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측과 응시
2022. 5. 26.

Zina Cole & Ivan Martinez

 

 

  그 사람들은 서쪽 땅에서 홀연히 나타났다. 두 사람 모두 손에 짐을 든 채였다. 나는 두 사람 중 아가씨로 보이는 사람이 입은 모슬린 드레스에 시선을 빼앗겼다. 이 동네에서는 보기 힘든 우아한 디자인이었다. 두 사람이 이쪽으로 걸어오자 이모가 내 팔을 잡아끌었던 게 기억난다. '가까이 하지 말라.'는 신호. 그들은 조금 이상했다. 아가씨의 드레스는 흙으로 더러워졌고 땅에 질질 끌렸다. 아가씨 옆에 있는 노인은 절뚝거리면서 걸었는데, 어린아이의 옷을 뺏어 입은 건지 짧은 옷 밑으로 발목과 손목이 훤히 드러났다. "어디에서 왔을까?" 내가 이모에게 귓속말을 하자, 이모는 얼른 집으로 돌아가자는 듯 채근했다. "궁금해할 것 없어."

  그들은 마을에 정착했다. 아가씨의 이름은 지나. 지나는 값비싼 옷과 장신구를 갖고 있었다. 사람들은 지나가 '부잣집 아가씨'고 노인이 그의 집사라고 떠들곤 했지만, 소문에는 늘 의혹이 따라 붙었다. 그들은 서로를 이름으로 부른다. 지나의 태도에는 우아함이 없다. 뭐가 됐든 아가씨 답지 않다. 지나가 작은 목공방을 운영하면서 사람들은 지나를 '아가씨'로 대하는 것을 완전히 그만두었다. 아가씨와 목공은 썩 어울리지 않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차라리 그들이 어느 저택에서 물건을 훔쳐 도망 온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실제로 서쪽에 콜 가문 소유였던 대저택이 완전히 무너진 것이 그들이 이 마을에 도착한 시기와 비슷했다. 하지만 나는 지나가 첫날 입었던 모슬린 드레스를 기억했고, 내심 지나가 콜 가의 사라진 딸 같은 게 아닐까 망상하곤 했다. 망상이 망상으로만 끝난 것은 내게 지나와 대화를 나눌 기회가 없었기 때문이다. 많은 마을 사람들이 지나를 암암리에 피했고, 이모는 노골적으로 지나를 싫어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나는 마을 사람들이 잘못했다고 생각하면서도 그들의 눈 밖에 나기 싫어서 지나를 피했다.

  그러나 1년 뒤, 나는 지나의 목공방에 앉아 있다.

  "그럼 며칠 뒤에 찾아오면 될까요?"

  "글쎄요…. 우선 이걸 써보시고, 마음에 드신다면 제가 한번 찾아갈게요."

  "집으로요?"

  "아… 사용하실 분을 직접 만나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요. 이모께서 거동이 불편하신 거죠…?"

  그랬다. 나는 이모 때문에 이곳에 왔다. 얼마 전에 이모가 계단에서 크게 구르면서 왼쪽 다리가 부러지는 사고가 있었다. 동네에 목공방은 한 군데가 더 있었지만, 지팡이는 취급하지 않는다고 퇴짜를 맞았다. 나는 지나와 함께 사는 노인이 지팡이를 짚고 다니는 것을 자주 보았고, 이모에게는 말하지 않고 지나를 찾았다. 지팡이를 만들어 줄 수 없느냐는 말에 지나는 왜인지 난감해했지만, 결국은 받아들였다. 지나는 이모의 키, 덩치, 집안의 구조나 자주 다니는 길을 세심하게 물어보고 지팡이를 하나 건네줬다. 하지만 집에 오는 건 다른 문제다. 상상과 무관하게 지나는 사람이었고-당연하지만- 나는 그 앞에서 차마 '이모라면 이곳에 죽어도 오지 않을 것'이라고 답할 수는 없었다.

  "어… 이모가 그게… 갑자기 아프면서 많이 상심하셨어요. 그래서 손님도 잘…."

  형편없는 변명에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그럼…."

  지나는 대안을 제시했다. 번거롭더라도 내가 이모의 요구를 지나에게 전달하는 식이었다. 나야 그렇다 쳐도 지나가 손해를 볼 텐데. 이해되지 않았다.

  "그냥 지금 이걸로 계산할게요."

  "그건 안 되는데요."

  안 된다는 말을 못할 것 같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번에도 당황했다. 지나는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가 옆에 놓인 지팡이 끝을 천천히 매만졌다.

  "무게를 지탱하는 거니까… 앞으로도 계속 쓰실 거니까요… 그 분한테 맞아야 해요."

  거절하면 더 곤란한 표정을 지을 것 같아서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지나. 들어가도 될까요."

  그때 정갈한 목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다른 방으로 연결되는 문이었다.

  "네, 이반."

  지나가 답했다. 나는 노인의 이름을 그제야 기억해냈다. 이반이 문을 열고 나에게 가볍게 인사했다.

  "식사 준비가 다 됐어요. 들고 해요."

  "아… 고마워요. 곧 갈게요."

  이반은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닫았다. 나는 일정하게 바닥을 울리는 지팡이 소리를 들었다. 그들 사이에는 확실히 '할아버지와 조카' 같은 사이로 단정 짓기 어려운 거리감이 있었다.

  "저 분 것도 지나가 만든 거죠?"

  "…네. 일단은요."

  어딘지 불만족스러운 목소리였다. 나서기 전에 나는 지나의 목공방을 둘러보았다. 왠지 이 사람이라면 믿어도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나의 목공방에 자주 들렀다. 이모의 자잘한 불평을 옮기면서 지나의 일거리를 늘리는 데 대한 죄책감이 들었지만 그것도 잠깐이었다. 나는 반복되는 일과 늘어나는 이모의 짜증 때문에 지친 상태였고, 조용한 지나의 목공방은 내게 숨 쉴 틈을 마련해 주었다. 나는 지나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떠들기 시작했다. 지나는 주로 조용히 듣기만 했지만, 가끔 내가 재밌는 말을 하면 웃기도 했다. 식사 시간을 알리는 이반의 얼굴도 익숙해졌다. 이반은 가벼운 미소를 띤 얼굴로 내게 인사한다. 그러면 나는 두 사람에게 인사를 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그러나 나의 일상을 공유하면 공유할수록 지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지나의 과거를 종종 물었다. 지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는 눈치였지만 곤란하면 입을 다물곤 했다. 알 수 없는 대답도 여럿 있었다. 이를테면 부모를 묻는 말에 "이제는 없어요."라고 대답하고, 실수했나 싶어 미안하다고 했더니 "그런 게 아니에요."하고 도리어 난감해하지 않나…. 더 캐물어도 나오는 건 없었다. 하루는 지나와 이반의 관계에 관해 물은 적이 있다. 지나는 이반이 한때 집사였으며 이제는 친구인 사람이라고 말했는데, 그럼 지나는 역시 부잣집 아가씨였느냐는 물음에는 대답하기 어려워했다. 그때 이반이 문을 두드렸다. 평소보다 살짝 이른 시간이었다. 마치 우리가 무슨 얘길 나누고 있었는지 아는 것처럼…….

  언젠가부터 나는 이반의 미소에 께름칙한 비밀이 숨어 있다고 생각했다. 지나도 이반에 대해서 잘 아는 것 같지는 않아서 나는 둘의 사이에 대한 호기심에 더불어 의혹이 생겼다.

  "당신은 이반과 닮았군요…."

  그래서 지나가 이렇게 말했던 날은 참지 못했다.

  "내가요? 어디가요?"

  "이반이 늘 그렇게 물어봤거든요. 이것저것…."

  "아니 그건…."

  나는 이반에 대한 비합리적인 의심을 떨치지 못하고 '그거야말로 수상해요!'하고 외칠 뻔했다. 그러면 나 역시 수상한 놈이 되어버리는 꼴이다.

  "지나가 궁금해서 그래요."

  "…내가요?"

  "당연하잖아요. 궁금하지 않으면 질문 안 하죠!"

  지나가 어색하게 웃었다. 그리고 잠시 입술을 떼었다 말았다 반복했는데, 나는 슬슬 지나가 말할 때 오래 걸리는 타입이라는 걸 깨닫고 있던 참이라 이번엔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나는… 말하는 게 서툴러요. 뭘 숨기려고 하는 건 아닌데요."

  "…알아요."

  "글로 쓰는 건 조금 익숙해졌는데… 아직 말은 어렵군요."

  "글을 써요?"

  그건 의외였다. 지나가 펜을 붙잡고 종이와 씨름하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다. 나는 지나가 하루종일 나무만 만지고 있을 줄로 알았다. 지나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서랍에서 수첩을 하나 꺼냈다. "늘 갖고 다녀요." 나는 한 손을 내밀었다. "구경해도 돼요?" 지나는 잠시 망설이다 수첩을 내게 건넸다.

  수첩 귀퉁이에 서명이 새겨져 있었다.

  '지나 콜'

  순간 내 오래된 망상이 빛을 발하면서 퍼즐이 자리를 찾아 움직였다. 재혼하여 살림을 차린 콜 부인. 폭삭 무너진 대저택. 사라진 딸. 모슬린 드레스를 입고 서쪽 땅에서 나타난 아가씨. 집사.

  나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슨 말을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나는 지나에게 나의 망상, 지나를 처음 봤던 날, 이모의 멸시, 죄책감, 호기심과 의혹을 마구잡이로 뒤섞어 내뱉었다.

  "당신이 말해줘요, 지나."

  그리고 지나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내가 살았던 집은 무너졌습니다.

  아니… 사라졌다고 하는 게 옳을까요? 나는 아직도 그때를 잘 설명하지 못하겠어요… 이반이라면 알지도 모를 텐데요. 이반은 내게 많은 걸 줬습니다. 이 수첩도 그렇죠. 그때보다 많이 나아졌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어렵군요. 나에 대해 말하는 것…… 아는 것이요.

  그때는요.

  그때는 그랬어요… ….

 

 

 

 

 

 

  내 이름은 지나 콜입니다.

  마르티네스 씨가 내 이야기를 써 보라고 했습니다.

  잘 모르겠습니다. 어렵군요.

 

 

 

 

 

 

  이반이 지나의 방을 뒤지고 있었다. 막 방에 들어오던 지나는 열린 서랍과 등을 굽힌 이반을 보고 걸음을 멈췄다.

  "뭘… 하고 계세요?"

  이반은 어깨를 편다.

  "목걸이를 찾았어요."

  상황에 순응하는 듯한 매끄러운 어조였다. 그는 어질러진 주변을 정리할 생각도 없는지, 자연스럽게 등을 돌려 지나에게로 다가왔다.

  "필요 없으신 것 같길래 제자리에 두려고 했는데, 목에 걸어드릴까요."

  이반은 지나가 며칠 전 잃어버린 목걸이를 손에 쥐고 있었다. 지나는 원체 둔한 사람이었지만, 자신과 이 집의 물건을 훔치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는 건 알았다. 그게 이번엔 이반 마르티네스였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거기 있는 것들… 전부 필요없어요…."

  말을 흐리면서 고개를 들자, 이반은 기묘한 표정을 지었다. 지나는 꼭 시험에 틀린 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이반은 시야 밖으로 사라지더니, 지나의 등 뒤로 걸어왔다. 목덜미에 닿는 차가운 감촉. 이건 지나의 할머니가 어머니에게로, 다시 어머니가 지나에게로 물려준 목걸이다.

  며칠 전 지나는 장신구함에서 작은 별 모양 목걸이가 사라졌다는 것을 눈치챘다. 매일 아침 목에 걸던 것이었다. 장신구함에 있는 다른 모든 것들을 기억하지 못하더라도, 그것만은 잊을 수 없었다. 이반도 그걸 알았다.

  "아가씨, 왜 목걸이가 중요하지 않나요?"

  지나는 목걸이가 제 목에서 반짝이는 걸 내려다 보며, 이 목이 허전할 때도 괜찮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엄마는 신경 쓰지 않으실 거예요."

  목걸이를 두르고 있는데도 목덜미가 허전했다. 아니, 목걸이가 외려 서늘한 감각을 가져다 주었다. 처음 엄마가 제 목에 목걸이를 걸어줬을 때 어떤 기분이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어느새 지나의 앞으로 돌아온 이반이 지나와 눈을 맞추고 물었다.

  "그런 식으로 말씀하시는 건 처음이군요.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그건… …."

  지나는 자신도 알 수 없는 생각과 감정을 흘리고 있었다. 부끄러움이 밀려왔으나 이반의 질문을 피하기가 어려웠다. 그는 같은 눈높이에 서서 늘 똑바로 묻고 바르게 답했다. 지나는 망설이다 느리게 입술을 떼었다. 무엇이라도 이반이 답을 줬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역시 이런 건 한심한가요…?"

  "아니요, 그렇지 않아요. 진정으로 한심한 건…"

  하지만 이번에 이반은 말을 흐렸다. 그는 자기 스스로를 가리키더니 말을 끝맺지 않은 채로 지나의 방을 떠났다. 지나는 혼란 속에 홀로 남겨졌다.

 

 

 

 

 

 

  엄마는 목걸이가 할머니의 유품이라고 말했습니다. 마음에 안 든다고 했던 게 기억납니다. 하지만 엄마는 매일 목걸이를 찼습니다. 제게 목걸이를 주기 전까지는요. 엄마는 목걸이를 제게 줬고, 이제 집으로 돌아오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떠났습니다. 집에는 마르티네스 씨만 남았습니다.

  모두 왜 떠났을까요. 그는 왜 떠나지 않았을까요.

 

 

 

 

 

 

  목걸이를 찾고 며칠이 지나지 않아서 이반은 지나에게 수첩을 하나 건넸다.

  자신의 이야기를 써 보세요. 서랍 안에 있는 것들은 여전히 필요없다고 생각해도 괜찮지만, 언젠가 이 수첩만큼은 당신에게 중요해졌으면 좋겠습니다. 주인님.

  지나는 카펫 위에 엎드려 수첩을 폈다. 밑으로 늘어진 목걸이가 햇살을 받아 반짝이며 흔들거렸다. 지나는 흰 종이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자신이 이반의 호칭을 정정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모든 사용인들은 지나를 '아가씨'라고 불렀다. 그들이 이 집에 있었을 때는 그랬다. '주인님'은 엄마에게 돌아가야 마땅한 호칭이었다. 하지만 엄마는……. 이 집에 남은 건 이제 단 둘뿐이었다. 목덜미가 시큰했다.

  지나는 이반과 종종 대화를 나눴다. 주로 이반이 물으면 지나가 답하는 형식이었다. 지나는 결코 사교적인 인물이 아니었기 때문에 이반과의 대화가 무척 생경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반이 긴 시간을 들여 참을성 있게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것, 탐구하듯 질문을 지속적으로 던지고 있다는 것 따위를 깨닫지 못했다. 답하기 어려운 건 글로 써보세요. 이반이 말했으므로 지나는 수첩에 일기를 적었다.

  말도, 글도 지나에게 친숙한 것은 아니었다. 지나는 나무를 만졌다. 처음에는 작은 장난감이나 도구 같은 걸 만들다가 조금 더 커서는 가구로 영역을 넓혔다. "의자 다리를 잘라버리고 싶어." 엄마가 매번 저주하던 의자를 바꿔주고 싶었던 게 시작이었다. 지나는 평생을 거의 집에서 시간을 보냈고, 엄마에게 저주받은 의자나 흠이 생긴 서랍, 부러진 받침대 같은 것들을 대체할 것을 만들었다. 완성되기 전까지 그것들은 지나를 비난하거나 몰아붙이지 않았다. 슬프게 만들지도 않았다. 잘못되면 고치고 다시 만들면 그만이었다. 알맞은 자리에 물건을 돌려놓고 나면 희미한 충족감이 가슴에 들어찼다. 하지만 그것도 모두 지난 일이다. 지나는 무얼 만들어야 할 지 알 수 없었다. 집이 흠결 없이 완벽한 것이 아닌데도 나무를 만지고 두드리고 깎아낼 욕구가 들지 않았다. 그것들은 이제 필요없었다.

  집이 비어버렸으므로.

 

 

  꿈에서 지나는 나무를 만지고 두드리고 깎았다. 나무는 깎이고 뭉툭해지고 매끄러워졌다가 거친 결을 드러냈으나 그뿐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모양도 이루지 못했다. '조금만 더'. 지나는 답답함에 공구로 나무를 세게 내리쳤다. 나무가 예상과 다른 모양으로 깎이면서 손이 중심을 잃는다. 날카로운 모서리가 지나의 손가락을 뚫고 튀어나온다. 등골이 오싹했다. 피가 흐른다……

  눈을 떴을 때 보인 것은 사람의 얼굴이었다. 갑작스럽게 바뀐 풍경에 지나는 소리를 지를 뻔했지만, 음성이 나오지 않았다. 목이 졸린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상대는 조용히 지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어둠 속에 잠긴 얼굴. 작은 빛이 그 얼굴 위에서 일렁거렸다. 지나는 눈을 크게 뜨고 뻣뻣한 손을 겨우 움직여 목을 더듬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에 닿았다.

  "주인님."

  상대가 입을 열었다.

  "…이반."

  "네. 마르티네스입니다. 물을 가져다 드리죠."

  이반은 들고 있던 촛대를 기울여 지나의 방에 불을 밝혔다. 이반이 멀어지자 지나는 식은땀을 닦고 자리에 앉았다. 천천히 호흡을 고르는 동안 의혹이 마음을 불안하게 떠밀었다.

 

 

 

 

 

 

  "그 사람 대체 뭐예요?"

  나는 이야기를 끊고 불쑥 물었다. 지나 역시 이반을 께름칙하게 생각했다는 걸 눈치챘다. 들으면 들을수록 수상했다. "아니, 물건을 훔쳤으면… …." 이반의 지팡이 소리가 들려왔기에 나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지나, 들어가도 될까요."

  "네, 이반."

  곧 이반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와 식사가 준비되었다고 말했다. 나는 내가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도 모르는 채로 일어나서 두 사람에게 인사했다. 나는 온갖 의문으로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돈을 노리고 붙은 자가 아닐까? 지나를 왜 보고 있었을까? 왜 그런 질문들을 했지?

  밤이 깊은 뒤에야 내가 그날 지나에게 보였던 태도가 후회스러웠다. 거울을 보면서 머리카락을 정리하다 문득 지나의 이야기 속에서 지나와 이반의 눈높이가 비슷했다는 것이 떠올랐다. 지나는 이반과 나보다 키가 한참 작았다. 무릎을 굽혀줬다는 뜻일까? 이런 것까지 기억하고 있다니 내가 그들의 사생활에 너무 몰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민망했다.

  지나의 목공방이 이틀 동안 문을 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초조함을 안고 지나의 얼굴을 기다렸다. 3일째 되는 날 다행히도 목공방이 문을 열었다. 지나는 이반과 함께 볼일이 있어 잠시 문을 닫아야 했다고 말했다. 며칠 전 내가 보인 행패는 완전히 잊은 듯한 태도였지만 나는 지나에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기왕이면 이반에게도 미안하다고 사과하고 싶어요. 지금 계시나요?"

  "아… 내일은 있을 거예요."

  "그럼 내일도 다시 올게요."

  "음. 네. 저, 그리고…."

  지나가 곤란한 표정을 지어서 나는 덜컥 가슴이 내려앉았다. 역시 날 용서하지 못하는 게 아닐까?

  "조만간 떠날 것 같아요."

  "네?"

  "지팡이를 다 만들었어요. 부족할지도 모르는데요. 여기요."

  지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지팡이를 가져왔다. 나는 당황함을 감추지 못하고 얼떨떨하게 지팡이를 받았다.

  "아주 떠난다는 건가요? 저기, 벌써요?"

  "네… 아쉽게 됐네요."

  지나가 정말로 아쉬운 표정이었기 때문에 예상치 못한 소식에도 마음이 크게 상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쉽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평소처럼 앉아서 오래 대화를 나누고 싶었는데 입술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내 실수가 발목을 잡고 우리의 거리를 다시 벌린 것 같았다. 나는 의례적인 인사를 몇 번이나 한 뒤에야 잔금을 치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반의 노크도 없이 희한하게 적막한 날이었다. 나는 문가까지 배웅을 나온 지나에게 물었다.

  "어디로 가요?"

  "잘 모르겠어요."

  그것이 우리의 마지막 대화다.

  이모는 지나가 공들인 지팡이를 생각보다 더 마음에 들어했고, 나는 이반에게 사과하지 못했다. 지나와 이반은 처음 왔을 때처럼 갑자기 떠났다. 나는 그들이 떠나고 빈 집에서 이반이 매일 들고 다니던 지팡이를 발견했다. 그것은 식탁 옆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다. 두 사람이 그걸 모르고 놓고 갔을 리는 없었다. 나는 그들이 그 지팡이를 남기고 떠났다고 생각하고 그것을 챙겼다. 모슬린 드레스에 마음을 빼앗겼던 인연이 누군지 알 수 없는 사람의 지팡이로 끝났다는 것을 생각하면 기묘하다. 나는 그들이 떠나는 모습을 보지 못했다.

 

 

 

 

 

 

  따뜻한 기척에 지나는 눈을 떴다. 이반이었다. 의자에 앉아서 이반이 오기를 기다리다가 깜빡 잠에 들었던 게 기억났다. 지나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막 맞은편에 앉은 이반이 가만히 미소 지었다. 지나는 반사적으로 그의 지팡이를 눈으로 찾았다. 이곳에 와서 처음으로 다듬었던 나무. 그것도 1년 정도가 지나자 이제 손잡이가 반질반질해졌다. 그러나 길이는 이반에게 조금 짧고, 끝이 살짝 갈라졌으며, 균형이 왼쪽으로 쏠렸다.

  "잠시만요…."

  지나는 담요를 옆에 두고 목공방으로 향했다. 다시 돌아왔을 때는 손에 새 지팡이를 쥔 채였다. 이반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미안해요. 오래 걸렸네요."

  이반은 지나가 자신에게 내민 것을 한참 바라보다 제 손으로 가져왔다. 처음 땅을 다시 짚는 것처럼 생경한 감각이었다. 꼭 지나와 함께 그 집을 나왔던 날처럼. 그날 이반은 살았고, 무너졌으며, 다시 일어났다. 지나가 그를 부축했다. 지나는 어디로 가야 할 지 길을 알 수 없었으나 이반을 부축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함께 쉴 곳을 찾았고, 지나는 이반을 위한 지팡이를 만드는 데 매진했다. 1년. 마침 계절이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이반은 지나가 새로 만들어 준 지팡이의 손잡이를 만지며 지나를 바라보았다.

  "제게 알맞습니다. 고마워요."

  "아니에요. 제가…."

  지나가 말을 흐렸다. 이반은 침묵을 깨지 않고 한참 기다리다, 지나가 말을 끝맺지 않을 거라는 게 확실해졌을 때 입을 열었다.

  "영광입니다."

  "이반."

  "네, 지나."

  "당신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그렇게 보냈는지, 나는… …그 시간을 어떻게 버텼나요?"

  그들이 그 집에서 있었던 일을 언급한 건 아주 오랜만의 일이었다. 지나는 불안해 보이는 얼굴이었다. 이반은 그들에게 새로운 행선지가 필요한 순간이 왔다는 걸 직감한다.

  "외로움을 없애려고 노력한 적은 없습니다. 다만 내가 할 일을 찾아 헤맸죠."

  "그걸 찾았나요?"

  이반은 고개를 젓는다.

  "잘 모르겠어요. 이렇게 주인님을 모시고 나왔으면서도요…. 이상하죠?"

  차분한 대답에 지나의 불안이 차츰 얼굴 뒤로 가라앉았다. 내용을 뜯어보면 해답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지나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에요. …같이 찾아요."

  마주 보고 앉아 있으면 옛날처럼 눈높이가 조금은 비슷해졌다. 멀지도 가깝지도 않은 거리에서 이반은 순순히 수긍했다.

  "네. 같이 찾으면 되겠군요."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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