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은 열려 있다.
2021. 10. 31.

https://ghorrorcollab.wixsite.com/gothichorror

with. 알렉산드르 볼코프

2021. 고딕호러 합작

연님의 갓아트도 허락받고 첨부해두었어요 ^.^ ♥


 

 

 

  "버사 씨는 맡긴 일만 하면 됩니다. 문제될 건 없습니다."

  그곳에 온 첫날, 젊은 집사가 말했다. 버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버사는 드넓은 정원을 지나 밝은 현관에 들어섰다. 빛이 쏟아진다. 3층 높이의 저택은 아주 오래되었다고 들었는데, 실내는 새집처럼 깨끗했다. 오래된 집의 흐릿한 먼지 냄새가 아니었다면 착각할 정도로.

  "잘 부탁합니다." 버사는 옷을 갈아입었다.

  사용인들은 무척 조용했다. 처음에는 늙은 후임을 따돌리는 텃세인 줄로 알았으나 며칠이 지나고 보니 이곳 특유의 분위기 탓인 것 같았다. 입이 무거운 자들을 고용하는 게 이곳의 법칙이었던 건지, 모두 말을 아꼈다. 이곳엔 사용인들끼리 모여 나누는 다과 시간도 없었다. 쉴 시간이 없는 건 아닌데도 사용인들은 서로에게 등을 돌려 각자의 공간으로 돌아갔다. 사용인들은 제각기 맡은 구역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평온하고 무료한 일과가 계속되었다. 새벽 일찍 일어나 앞치마를 두르며 안개 낀 창밖을 바라보고 있자면 꼭 거대한 침묵에 갇힌 기분이 들었다.

  버사는 이곳에 아는 사람이 일하고 있었다는 걸 뒤늦게 알게 되었다. 얼굴이 낯익었는데 이름이 기억나지 않아 통성명을 다시 했다. 그의 성은 마이어였다. 버사는 마이어와 대화를 나눌수록 그에게서 친밀한 기운을 느꼈다. 코에 박힌 점을 비롯한 마이어의 둥근 얼굴이 눈에 선하고, 말끝을 끄는 그의 버릇도 익숙했다. 그러고 보니 왜 잊고 있었을까? 그는 마이어였는데. 어렴풋이 마이어가 오래전 이곳으로 떠났던 게 기억났다. 마이어가 이곳에 있었는데, 버사는 몇 달 동안 그의 안부를 물을 생각도 하지 않았고, 이름조차 잊고 있었다.

  "미안해요. 편지 한 통 보내지 못했군요."

  그렇게 말하자 마이어는 서글픈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 표정만은 익숙하지 않아서 버사는 어색하게 입꼬리를 올렸다. 마이어가 말하길, 버사 이전에 일하던 사람은 실종되었다. 아마 금품을 들고 도망간 것 같다고 했다.

  "가끔 그런 일이 있어요…. 이곳은 넓고 자비로우니까요. 그렇게 뭣 모르고 저택의 물건을 훔쳐서 달아나는 사람들이 있죠…."

  "주인님이 상냥하신가 보군요."

  "네?"

  그 순간 갑자기 마이어가 얼굴을 돌처럼 굳혔다. 그는 꼭 제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으로 버사를 빤히 바라보았다. "그게…." 문득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복도의 모든 사용인이 그들의 대화를 듣느라 걸음을 멈춘 것 같았다. 착각이라기엔 복도가 너무 고요하다. 버사는 마이어의 눈동자에서 시선을 떼면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안 된 일이군요."

  복도에 다시 발소리가 울리고 사람들이 제각기 가까워지고 멀어진다. 마이어가 미소를 지었다.

  "네. 안 된 일이에요…."

 

 

 

 

 

 

 

 

  이곳에 오기 전 버사는 두 사람을 묻었다. 그의 가족과 다름없는 두 사람이 차례로 병마와 사고로 목숨을 잃었을 때, 버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고된 일과처럼 부고를 쓰고 장례를 치렀다. 돈이 궁한 시기였다. 버사는 두 번의 죽음 끝에 돈은 물론이요, 제 장례를 치러줄 사람도 잃었다. 일터도 잃었다. 그가 일하던 곳은 부고에도 휴가를 내주지 않았기에 버사는 일을 관둬야만 했다. 곧바로 다시 새 일을 알아보는 게 옳았을 텐데, 어쩐지 그럴 기운이 나지 않았다. 이제 무엇을 위해 돈을 벌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버사는 한동안 골방에 갇힌 것처럼 생활했다. 그러던 중 소개받은 곳이 이곳이다.

  숲에 있는 오래된 저택에 관해서는 버사도 들어본 바가 있었다. 베일에 싸인 저택. 돈을 많이 준다고 알려졌지만, 공개적으로 일손을 구한 적은 없다. 그런데도 가끔씩 그곳으로 떠나는 자들이 있었다. 다시 마을로 돌아온 사람에 대해서는 듣지 못했다. 그런 저택에는 소문이 붙을 법도 한데, 기이하게도 그곳의 얘기를 하는 사람이 없었다. 사실 버사는 일손을 제안받기 전에는 그곳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다. "기억하지?" 그러나 일손을 제안한 사람이 물었을 때, 버사는 바로 그렇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인적이 드문 골목을 지나 나오는 빽빽한 숲을 통과하면 나온다던 저택이 기억났다. 그 커다란 숲에 발 한 번 들인 적 없다는 것이 새삼스러웠으나, 문제될 일은 없었다. "그래. 거기로 갈게." 사실 어디든 상관없었다.

  버사는 죽은 자의 관 앞에 앉아 있다. 관은 아주 아름답고 재질이 튼튼했다. 버사가 평생 일해도 살 수 없을 것 같은 관이었다. 안에는 그 애가 누워 있다. 눈을 고이 감고 생전에 좋아하던 푸른 드레스를 입은 채로. 얼굴은 살아있을 적보다 창백했지만, 장의사들은 솜씨 좋게 그 애를 살아있는 사람처럼 분했다. 버사는 죽은 육신이 손상되기라도 할까 한 번 만질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애의 거친 손을 보자 마음이 저려 결국 조심스레 손을 맞잡는다. 이 아이가 귀한 집 아가씨였다면 저 자리에서 저렇게 누워 있지 않았을 텐데. 저 손으로 하고 싶은 게 많았으니 손이 고울 일은 없었더래도,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터다. 분명 그래야 했다. 적어도 버사보다는 오래 살면서 더 많은 것을 이뤄야 했다. 이렇게 빨리 저물 아이가 아니었다. 이렇게…….

  이제 뚜껑을 닫아야 합니다. 손을 놓으세요. 누군가 그렇게 말한다.

  그러나 버사는 그럴 수 없다.

  아이가 손을 놓아주지 않았다. 억지로 손을 빼려고 비틀자니 마른 거죽이 찢기기라도 할까 두려웠다. 놓아주렴. 읊조리며 손목을 약하게 비틀었으나 그럴수록 악력이 거세졌다. 죽은 자의 손은 어찌나 연약하고 거센지. 심장과 손목이 저렸다. 저릿함은 곧 혈관을 타고 올라와 팔꿈치, 어깨, 목, 머리끝까지 압박했다. 중압감에 상체가 고꾸라졌다. 그래서 버사는 제가 무엇을 보게 될지 알면서도 고개를 돌릴 수 없었다. 버사는 관에 잠기듯이 얼굴을 내렸다. 아이의 분장이 모두 화하고 핏기가 사라진 입술에서 벌레가 튀어나오는 모습을 버사는 두 눈으로 똑똑히 지켜본다. 아이의 눈동자가 버사를 응시한다.

  끓는 소리. 목 안에서 피가 끓는 것 같다.

 

 

  "버사 씨!"

  숨을 들이켜면서 버사는 고개를 들었다.

  "물을 올리고 잠드시면 어떻게 합니까."

  집사가 끓는 주전자를 든 채 버사를 내려다보고 있다. 버사는 부엌 식탁 앞에 앉아 있었다. 앉은 채로 깜빡 잠이 든 모양이다. 이곳에 온 뒤로 매일같이 반복되는 악몽이었다. "불은 제가 껐습니다." 버사의 시선을 눈치챈 집사가 주전자를 식탁 위에 올렸다.

  집사는 매우 젊은 사람이었다. 처음 면접을 볼 때, 버사는 그의 젊음에 놀랐다. 버사 역시 어린 나이에 일을 시작했지만, 그만한 나이에는 아직 한참 일을 배울 때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시일이 지나면서 차츰 그가 고택을 책임지는 게 당연하게 느껴졌다. 집사는 모든 것에 철저했다. 그는 모든 종이 정확한 시간에 정확한 횟수로 울려야 하는 사람 같았다. 쇠로 만든 종은 흔들림 없이 소리를 낸다.

  "고마워요." 버사는 식은땀을 닦았다.

  집사는 버사의 앞에 놓인 컵에 물을 따라주었다. 오래 끓인 탓에 컵에 담긴 뒤에도 작은 기포가 올라왔다. "왜 안 자고 나와 계십니까." 집사가 말했다. "그건 당신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내가 물을 깜빡하긴 했지만, 주전자는 아직 넘어지지 않았는 걸요." 버사가 말한다. 어둠 속에서 집사의 얼굴은 반쯤 가려져 한쪽 눈만 형형하게 빛난다. 낮에도 그의 얼굴은 그런 낯이긴 했다. 한쪽은 검은색, 한쪽은 파란색으로 색상이 다른 두 눈동자. 버사는 집사의 파란색 눈동자를 바라보다, 그를 공연히 기분 나쁘게 한 것일지 염려되어 시선을 먼 곳으로 돌렸다.

  "꿈을 꿨어요."

  "잠을 설치셨습니까."

  "네. …당신도 그런 모양이군요."

  집사는 답하지 않았다. 늘 과묵한 사람이긴 했지만, 버사는 이번에 그의 침묵에서 거부감을 느꼈다. 그는 무슨 이유로 잠을 설쳤을까. 잠시 의문이 떠올랐으나 집사는 질문에 답해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기포가 죽은 물컵을 눈짓으로 가리킨 뒤 등을 돌린다.

  "새로운 곳에 적응하느라 몸이 힘들어서 그러시는 겁니다. 목을 축이고 주무시길."

  곧 작은 불빛과 함께 그의 등이 점멸한다. 버사는 따뜻한 컵을 양손에 쥔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고 보니 이곳을 소개해준 자의 이름과 얼굴이 기억나지 않는다.

 

 

 

 

 

 

 

 

  버사는 수석 메이드가 되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한편으론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것 같았다. 문득 이곳을 소개받을 때 들었던 말이 기억났다. 당신이라면 금방 적응할 수 있을 거예요. 그때는 그 말이 위로로 들렸는데, 지금은 자신에 대한 조롱으로 느껴졌다. 매일같이 계속되는 악몽 때문인지, 나태함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무엇 때문인지… 버사는 자신이 이곳에 쉽게 적응하는 것이 기쁘지 않았다.

  고택의 사용인들은 나태한 일과를 보냈다. 이곳에는 새로운 일도, 특별한 일도 생기지 않는다. 그들은 그냥 드넓은 공간에 쌓인 먼지를 털고 물건의 위치를 바꾸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은 쏜살같이 흘렀다. 버사는 사용인들의 구역을 배치하면서 빈자리를 찾았다. 마이어였다.

  "마이어는 어디 있죠? 며칠 전부터 보이지 않는 군요."

  사용인들은 모두 고개를 저었다. 어떤 자들은 마이어의 이름을 처음 듣는 기색이었는데, 그건 놀랍지도 않았다. 이곳의 사용인들은 서로를 잘 모른다. 마지막으로 마이어를 본 날이 기억나지 않았다.

  "집이 늙어가는 것처럼 우리도 늙어가는 겁니다. 원래 그래요. 사는 것은 죄다…."

  연로한 사용인이 흐릿한 미소를 지으며 버사의 어깨를 두드려주고 지나갔다. 버사는 그의 말에 공감하려고 입을 열었지만, 무언가 마음에 걸려 그러지 못했다. 그리고 또 며칠 뒤, 버사는 자기의 어깨를 두드려주었던 연로한 사용인 역시 사라졌다는 걸 깨달았다. 언제부터 사람이 사라졌을까. 누구도 그들의 행방을 묻지 않는다.

  버사는 무의식 아주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문이 삐그덕거리는 소리를 들었다.

  매일 밤 꿈속에서 버사는 관을 들여다본다. 이곳에는 이상한 점이 많다. 버사는 자신이 어디로 가야 할지 알고 있었다. 버사는 아무도 언급하지 않는 곳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버사는 3층으로 올라갔다.

  문은 활짝 열려 있다.

  금색 실로 장식된 카펫 위에 그가 서 있다.

  "주인님."

  버사는 자신이 그를 불렀다는 데 놀랐다. 그러나 곧 침착하게 감정을 갈무리하기 시작했다. 놀랄 일이 아니다. 사용인이 주인을 부른 것뿐이다. 허락 없이 방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것도 아니었다.

  주인은 긴 로브를 걸친 채 등을 돌리고 있었다. 로브가 그의 몸을 완전히 감싼 탓에 버사가 있는 곳에서는 그의 머리카락 한 올, 카펫을 밟은 발가락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주인님, 버사입니다." 다시 주인을 부른 뒤 버사는 당황하여 입술을 말았다. 그는 오늘 주인을 처음 만났고, 집사는 버사에게 주인의 말을 전한 적이 없다. 그런데 어떻게 그가 수석이 되었단 말인가? 아무도 그에게 그러라고 한 적이 없는데. 버사는 자신을 설명할 말을 찾지 못했다. 주인에게 제가 하는 일도 설명하지 못하는 사용인이라니. 무수한 질문이 날카롭게 쏟아지려 드는 걸 애써 억눌렀다. 더운 날이 아니었는데도 땀이 흐르기 시작했다. 등 뒤에서 자신을 비웃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러나 사람이 들지 않는 복도는 서늘하고 주인은 말이 없다.

  "…근래에 있던 실종 사건들에 관해 말씀드리고 싶어요."

  한 마디 한 마디 내뱉을수록 모든 말이 무용하게 느껴졌다. 버사는 알았다. 주인은 신경 쓰지 않을 것이다……. "주인님?" 버사는 이미 실수하고 있었다. 그는 지금 처음 만나는 주인을 벌써 몇 번이나 부르며 재촉하고 있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다. 침이 마르고 손에 땀이 찼다. 미동 없이 자신의 부름을 무시하는 주인의 등을 멀거니 바라보던 버사는, 어느 순간, 방안으로 들어섰다. 허락은 없었다.

  "주인님. 저는…."

  이때 벌어진 일이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버사는 알지 못한다. 버사는 주인에게 아주 가까이 다가갔고, 거리를 재지 못한 발은 주인의 로브를 밟았다. 검은색 천이 미끄러지듯 바닥으로 흘러내렸다. 아니, 허물어졌다는 표현이 더 옳을 것이다. 사람의 형체가 함께 허물어졌다. 버사는 이해할 수 없었다. 검은색 천이 바닥으로 무너지고, 처음부터 그 자리에는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시야가 트였다. 버사는 주인의 방 창문에서 안쪽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정면으로 마주했다.

  아무도 없다.

  아니, 그곳에는 관이 있었다.

  기이하게도 그 관을 보자 털이 쭈뼛 서면서 땀이 식었다. 버사는 그 관을 알아보았다. 아주 매끄럽고 아름다운 관이었다. 그 위로 쏟아지는 햇빛도, 발에 부드럽게 밟히는 벨벳 카펫도 모두 익숙했다. 버사는 이제 무엇을 해야 할지 안다… ….

  정신을 차리기 직전까지 그는 악을 쓰고 있었다. 온몸을 누르는 중압감과 어둠 속에서 눈을 뜰 수 없었고 소리를 지를 수 없었으며 움직일 수 없었다. 꿈과 달리 아이를 만날 수도 없었다. 그의 곁에 있는 건 공포와 외로움뿐이었으나 그들은 너무도 비정한 동료였다. 빠져나올 방도는 없었다. 평생 썩지도 죽지도 못한 채로 어둠 속에 유예될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무력감에 모든 걸 포기하려던 순간, 눈에 차가운 것이 닿았다. 그 다음에는 입에 차가운 것이 닿는다. 그 다음에는 팔, 등. 배. 생경한 감촉에 놀라 버사는 악을 쓰기 시작했다. 온몸을 옥죄는 것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을 쳤다.

  "조용히 하세요. 버사 씨. 버사 씨?"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비로소 버사는 자신이 악을 쓰고 있다는 걸, 그럴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어둠이 걷혔다. 제 몸을 옥죄던 어둠 대신 집사가 눈과 입을 가리고 몸을 붙잡고 있었다. 그들은 반쯤 땅바닥에 넘어진 상태였다. 카펫의 감촉은 없다. 차가운 바닥. 안도와 두려움이 함께 몰려와 버사는 숨을 죽였다. 몸부림을 멈춘 대신 어깨가 긴장으로 굳는다.

  "손을 놓아드리겠습니다. 소리 지르지 마십시오."

  차다고 생각했던 집사의 손이 모두 물러가자, 버사는 그 손이 따뜻했다고 생각한다. 서늘한 공기가 닿는다. 그는 차마 눈을 뜨지 못했다.

  "버사 씨."

  그 목소리가 눈앞에서 들려온다는 걸 느끼고 천천히 눈을 떴다.

  눈앞에 사람이 있다. 복도의 창을 통해 들어오는 옅은 햇빛이 집사의 눈동자를 지나갔다. 그의 얼굴은 일그러져 있었다. 그 눈동자에 공포와 염려가 있다는 걸, 사람의 감정이 있다는 걸 알아본 버사는 눈물이 났다. 이해할 수 있는 세계가 눈앞에 있다는 사실이 버사를 울게 했다. 그도 알아주었으면 했다.

  "봤나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집사는 시선을 피했다.

  "당신은 집사잖아요. 분명 여기에 왔을 거예요. 그리고…."

  "본 적 없습니다."

  내리 깐 눈동자. 집사의 말은 진실이었다. 버사는 차가운 쇠 종을 제 시간마다 울리던 집사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래서 당신이… 그렇게 젊은 나이에…." 버사는 그가 이곳의 집사인 이유를 깨닫는다. 가장 가까운 위치에서, 먼저 주인의 얼굴을 들여다볼 생각 따윈 하지 않는 충직함이 그를 이곳에 앉혔다. 제가 머무는 곳을 모두 알아야 했던 늙은 메이드가 수석이 된 것처럼. 그들은 자기 자리를 찾았다. 버사는 집사의 내리 깐 눈동자에서 닮은 얼굴을 떠올린다. 그건 죽은 아이의 얼굴이다. 어린 버사의 얼굴이다. 죽음에게 패배하고 삶의 중압감에 짓눌린 자들의 얼굴, 버사가 아는 모든 인간의 얼굴이다. 버사는 떨리는 손을 들어 젊은이의 얼굴을 만졌다.

  "당신은 너무 젊어요. 이렇게나 젊은데… 꼭 이곳에서 평생을 살아온 노인 같군요."

  선뜩한 절망과 안도 속에서 버사는 이곳으로 온 뒤 처음으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입에 담았다.

  "그러면 안 돼요, 안톤."

  자신을 부르는 목소리에 안토니오가 눈을 들었다.

 

 

 

 

 

 

 

 

 

 

 

 

  버사는 복도를 청소한다는 빌미로 3층에 들르기 시작했다. 아주 가끔 그곳으로 올라오는 사용인들이 생긴다는 걸 그제야 알게 되었다. 3층에 딱 하나 있는 그 방, 주인의 방은 한결같이 열려 있다. 그곳엔 늘 무언가가 로브를 두르고 서 있다. 버사는 그 방에 있는 관을 열고 싶은 충동을 매일같이 억누르느라 애써야 했다. 그때, 어둠 속에서 잡아준 사람이 없었더라면… …. 버사는 3층으로 올라오는 사용인들을 내려 보냈다. 안토니오가 3층으로 올라오기도 했다. 그는 매일 주인의 방 앞에서 일과를 보고하곤 했는데, 주인이 거기에 대답하는 일은 없었다.

  어느 날 3층 복도에 의자가 생겼다. 물어보니 집사가 가져다 둔 것이라 했다.

  "당신이 앉아있을 게 아니라면 이건 치울게요."

  "왜죠? 굳이 치울 이유가 없습니다."

  안토니오가 이해되지 않는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버사는 열린 문을 흘긋 보았다.

  "앉을 수 있다면, 나는 더 오랜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겠죠. …난 자신이 없어요."

  안토니오의 턱에 힘이 들어갔다.

  "무슨 뜻입니까?"

  "당신은 무슨 의미인지 알 거예요."

  안토니오는 대답하지 않았지만, 다음날 의자는 사라졌다.

  버사는 안토니오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그들은 한낮의 3층에서 눈인사하고, 새벽의 부엌에서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안토니오는 말수가 적었지만 버사는 그의 이름이 보육원에서 받은 세례명임을 들었고, 그가 안정적인 직업을 얼마나 바랐는지도 알게 되었다.

  "이만큼 오래 절 받아준 곳은 처음입니다."

  "하지만… 안톤. 받아주었다고 할 수 있는 건가요? 우린 그저…."

  버사가 이어질 말의 첫음절을 뱉는 순간 접시가 바닥에 떨어져 깨졌다. 요란한 소리에 둘 다 어깨를 움츠린다. "죄송합니다. 다치지는 않으셨습니까?" 안토니오는 화를 내야 할 지 걱정해야 할 지 갈피를 못 잡는 것 같았다. 그답지 않은 실수다. "괜찮아요." 버사는 깨진 접시를 치우려고 움직였으나 안토니오가 가로막았다. "제가 하겠습니다." 버사는 그 목소리에서 그들이 처음 부엌에서 마주쳤을 때 느꼈던 것을 다시 느낀다. 그러나 이번에는 힘이 과하게 들어갔다. 그간 그들은 조금은 가까워졌다. 버사는 이제 그가 연약한 살을 의식할 때마다 철과 쇠로 만든 갑옷을 두른다는 것을 알고 있다.

  버사는 기다리기로 했다. 안토니오는 하루도 빠짐없이 주인의 방으로 가 보고를 올렸고, 닫히지 않은 문밖에는 버사가 있었다. 그들은 한낮의 3층에서 눈인사했고, 새벽의 부엌에서 작은 소리로 대화를 나눴다.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버사는 이전보다 밤이 두렵지 않았다.

 

 

  그러나 이야기는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그날은 여느 날처럼 부엌에서 따뜻한 차를 마시고 안토니오와 대화를 나누고 방으로 돌아가는 길이었다. 버사는 미끄러질 뻔했다. 등을 밑으로 내려보니, 바닥에 물이 떨어져 있었다. 그것은 아주 천천히 옆으로 흐르고 있었다. 버사는 물이 어디서 쏟아졌는지 확인하기 위해 벽을 짚으며 거슬러 올라갔다. 발이 보였다. 맨발이었다. 꿈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릿한 감각이 혈류를 타고 머리끝까지 올라갔다. 목 뒤에 소름이 돋았다. 버사는 조심스럽게 한 발을 내디뎠고, 물컹한 것을 밟아 넘어졌다. 저도 모르게 억, 소리가 났다. 그가 밟은 것은 사람이었다. 버사는 등불을 놓쳤고, 누워있는 사람의 몸 위로 작은 불씨가 옮겨붙는다. 비명을 지르고 싶었다. 버사는 불을 끄기 위해 온몸을 썼다. 억눌린 흐느낌이 새어 나갔다. 버사가 천을 펄럭이고 몸을 짓누르는데도 누워있는 사람은 깨어나지 않았다. 처음부터 깬 적 없는 사람처럼 조용했다. 불은 금세 꺼졌지만, 버사는 울음을 멈출 수 없었다.

  안토니오가 복도의 모든 등불을 밝혔다.

 

 

 

 

 

 

 

 

 

 

  버사는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손에 묻은 액체에서 혈 향이 났고, 누워있는 사용인의 손에는 칼이 들려 있었다. 방에서부터 핏자국이 이어진 걸 보면 자상을 입은 채 밖으로 나온 모양이었다. 안토니오는 시체와 방을 차례로 확인하고 버사의 곁으로 돌아왔다. 그는 한동안 침묵했다. "자살인 것 같습니다." 고통이 그들을 꿰뚫고 지나갔다. 버사는 어떤 말을 읊조리기 시작했다. 안토니오는 끼어들지 않았다. 버사의 목소리는 점점 커졌고, 언젠가부터 그는 소리치고 있었다. 목소리를 줄일 생각은 없었다. 차라리 모두 일어났으면 했다. 왜 사람이 이렇게 죽어야 하는지, 왜 사라지는 사람을 두 손 놓고 바라봐야 하는지, 왜, 아무도 이곳을 나가지 않는 건지… ….

  이곳의 사람들은 매일 밤 악몽을 꾼다. 아무도 꿈의 내용을 알려주지 않았지만, 버사는 잠 못 들고 복도를 서성이거나 이불을 뒤척이는 이들을 여러 번 봤다. 버사의 꿈은 늘 3층의 그 방에서, 관 앞에서 끝난다. 3층으로 올라오는 이들이 있다는 걸 알게 된 이후로 버사는 다른 이들의 꿈 역시 그 방으로 이어지리라 생각했다. 로브로 몸을 꽁꽁 가린 주인이 서 있는, 모두에게 활짝 열린 방.

  그러나 이곳에는 주인이 없다. 단지 스스로 집에 묶인 가여운 사람만이 존재할 뿐이다. 버사는 사람들의 이름을 자꾸만 잊는다.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서로에게 관심이 없다. 그들의 얼굴은 서로를 닮았다. 그건 죽은 아이의 얼굴이다. 어린 버사의 얼굴이다. 죽음에게 패배하고 삶의 중압감에 짓눌린 자들의 얼굴, 버사가 아는 모든 인간의 얼굴이다. 서로를, 자신을, 삶을 궁금해하지 않는 사람들의 얼굴이다.

  "제발…. 나가겠다고 해요."

  안토니오는 또다시 미간을 좁히고 있었는데, 이번에는 그 얼굴이 두려운 사람의 것으로 보였다. 그걸 놓치기 싫어 버사는 그의 손을 꽉 붙잡았다.

  "당신도 살고 싶잖아요."

  안토니오는 이번에 답했다.

 

 

 

 

 

 

 

 

 

 

 

  숲에서부터 그들은 달리기 시작했다. 아무도 쫓아오지 않을 것을 알았음에도 쫓기는 기분이 들었다. 절박함과 두려움, 죄책감이 온몸을 붙잡았다. 그들은 혼자가 아니었으나 단둘이었다. 숨이 턱 밑까지 차서 그대로 죽을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집에서 죽는 것이 아니라면, 적어도 육신은 지상에 남으리라. 버사는 그 사실을 위안으로 삼아 달렸다. 숲을 빠져나온 뒤로도 그들은 마차를 잡을 생각도 할 수 없었다. 어두운 골목을 지나며 벽에 부딪혔다. 그래도 멈추지 않았다. 이윽고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대로변까지 나왔을 때 그들은 코앞을 달려가는 마차 때문에 뒤로 넘어졌다. 마부가 욕을 쏟으며 지나갔다.

  버사는 그때까지 안토니오의 손을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닫는다. 아마 안토니오도 마찬가지였을 터다. 누구의 것인지 모를, 손을 붙잡은 그 힘이 그들을 함께 넘어지게 했다. 그들은 숨을 몰아쉬고 기침한다. 새벽의 찬 공기를 급하게 폐에 불어넣는다.

  버사는 꿈속의 손아귀를 떠올린다. 그 집, 그 방, 그 관 안에서 자신을 끌어내리던 것의 정체를 떠올려본다. 그 손이 버사를 죽음으로 끌고 들어갔고, 안토니오의 손이 버사를 집으로 돌아오게 했다. 버사와 안토니오는 손을 잡고 밖으로 나왔다. 그들은 삶으로 돌아간다. 버사는 잡은 손의 온기를 의식했다. 안토니오도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그들은 완전한 남남이었다.

  혹은, 그렇게 되지 않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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