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아나스 퓨리
아무개를 아시는지.
아무개는 선장 잭 클라크고 대영제국의 왕이며 변덕이 죽처럼 들끓고 심장은 파도와 같다. 아무개는 아름답고 고결한 것을 바라보지만 앞서 말했듯 변덕이 죽처럼 끓기 때문에 그가 진정 그것을 바라보는지는 확신할 수 없다. 아무개는 제 손과 귀를 유쾌한 말과 활자에 푹 고아 담근다. 아무개는 이야기를 짓고 가십을 줍는다. 아무개는 비밀스럽다.
아무개는 선장도 왕도 신도 될 수 있으나 아무것도 아니며 아무개만 될 수 있다.
아무개는 누구인가?
아무개와 서신을 주고받은 지도 어언…… 며칠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법 시간이 흘렀다. 조난자들의 불안을 좀먹으며 선박은 나날이 진한 바닷냄새를 풍겼고, 서신에도 소금 짠 내가 묻기 시작했다. 아틸라스가 모습을 나타낸 후로 익명의 뒤에 숨는 자들이 더 많아졌는데, 프랭키도 그중 한 명이었다. 엘렌에게 농담한 것처럼 '사랑이 적힌 종이' 따위를 주고받은 것은 아니다. 사랑 이야기를 적은 종이는 있지만……. 프랭키는 아무개에게 보내기 전 연습차 적었던 정령과 인간의 실패한 사랑을 불에 태웠다.
사실 아무개는 아무개'들'이라는 의미다. 그간 니케 호 안에서 오간 익명의 서신들을 모두 모으면 선실 하나를 꽉 채우고도 남을 터다.
하지만 아무개 A와 아무개 B 사이에는 분명히 차이점이 있다.
니케 호의 많은 조난자가 그렇듯 프랭키도 아무개들 사이에서 아무개 A와 아무개 B를 구분할 줄 알았다. 어떤 아무개는 종이와 활자 사이에서 자신을 드러냈다(어쩌면 프랭키 역시 티 나는 아무개일지도 모른다). 물론 그게 아무개의 페르소나일 가능성도 적지 않으나, 어쨌든 그 아무개가 저 아무개와 다르다는 건 알 수 있으니 아무개들은 그러려니 서신에 새 잉크를 버렸다. 프랭키는 네이지에게 이 섬에서 사업을 시작한다면 잉크부터 후보군에 올리는 게 좋을 거라고 말하는 상상을 한다. 조난된 선박 안에서 가장 먼저 떨어지는 건 잉크가 될 터다.
프랭키가 가장 자주, 그리고 오래 서신을 주고받은 아무개는 웃긴 놈이었다.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역할극 따위를 했기 때문에 프랭키는 아무개에 관해서 확신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단 하나, 우습거나 유쾌하거나 쓸데없는 말을 즐기는 아무개가 그 아무개라는 사실은 알았다. 프랭키가 아는 아무개 중 가장 아무것도 아닌 아무개.
그러니까 프랭키는 아무개를 알아봤다.
"그러니까 요약하자면 큰 죄를 지은 이후 그간의 업보를 상쇄하기 위해 해군인 채로 백 년은 살았고 그 이전엔 해신으로서 바다를 다스렸으며 현재로 와서는 정체를 숨기기 위해 한 귀족가의 불길한 하인으로 살고 있다는 거지. 이 장식은 대략 천여 년간 가지고 있던 거고."
"꽤 길었는데 잘 이해했군. 그 외 보충 설명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친히 도와주지."
아나스 퓨리가 그의 긴긴 거짓 생에 관해 떠든 덕분에 프랭키 안에서는 아나스 퓨리에 대한 인상이 대폭 수정되었음은 물론이요, 아무개에게 답신을 보내면서 아름다운 어떤 자를 떠올리게 되었다. 물론 티를 내지는 않았다. 여하튼 제 이름을 알면서도 뻔뻔스럽게 모르는 체하는 익명의 그놈에게 아는 척을 해봤자 좋은 일(이를테면 아무개가 좋아하는 유쾌한 전개)은 일어나지 않을 테니까.
"아, 그대에게만 비밀스레 알려주는 거니까 되도록이면 타인의 귀에 들어가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프랭키는 뻔뻔한 아나스 아무개 퓨리의 낯을 보고 입술을 씰룩거리며 웃었다.
"그래…. 이 장식과 그쪽에 관해 궁금해하는 사람이 천지에 널려 있지만, 왠지 떠벌리고 다녔다가는 나에게도 불길한 운명이 다가올 것 같아서 말이야…. 약속은 지키도록 하지."
프랭키는 독수리 장식을 허공에 높이 띄웠다가 받는다.
"어쨌든 이제 이건 내 거니까."
프랭키에게는 새로운 습관이 하나 생겼다. 머릿속이 어지럽거나 일이 잘 안 풀릴 때 작은 독수리를 손안에서 굴리거나 던지고 받는다. 아나스 아무개 퓨리에 의하면 대략 천여 년간 그가 갖고 있었다는, 귀족가의 아름답고 불길한 하인의 블라우스를 장식하던 황동 독수리는 이제 프랭키의 손이나 주머니 안에서 굴러가는 신세가 되었다. 아틸라스와 만난 뒤 부쩍 객실에서 보내는 시간이 늘었던지라 프랭키가 독수리를 만지는 일도 늘었다. 그에겐 해결해야 할 일이 있었다. 인어의 이야기. 마리아였다면 이런 상황에 고작 소설 나부랭이를 쓰겠다고 방에 처박히냐며 화를 냈겠지만, 별수 없었다. 프랭키는 제 안에서 어지럽게 물결치던 의문과 감정을 이 섬에서 놓쳐버리면 안 된다는 걸 직감했다. 운명! 프랭키 서튼이 외치던 운명의 갈림길이 눈앞에 놓여 있다. 프랭키는 많은 시간을 소설을 쓰는 데 할애했고, 일이 잘 안 풀리면 공연히 남에게 심술을 부리거나 아무개들과 서신을 주고받았다.
난 원래 변덕이 있는 편입니다. 한참 생각해 본 결과 아름답든 덜 되었든 유쾌한 쪽이 자주 마음이 가는 듯한데.
유쾌한 걸 좋아하는 아무개가 떠오른 건 졸다가 종이 한 장을 잉크 범벅으로 만든 뒤였다. 프랭키는 발을 앞으로 차면서 일어났다. 잉크 범벅이 된 종이를 붙잡고 고함을 지르다가 바닥을 내려다보면, 힘없이 고꾸라진 포댓자루가 보인다. 그의 객실에 방문했던 자들은 그걸 내다 버리라고 질색했다. 그야 구멍이 세 개 뚫린 것 말고는 쓰잘머리 없이 비린내만 풍기는 빈 포댓자루를 일등실 안에 모셔둘 이유가 무어란 말인가.
그건 아무개가 준 포댓자루였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선장에게 아사하게 생겼다고 먹을 것이나 좀 내놓으라 해보는 건 어떤지.
이미 해봤어요. 안 믿던데. 협박하는 법을 알고 있습니까?
다짜고짜 멱살을 잡아보는 걸 추천합니다.
...
복면은 아직까지 안 써봤군.
효과는 좋지 않았습니다.
그런 종이 복면을 쓰니까 그렇지.
…
하여튼 쓸데없는 농담 따먹기 끝에 받아낸 것이었는데, 아무개의 말대로 프랭키는 조금 너덜너덜하고 덜된 것에 마음이 가기 때문에 버리지 못하는지도 모른다(모든 것을 쌓아두는 성격이다).
프랭키는 테이블 위에 놓인 독수리 장식을 바라보다가 새 종이를 꺼냈다. 예비 종이도 필요치 않았다. 프랭키는 막힘 없이 글을 써 내려갔고, 잉크가 마른 종이를 봉투에 넣는다. 발신자도 수신자도 없지만, 이 서신은 아나스 퓨리의 객실로 들어갈 예정이다. 답신이 온다면 아무개, 혹은 퓨리에게 올 것이고, 답신이 오지 않는다면 아무개가 먹어 치우거나 퓨리가 태운 걸지도 모른다(극적인 상상이다). 결국 아나스 아무개 퓨리와 서신을 주고받는 프랭키 아무개 프랭키 역시 삶에 유쾌함이 부족한 무료한 아무개이므로, 쓸데없는 서신을 잘도 쓴 뒤 전송한다.
프랭키 아무개 프랭키의 이번 서신은 이렇게 시작한다.
아무개를 아시는지.
#20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