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GM: Anne Muller - Solo? Repeat! (LINK)
1
엘리자베스 샐먼의 장례식은 조촐했다. 예견된 죽음 앞에서 우는 사람은 없었다. 엘리자베스는 오래 병을 앓다 죽었다. 고인의 유일한 친족, 엘리자베스 샐먼의 딸 역시 관이 내려가는 모습을 조용히 지켜보았다.
장례가 끝나고 그레이스 샐먼은 조문객들에게 그의 어머니가 편안하게 잠을 자듯 죽었노라고 말했다. 다행이구나. 조문객들은 그렇게 말하며 돈은 어떻게 마련했느냐고 조심스럽게 질문했다. 그레이스 샐먼은 그때까지 자신의 옆을 지키고 있던 사람을 흘긋 돌아보고는 '나의 다른 어머니'가 도왔노라고 답한다. 조문객들이 그레이스 샐먼의 '다른 어머니'를 일제히 바라본다. 그제야 그곳에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는 듯이. 그레이스가 다 했답니다. 저는 한 게 없지요. 버사 힐은 정중하게 읊조렸다. 조문객들은 그레이스 샐먼의 어깨나 손을 한 번씩 두드려주고 집을 떠났다.
둘만 남았을 때 그레이스는 버사에게 말했다.
"나 왜 거짓말했을까. 엄마는 눈 뜨고 죽었는데."
"그랬니."
"소름 끼쳤어. 획 돈 사람처럼 천장 보고."
"그래도 네가 감겨줬을 것 아니니."
그레이스는 고개를 끄덕이고 거실의 낮은 창문으로 시선을 돌린다. 촘촘한 레이스 커튼이 드리워진 창 앞에는 베스가 자주 앉던 의자가 놓여 있다. 베스는 꼭 그 의자에 앉아 창문을 바라보곤 했다. 같은 자리에서 무엇을 보는 것인지 궁금했던 버사가 이를 물어봤을 때, 베스는 커튼의 무늬를 센다고 답했다. 어디까지 셌어? 다시 묻자 베스는 한숨을 쉬고 고개를 의자에 깊숙이 묻었다. 까먹었어. 신경질적인 목소리는 아주 작았다. 버사는 창을 바라보는 그레이스의 등에서 베스의 젊은 시절을 떠올려보려 애썼다. 이제 베스가 아프지 않던 모습이 쉬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날 밤 그레이스를 재우고 버사는 베스의 죽음에 든 돈을 생각했다. 그즈음 그들은 이미 몇 년째 병석에 누운 베스의 빈자리를 채우고 약값을 마련하느라 재산을 탕진했다. 묫자리를 겨우 구한다 해도 비싼 관을 마련하는 건 사치였다. 그러나 그레이스는 제 어머니의 장례를 잘 치르는 데 집착했다. 그레이스는 이틀간 사라졌다 돌아왔다. 문을 열자 겨울이 아니었는데도 얼음처럼 차갑게 느껴지는 얼굴이 서 있었다.
해결했어. 그레이스는 말했다.
무슨 일이니? 버사가 묻자 그레이스는 제 엄마가 죽은 뒤 처음으로 눈물을 쏟아내며 무너졌다.
그레이스 샐먼은 자신의 아버지를 찾아가 돈을 구걸했다. 아버지의 성은 샐먼이 아니었고, 그에게는 아내와 자식들이 있었지만 그건 알고 있던 사실이기에 충격적이지 않았다. 친부는 그레이스에게 남보다도 못한 존재였다. 그의 집, 그 으리으리한 저택에서 자신에게 쏟아지는 경멸의 시선을 온몸으로 버티던 순간 그레이스가 끔찍하게 혐오스러웠던 건 자기 자신이었다. 돈을 구걸하는 말, 절로 숙어지는 고개, 닳은 신발코. 돈을 받아 집 밖으로 나와서 그레이스는 실소했다. 직접 택한 일인데도 성취감보다 탈력감이 들었다.
…내가 잘한 걸까?
버사는 그레이스의 물음에 답하지 않고 등을 쓸어주었다. 묻지 않아도 그레이스의 감정을 알 수 있었다. 버사 역시 때때로 세상에 돈과 목숨을 구걸하는 버러지가 된 것 같았기 때문에.
그렇게 엘리자베스 샐먼의 죽음에는 엘리자베스 샐먼과 그레이스 샐먼, 버사 힐의 삶에 단 한 톨도 기여하지 않았던 남자의 이름이 빚처럼 얹어졌다. 버사는 잠든 그레이스의 얼굴을 바라보며 죽음을 생각했고, 사라 뷰캐넌을 떠올렸다. 사라 뷰캐넌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 이상한 프로젝트에 버사 아지지 힐의 이름을 올리게 했다. 버사는 영생을 믿지 않았고 자신의 육신이 미래에 되살아나리라고 믿지도 않았으나 그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의 관을 마련하는 데 사라 뷰캐넌의 이름이 들어갔다는 게 이제 와 마음에 걸린다.
그레이스는 제 죽음에 누구도 돈을 마련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했다. 버사는 그레이스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러니까 넌 잘 살아야 해. 악착같이 살아야지.'
"…살아야지."
버사는 잠든 그레이스의 얼굴을 들여다보며 주문을 외었다. 이 아이의 삶과 죽음만은 온전히 이 아이의 것이길 바라면서.
버사 아지지 힐의 죽음은 신문에 게재되지 않았다. 다만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그의 마지막이 전해졌을 뿐이다. 골목을 빨갛게 수놓은 핏자국. 살아보겠다고 발악한 흔적. 마지막 순간 흘린 눈물과 닫히지 않은 눈. 사라진 시신. 대부분의 사람은 버사 아지지 힐의 영혼이 지상을 떠났음을 알았으나 그의 육신이 어디로 갔는지는 알지 못했다. 그레이스는 이번에도 울지 않고 자신의 두 번째 어머니의 묘 아래 빈 관을 묻었다.
버사 아지지 힐의 죽음에는 수많은 말이 먼지처럼 달라붙었다가 순식간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진실은 버사 아지지 힐의 육신과 함께 미래로 동봉되었다. 둥근 관처럼 생긴 캡슐 속에서 버사 아지지 힐이 눈을 뜨는 순간까지 그의 죽음은 실종된다.
2
크리스마스의 밤. 아지지는 이상한 기척을 느끼고 잠에서 깼다. 천막에서 나오자 비슷한 이유로 서성거리는 사람들이 보였다. 이쪽으로!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누군가 외쳤다. 심장을 덜컹 흔들리게 하는 목소리였다. 모두 무슨 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걸음을 서두르자 눈에 들어온 것은 찢어진 텐트였다. 사람이 없다. 다양한 모양과 크기의 발자국, 그리고 핏자국은 점점이 눈밭을 가로지르다 숲에서 끊겼다. 잠든 인원을 모두 깨워 확인한 끝에 선발대는 총 다섯 사람이 실종되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언더." 누군가 불안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다음날 돌아온 사람은 네 명이었다. 다친 사람도,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었다. 선발대는 그들에게서 자초지종을 들었다. 전에 본 적 없던 거대한 언더. 그리고 언더들을 조종하는 자, '절대자'라는 존재. '절대자'는 아야네를 인질로 48시간의 유예시간을 주었고, 선발대가 자신을 찾아오길 바랐다. 절대적인 힘. 강자. 거부하기 힘든 제안. 언더들. 인질. 아지지는 이마를 짚었다. 심장이 불안하게 요동쳤다.
도착한 폐공장에는 천장에 닿을 만큼 몸집이 큰 언더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긴장된 분위기를 뚫고 그 언더가 있는 방향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더 위에 사람 한 명이 앉아 있었다. 아니, 그 사람은 일반적인 사람보다는… 언더에 가까워 보인다. 천 한 올 걸치지 않은 매끄러운 피부에 흰 머리카락을 가진 그자는 자신을 '절대자'라고 칭했다.
'절대자'는 자신이 한국에서 태어난 최초의 '완성된 언더'라고 말했다. 그러니까 이 실험의 목적이 영원한 삶을 사는 인간이라면 '절대자'는 유일하게 실험에 성공한 몸을 가진 것이라고. 그는 동면에서 깨어나 설명을 듣자마자 한국 지부부터 시작해 크로포드 사를 절멸시켰다고 설명했다.
"지난 몇백 년간의 냉동. 약한 인류는 모두 절멸했어."
"이미 느끼고 있지 않아? 언더야말로 새로운 종의 기원이자 혁명이야."
그는 선발대에게 자신과 같은 존재가 되길 권했다.
말릴 틈도 없이 위미와 비나가 언더화를 결정했고, 선발대의 눈앞에서 두 사람의 신체가 빠르게 변화하기 시작했다. 검은 대리석 같은 피부. 길어진 흰 머리카락. 언더들은 두 사람을 품에 안고 어디론가 걸어갔다. 눈앞에서 두 사람의 변이를 지켜본 선발대 사이에 긴장된 침묵이 흘렀다. '절대자'는 자비를 베풀듯 지금 선택하지 않아도 괜찮다고 말했다.
빛이 들어오는 폐공장 안의 공터에 나아가 언더와 대화를 나누는 사람들을 지켜보며 아지지는 피가 차갑게 식는 걸 느꼈다. 하나의 질문이 목구멍까지 묵직하게 차올랐는데, 문장이 제대로 맺어지지 않았다.
"이만 돌아가도 좋아. ……아. 그리고 이건 선물인데. 내 선물이 아니야. 크로포드 사에서 보내는 선물이지. 선물이 달갑지 않다면, 내 도움을 요청해도 좋아. 그 대가는 충분히 치러야겠지만."
이대로 돌아가도 좋다는 말에 아지지는 우습게도 잠시 안도했다. 나중에 무슨 일이 벌어지든, 이 공간을 벗어나고 싶었다. 왜인지는 몰라도 숨이 막혔다. 물러나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살아나며 기민해진 감각은 당장 피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했다. '절대자'가 물러선 자리에서 인간형 언더들이 나타났다. 놀랄만한 일은 아니었다. 그들은 계속 언더와 싸웠고, '절대자'의 곁에도 언더가 있으니까. 그런데 이질감이 드는 건 그 언더들에게 인간의 얼굴이 남아있기 때문일까.
사람들 사이에서 파문이 일었다. 비명과 탄성,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전염성을 가진 것처럼 서서히 울려 퍼졌다. 어지럽게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언더의 얼굴을 만지는 사람이 있었다. 마치… 아는 사람을 만난 것처럼 괴로워하는 얼굴, 이름을 부르는 음성이 스쳐 지나갔다. 혼돈 속에서 아지지는 눈앞의 언더들이 선발대가 아는 사람들의 얼굴을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울부짖는 언더 무리 사이에서 아지지는 익숙한 눈동자를 본 것 같았다. 황급히 고개를 돌린다. 입술이 마르기 시작했다. 크로포드 사의 선물이라니, 죽은 이들의 육신을 훼손하기라도 한 걸까. 죽기 전부터 예비된 걸까. 능력을 써야 하는데 머리가 어지러웠다.
'너희는 계속해서 겪었지. 방금까지 옆에서 함께 숨 쉬던 사람들을, 지독하게 강한 존재에게 수 차례나 잃어버리는 경험을. 그 지긋지긋한 일들을 이제 끝내버리고 싶지 않아?'
아는 사람… 지난 시대의 사람… 그들의 얼굴이 희미하게, 혹은 선명하게 머리를 수놓기 시작했다.
'약한 인류는 모두 절멸했어.'
'절대자'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윙윙거렸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쏴.'
울컥 알 수 없는 응어리가 용솟음쳐 전신을 때렸다.
'쏴버려.'
토할 것 같다. 비이성적인 사고가 자꾸 머리를 흔들었다. 피가 머리에 몰린다. 아지지는 총을 들어 멀리 커다란 언더가 있는 곳의 위를 조준했다. 조준점은 정확했다.
탕!!!
총격음. 아지지는 숨을 급하게 들이켰다. 방아쇠가 손가락에 닿는 감각에 지레 놀라 손을 내린다. 손이 덜덜 떨렸다. 그는 아직 방아쇠를 당기지 않았다.
'절대자'는 여전한 자세로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쩌면 웃는 것 같기도 했는데, 거리가 멀어 확신할 수 없었다. 아지지는 굳은 몸으로 '절대자'를 노려보다 문득 어떤 소리를 들었다.
고개를 돌리면 광석이 돋아난 얼굴이 가까운 거리에 있다. 겨울의 눈송이처럼 희고 푸른 눈동자. 아지지는 그 눈동자를 몰라볼 수 없었다. 그레이스 샐먼의 얼굴을 한 언더가 입을 연다. 심장이 꽉 조여들었다. 움직여야 했는데, 움직일 수 없었다. 파도가 치듯 기억이 흘러 들어오기 시작했다. 베스가 앉아 있던 그 자리에 똑같이 앉아서 창문을 바라보던 그레이스의 뒷모습. 양팔을 꽉 잡던 베스의 손. 사라. 칩. 이사벨. 메릴린. 다시 그레이스. 이제 릴리의 얼굴이 죽지 말라고 고함을 친다. 한번 겪어봤기에 이게 무엇인지 알 수 있었다. 죽음 전에 주마등처럼 찾아오는 삶의 기억이다.
죽음의 코앞에서 누군가의 몸이 앞을 가로막았다. 눈앞의 모든 장면이 비현실적인 영화처럼 느리게 흘렀다.
앞을 가로막은 등이 움직이고, 어깨와 팔이 앞으로 뻗어나간다. 부서지는 소리. 그레이스의 푸른 눈동자가 광석과 한데 섞여 허공으로 흩어진다. 아지지는 비명을 지를 뻔했다. 숨이 막히지 않았다면 그랬을 터다. 흘러 들어왔던 기억이 거칠게 몸을 가르고 지나간다.
"왜 멀뚱히 서 있나! 죽을 뻔했…"
아지지는 눈앞에서 소리치는 자를, 언더를 부수고 아지지를 구한 자를, 그레이스의 얼굴을 산산조각 낸 자를, 일리스 메드베데프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비애와 고통, 모욕감과 분노, 원망, 절규, 그리고 셀 수 없이 많은 파편이 가슴을 괴롭게 짓눌렀다. 온몸이 미세한 조각으로 나뉘어 진동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찢어진 것의 정체를 무엇으로 표현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자기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저 소리치고 싶었다. 어째서 그 아이가 죽어야 했느냐고. 어째서…….
"아."
아지지는 놀란 사람처럼 메드베데프의 어깨에서 손을 뗐다. 메드베데프의 어깨는 긴장으로 굳었고 빨간 눈동자는 선명하다. 그 눈. 메드베데프의 눈을 보면서 버사 아지지 힐은 비로소 숨을 쉬었다. 진동이 잦아들고 물살은 다시 바깥으로 흐른다.
메드베데프는 울고 있었다.
3
버사 아지지 힐이 다시 눈을 떴을 때 세상은 뒤집혔다. 자신을 '노아'라고 소개한 영혼이 든 기계―기계 속에 든 게 영혼이 아닌 데이터라는 건 나중에야 이해할 수 있었다.―는 인류가 사는 세계가 멸망했다는 사실을 건조하게 전달했다. 때는 2638년. 차마 셈할 수도 없이 많은 인간의 시간이 버사의 뒤로 묻혔다.
버사는 자신이 기억하는 세상을 찾을 심산으로 과거의 역사를 뒤졌다. 손으로 직접 종이를 바쁘게 넘길 때도 있었고 노아에게 부탁하여 검색을 시도할 때도 있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영화관을 찾았다. 영화 속에는 많은 시간이 담겨 있었다. 익숙한 것이 낯선 풍경으로 그려질 때도 있었고 낯선 것이 익숙한 감정을 건드릴 때도 있었다. 버사는 그 안에서 사람들을 보았다. 비슷하고 다른 얼굴을 한 사람들이 한데 모여 비슷한 옷을 입고 있는 풍경. 빛과 그림자로, 흑과 백으로 나뉘지 않고 모호하게 서로에게 뒤섞이는 사람들. 버사는 억센 머리카락을 촘촘히 땋은 여자들이 예술가라는 이름으로 꼿꼿하게 서 있는 사진에 매료되었다.
인류가 멸망한 2638년에 과거의 기록을 더듬는 일은 버사의 기억을 되살리기보다는 역사를 이해하는 일이 되었다. 이제 좌초되었을지라도 인류의 배는 끊임없이 앞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버사 아지지 힐은 한 가지 진실을 깨닫는다. 버사의 몸과 영혼은 낡은 역사의 증거물로 방주에 탑승했다.
'많은 하인들이 스스로 갇혀 있었다……' *
역사서에서 자신을 일컫는 구절을 발견했을 때 아지지는 책을 찢어버리고 싶었다. 과거가 제 몸을 덮쳐올 때마다 술을 찾기 시작했다.
며칠 뒤 버사 아지지 힐은 노아에게 자신을 '버사' 대신 '아지지'라고 불러달라고 요청했다.
그 뒤로 시도한 많은 것들이 그런 식이었다. 아지지는 자신의 시대를 버리기 위해서 다른 시대의 옷을 입었다. 메이드가 되기 싫어서 기계 메이드를 부렸다. 머리카락을 숨기고 싶지 않아서 머리를 땋았다. 처음에는 보이지 않는 익명의 시선들을 의식하며 자신이 잘못하고 있다는 생각과 싸워야 했다. 그러나 버텼다. 심장이 뛰는 이유가 단지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라는 걸 서서히 체감했다. 버사 아지지 힐은 반항하고 있었다. 삶의 모든 궤적에서 자신을 수치스럽게 하고 괴롭게 했던 것들을 버리고 싶었다. 수치를 모르는 자가 되고 싶었다. 삶의 주인이 되고 싶었다.
4
"날 원망하나?"
눈물이 마른 땅 위에서 메드베데프가 물었다. 아지지는 걸음을 멈췄다. 그들은 '최후의 수단'을 향해 걷는 길이었다. 선물이라는 이름을 빙자한 언더들과의 전투가 지나고, 선발대 사이에는 불편한 긴장감이 맴돌기 시작했다. 가끔 육중한 침묵이 모든 이들의 어깨를 짓누르면, 소리 없는 비명이 바람을 타고 숲을 울렸다.
아지지는 메드베데프의 우는 얼굴을 마주했던 순간을 곱씹었다. 아지지는 그때 화가 났다. 어쩌면 메드베데프도 그랬을지 모른다. 산산이 조각나지 않기 위해 고함을 지르고 울어야 할 때가 있다. 그들은 정처 없는 감정을 서로에게 들켰다. 그러나 감정의 방향에 관해 말한다면,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고 있는 그 순간에 각자의 자리에 서 있었다. 남이 들여다볼 수 없는 곳에 홀로.
"… …원망하지 않아요."
겨우 답을 내놓자 메드베데프는 아지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반쯤 돌리면 등 뒤로 온기가 훅 끼쳐온다. 메드베데프는 몸을 기울이고 건조하게 읊조렸다.
"당신은 내가 어쩔 수 없었던 걸 알만한 사람이지만, 날 위해서 원망하지 않는다 하는 거면 그럴 필요 없어. 누구라도 한 번쯤은 겪은 상처에 대해 탓할 남이 있어야 하지. 모든 걸 속에만 두고 사는 척만 해도 삶은 답답하니까 말야."
고개를 조금 더 돌리자 메드베데프의 손은 어느새 어깨를 벗어나 아지지의 귓바퀴에 달린 피어싱을 건드리고 떨어져 나갔다.
"아직도 아픈가? 피어싱 말야."
대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도망치는 사람을 바라보며 아지지는 과거 메드베데프와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아직 당신을 믿을 수 없어서 말 못 하겠다던 메드베데프와 그런 메드베데프가 알렉과 닮았다고 말했던 자신을. 메드베데프는 이해할 수 없는 눈치였지만 이 순간 아지지는 두 사람을 다시금 겹쳐 보았다.
"거의 다 나아가요."
"다행이네. 이제 날 괴롭힐 일은 없어서."
그들은 다시 걷기 시작했다. 대화는 끊길 듯 끊기지 않았다.
"그나저나, 당신도 피어싱을 뚫어버려서 내기의 의미가 없어진 것 같은데. 내가 졌던 게임인데 말야."
"내기의 의미나 승패가 중요한가요?"
"내가 받은 벌칙의 의미가 없어졌단 말을 하고 싶은 거지."
아지지는 작게 웃었다. "벌칙의 의미는 당신이 아파했던 걸로 충분해요." 놀리듯 대꾸하자 메드베데프는 처음 알았다는 것처럼 대답했다. "아, 그런 이유였군."
아지지는 제 얼굴에 닿는 시선을 느끼며 메드베데프를 바라보았다. 일리스 메드베데프. 알렉산드르 볼코프 형제와 인연이 있는 사람. 진지한 사람. 두꺼운 벽을 지녔으면서 동시에 쉽게 당황하는 사람. 놀리면 재밌는 사람. 알렉산드르 볼코프와 닮았고, 버사 아지지 힐과 닮았으며, 또 누구와도 닮지 않은 사람.
"메드베데프."
서로를 재는 시선을 깨트리듯 이름을 부르자, 그는 아지지를 본 적 없다는 듯 눈동자를 돌려 정면을 본다. 그런 행동에는 익숙했다. 그러니까, 도망가는 것. 머뭇거림. 경계. 아지지는 익숙하게 메드베데프를 따라 정면으로 시선을 돌린다. 무수한 발자국이 앞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리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 일행의 등이 보였다. 함께 최후의 수단을 찾아 걷고 있었지만 그들 각자의 앞에 갈림길이 놓여 있다는 걸 모두 알았다. 그들은 함께이되 혼자였다. 같은 방주에서 눈을 뜬 순간부터 그랬다.
"…일리스라고 불러."
예상하지 못한 말에 아지지는 일리스 메드베데프를 다시 돌아보았다.
5.
소리 없는 파장이 온몸을 때리던 순간 아지지는 정신을 잃었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아지지는 이명에 눈을 찌푸렸다. 몸이 마비된 것 같았다. 흰 천장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자면 천천히 팔에 감각이 돌아왔다. 축축하다.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올린 아지지는 헛구역질을 했다. 녹은 살점과 피, 파편이 흉측하게 늘어져 있었다. 자신의 것은 아니었다.
고개를 들자 고요한 방주가 보였다. 난전의 흔적으로 더러워진 흰 벽과 바닥. 쓰러져있는 사람들. 아지지는 자신의 팔에 들러붙은 파편을 떨리는 손으로 집어 들었다. '언더'는 보이지 않는다. 아지지는 정신을 잃기 전의 충격파가 최후의 수단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건 검은 피부를 가진 사람들이 죽었다는 뜻이다. 절망이 몸을 잠식하던 순간 아지지는 벼락을 맞은 것처럼 일어났다. 하나둘 일어나는 사람들을 뒤로하고 '언더'였던 것들을 찾았다. 부서지고 녹고 흩어진 것들을 마주할 때마다 속이 뒤집히는 것 같았지만 아지지는 그것들을 떨리는 손으로 헤집었다. 한 번, 두 번, 세 번, …원하던 걸 찾지 못했지만 포기하지 않았다.
그리고 찾았다.
"……아직 살아있어. 여기, 아직 살아있어요! 누가, 누가 좀 도와줘요! 여기 이 사람을 옮겨야 해요!"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 꼴인 걸 어떻게 살리겠다는 건데?"
익숙한 목소리였다. 아픈 몸 한구석에서 옅은 안도감이 퍼져나갔다. 아지지는 부서진 몸을, 흩어진 파편 사이에 남은 불완전한 심장이 다치지 않도록 껴안고 퍼피를 바라보았다.
"방주를 돌아다니다 발견한 게 있어. 그 서류에 의하면, 신경이 살아있든 맥이 뛰든, 신체에 반응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살릴 수 있다고 했어."
"뭐라고?"
"…봐. 동공이 움직이고 있어. 길게 설명할 시간은 없구나. 살아있다면 어서 캡슐 쪽으로 데려와요!"
아지지는 울 것 같은 마음을 다스리고 크게 외쳤다.
최후의 수단은 범위 내의 모든 언더를 말살하는 장치였다. 선발대는 방주로 돌아가 모든 것을 알렸다. 시간이 조금 흘렀고 몇몇 사람들이 방주를 완전히 떠나거나 떠났다가 돌아왔다. 후자의 사람들은 '언더'가 되어 돌아왔다. 방주의 분위기는 이상했다. 기묘한 긴장과 나른함, 경계와 평화가 공존했다.
'폭풍의 눈'. 아지지는 방주 밖 풍경을 그렸던 수첩의 흰 면에 그렇게 적었다.
'…당신은 이 세상에 이 벙커 하나만 남았대도. 이 세상에서 사는 걸 선택할 건가?'
최후의 수단을 찾으러 가는 길에 일리스 메드베데프가 던진 질문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있었다.
'…살아가는 수밖에요. 세상은 내가 택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죽을 생각이 아니라면요.'
'선택'.
폭풍의 눈 속에서 아지지는 그 단어가 오래도록 제 목구멍에 걸려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버사 아지지 힐은 위로 오르고 싶었다. 강해지고 싶었다. 모욕하는 자를 짓밟고 그를 모욕하고 싶었다. 그러나 '절대자'의 선택지 앞에서 그는……
가만히 있는다고 태풍을 피할 수 있는 건 아니더군요. 수호에게 그렇게 말했던 게 떠올라 웃고 만다. 실수했다. 그런 말을 남겼으니, 다시 부끄러운 사람으로 남지 않으려면 움직일 수밖에 없다. 퍼피의, 아니… 메릴린의 등을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아지지는 때때로 세상에 묻고 싶었다. 그럼 우리는 약해서 죽은 것이냐고. 단지 약했기 때문에 짓밟힌 것이냐고. '강해지고 싶거든요.' 아지지는 숱한 선택의 기로에서 느낀 무력함이 미웠다. 무엇을 선택할 수 있냐고 화를 내는 아이에게 기껏해야 붓 몇 획의 서명이 네 것이라고 답해줄 수밖에 없던 초라함이 미웠다. 버사 아지지 힐이, 그 자신의 나약함이 미웠다.
그러나 그는 위로 오를 수 없다. 기회가 주어져도 쥘 수 없을 터다. 아지지는 발밑에 자신의 껍데기를 두고 도망갈 수 없었다. 버사 아지지 힐과 메릴린과 그레이스 샐먼과 베스 샐먼의 육신을 짓밟을 수 없었다. 짙은 모욕감과 분노를 무시할 수 없었다. 마지막 자존심이 그에게 차라리 멍청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남기를 종용했다. 어쩌면 너무 오래 그림자에 머무른 나머지 영영 열망하던 곳으로는 가지 못하는 사람이 되어버린 건지도 모른다.
버사 아지지 힐은 끊임없이 줄다리기 하고 있었다. 제 삶과 영혼을 담보로, 한 치 앞도 모르는 채로 사는 것이 신에게 맡겨진 운명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으로 바꿀 수 있는 게임이기를 바라면서. 신에게도 허락하고 싶지 않은 삶을 남의 손에 쥐여줄 수는 없었다. 과오를 반복할 수 없었다. 몸이 아직 부서지지 않았기에 아지지는 방주의 무수한 복도를 걸으며 세 번째 갈림길을 찾아 헤맸다.
폭풍이 지나간 자리에서 버사 아지지 힐은 바닥에 흩어진 생의 흔적을 있는 대로 주워 모아 복도를 달린다.
6
친애하는 일리스.
잘 지내는지.
갑자기 웬 편지냐고 묻지 마.
어쩌면 마지막 인사가 될지도 모르니 격식은 내려둘게. 당신이 너른 마음으로 양해해주길.
당신의 질문들에 답해볼까.
당신은 내게 이 세상에서 살 거냐고 물었지. 간단한 물음이었지만 답하기 어려웠어. 삶에는 많은 것이 필요한 것 같잖아. 이를테면 희망 같은 거 말이야. 희망, 꿈, 사랑, 사람들을 진정 살아가게 한다던 것들.
당신도 알겠지만, 현실에선 그런 것들로 숨을 쉬지 않아도 살게 되는 법이지. 난 단 한 번도 내 삶을 선택해 본 적이 없는 것 같아. 세상을 택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어렸을 땐 그런 생각도 해봤지만 그뿐이었어. 살려면 살아야지. 헛된 꿈은 꾸지 않는 게 신상에 좋으니까. 당신도 이해하겠지.
그래. 누구라도 한 번쯤은 탓할 남이 필요하지. 나는 세상을 탓했어, 일리스. 내가 그 녀석을 얼마나 미워하는지 당신은 꿈에도 모를 거야. 그 원망이 너무 강렬해서 다른 사람들이 마음에 들어오지도 않을 정도였으니까.
난 당신을 미워하지 않아. 당신이 나를 미워한다면 모를까. 그런대도 놀라진 않을게. 그도 그럴게, 난 당신에게 조금 못된 사람이었잖아. 내가 당신에게 얼마나 제멋대로 굴었는지 당신은 알까?
지금에야 알게 된 게 하나 있어. 당신이 내게 물은 적이 있지. 왜 알렉에게 부탁하지 않고 대화 몇 번 안 한 당신에게 훈련을 도와달라고 했느냐고. 난 당신이 궁금했지만… 어쩌면 그때부터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어. 당신과 있을 땐 강한 사람인 척 할 수 있었거든. 웃기지만 난 언제나 강해지고 싶었어.
솔직히 당신이 걱정돼. 세상을 저주해 놓고 다시 웃기는 소리지만 사람은 세상에 맘 붙일 곳이 필요하거든. 이쯤 되면 당신도 한 가지는 알 수 있을 거야. 나는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사람이라는 걸. 알렉도 걱정을 사는 사람이지. 그 사람은 당신과 나보다도 겁이 많아. 전에 내가 알렉에게 개미도 못 밟겠다고 했더니 알렉이 나에게 오해가 있는 것 같다고 화를 내더군. 자긴 개미 정도는 그냥 밟는다고 말이야. 웃기는 노릇이지.
두 사람이 떠나면 키튼은 아쉬워할 거야. 그 애조차 당신을 따르는 모양이던데… 당신들에게 무슨 일이 있었는지 나는 앞으로도 모르겠지만 말만 번지르르하게 하는 친구가 한 가지 충고를 해주자면, 일리스. 집을 떠나려면 어른이 돼. 이건 진심 어린 응원이자… 당신에게 한 다른 말과 마찬가지로 내게 하는 말이 되겠군. 사람은 거울로 세상을 본다고 하지. 사람을 볼 때도, 말을 할 때도 그 속에는 내가 깃들어 있다고. 나는 당신에게서 망설이고 후회하는, 겁먹은 사람을 봐. 너무 멀리 도망가지는 마, 친구. 그러면 세상을 잊게 될 테니까. 세상을 잊으면 자신을 잊게 되는 법이지.
나는 아직 이곳을 떠날 수 없어. 이 '선택'이 당신과 나의 차이겠지. 난 떠나는 게 두려운 모양이야. 한 가지 변명을 하자면. 방주는 아직 집처럼 느껴지지 않아. 나는 집이라면 구석구석 알아야 하거든. 그래도 전생에는 명색이 하녀였는데 여기서 포기하면 자존심이 상하지 않겠어. 어쨌든 지난번 질문의 답을 수정할게. 오래 돌아왔군.
나는 사는 걸 선택해 보려고 해. 당신도 그런다면 좋겠어. 그러니 내가 아직 살아있을 때 한 번쯤 돌아와. 그때는 누가 먼저 어른이 됐는지 내기하는 것도 나쁘지 않겠군.
그간 고마웠어, 친구. 다음에 다시 만나길.
당신의 친구 아닌 친구, 아지지.
* '여전히 더 많은 하인들이 스스로 갇혀 있었다. 고용주는 공손함의 표현일 것이라 기대했지만, 그들의 침묵은 사생활이 지속적으로 침해당하는 일터에서 드러내는 반감의 표시일 때가 더 많았다.' 42쪽, 셀리나 토드, 『민중』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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