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틸라스의 아이들
2021. 11. 26.

 

Edmund Dulac _ The Mermaid Pl 3 (1911) / 후가공

 

 

 

  나는 진주알 속에서 태어났다.

  눈을 뜨자 모래가 사방으로 흩어지고 진주가 얼굴에 부딪혔다. 바다는 군청빛이었다. 느리게 부유하는 군청색 물. 그 속에서 나는 나를 향해 팔을 벌린 인어의 고통으로 일그러진 얼굴을 보았다. 그가 바다를 군청색으로 물들이며 눈에서 진주를 흘리고 있었다. 내가 두 눈을 크게 뜨고 있는 동안 그는 나에게서 점점 더 멀어졌다. 포식자는 인정사정없이 인어를 데리고 갔다. 그가 지나간 자리로 군청색 피와 진주가 흔적처럼 남았다.

  그가 날 낳았을까? 하지만 나는 포식자에게 덤벼들 용기를 낼 만큼 그를 알지 못했고, 세상을 알지 못했다. 나는 막 태어난 인어에 불과했다. 내가 아는 것이라곤 단 하나. 나보다 강하며 그 인어보다도 나를 사랑해줄 존재였다. 모든 인어가 그렇듯 나는 나의 혈류를 타고 흐르는 군청색 피의 주인을, 내가 태어난 곳이자 앞으로 살아갈 바다의 주인을 느꼈다.

  해신이시여, 그대 나의 태동을 기억하듯 나 또한 그대가 점지어준 이름을 기억하나이다.

  나는 홀로 남았으나 혼자가 아니었으니 외롭지 않았다.

 

 

 

 

 


 

 

 

 

 

  나는 떠돌이 인어들 사이에서 자랐다. 누군가는 우리를 '가족이 없는 애들'이라고 불렀지만, 그건 사실이 아니다. "우린 전부 아틸라스의 아이들이니 한 가족이지." 우리는 그렇게 말했고 그렇게 생각했다. 우리는 서로 닮지 않았지만 닮았다. 사실 모든 인어가 곧 아틸라스의 아이들이라, 나는 스쳐 지나가는 모든 인어에게 미약한 유대감을 지니고 있었다. 다른 많은 생물이 그렇듯 우리에게도 우리만의 소통 수단이 있었다. 우리는 멀리서 서로를 알아보았고, 입을 열지 않고도 의사를 전달할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길을 잃지 않았다. 그래도 부러 입을 열어 목소리를 낼 때가 있었다. 인간의 언어를 능숙하게 하는 인어에게 언어를 배웠다.

  "왜 나는 프랭키고 너는 세스투나?"

  "그야 난 세스투나고 넌 프랭키. 뭐가?"

  "그러니까 왜? 다르잖아?"

  "너랑 내가 같냐?"

  "아니! 왜?"

  "그냥 살아!"

  세스투나는 나보다 열 살 정도 더 먹은 또래였는데, 만사를 귀찮아했다. 나는 인간의 언어로 이상한 말을 하며 세스투나를 종종 괴롭혔다. (진짜로 못살게 군 건 아니다.)

  "프랭키. 아틸라스께서 주신 이름이다. 그거면 족해."

  재클린이 세스투나와 내 머리를 꾹 눌렀다. 재클린은 우리들의 대장이고, 장난스럽지만 진중한 성격이었다. 재클린에게는 내가 백 마디 질문하면 한 마디로 입을 다물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넌 궁금한 게 참 많구나, 프랭키. 나무라는 건 아니지만 우리의 어버이가 누구인지 기억하렴."

  "기억해."

  지금 생각해보면, 글쎄, 재클린은 나 같은 놈들이 어떤 곳으로 헤엄치는지 알고 있었을 거다.

  나는 궁금한 게 많았다. 그게 항상 문제였다.

 

 

 

 

 

 

  모든 생물은 자신의 약점을 보완하고 강점을 응용하여 드넓은 생태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쓴다. 이를테면 해파리. 해파리는 아주 연약해 보이는 몸을 갖고 있는데, 그게 해파리를 물속에 떠 있을 수 있게 돕는다. 해파리는 꼭 인간들이 크리스마스에 울리는 종을 닮았다. 해파리는 몸을 벌렸다가 오므리면서 헤엄친다. 적당한 위치에서 몸을 멈추면, 이제 천천히 부유하며 가라앉는다. 식사 시간이다. 해파리는 부유하면서 자기한테 걸려드는 작은 동물들에게 독을 쏜 다음 잡아먹는다. 넓게 부푼 몸체 안에 추, 아니, 입을 숨긴 채다. 오로라가 아름답다고 했던 해파리를 통해 일어나는 느리고 아름다운 생태계의 순환이다. 뭐, 그 모습을 가까이에서 관찰한다면 오로라의 생각이 바뀔지도 모르겠지만……. 오로라의 환상을 깨트릴 생각은 없다. 행복과 환상을 절박하게 꿈꾸는 자들이 있다는 걸, 때로는 그게 존재를 겨우 지탱한다는 걸 아니까.

  우리, 인어는 특별한 종이었다. 포식자에게 대항하거나 몸을 숨길 좋은 방도를 가진 것도 아니고, 헤엄치는 속도도 빠른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우리는 쉽게 잡아먹히지 않았고 바다를 자유롭게 유영했다. 많은 생물은 우리를 위협적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그들이 먼저 우리 앞에 몸을 숨길지언정 우리가 몸을 숨길 필요가 없었다는 뜻이다. 우리는 똑똑했고, 입을 벌리지 않고도 멀리서 소통할 수 있었다. 우리는 도구를 쓸 줄 알았고, 대를 이어 지식을 전할 줄 알았다. 누군가 위험에 처하면 우리는 그곳으로 헤엄치며 몸을 어떻게 피할지 이르고 도구를 가져와 동료를 도왔다. 우리는 다른 생물들의 약점을 파고들었다. (해양생물 연구는 분명 인어들의 도움으로 발전했을 것이다.) 아틸라스를 경배하는 것처럼 아틸라스에게 사랑받는 우리의 존재를 특별하게 생각하는 동족들이 있었다. 나 역시 그게 특별하다는 걸 자각하지도 못한 채로 그런 생각에 물들어 있었다. 우리는 아틸라스의 아이들이 아닌가.

  우리는 신의 권위를 알았다. 신에게서 비롯된 것에 의문을 가지는 것은 옳지 않다. 그러나 내게는 해소되지 않는 궁금증이 있었다. 내 몸의 반쪽에 관한 것이었다. 내게 인간과 인어는 뭍으로 나가기 전부터 불가분의 관계였다. 나는 많은 동족이 육지로 올라가기 위해 아틸라스와 약속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신께 허락도 구하지 않고 우리를 발견한 인간들이 벌을 받는다는 것도 알았다. 나는 그들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필 운 나쁘게 우리의 바다에 떨어져서 운 나쁘게 우리를 발견한 인간들의 최후를.

  왜?

  나는 수면에 너울거리는 햇빛과 물그림자를 보며 자주 궁금해했다. 왜 우리는 밖으로 나가는 걸까? 왜 우리는 바다에서 태어났는데도 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걸까? 왜 우리 몸의 절반은 인간인 걸까? 왜 인간들은 우리를 보면 죽는 걸까? 왜 우리는 뭍으로 올라가기 위해 약속하는 걸까?

  재클린은 그게 아틸라스의 사랑을 받는 존재로서 타고난 축복이라고 말했다. 해신께서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이며, 해신께서 우리에게 더 많은 세상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하고 싶은 질문의 반의반의 반만 말했는데도 재클린은 내게 적당히 하라고 말했다. 더 말하면 아주 큰일 나겠구만. 큰일나겠어. 아주 까무러치겠구만. 나는 자주 구시렁거렸다.

  사실 내게는 질문만큼 불만도 많았다. 질문이 생길수록 불만이 따라왔다. 나는 가오리의 독을 갖고 있었으나 가오리만큼 자유롭게 헤엄치지 못했다. 나의 상체는 지느러미가 감당하기에 무거웠다. 가오리들이 매끄럽게 몸을 펄럭이며 헤엄치는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그들이 부러워지기도 했다. 가끔 나는 바다가 내게 조금만 더 가벼웠다면, 지느러미가 조금만 더 넓었다면, 내 인간 몸이 조금만 줄어든다면, 하고 바랐다.

  말을 배워서 좋은 점은, 다른 인어들이 알지 못하게 소통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실 재클린이 누군가를 찾고 있는 것 같다고 세스투나가 귓속말로 말해 준 적이 있다. 재클린의 파트너는 뭍으로 나간 뒤 돌아오지 않았다. 내가 그 얘길 꺼내자 재클린은 한참 내 눈을 바라보다가 답을 피했다.

 

 

 

 

 

 

  헤엄치고 또 헤엄치다 보면 육지와 가까운 곳에 다다르기도 한다.

  성년을 앞둔 어느 날, 나는 섬에 고개를 내밀었다.

  인간과 눈이 마주쳤다.

  나는 그 인간이 소문 속에서 그랬듯이 끔찍하게 죽을 것을 예감하고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 인간은 죽지 않았다.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게슴츠레 눈을 떴다. 그 인간은 지팡이를 짚은 채 내 쪽으로 걸어오고 있었다.

  "누구세요?" 아뿔싸. 그 인간은 앞을 볼 줄 몰랐다.

  "프랭키." 나는 기회라고 생각했다.

  아, 멍청하긴.

  이어질 이야기는 누구나 예상할 수 있을 만큼 뻔하다. 인간은 생각보다 똑똑했고, 너무 똑똑해서 내가 자신과 다르다는 걸 알아차렸으며, 나는 뭍으로 올라가지도 않았는데 빨간 피를 봐야 했다. 신의 목소리가 귀에 웅웅거리며 울리는 것 같았다. 파도가 치고 바다는 순식간에 나를 밑으로 끌어내렸다.

  나는 멈추지 않고 계속 울었다. 내 호기심이 한 인간을 죽였다. 나는 뭍으로 올라갈 수 없다. 나를 끌어내리는 바다, 아틸라스의 목소리가 그렇게 말하는 것 같았다. 나는 아주 슬펐고, 또…… 그때는 알지 못했지만 사실 화가 났다. 인어들은 나를 달래는 자와 훈수를 두는 자로 나뉘었다. 그러게 그렇게 될 줄 알았다, 조심 좀 하지 그랬냐, 앞으로는 저러는 일이 없을 테니 됐다, 액땜한 셈 쳐라.

  죽은 건 내가 아닌데 무슨 액땜이야!!! 나는 감각을 날카롭게 벼렸다. 인간으로 치자면 귀가 찢어질 것 같은 비명에 가까웠다. 나를 둘러싼 인어들이 인상을 찌푸렸다. 머리 아파. 시끄러워. 그만 해. 됐어. 올라갈거야. 잠깐, 뭐라고?

  "올라갈래."

  나는 뭍으로 올라가겠다고 말했다. 그때 우리가 어떤 대화를 나눴는지 이제는 잘 기억나지 않는다. 비웃음, 조롱, 걱정, 염려, 분노, 원망, 사랑, 그리고 눈물. 너 이제 가면 다신 못 돌아올 거야! 우리도 다신 못 볼 거라고! 나는 귀를 막고 눈을 감았다. 몇몇 인어들, 어쩌면 세스투나가 내 몸을 붙잡아 내렸다. 가지 마. 후회할거야! 프랭키! 나는 약한 독을 담은 꼬리를 흉기처럼 휘둘렀다. 나를 붙잡는 이들의 외침을 듣기 싫어 감각을 차단했다. 마지막으로 내려다본 바다는 진주가 가득했다.

 

 

 

 

 


 

 

 

 

 

  처음 뭍으로 나왔던 순간을 잊지 못한다.

  땅 위는 추웠다. 한 번 호흡할 때마다 차가운 바람이 폐를 얼어붙게 만들고, 물기가 말라붙기 시작하는 몸은 왜인지 수치스럽게 느껴졌다. 햇빛은 어지럽고 모래는 찐득거렸다. 내 눈에서는 진주 대신 물이 떨어졌다. 나는 꼭 물속에 있는 것 같았다. 모래가 일고 거품이 올라올 때처럼 눈앞이 뿌옇다. 모래 위로 빨간색 피가 흩뿌려져 있다. 시체는 없었다. 바다가 저 먼 곳으로 끌고 내려갔겠지. 빌어먹을.

  모래사장에는 내 눈이 아직 물을 흘리기 전까지 흘렸던 진주들이 조금 딸려 나와 있었다. 나는 울면서 그것들을 그러모았다. 나는 길을 떠나기도 전에 수십 번 넘어졌다. 수백 번 나의 결정을 후회했다. 지상의 공기는 지나치게 가볍고, 인간의 다리는 내 꼬리보다도 연약했다. 신이 없는 육지란 이런 걸까?

  그러나 신을 잊을 수는 없었다. 모든 인어가 그렇듯 나는 나의 혈류를 타고 흐르는 군청색 피의 주인을, 내가 태어난 곳이자 떠나온 바다의 주인을 느꼈다. 등 뒤로 서늘하고 무거운 파도가 치는 것 같았다. 나는 홀로 남았으나 혼자가 아니었으니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마른 몸에 쏟아지는 햇빛이 이곳이 내 자리가 아니라고 상기하는 것처럼 뜨거웠다. 나는 비틀거리면서 걸었다. 이상하게도 도망치는 기분이 들었다. 앞으로 이어질 평생이 그랬다.

  그야, 나는 아틸라스의 아이가 아닌가.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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