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제
2022. 12. 1.

* COC 시나리오 사계기담 캠페인과 호질 - 오사이비자 캠페인의 약 스포일러가 있어요 (특히 오사이비자)

 

 







  손톱 밑으로 차디찬 흙이 때처럼 낀다. 나는 해야 할 말을 알았다. 주문을 왼다. 함이 깨진다. 먼지가 회오리 바람처럼 춤을 추며 허공을 맴돈다.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낀다. 기이한 압력이 온 몸을 짓누른다. 온 몸으로 들어온다. 알 수 없는 거대한 힘이 밖에서 날 누르고 안에서 팽창한다. 당장이라도 몸이 찢길 것 같다. 그래도 멈추지 않는다. 멈추지 않는다. 말한다. 바람이 분다. 바람이.

  모든 것이 멈춘다.

  무덤에서 유령이 일어난다.

  나는 탄성을 내지르려고 했다. 하지만 목구멍에서 튀어나오는 건 비명이다. 나는 양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비틀거리다 뒤로 넘어진다. 내가 살린 유령에게는 얼굴이 없었다.

 

 

 

 

 

 

 

  《미제》는 서제나의 본격적인 호러/스릴러 데뷔작이라고 할 수 있다. 죽은 연인을 되살려내는 기이한 장면으로 시작하는 이 소설은 처음부터 이 연인의 앞날이 파국임을 예상하게 한다. ‘나’와 해수의 재회는 로맨틱하지 않다. 이상한 주문으로 죽은 사람을 살려낸 판국이라 해도, ‘나’는 각오가 되어 있어야 했다. 하지만 살아난 해수에게는 얼굴이 존재하지 않고, 이를 본 ‘나’는 비명을 지른다.

  ‘나’는 기존의 서제나의 주인공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서제나의 주인공들은 불안과 집착을 안고 탄생한다. 하지만 서제나의 주인공들이 시종일관 불안의 정체를 찾아 헤매는 것과 달리, 《미제》의 ‘나’는 처음부터 자신이 불안한 이유를 안다. 기존의 다른 작품들과의 차이는 여기서 발생한다. 서제나의 소설에는 불가해한 현상과 소름 끼치는 사건이 자주 등장하지만, 이는 사랑을 위한 장치에 가깝다. 위기 속에서 사랑이 꽃핀다고 하던가. 연인들이 하나로 결속되면서 소설은 사랑을 말한다. 그러나 《미제》에서 연인들은 서로를 두려움과 불안에 빠트리는 존재일 뿐, 관계에는 진전이 없다. ‘나’와 해수 사이에 신뢰할 수 있는 건 서로의 징그러운 마음밖에 없다. 독자인 우리들마저 결말에 이를 때까지 해수의 얼굴과 ‘나’의 이름을 모르는 것처럼….

 

 

 

 

 

 

 

  "이 그림을 보면 어떤 생각이 들어요?"

  제나가 물었을 때 수현은 다른 생각에 빠져 있었다. 저녁은 뭘 하는 게 좋을지, 장은 어떻게 볼지, 오늘은 일찍 퇴근할 수 있을지, 등등…. 오래 지루하지 않은 사람처럼 서 있으려면 다른 생각도 도움이 된다. 제나는 갤러리에 들어온 다음부터 한참 말이 없었다. 그러다 꺼낸 말은 뜬금없었다. 수현은 눈을 깜빡였다. 그들 앞에는 거미줄을 그린 그림 액자가 있다.

  "어둡고… 질척하고… 그렇네요.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들었어요."

  “어머. 그런 건 인터넷에 검색하면 누구나 알 수 있는 거잖아요. 어둡고, 질척하고, 또 어때요?”

  "허허. 음…… 아. 이 그림 처음 봤을 때요."

  수현은 망설이며 말을 이었다.

  "불쾌해서 두고두고 생각났거든요. 그게, 거미보다 거미줄이 더 징그러워요. …… 이런 감상도 되는 건가? 전 예술은 모르겠네요."

  이 그림을 처음 봤을 때부터 생각했던 감상이다. 내뱉고 나니 후련한 동시에 후회가 됐다. 이 그림을 갤러리에 들인 것도, 옆에서 감상을 물은 것도 모두 수현의 고용주였기 때문이다.

  "오…… 새롭네요."

  “그래요?”

  무슨 의미일까? 제나는 그림에 한 뼘 더 가까운 위치에 서 있었다. 그는 수현이 살면서 본 사람 중에 가장 키가 컸기 때문에 수현은 고개를 젖혀도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었다. 입꼬리가 올라간 것도 같다.

  "가끔 있잖아요. 산책하다 보면 거미줄이 이렇게, 몸에 걸릴 때가 있어요. 아마 거미들이 집 짓겠다고 이동한 흔적이겠죠? 정말…… 알아볼 수밖에 없더라구."

  웃는다.

  제나가 고개를 제 쪽으로 돌리자 수현은 저도 모르게 눈을 굴렸다.

  웃는 게 맞나?

  수현은 저 표정을 본 적이 있다.

 

 

 

 

 

 

 

  지난 가을의 일이다.

  ‘사건 현장에 있던 서 이사가 경찰에 증언한 바 있다. 서 이사는 휴가 중 친구들과 경남으로 여행을 떠났다가 불운한 사건에 휘말렸다. 함께 증언한 일행 중에는 ‘안은수’의 딸 안 모 씨도 있었다고…….’

  기사가 뜨기 하루 전, 수현은 서제나가 경찰서에서 미친 사람처럼 굴었다는 얘기를 들었다. 서 대표가 갑작스럽게 수현을 호출했다. 수현은 고향에 내려가 있다가 부랴부랴 회사로 돌아왔다. 제나가 휴가를 떠났기 때문에 수현 역시 휴가를 즐기던 참이었다.

  수현이 사무실에 들어오자 대표는 고개만 까딱이고 스피커폰으로 통화를 계속했다. 고개를 끄덕였으니 나가지는 말라는 뜻이다. 수현은 문가에 얌전히 서서 대표의 대화가 끝나길 기다렸다. 있어도 없는 것처럼, 들어도 듣지 않은 것처럼 굴 셈이었다. "애들이요. 따님이 미쳤다고 합디다. 섬뜩하다고요. 자꾸 이상한 소릴 해요." 그러나 이 대목에서 수현은 움찔 고개를 들고 말았다. 대표와 눈이 마주쳤다. "그럼 미쳤나 보다 하고 넘겨요. 그 정도는 할 줄 알아서 그 자리까지 올라가신 거잖아, 서장님." 서 대표는 수현을 빤히 바라보면서 말했다.

  실종. 살인. 사이비. 미제 사건. 서제나는 사건 참고인으로 증언하는 동안 이 말을 28회 반복했다. "얼굴이 없어요."

  물론 ‘서제나가 미쳤다.’는 얘기는 항간에서 찾아볼 수 없다.

  제나가 서울로 돌아오는 날 수현은 그를 마중하러 나가면서 제 표정을 어떻게 가다듬어야 할지 한참 고민했다. 배수현은 8년간 서제나의 비서로 일했다. 서 대표가 말한 것처럼 ‘그냥 넘길 줄 아는’ 능력이 그를 살려왔다. 수현은 늘 그렇듯 아무 것도 모르는 비서로……

  "어머나. 수현 씨는 얼굴이 있네?"

  제나가 제 어깨를 붙잡고 그렇게 말했을 때, 수현은 미친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는지 알게 되었다.

 

 

 

 

 

 

 

  서제나가 관리하는 갤러리에서 이 그림은 일 년 전까지 VIP석을 차지하고 있었다. 입구로 들어서면 정면으로 보이는 위치. 그 자리에는 늘 서 이사가 가장 아끼는 작품이 걸렸고, 그러고 나면 기이하게도 평가가 높아졌다. 갤러리 사람들은 그래서 그 자리를 'VIP석'이라고 부른다. 《거미 여인의 키스》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이 그림은 커다란 캔버스에 거미줄을 촘촘하게 그려내었는데, 평론가들은 그 솜씨도 대단하지만 몇 겹의 껍질을 두른 작품이라는 점이 더 대단하다며 혀를 내두르곤 했다. 평론가들의 말에 의하면 이 작품에는 몇 겹의 작품이 중첩되어 있다. 최소 3개의 레이어 위에 아주 선명하고 촘촘한 거미줄을 쳐서 다른 레이어를 제대로 알아볼 사람은 화가 본인밖에 없을 거라고. 수현은 그 얘기를 듣고 예술가들은 역시 미친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자신이었다면 아까워서라도 제 그림 위에 새 그림을 그릴 생각을 못했을 테다.

  "그런데 거미들은 거미줄에 내가 걸리기도 전에 눈치챈다는 거예요. 거미줄이 안테나 역할을 한대. 얇고 촘촘하니까… 소리도 바람을 타고… 거미들도 바람을 타고 아주 멀리까지 이동할 수 있다고 해요. 신기하지 않아요? 그렇게 잘 끊어지는데, 실은 강철보다도 강한 물질이라고 하고.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제나는 말을 멈추고 허리를 살짝 굽혔다.

  "난 늘 궁금했거든요."

  "하하. 뭐가요…?"

  "왜 징그러운 건지요. … 이젠 알겠어. 모르니까 징그러운 거예요."

  이리저리 튀는 이야기를 종잡을 수 없어 어색하게 웃던 수현이 눈을 깜빡였다. 제나의 표정의 의미를 희미하게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서 이사님은 좋아하시는 거 아니었나요? 이 그림…."

  중얼거리듯 반문하자 제나가 허리를 펴고 가뿐하게 웃었다.

  "원래 모르는 사람한테 설레잖아요. 모르니까 알고 싶고. 수현 씨는 안 그래요?"

  "… 그렇게 비유를 드시면 부정할 수는 없네요. 음. 그럼 지금은 이 그림…왜 VIP석에서 치우셨는지 물어봐도 돼요?"

  그림은 작년, 서제나가 신작 장편을 마무리한 뒤 VIP석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수현은 궁금했다. 그렇다면 많은 사랑이 그렇듯이 알게 되어서 질린 건지. 그림을 아는 건 뭘까? 모든 레이어를 샅샅이 파악했나? 수현은 알 수 없었다.

  "그건……."

  제나는 드물게도 망설였다. 수현은 재촉하지 않고 기다린다.

  "선생님이 그러는 게 좋겠다고 하셔서요."

  "아. 그랬군요."

  제나의 ‘선생님’은 정신과 의사를 뜻한다. 그래서 수현은 할 말이 없어졌다. 더 물어봐서는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껄끄러운 뒷맛을 애써 넘기고 입을 다문다.

  “수현 씨는 더 안 물어요?”

  "네?"

  "은수는 묻던데… 그렇구나. 오늘은 이만 퇴근해요."

  한숨 같은 말을 남기고 제나는 돌아나갔다. ‘모셔다 드릴게요.’라고 말해야 하는데, 입술이 거미줄로 봉한 것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수현의 고용주는 잊을만하면 죽은 친구를 어제 만난 사람처럼 언급한다. 그럴 때마다 수현은 말을 잃는다. 수현은 등을 돌리지 않고 갤러리의 흔한 손님들처럼 그림을 올려다 본다.

  자. 뭐가 보여요? 제나가 물으면,

  아무것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요…. 수현은 답한다.

  최선의 답이지만 정답이 아니다. 수현은 지금보다 젊을 적, 엄마가 아픈 걸 모른척했을 때처럼 속이 울렁거렸다. ‘하지만 난 그때도 어디가 왜 아픈지는 몰랐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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