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 feel the same way
2021. 2. 26.

201님의 크툴루의 부름 시나리오 〈바커스의 상속〉 엔딩 이후 시점으로 작성한 글입니다.

시나리오 전개와 엔딩에 대한 직접적인 스포는 없지만, 스포일러에 민감한 분들은 읽기 전 재고해 주세요.

전 둘째로 다녀왔고요. 멋진 시나리오와 멋진 세션이었습니다.

멋진 유산을 받으러 저택의 부름에 응해 보세요... 시나리오 원문 링크

계속 듣고 있는 음악: Go Tomorro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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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feel the same way

 

  유산을 상속받는 일에는 사람들의 민낯이 따라온다. 나는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혈육들이 냉정한 스크루지처럼 변하는 걸 지켜봤다. 1년 전 여름이었고, 나는 룸메이트를 붙잡고 많이 울었다. 엄마가 죽은 것이 슬펐지만, 그보다는 오빠에게 빼앗긴 것들이 서러워서이기도 했다. 나와 여동생도 성인군자처럼 군 건 아니지만 싸우면 뭐해? 승리하는 건 늘 남자다.
  거티의 경우는 조금 달랐다. 거티는 나와 3년째 같이 살고 있는 친구다. 가족 얘기는 내가 더 많이 하지만, 그 애도 나에게 가족에 대해서 얘기해 준 적이 있다. 엄마는 일찍 돌아가셨고 아빠와 다른 고용인들이 그 애와 자매들을 길렀다. 아빠보다는 엄마와 나이가 비슷한 고용인들에게, 그보다는 언니에게 의지하며 자랐다. 그 애는 세 자매 중 둘째이다. 나는 그 집 막내가 가정교사와 눈이 맞아 집에서 도망갔다는 것도 알고 있다. 거티가 아빠의 유언장을 받았을 때, 나는 그 애를 부러워했다. 가까운 남자 친인척이 없다는 사실을 말이다. 여자들이라고 우아하게 유산을 배분하겠냐마는, 그 애는 최소한 나와 같은 박탈감은 느끼지 않을 테니까.

 

  거티의 집에서 있었던 사건은 신문에 실렸다. 나는 신문을 통해서 거티의 고향집의 사진을 보았다. 거티는 전과 다른 사람이 되어 돌아왔다. 베개에 머리를 대자마자 자는 애가 매일같이 잠을 설친다. 언제인가는 그 애의 비명소리가 너무 커서 나는 사람이 죽는 줄 알았다. 처음 듣는 소리, 죽음과 가까운 목소리였다. 거티는 악몽을 자주 꿨다. 나도 그 애 때문에 깬 적이 많다. 며칠 전에는 수잔이 내게 거티와의 사이에 문제가 없냐고 물었다. 거티가 수잔에게 아직도 빈 방이 있냐고 물어봤다면서. 미안하긴 한가 보지. 나는 거티에게 나는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힘든 때에 낯선 집에 가는 것보다는 익숙한 곳에 머무는 게 낫지 않겠어? “네가 그런 식으로 말하면 내가 뭐가 돼?” 거티는 자기가 힘들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거티에게는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거티가 집으로 돌아갈 때 그 애를 부러워한 것에 옅은 죄책감을 느꼈다.
  거티와 내가 룸메이트가 된 이유에 대해서 고민해 본 적이 있다. 그 애 주변에는 사람이 많았고 나는 그 애의 룸메이트는 다른, 그러니까 더 멋진 여자애가 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그 애는 나의 성실함과 현실적인 면을 좋아했다. 거트루드 앵글로스는 내가 자신과 같은 부류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우울과 슬픔과 분노에 잠식된 적 없는 여자라고 말이다.
  그 애는 틀렸다. 나는 우울증에서 조금 벗어났을 뿐이고, 그 애는 병들었다. 자기 집에서 그런 일이 생겼는데 병들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 애는 자기 집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 나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나는 거기에 비극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 나는 슬픔이나 분노, 고통에 사로잡힌 여자들을 많이 알고 있다. 그런 여자들은 도처에 깔려 있다. 너무 많아서 거기에 있는 줄도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가을의 낙엽처럼, 바닥의 개미떼와 거울에 쌓인 먼지처럼.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그 애가 그런 여자가 된 것이 조금 달갑다. 속이 시원한 것도 같다. “우린 현실을 직시해야 해.” 그 애가 우리 같은 여자들을 상처 입히기 위해 이성과 현실을 입에 담은 순간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그렇게 자긴 아닐 거라고 당당해하더니 소감이 어때? 가끔 묻고 싶다.

 

  거티가 집으로 돌아왔던 날을 떠올린다. 나는 그날 작업을 일찍 끝내고 야식을 먹으려던 참이었다. 거티가 있었다면 일찌감치 잠에 들었을 시각이었다.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나는 처음에 그게 거티인 줄을 몰랐는데, 평소 그 애의 발소리와 문을 두드리는 소리와는 달랐기 때문이다. 발소리에는 힘이 없었고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날카로웠다. 누구냐고 묻자 거티가 문을 열어달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 애에게 큰일이 생겼다는 걸 직감했다. 문을 열자 거티가 내 쪽으로 쓰러지듯 안겼다. 그 애에게서는 피와 쇠와 땀, 그리고 바람 냄새가 났다. 그토록 강렬한 냄새들이 사람의 체취와 한데 뒤섞인 것은 처음 맡아보았다. 거티가 나를 너무 절박하게 안고 있어서, 나는 거티에게 냄새난다고 면박을 주지도 못했다. “괜찮아? 괜찮니? 거티.” 내가 그렇게 말하자 심지어 거티는 울기 시작했다. 그 애는 이상하게 울었다. 흐느끼는 소리 같다가 울부짖는 소리 같았고, 한순간에 숨을 죽였다. 그 소리와 냄새, 날 꽉 붙잡은 그 애의 차고 뜨거운 몸. 나는 처음 경험해보는 강렬함에 가슴이 먹먹해졌다. 누가 울면 나도 울게 된다는 말을 그때 처음으로 이해했다. 날것의 감정이 그 애의 몸에서 나의 몸으로 전이되는 것 같았다. 그 애의 감정이 무엇인지도 모르면서.
  마침내 그 애가 그 마법 같은 시간에서 빠져나왔을 때, 나는 그 애에게 유산과 장례에 대해 물었다. “이제 없어.” 그 애는 이를 꽉 물고 말했다. 몸을 떨고 있었다. 그날 그 애의 몸이 뜨거웠던 건 열이 나고 있어서이기도 했다. 나는 아픈 친구를 보살피고 침대에 눕게 했다. 그 애는 자고 싶지 않다고 말했다. 잠에 들기 두려워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래서 나는 농담으로 책을 읽어주겠다고 했는데, 웃기게도 그 애가 승낙했다. 나는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를 읽었다. 그건 우리들의 농담 같은 거였다.
  거티와 내가 대학을 다닐 때, 어떤 남자가 여배우랑 여학우들을 한데 두고 질 나쁜 잠자리 농담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얘기를 전해들은 거티는 그 남학우의 사물함에 놀라운 것을 붙였다. 그 남자를 비판하고 모욕하는 한편으로 페미니즘 서적들을 인용한 내용이었는데, 신랄하고 유쾌하면서 멋있었다. 나중에 물어보니 그림은 신디가 그리고 그 외에도 에이미와 난의 도움을 받았다고 했다. 여하튼 그 포스터인지 대자보인지 모를 것은 잘 뜯어지지 않아서 남학우는 고생을 깨나 했다. 열심히 뜯어내다가 하필 『여성의 신비』의 한 구절과 성기를 모욕한 그림이 함께 있는 조각이 팔에서 안 떨어져서 허우적대는 사진이 찍혔다. 그 에피소드는 대학 친구들끼리 만나면 지금도 두고두고 회자되는 에피소드다. 그 뒤로 우리는 여성을 폄하하고 모욕하는 남자들을 볼 때마다 ‘여성의 신비가 침대까지 쫓아가게 만들어 즐까?’ 하는 식으로 자조를 담아 농담했다. 자기 전에 그 책을 함께 읽다가 잠든 적도 있다.
  하지만 거티는 농담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나는 내가 그 애의 기분이 나아지도록 노력한 행동들이 부질없어진 것이 조금 속상했다. 그만큼 정신이 없는 것일 테니 이해는 하지만. 거티는 두 번째 챕터가 끝날 때까지도 천장을 뚫어져라 쳐다보다가, 내가 자야겠다고 책을 덮고 나서야 눈을 감았다. 나도 내 침대에 누웠다. 그 애와 내 침대는 발끝을 마주 보는 형태로 나란히 놓여 있다. 그날은 나도 잠이 오지 않아서 한동안 누워 있었는데, 그래서 그 애가 중얼거린 말을 들을 수 있었다. 그게 무척 뜬금없었고 그날은 이상한 날이었기 때문에 나는 그 애의 말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한다.
  “바람이 불지 않는 곳… …. 미친놈들. 자기들이나 죽어버리라지…. 미쳤어. 난 안 가. 안 갈 거야. 난 이제 돌아왔어. 돌아왔어. 돌아왔어.”
  돌아왔다는 말은 그 뒤로도 몇 번이나 반복되었는데, 그 말을 듣다가 잠들어버린 탓에 어떻게 끝났는지는 알지 못한다.

 

  나는 거트루드 앵글로스를 연민한다. 그리고 거티와 전보다 가까워진 기분을 느낀다. 그 애에게 비밀이 생겼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 애는 전에 없이 창밖을 보거나 거울을 들여다본다. 소설 속 우울한 여자들이 자주 그러는 것처럼 말이다. 그럴 때의 그 애 눈은 먼 곳에 닿아 있다. 내가 결코 알 수 없는 곳이다.
  내게도 그런 곳이 있다. 그래서 나는 그 애를 연민하고 이해한다. 그 애의 생각과 감정이 무엇인지 모르면서, 그 애의 고통의 이유를 모르는데도 우리가 닮은 여자들이라고 느낀다. 그것이 못내 애달프다. 어쩌면 이 감상은 거트루드가 나를 우울을 모르는 여자로 생각한 것처럼 오해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 애의 친구이고, 그 애가 외롭게 아프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는 도망쳤어.” 거티는 얼마 전에 처음으로 그날의 일을 입에 올렸다. 그 말이 전부였지만, 나도 그 애에게 내 허벅지에 흉터가 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거티는 얼마 전부터 자매와 연락하기 시작했다. 지금도 나는 거티가 수화기를 붙잡고 하는 말을 듣는다. “날이 추워져서 그래. 응. 바람이 찰 땐 창문을 닫아. 알았어. 나도 그렇게 할 테니까. 알아. 안다니까. … …. 그래… 널 이해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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