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은 잘 지워지지 않는다
2021. 2. 24.

 

1.

 

  은효의 직장은 도시 외곽에 있는 주택이었다. 푸른색과 흰색 페인트가 칠해진 외벽이 깨끗했고, 2층이었다. 처음 그곳을 찾아갔을 때 은효는 정원에 마음을 뺏겼다. 가지각색의 여름꽃과 풀들은 꾸준히 관리되는지 완벽했다. 주택에 딸린 정원은 아마 거실 옆에 붙인 것 같았다. 테라스 옆에 넓은 창문이 줄지어 자리 잡았다. 레이스 커튼이 겹겹이 쳐져 안쪽은 볼 수 없었다. 울타리 밖에서 정원을 구경하며 시시한 생각을 했었다. 입에서 튀김 냄새가 나려나. 첫날부터 잘리진 않겠지. 손가락을 굽혔다가 약지에 까맣게 묻은 물감을 보고, 아차. 신경 쓸 걸.

  그때 세 번째 창의 커튼이 걷혔다.

  그림처럼 미동 없이 선 사람이었다. 그래서 눈 돌릴 생각도 못 했다. 파란 드레스를 입은 여자는 서은효와 눈이 마주치자 입술을 작게 움직이곤 웃었다. 어머, 하고 말한 것 같았다.

 

 

 

 

  한국말밖에 할 줄 모르고, 좀처럼 집 밖으로 나가지 않는 아가씨. 그게 은효가 서하를 만나기 전 전해 들은 전부였다. 실제로 만난 서하는 구불거리는 흑갈색 머리카락을 하나로 올리고, 파란 드레스를 입고, 자주 웃었다. 서양 애들 얼굴로 한국말을 했다. 파란색 눈동자로 은효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안녕, 하고 말하는 서하의 얼굴을 마주한 첫날. 은효는 이질감을 느꼈다. 안녕하세요. 서하보다 서툰 한국말로 인사했다.

  주택은 외부보다 내부가 더 아름다웠다. 동서양의 물건들이 잔뜩 섞여 있는데도 위화감이 없이 잘 어울렸다. 심심할 때면 은효는 비싸 보이는 물건들의 가격을 추측해보며 시간을 보냈다. 모든 게 빈틈없이 완벽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며칠이 지나자 은효는 대강의 사정을 추측해볼 수 있었다. 서하의 가족은 그녀의 피 반쪽을, 그녀가 혼혈이라는 사실을 수치스러워한다. 서하는 집 안에서 살아왔다. 그녀는 언젠가 결혼을 하고, 그러면 다른 집으로 가게 될 것이다. 이 아름다운 주택은 그녀의 임시거처나 다름없다.

  그녀는, 서하는 괜찮은가? 물론 신경 쓸 일은 아니다.

  은효의 일은 그녀의 말동무를 자처하고 그림을 가르치는 것이었다. 서하는 은효에게 어제는 집에 잘 들어갔어? 라거나 무얼 하고 지냈니? 같은 질문을 했다. 시간이 지나며 은효는 서하가 절대 해보지 않았을 시시한 장난들을 –고용주 몰래- 가르쳐주기도 했다. 얼굴에 물감 묻히기, 손으로 바람 빠지는 소리 내기, 콩을 던져서 받아먹기…. 서하는 두 번째 장난을 절대 성공하지 못했지만, 세 번째 장난은 너무 완벽하게 한 나머지 목에 콩이 걸려 한참을 혼나야 했다. 물론 혼난 건 은효였다.

  은효는 삼시 세끼를 챙겨 먹었다. 동네에서 유명하던 차이나 식당에 가보았고, 새틴 화방에서 물감을 샀다. 지금까지 하던 일에 비하면 이 일은 너무 쉽고, 편했고, 그에 비해 수입이 짭짤했다. 부업까지 합하면 그럭저럭 먹고살 만했다. 게다가 서하는 까다롭지 않다. 서하는 밥을 먹고 책을 읽고 정원을 산책하거나 은효와 대화를 하거나-거의 듣는 것뿐이었지만.- 낮잠을 잤다. 그리고 은효를 좋아했다. 여러모로 편한 직장이다.

 

 

 

 

  “난 네 그림이 좋아.”

  “헤에~ 내 그림만 봐서 그런 거 아녜요?”

  캔버스에 물감을 찍어 바르던 은효가 농담조로 말했다. 서하는 고개를 젓는다.

  “네 그림이 좋아.”

  은효와 서하는 팔 하나 뻗으면 닿을 거리에 나란히 앉아 그림을 그렸다. 서하는 막 사과를 붉게 칠하고 있었다. 과일 접시를 올려둔 유리 탁자와 고동색 의자, 유리문이 달린 장식장. 두 사람이 정면을 바라보면 유리 탁자가, 또 그 뒤의 창문이 보였다. 세 겹의 레이스 커튼 뒤로 투명한 유리창이 빛을 받아 반짝인다. 서하가 커튼을 걷고 서 있던 그 창가였다. 커튼은 활짝 걷혀 있었다. 닫힌 창문 너머로 여름의 정원이 보였다. 푸르고 푸른 녹음. 은효는 정원을 가장 열심히 덧칠했고, 서하는 자신의 그림을 그리기보다 서은효의 그림을 구경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보냈다.

  “은효야.”

  “… …네.”

  꿈에서 깬 사람처럼 느릿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색을 입힐 때면 멍하니 넋을 놓고 있는 버릇 때문이었다. 돌아보자 서하는 턱을 괴고 은효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시선이 서은효의 그림으로 옮겨간다.

  “초록색이 좋아?”

  “여름엔 좋아해요.”

  “그럼 다른 계절엔 싫어?”

  “…겨울요?”

  딱히 그런 건 아니지만. 은효는 어깨를 으쓱이며 붓을 내려두었다. 초록색 계열의 물감을 조금 더 짠다. 서하의 집에 올 때는 물감을 아끼지 않아도 되었다. 서하는 은효의 팔레트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제 캔버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나도 초록색 좋아해.”

  서하가 새로운 걸 배운 사람처럼 웃으며 연두색 물감을 짰다.

 

 

 

 

  서하가 책을 읽는 동안 부엌에서 수경과 얘기를 나눌 때도 있었다. 수경은 부엌에서 일하는 한국 여자였다. 그녀는 몸집이 무척 작았는데, 각진 턱과 탄탄한 팔다리 덕분에 강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줬다. 밥을 먹을 때면 크게 한 숟갈을 떠 꼭꼭 씹어 먹었고, 접시를 닦을 때는 뽀득거리는 소리가 날 정도로 스펀지를 눌러가며 닦았다. 수경은 새로 만드는 디저트를 은효에게 먹여보곤 했다. 나이는 30대 중후반 정도였는데, 처음 그녀를 보았을 때 은효는 수경을 20대로 착각했다. 나중에야 동양인은 원래 젊어 보인다는 걸 알았다. 묘한 일이었다. 제 얼굴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언니라고 불러. 자신의 나이를 말하면서 수경은 그렇게 말했다.

  “어때, 맛있어?”

  “너무 시큼해.”

  “…보통은 시큼이 아니라 새콤달콤하다고 하지?”

  “비슷하잖아요.”

  은효는 상체를 앞으로 기울이며 레몬 타르트를 포크로 찍었다. 수경은 물 묻은 손을 닦으면서 은효를 내려다봤다. 힐난하는 것 같지만 장난기가 섞인 시선이었다.

  “아가씨를 좀 본받아봐. 아가씨는 밥반찬 한 번 투정해본 적 없다.”

  “아가씨는 싫은 게 없는 사람이잖아.”

  “…”

  수경은 대답 없이 은효를 바라보다 맞은편 의자를 조용히 끌어 앉았다. 방금까지 테이블을 덮던 햇빛이 바람처럼 거두어지고 수경의 얼굴은 그늘에 잠겼다. 조용한 오후였다.

  “아가씨는… 서울에 있었을 때도 그랬어. 국경을 넘은 사람 같지 않아.”

  “서울은 어때?”

  “….”

  은효가 접시를 밀자, 수경은 고개를 젓고 등받이에 등을 기댔다. 수경은 단 게 싫다고 했다. 그러니 네가 먹어봐. 언젠가 딸기 소르베가 담긴 접시를 밀던 손으로 수경이 턱을 괸다. 생각에 잠긴 수경의 얼굴은 갑자기 나이를 먹은 것처럼 보인다. 수경이 레몬 타르트를 흘깃 보았다가 입술을 달싹였다.

  “거기서나 여기서나… 삶이 비슷해. 나는 먹을 걸 만들고, 아가씨는 아가씨대로 시간을 보내지.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거야. 아가씨도 나도.”

  “안 답답해?”

  “…어쩌겠니.”

  수경은 어깨를 으쓱였다.

 

 

 

 

  마지막 날, 그들은 다른 날과 다름없이 그림을 그리고 대화를 나눴다. 은효는 서하의 손에 이끌려 그녀와 같은 식탁에서 밥을 먹었다. 바른 자세로 앉아 적당량의 반찬을 천천히 입에 집어넣는 서하의 모습. 잘 먹었어. 서하가 수경에게 말하면 수경은 더 안 드세요? 하고 물었다. 그럼 서하는 고개를 젓는다. 아니, 충분해, 하고 말한다. 조용한 식탁에서 은효는 이질감을 느꼈다. 아니, 그보다는 미묘한 불쾌감, 혹은 답답함.

  은효는 서하가 살아가는 방식이 그와 닮았다고 생각한다. 아니. 충분해.

  “아가씨도 참, 내가 결혼하는 줄 알겠네요.”

  “아쉽잖아….”

  문 가까이 선 서하는 아쉽다는 얼굴로 은효를 바라봤다. 은효는 그날 집을 나오기 직전 서하가 지었던 표정이 기억나지 않았다. 다만 서하가 손을 붙잡던 걸 기억했다. 따뜻한 손이 제 손바닥에 겹쳐지던 걸, 그리고 서하가 묻던 걸.

  이제 가는 거니?

  그 말은 은효에게 ‘떠나는 거니?’로 기억된다.

 

 

 

 

 

 

2.

 

  팔 아래 느껴지는 배와 가슴, 볼을 간지럽히는 머리카락. 꽃 냄새. …서하의 냄새. 눈을 뜨자 잠든 서하의 얼굴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안고 잤던 모양이다. 버릇이었다. 은효는 몸을 반만 일으켜 서하를 내려다보았다. 문득 멀리서 바닥을 때리는 빗소리가 들렸다. 비가 내리는구나. 몸을 일으키다가 천이 부스럭거리는 소리에 동작을 멈췄다. 모든 소리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서하의 어깨가 살짝 움직인다. 은효는 잠시 멈춰 있다가 조심스럽게 침대에서 나왔다.

  비 내리는 소리, 물이 끓는 소리, 발소리. 모든 게 리듬에 맞춘 음악처럼 낮게 깔렸다. 무심결에 커피에 설탕을 탄 은효가 미간을 좁혔다. …서하의 집에서는 어떻게 하더라. 설탕은 금세 바닥으로 가라앉는다. 이렇게 설탕을 많이 넣은 걸 먹어보긴 했을까. 그 생각을 하니 짓궂은 웃음이 났다. 새까만 수면을 바라보던 은효는 설탕을 스푼으로 휘저어버렸다. 서하는 팬에 빵을 굽는 소리가 들릴 때에서야 눈을 떴다.

  “좋은 아침.”

  “‥좋은 아침이에요.”

  순간 어떤 방식으로 인사해야 할지 고민했다.

 

 

 

 

  서하가 찾아온 건 전날 저녁이었다. 은효가 짐을 정리하다 소파에 누웠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은효야, 하며 문 앞에서 웃고 있는 얼굴은 비현실적일 정도로 태연했다. 왜 왔어요? 어떻게 왔어요? 질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은효가 한 건 그저, 아가씨, 하고 그녀를 부르는 것뿐이었다.

  “은효야.”

  “네.”

  “그럼 넌 어디서 자니?”

  “전 여기에서 자요.”

  은효가 소파에 앉아 담요를 끌어왔다. 서하는 드레스를 입고 침대에 앉아 있었다. 침대를 손으로 두드린다.

  “그러지 말고 여기서 같이 자자.”

  “침대 터져요, 아가씨.”

  “아, 그러니?”

  “…그냥 올라와요. 터지면 다시 살 테니까.”

  침대가 터진다는 말에 바로 땅으로 내려온 서하를 보고 은효가 몸을 일으켰다. 픽 웃음이 샜다. 어쩔 도리가 없다. 서하는 씻다가 난간에 머리를 찧고, 은효의 옷으로 갈아입다가 팔을 잘못 넣고, 은효의 책장에서 야한 책을 찾아내면서 내내 웃었다. 즐거운 것 같았다.

  “소설에서 이런 장면을 본 적 있었어.”

  “부잣집 아가씨가 멋모르고 먼지 나는 침대에서 자는 장면요?”

  “…응. 한번 해보고 싶더라.”

  “난 소설 등장인물은 싫은데.”

  침대 위에 풀썩 누우면서 서하가 웃음을 터뜨렸다. 은효의 손을 가볍게 잡아끈 서하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은효가 서하를 바라보자 서하가 고개를 돌렸다. 서하의 눈동자는 너무 선명했다.

  "은효야.”

  “….”

  “걱정하지 마.”

  “걱정 안 해요.”

  그 말에 서하는 다시 미소를 지었다. 서하에게 잡히지 않은 쪽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서하는 결혼선물로 그림을 부탁했다. 그래서 그렇게 예쁘게 입고 왔어요? 은효가 묻자 서하는 웃었다. 예쁘니? 네. 싱거운 장난 같은 말이 둘 사이에 오갔다. 다행이다. 자리를 잡고 앉은 서하가 별안간 그렇게 말했을 때, 은효는 뭐가요?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미는 걸 참아야 했다. 무엇이? 당신의 무엇이 다행이야? 그런 질문은 할 수 없었다. 묻지 않아도 서하는 이미 아는 것 같았다. 그런 말을 하고 싶어질 때면, 말이 목구멍까지 치밀 때면, 서하는 어김없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고마워, 걱정하지 마, 너랑 같이 있으니까 좋다. 다 안다는 듯이.

  “아직 아가씨라고 해주는구나.”

  서하의 말에 은효가 고개를 들었다. 서하는 하얀 원피스를 입고 의자에 앉아 있었다. 약간 부스스한 머리칼이 배까지 내려왔다. 서하는 허리를 펴고 양손은 가지런하게 무릎 위에 올려둔 채 은효를 바라보고 있었다. 붓으로 그린 듯 미동 없는 자세와 옅은 미소를 띤 얼굴. 서하의 손을 그리던 은효가 잠시 멈췄다.

  “애프터서비스라고 생각해요.”

  “아하하.”

  장난스러운 은효의 목소리에 서하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잔잔한 물결 같은 웃음이었다.

 

 

 

 

  어느 오후, 서하와 은효는 정원에 나와 있었다. 가을로 접어든 터라 공기가 쌀쌀했지만 볕이 드는 한낮은 또 온기로 가득했다. 서하는 책을 몇 장 넘기다 말고 도로 덮었다. 까눌레를 먹던 은효는 포크를 내려놓고 서하를 따라 시선을 옮겼다.

  “뭘 보고 있어요?”

  “해국.”

  “그게….”

  무엇이냐고 물으려던 서은효가 입을 다물었다. 서하가 손을 뻗어 자기가 이름 부른 꽃의 잎을 만졌기 때문이다.

  “그건 어떤 꽃이에요?”

  은효는 평소처럼 물었다. 서하는 자신의 정원에 있는 모든 식물을 꿰고 있었고, 은효가 그렇게 물으면 곧바로 답변을 내놓곤 했다.

  “바다에서 자라는 국화.”

  “바다에서?”

  “응. 바다에서.”

  해국은 크기가 작았고, 꽃잎에는 푸른빛이 돌았다. 은효가 익히 아는 국화도 그 곁에 있는 걸 보면, 그 종들을 다 한 데 모아둔 건가 싶었다. 서하는 손을 거두고 은효를 마주 보는 자세로 돌아왔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바다가 보고 싶네.”

  “보러 가요?”

  그 말에 서하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평소처럼 웃었다.

  “데려가 줄 거니?”

  “어렵지 않죠.”

  마냥 쉬운 일이 아니라는 건 은효 역시 알고 있었다. 서하가 이 집을 멀리 떠나는 건 자기만 해도 잘 상상이 되지 않았으니까. 서하는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미소 지었다. 은효는 손을 뻗어 해국을 건드렸다.

  “…바다에서 피는 게 여기서 멀쩡해요?”

  “바다에서 필 만큼 강한 꽃이라 여기서도 탈 없이 잘 자라주는 거야.”

  은효의 어깨가 미세하게 움찔했다. 서하가 제 손을 잡아 손바닥의 굳은살을 문질렀다.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손이다.

  “너랑 같이 있으니까 좋다.”

  “….”

  왜 그런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다. 저도요, 하고 말하는 게 마땅한 고용인의 자세일 텐데. 은효는 한발 늦게 웃었다. 어느 때나 보여줄 수 있는, 고용인 특유의 가벼운 미소였다. 서하는 은효의 그런 반응은 신경 쓰지도 않는 것처럼 은효의 손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초록색 좋아한다고 했었지.”

  “네.”

  차마 손을 빼지도 못한 채 은효는 서하의 손에 자신의 손을 맡겼다. 서하는 물감이 묻은 은효의 손톱을 엄지로 만졌다.

  “네 그림은 네가 무얼 보고 있는지, 무얼 좋아하는지 말해주는 것 같아서 좋아.”

  “잘 보이죠.”

  “그걸 보고 있으면 너라는 사람에 조금 가까워진 기분이야.”

  그렇게 말하는 서하의 손이 유독 낯간지럽게 느껴져서, 은효는 결국 손을 빼고 말았다. 서하는 이번에도 내색하지 않았다.

  “언젠가 바다에 가자.”

  한참 늦은 답변을 바람처럼 내놓고 서하는 다시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네. 선선히 답하고 웃으면서 은효는 제 손을 무릎 위로 내렸다. 바람이 손등을 스치고 지나갔다.

 

 

 

 

  “은효야.”

  “네.”

  “너랑 알고 지낸지가 벌써 꽤 됐는데, 이렇게 가까이 있었던 건 처음인 것 같아.”

  “그러게요.”

  “좋다.”

  “….”

 

 

 

 

 

 

3.

 

  일을 그만둔 뒤 밖에서 수경을 마주쳤다. 건너편 횡단보도에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작은 동양인 여자. 밖에서 보니 수경은 작고 초라해 보였다. 하지만 파란불이 켜지고 그녀가 단단한 걸음걸이로 제 앞까지 건너왔을 때, 수경 언니 오랜만이에요, 인사하면서 은효는 평소와 같은 수경이구나, 생각했다. 아가씨가 널 많이 보고 싶어 하더라. 언니는요? …나도 그랬지. 그토록 덤덤한 목소리와 표정으로 보고 싶었다는 말을 하는 수경이라니, 손바닥이 간질간질했다.

  잘 지냈어요?

  그럼.

  아가씨는요?

  잘 지내셔.

  그리고 더는 할 말이 없었다. 그 정도의 인연이었다.

 

 

 

 

  짐 정리가 얼추 끝나자 은효는 시내에서 로라를 만났다. 반년만이었다. 그들은 식당에서 파스타를 시켰다. 파스타 면은 뚝뚝 끊겼고, 로라는 맛이 없다고 대놓고 투덜거렸다. 은효도 동감의 의미로 포크로 면을 헤집었다. 포크가 접시를 긁으면서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인상을 찌푸린 로라는 슬슬 ‘집’에 돌아오라고 말했다. 은효는 그럴 거라고 답했다. 일이 끝났으니까.

  “진짜? 아쉽네~.”

  “응.”

  “거기 돈도 잘 주고 편하다며. 게다가 관대한~ 아가씨도 계시고.”

  과장된 로라의 말투에 은효가 픽 웃었다.

  “아주 관대하시지. 나 드레스도 한 벌 받았다니까.”

  “헤에~ 진짜? 나 한번 입어보자!”

  “오~ 로라. 그러다 드레스 찢어질 일 있어?”

  비웃는 어투에 로라가 다시 인상을 찌푸렸다가 곧 어깨를 으쓱했다. 이럴 때마다 성을 냈다면 그들의 관계는 진작 끊겼을 거였다. 로라는 은효가 그랬던 것처럼 남은 파스타 면을 포크로 헤집었다. 그러다 포크를 놓고 별안간 은효의 손을 잡아당겼다. 은효는 무슨 일이냐는 듯 미간을 좁혔다.

  “또, 또 그런다.”

  주름 잡혀. 로라가 말했지만 은효의 표정은 조금만 누그러졌을 뿐 딱히 로라의 말을 듣는 것 같지는 않았다. 로라는 파랗게 물든 은효의 손끝을 바라보다가 손을 놓았다.

  “손 좀 닦고 다녀라. 너 이거 때문에 잘린 거 아냐?”

  “잘린 건 아가씨가 결혼해서고.”

  “진짜?”

  “그래. 진짜. 그 진짜 좀 그만해. 짜증난다.”

  “누구랑 하는 거래?”

  “그건 잘.”

  “흐응‥ 돈 많은 남자겠지. 이왕이면 잘 생기고 돈 많은 남자가 좋은데.”

  “네가 결혼하냐?”

  “상상은 자유래잖니.”

  로라가 빙글거리며 웃었다.

  “고 아가씨 섹스도 한번 안 해본 거 아냐? 완전 쑥맥일 것 같은데.”

  은효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남의 일에 열 내지 말고 네 연애나 잘하지?”

  “야, 왜 그러냐? 진짜.”

  이번에는 정말로 화가 났다. 뺨이 붉어진 로라를 흘깃 본 은효가 한숨을 내쉬었다.

  “미안. 피곤하네.”

  “손톱 좀 닦고.”

  “‥이건 잘 안 지워진다고 몇 번을 말해.”

  “됐다. 오늘은 먼저 간다? 들어올 때 연락해.”

  로라는 은효의 팔을 가볍게 친 뒤 손을 흔들었다. ‥계산도 안 하고 가냐. 로라가 떠난 자리를 바라보던 은효가 제 미간을 손가락으로 슬 문질렀다. 왜 이렇게 짜증을 냈지. 알 것 같았지만 알고 싶지 않았다. 손을 내려 손톱이 보이도록 손가락을 굽혔다.

  로라에게 말한 건 거짓이 아니었다. 이런 건 잘 지워지지 않는다.

 

 

 

 

  그날 서하는 자신을 찾아온 고용인과 함께 집을 나섰다. 안녕. 그렇게 말하면서 은효의 손을 가볍게 붙잡았다가 놓았다. 잘 지내야 해. 그녀가 떠나고 조용해진 집에서 은효는 캔버스 앞에 앉았다. 캔버스에는 스케치를 마치고 배경색을 넣은 그림이 있었다. 허리를 펴고 손을 무릎 위에 가지런히 모으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는 서하의 얼굴. 색을 어떻게 넣을지 고민하면서 은효는 방금까지 의자에 앉아 있던 서하의 모습을 머릿속으로 그려봤다. 습기를 머금어 부스스했던 흑갈색 머리카락. 짙은 눈썹과 파란 눈동자. 보기 좋게 살이 붙은 몸. 하얀 원피스. 밑단이 더러워진. 이제 끝이었다. 다시는 자신이 서하의 집에 가는 일도, 서하가 원피스 밑단을 더럽히며 자신의 집에 찾아오는 일도 없을 거다.

  그러고 보면 바다에 가자는 얘기를 했다. 그때도 생각했다. 우리는 함께 바다에 가지 않을 것이다.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서하는 또 안다는 듯이 웃었다. 그 얼굴 앞에서는 할 수 있는 말이 없었다.

  차라리 좆 같다고 말하지. 답답하다거나 힘들다거나 별로라거나 더 먹고 싶다거나 네가 그런 표정 짓는 게 싫다거나, 가지 말라거나. 가기 싫다거나. 하지만 서하는 마지막까지 웃었다. 그게 거짓이 아니었다. …설령 그렇지 않았더라도 바뀌는 건 없었을 테지만.

  그림 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 집처럼.

 

  은효야, 걱정하지 마. 고마워. 너랑 있으니까 좋다.

 

  한참 색을 덧입히다 문득 고개를 돌려보니 비가 그쳤다. 캔버스 위로, 손 위로 천천히 햇빛이 들어온다. 파랗게 물든 손이 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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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c 미국, 아가씨와 화가 au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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