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
2024. 9. 1.

 

경첩이 어긋나 닫히지 않던 장롱을 버렸다. 이인해가 줬던 작은 반상과 삐걱거리는 의자, 낡은 전자레인지도. 끝이 닳은 색연필이나 소파 밑에 숨어 있던 빗, 지우개, 기한이 지난 쿠폰과 전단지 역시 머리카락과 함께 모아 버렸다. 놓친 게 없나 방들을 다시 둘러보다 다연의 벽 귀퉁이에서 처음 보는 낙서를 발견했다. ‘이다연.’ 또박또박 적은 이름 세 글자였다.

혜화는 어릴 적 아지트를 떠나면서 남겼던 낙서를 떠올렸다. 그때는 무슨 생각이었더라. 품에 꼭 챙긴 돈다발을 제외하면 수중에 아무것도 없던 때였다.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어디로 가야 하는지 아무것도 알지 못하던 때. 그때는 몰랐지만 열여덟의 이혜화는 세상에 아주 작은 흔적이라도 남기고 싶었던 건지도 모른다. 다연도 비슷한 마음일까. 별 모양 벽지는 유치하다며 툴툴대던 게 엊그제 같은데, 그래도 살던 곳에 정이 든 모양이었다. 혜화는 다연에게 벽의 낙서를 보았다고 놀릴까 하다 관뒀다.

마지막으로 돌아본 집은 아주 휑했다. 그러나 시선이 닿는 곳마다 익숙했다. 거기에 무엇이 있었는지 머릿속으로 그려볼 수 있었다.

“엄마.”

다연이 열어둔 문밖에서 혜화를 바라봤다. 안 가냐고 묻는 얼굴이다.

“나가자.”

혜화는 꽉 찬 종량제 봉투를 들고 현관문을 나섰다.

*

「집들이는 언제 할 거야?」

「사람 사는 꼴부터 만들어놓고」

「이사 만만치 않지ㅋㅋ 도와줬어야 하는데」

「거의 다 했어」

「잠깐만. 이따 연락할게」

재익이 보낸 메시지를 확인한 혜화는 마루에 드러누웠다. 깨끗한 아이보리 색 천장이 보인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고 생각한 것도 잠깐, 눈앞에 다연의 얼굴이 나타났다.

“엄마. 짜장면 시켜?”

“네가 사려고?”

“아니~! 엄마가 살 거야. 전화는 내가 할게. 짜장면 두 개?”

“응. 탕수육도 하나 시키자.”

“좋아.”

다연은 혜화의 휴대폰을 가져갔다. “시켰어. 나 게임해도 돼?” 아이가 익숙하게 휴대폰을 만지는 걸 보며 혜화는 눈을 감았다. “응. 짜장면 올 때까지만.” 곧 다연이 자주 하는 게임 속 캐릭터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캐릭터들이 엄살을 부리면서 앓는 소리를 냈다. “잘 좀 해봐.” 놀리듯 말하자 다연이 투덜거렸다.

“아니… 아! 엄마 때문이야!”

“또 내 탓이야?”

다연이 조용히 하라면서 팔을 내저었다. 혜화는 작게 웃고 옆으로 등을 돌렸다. 창가로 들어온 햇빛에 등이 뜨끈하게 달궈졌다. 노곤노곤하니 잠이 올 것 같았다.

“엄마.”

가깝게 들려온 목소리에 혜화가 다연을 돌아봤다. 눈앞에는 일시정지를 시켜둔 다연의 게임 화면이 보였다.

“짜장면 왔어?”

“아니. 이거…. 재익이 오빠 온대.”

다연이 친절하게 메시지 창을 다시 띄워줬다.

「정리 다 못했지? 일 끝났으니까 지금 갈게」

하여튼 부지런한 애였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네 번째 집, 네 번째 이사였다. 그리고 홍재익은 이혜화가 집을 옮기던 날마다 함께했다.

첫 번째에 관한 기억은 흐릿하다. 이사라고 하기도 민망했다. 도피하듯 부산으로 내려가 마련한 집이었기에 수중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게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기에 이혜화는 문제를 느끼지 못했다. 그 집에는 이혜화만 있었다. 이인해도 이다연도 다른 사람들도 없었다. 이혜화는 누구도 생각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 대상에 자기 자신이 포함되었다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지만.

그 공간에 홍재익이 들어왔다. 바닷가에서 우연히 재회한 재익을 집에 초대하자 재익은 사람 사는 집 맞느냐며 인상을 찌푸렸다. 놀러와도 되냐고도 물었다. 그러라고 이혜화는 답했다. 홍재익은 그 뒤로 툭하면 찾아와 청소하라고 잔소리하고 찌개를 끓였다. 며칠 오지 못할 것 같을 때는 미리 연락까지 했다. 그동안 밥 잘 챙겨 먹고 청소 열심히 하고 아무튼 잘 지내라는 말이 꼭 따라붙었다. 혜화는 바보가 아니었기에 재익이 자길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미안하지는 않았다. 외려 재익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별로 친하지도 않은 사람을 왜 저렇게까지 신경 쓰면서 사나 하고. 그러나 혜화는 재익이 저를 챙기도록 내버려 두었고 거기에 익숙해졌다.

 서울로 올라와 세 번째 집을 마련했을 때 혜화는 꼭 지금처럼 바닥에 누워 있었다. “왜 그러고 있어? 먹고 바로 누우면 체해.” 재익이 다 먹은 짜장면 그릇을 먼저 치우던 게 기억난다. “그냥.” 혜화는 버릇처럼 답했다. 천장 무늬는 처음 보는 것이었고 벽지에서는 눅눅한 냄새가 났다. 누워 있으면 열어둔 창에서 바람이 불어와 먼지가 나풀거리는 게 보였다. 모든 것이 낯설었는데 그것이 오히려 위안이 됐다. “이런 날도 오네.” 재익은 다연처럼 눈앞을 가로막지 않고 거리를 두고 앉았다. 한참 그렇게 말없이 시간을 보냈다. 재익이 훗날 얘기하기를 ‘그때처럼 누나 편안한 얼굴 본 적이 없어서’ 말 붙일 생각을 하지 못했다고 한다.

“내가 답장해? 앗. 짜장면 하나 더 시킬까?” 다연이 재촉했다.

“응응, 이라고 보내.”

혜화는 제 메신저에 ‘이응’을 다섯 개 입력하는 다연을 구경했다. 이거 다연이지? 재익의 답장이 곧바로 돌아왔다. 어떻게 알았냐고 다연이 묻자 재익이 다시 답장을 보냈다. 척하면 척이지, 하고. 먹고 싶은 거 있냐는 질문도 돌아왔다.

“엄마. 아이스크림 먹을 거야?”

“응.”

“어떤 걸로?”

“알아서 사오라고 해.”

다연이 혀를 찼다. 재익이 온다는 말에 들뜬 얼굴이었다. 혜화는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조금 더 지켜보다 다시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소리는 물론이고 냄새도 선명해졌다. 새집 냄새다. 오래된 아파트이니 진짜 새집은 아니지만, 낯선 장소의 냄새가 났다.

“엄마. 잘 거야?”

“아니.”

그리고 익숙한 다연의 냄새가 났다. 조금 더 기다리면 익숙한 사람이 하나 더 늘 것이다. 누난 나 없으면 어떡하려고 그러냐. 재익이 혀를 차면 옆에서 다연이 함께 혀를 찰 테다. 세 사람은 아이스크림을 냉장고에 넣고 짜장면을 먹는다. 아이스크림은 아마 다연과 혜화가 잘 먹는 것들일 테고. 밤이 되면 재익이 돌아가고 다연이 하품을 하고 그리고 시간이 더 오래 흐르면… 혜화는 이곳에 익숙해질 것이다. 그것을 알았다.

“그럼 좀만 더 누워 있어.”

다연이 짐짓 어른처럼 말했다. 혜화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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