에 두고.

  버사 아지지 힐은 스스로가 우스워서 조금 웃었다. 그리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메리 크리스마스, 메리."

 

 

 

 

 

 

* They're gone, and we belong here.

 

♪ Judy Garland - Have Yourself A Merry Little Christmas (LINK)

 

 

 

 

 

 

 


"hey, Moooong."

 

 

  표정이 이상하구나.

  이상하니까. 왜 그렇게 불러?

  M으로 시작하는 거면 아무거나 상관없다길래.

  그게 그런 뜻이 아니잖아!

  그럼 무슨 뜻인데?

  아~ 진짜. 답답하게 하네!

  미안. 하지만 나는 진심이야, 펍. 네게 다른 이름이 있다면 좋겠어.

  ….

  부담 갖지 말고 M으로 시작하는 단어가 생각나면 말해주렴. 적어도 '무우우웅'보다는 낫겠지.

  ….

  ….

  눈감아 봐.

  퍼피가 갑자기 진지한 얼굴을 했기 때문에 버사는 눈을 감았다. 손가락이 손바닥에 닿았다. 손가락은 글씨를 적는다. M으로 시작하는…

  발음하지 마. 그냥 속으로만 기억해. 잊어.

  목소리가 철창처럼 입술을 가둔다. 버사가 눈을 뜨자 퍼피는 단호한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바닥에 적힌 글씨는 M에서 시작해 다른 곳에서 끝났다. 버사는 손바닥을 가볍게 말아쥐었다. 그리고 퍼피의 얼굴을 마주 보면서 속으로 몇 번이고 그 애가 쥐여준 이름을 발음했다. 이름을 발음하지 말라는 퍼피의 말은 제법 아파서 발음할 때마다 목구멍이 마르는 듯했지만, 버사는 조바심을 내지 않기로 한다. 목구멍에서 발끝까지 이름을 굴려 보내고, 기억했다. 버사는 잊지 않을 셈이었다. 퍼피가 'M'을 세상에 남긴 것처럼 언젠가는 이어지는 이름을 되찾으리라고 믿고 싶었다.

  버사는 입술을 달싹였다.

  알려줘서 고맙다, M.

 

 

 

#2021

'로그 > 아지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홀로 도착한 사람들  (0) 2021.09.14
소망  (0) 2021.08.02
Merry Christmas  (0) 2021.08.02
애도  (0) 2021.08.02
낮은 언제나 혼란 속에  (0) 2021.08.02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