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툰 유대
2021. 11. 26.

Heritage Library (후가공)

 

 

with. 네이지 오테로, 한나 티어니, 로건 루이스

 

 

 

  더러워진 갑판 위, 줄로 칭칭 감긴 선장이 의자에 앉아 고개를 든다. 머리카락은 햇빛을 받아 더 하얗게 보인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고요한 눈동자. 굳게 다물린 입술. 멀리서도 그의 몸에 피가 묻어있다는 게 보인다.

  묵직한 어깨가 선장의 얼굴을 가린다. 톰 웨슬리다. 눈치 빠른 상인이 위를 돌아보기 전에 프랭키는 커튼 뒤로 몸을 숨긴다. 옆에 놓인 물을 벌컥 들이마시고 방문까지 빠르게 걸었다.

  "그러니까, 저 꼴을 보고서도 가만히 있으란 말이지."

  문 앞에는 네이지 오테로가 서 있다. 그는 침착하다 못해 차갑게 느껴지는 표정으로 프랭키의 얼굴을 올려다봤다. 흥분으로 붉게 물든 얼굴이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갈 것 같다. 네이지는 케인으로 발 앞 땅을 디딘다. 쿵. 카펫에 먹힌 소리가 작게 울렸다.

  "폭탄이 있다는 걸 잊지 말아요, 프랭키."

  "알고 있어. 그래도…."

  네이지가 프랭키의 어깨 뒤로 난장판이 된 방을 보았다. 프랭키는 그의 시선을 가로막듯 팔로 방문을 짚고 네이지의 케인을 발로 건드린다.

  "당신이 그걸 어떻게 쓰려고 하는지 봤어, 네이지."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치면 네이지는 침묵한다.

  "더 큰 사고가 벌어지기 전에 막아야죠, 프랭키.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에요."

  네이지의 뒤에서 들리는 인기척에 프랭키가 시선을 든다. 메리와 재스퍼가 숨죽여 복도를 걷다 프랭키와 눈이 마주치고 머쓱하게 인사했다. 각자 볼이며 턱에 검은 것을 묻히고 있다. 심기가 불편한 프랭키는 건성으로 인사하고 눈동자를 굴렸다. 네이지는 뛰어난 사업가답게 어느 타이밍에 치고 들어가야 할지를 안다. 등 뒤로 두 사람이 멀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네이지가 조용히 읊조렸다.

  "선내의 화약들을 찾고 있어요. 항해사가 깨나 약 오를 일도 있었고요. 지금쯤이면 그 사람, 눈에 불을 켰을 거예요."

  "무슨 일?"

  프랭키가 호기심에 고개를 기울이면, 네이지는 답하는 대신 가볍게 미소 짓는다.

  "아무에게나 알려줄 순 없죠. 동참할 거라면, 내가 도울게요. …서신이 많이 쌓였네요?"

  네이지는 케인으로 방문 앞에 놓인 종이봉투들을 짚어 방 안으로 밀어 넣는다. 일단 정신 차리세요. 말하지 않아도 네이지의 의중을 알아들은 프랭키가 툴툴거린다. "펍에 있을 거야?" "글쎄요." 프랭키가 얌전해진 걸 확인한 네이지는 제가 할 일을 찾아 다시 걸음을 옮긴다. 케인을 짚은 사업가의 뒷모습은 무너질 일 없이 곧다. 혼자 남은 프랭키는 침대에 앉아 밀린 서신들을 읽었다. 폭탄이 있다는 말에 한차례 뒤엎은 방은 지금까지 중 가장 더러운 꼴이었다. 익숙한 필체와 익숙한 아무개들의 서신 사이에서 프랭키는 이질적인 것 하나를 발견해낸다.

 

  구운 대구 요리 레시피.¹

  요리를 완벽하게 완성하는 건 계량에 달려 있다. 숫자와 단위가 중요하며, 바로 뒤의 내용도 주의 깊게 읽어야 한다.

  여담으로, 밀라 아주머니는 요리를 하다 항상 뒤를 돌아보는 습관이 있다. 쥐가 들락일까 신경 쓰는 눈치다. 특히 빈 상자 건너를 잘 봐야 한다나.

  ….

 

  이어지는 건 익명의 말대로 구운 대구 레시피다. 필체는 낯설었다. 내용을 이해했다면 행동으로 보이도록 하자. 알아보기 힘든 마지막 문장을 읊조리며 프랭키는 독수리 장식을 손안에서 굴린다. 셔츠 단추를 잠그고, 머리를 모아 묶는다. 한층 느릿해진 걸음으로 주변을 살피며 프랭키는 밀라 아주머니 몰래 조리실로 향했다.

  이것이 인질극에 대응하여 프랭키가 보인 첫 번째 행동이다.

 

 

 

 

 

 

  우리들의 요구는 간단하다. 인어 몇 마리와 선원 몇 명만 태워 일주일 내로 배를 띄울 것!

  목숨이 아까우면 알아서 기는 게 좋을 거다. 각 객실마다 폭탄을 설치해두었으니까.

  선장을 인질로 붙잡은 항해사와 상인 일당이 갑판에서 선포한 건 며칠 전 밤이었다. 무언가 터지는 소리와 함께 배가 한 차례 기울어졌고, 놀란 조난자들이 하나둘 선실 밖으로 나왔다. 릴리와 톰의 목소리가 갑판을 울리고, 사람에게서 사람에게로, 인어에게서 인어에게로, 인어에게서 사람으로, 사람에게서 인어에게로 다시 전달되었다. 그들이 선장을 인질로 붙잡았어…. 객실에 폭탄이 있대…. 어디로 가든 죽은 목숨이군…. 신이 두렵지도 않은가? 복도 바닥이 시커멓다. 매캐한 화약 냄새와 불안한 이들의 시선 사이에서 프랭키는 네이지 오테로가 그동안 지팡이인 줄로 알았던 것에서 검을 뽑아 드는 모습을 보았다.

  선장은 앓아눕고 조난자들은 섬을 탐사하느라 분주했던 기간이 그들에게는 기회였다. 그들을 감시하는 인원을 필수로 남겨두지 않은 게 어리석었다. 프랭키에게는 해적으로 살던 시절이 있었고, 어떤 자는 기회만 주어진다면 포박을 풀고 달아날 수 있다는 걸 이미 경험했다. 릴리 왓슨은 감시가 소홀할 때 탈출하여 톰 일당을 풀어주었다. 릴리와 톰 사이에 더러운 거래가 오갔을 것을 모두 눈치챌 수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셋이고, 조난자들 사이에는 그 전부터 쌓여온 은밀한 유대가 있었다.

  프랭키는 밀서의 암호를 읽어 찾아간 조리실에서 폴 아레스를 만났다. 역시. 올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그야 당신뿐입니다. 여럿이 모여 있으면 수상하게 여길 테니까요. …혹시 불안하십니까?

  네이지는 손에 화약을 묻힐 일이 상상되지 않는 이들과 함께 화약을 찾으러 돌아다니고 있었다. 망을 보는 이와 객실을 돌아보는 이로 역할을 분담한다. 도화선을 찾아 자르고 흩뿌려진 화약을 닦아낸다. 운이 좋으면 폭탄을 발견해 배의 바깥으로 던져버리기도 했다. 프랭키는 네이지를 통해 그들이 몇 개의 폭탄을 발견해냈는지, 도화선이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 전해 들었다.

  릴리 왓슨이 성난 표정을 채 숨기지 못한 채로 어딘가로 급하게 가는 뒷모습을 보았다. 누군가 그를 골탕 먹인 모양이었다. 그가 애지중지하는 것이라면 뻔하니, 프랭키는 배와 금고, 그다음으로 레베카의 얼굴을 떠올린다.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모두가 숨죽이는 탓에 불안마저 불러오는 고요한 나날.

  카메론 메이블리가 호른 나왈을 쐈다. 릴리와 톰 일당에게 배에 자신의 몫을 내어달라고 요구했다고 한다. 경계가 심한 그들 앞에서 자신이 어느 쪽에 서 있는지 확실하게 하려고 인어인 호른 나왈을 쏜 것으로 보인다. 인간의 화약, 군청색 피.

  릴리와 톰의 곁에 서는 이들이 생기고 있었다.

  놀랄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면서도 프랭키는 피가 거꾸로 쏠리는 기분이 들었다.

  "미친 자식 아냐? 파란 피가 신기한가 보지?"

  누구나, 태어난 이상 제 주제에 맞게 살아야 합니다. 당신같은… 하반신에 지느러미 단 존재들은, 바닷속에서 한 발짝도 나오지 않는 게 맞지 않겠습니까. 빈센트 스테이플턴이 부드럽게 속삭이던 목소리. 조르조의 작살. 인어를 가장 먼저 전시하는 놈이 있다면 가장 먼저 기사를 따내고 말겠다던 런던 동료들의 말. 언젠가 제게 달려들던 화염. 차례대로 머릿속을 어지럽히는 장면에 차곡차곡 쌓였던 울분이 입 밖으로 두서없이 튀어나왔다. 프랭키는 제가 무슨 말을 쏟아내고 있는지 몰랐다. 기억한다면 모두 후회로 남을 말뿐이었다.

  "당신은 어른이잖아요!"

  비명 같은 목소리가 귀를 때린다. 고개를 들면 그곳에 익숙한 얼굴이 있다.

  "한나."

  프랭키가 저도 모르게 중얼거린다. 프랑소와 드뇌브, 아니 한나 티어니의 단호하게 굳은 낯이 삽시간에 허물어진다.

  "그만 해요, 제발…."

  "미안, 미안해… 미안."

  프랭키는 제가 한나의 양팔을 꽉 붙잡고 있다는 것을 그제야 알았다. 황급히 손을 놓았지만, 손을 완전히 거두지도 못해 어쩔 줄을 모른다. 한나는 너무 연약해 보였다. 그러나 그를 위로하기에 프랭키는 그보다도 연약한 어른이다. 허공에 어정쩡하게 떠 있는 팔의 소매를 한나가 잡아 내렸다.

  "무서워요…. 그만 좀…."

  순식간에 작아진 목소리로 한나가 중얼거린다.

  "미안… 안 그럴게."

  울분이 차츰 가라앉으면 이제 떠오르는 것은 옅은 죄책감이다. 프랭키는 과거에 어린 한나를 두고 말없이 셰필드를 떠난 전적이 있었다. 당신은 어른이잖아요. 훌쩍 자란 한나 티어니의 그 말에 프랭키는 꼬맹이 한나와 철없던 돌리를 천천히 복구해낸다. 셰필드에서의 풍경을 떠올리면 언제나 함께 찾아오는 그림자가 있어 그들은 잠시 침묵한다. 프랭키는 한나가 조난자들 사이에서 어머니를 부르면서 자꾸만 돌아가고 싶다고 읊조리는 걸 놓치지 않고 기억했다. 그리고 니케 호에서 한나를 발견한 뒤 처음으로 한나를 한나라고 불렀던 날도.

  왜 당신이 여기에 있어요. 설마 날 잡으러 온 건 아니죠. 당신은, 설마….

  그럴 리가 없잖아, 한나. 널 잡아서 내가 뭘 해? 마그리트한테 죽을 일 있나….

  어머니는 죽었어요. 죽었다고요.

  그때 한나의 얼굴은 지독하게 서늘했다. 일순 프랭키가 한나 티어니를 완전히 잊고 그가 프랑소와 드뇌브라고 생각할 정도로.

  니케 호에서 재회한 뒤로 그들은 서로의 가면을 벗기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그들은 둘 다 형편없는 연기자였으므로 이 순간은 연기를 멈추고 초라하게 비틀거린다. 프랭키는 한나에게 그가 케인을 짚지 않은 손으로 자신을 잡을 수 있도록 소매를 내어주었다. "걱정 마. 아무도 없어." 한나가 불안하게 주변을 둘러보는 걸 보면서 프랭키가 속삭였다.

  릴리와 톰, 조르조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움직이는 조난자들이 벌이는 일은 더 있었다. 선박을 벗어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뭍 사람들의 얼굴이나 머리카락이 젖어있는 걸 프랭키는 종종 발견했다. 프랭키는 의도적으로 이 부분을 무시하고 있었다. 그들이 사람이 아니라 인어라는 것, 이 배에는 해수가 들어찬 층이 존재한다는 것, 그 층에 화물칸이 있다는 것을. 인어들은 기관실과 삼등실 칸, 화물칸을 헤엄쳐 아직 물이 차오르지 않은 에어포켓에 떠다니는 화기를 챙기고 있었다. 그들에게도 물 위에서 싸울 무기가 필요했으므로.

  프랑소와 드뇌브가 한나 티어니였기 때문에, 프랭키는 어른이 되어야 했다.

  "나도 무서워서… …. 어디 좀 같이 가주라. 가는 길에는… 그래, 마그리트가 죽기 전에 어땠는지 알려줘. 대신 난 걔 비밀 하나 알려줄게. 이거 진짜 아무한테나 안 말해주는 건데…."

  마그리트 티어니. 이제는 프랭키도, 한나도 떠난 셰필드의 땅에서 죽은 이의 이름을 언급하며 프랭키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나가 다리를 절뚝거리며 따라 걷는다. 케인이 바닥을 짚는다.

 

 

 

 

 

 

  프랭키는 수심에 잠긴 한나의 얼굴을 마지막으로 잠수했다. 해수로 가득 찬 니케 호의 저층을 작은 해양 생물들이 왕래하고 있다. 몸을 깊이 담그자마자 밀려 들어오는 아틸라스의 존재, 해양의 흐름 속에 머무르는 아틸라스의 아이들의 존재에 프랭키는 몸서리쳤다. 그는 아주 오랫동안 헤엄치지 않았다. 아틸라스에 의해 가면이 벗겨진 이 섬에서도 한사코 바다 깊이 잠수하는 걸 거부했다. 그러니 지금, 이 순간 느껴지는 아틸라스의 축복, 혹은 저주는 새로운 감각을 열며 온몸을 전율하게 했다.

  인어들은 해저에서 군청색 피를 지닌 다른 인어들을 느낄 수 있었다. 그것이 아틸라스의 아이들이 지닌 능력이요, 타고난 여섯 번째의 감각이다. 지금도 1, 2층을 헤엄치는 인어들이 몇 있었다. 프랭키는 그들을 마주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지 아직 결정하지 못해 최대한 인어들과 마주치지 않는 경로로 헤엄쳤다. 그러나 그들 사이에서 프랭키를 부르는 존재가 있었다. 잠깐만요, 기다려요. 인간의 언어로 치환한다면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법한 음파. 물살을 가르고 온몸으로 전해지는 그것을 프랭키는 무시하려 했다. 그러나 곧 그를 부른 장본인이 곁으로 헤엄쳐 왔다.

  "어라. 여기서 만나네요?"

  모르는 척하기는. 프랭키의 말 없는 말에 로건이 입매를 슬며시 올렸다.

  "화물칸 갈 거예요? 저도 같이 가요. 혼자 물에 들어오면 쓸쓸해서…."

  앞으로 난 길은 하나다. 푸른 지느러미를 펄럭이며 로건이 옆으로 붙었다. 바다는 춥고 외로워서 가기 싫어요. 언젠가 땅 위에서 로건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프랭키는 고개를 끄덕인다. 그들은 조용히 헤엄쳤다.

  "화기 찾으려고 온 거 맞죠?"

  평소보다 몇 배는 말이 없는 프랭키를 보며 로건이 물었다.

  "맞아."

  이제야 말하네요. 로건이 입을 열지 않고 말하면 프랭키가 픽 웃는다.

  "이미 다른 인어들이 다 챙겼을 것 같긴 하지만, 혹시 모르니까요. 숨겨둔 게 있을 수도 있고요."

  "어디 있는지 알 것 같으니까 따라 와."

  "정말요?"

  "응. 나 거기서 하루 잤거든."

  다시 생각해도 구역질 나는 밀항의 기억을 되새기며 프랭키가 조금 더 빠르게 헤엄쳤다.

  "화물칸에서요?"

  왠지 해수에 웃음기가 섞이는 것 같다. 생경하고 아늑한 인어의 감각을 느끼며 프랭키는 수긍의 뜻으로 아가미를 열어 거품을 일정한 박자로 내뿜는다. 화상으로 뻣뻣해진 아가미가 무의식중에 함께 열리다가 만다. 그래, 이런 거였지. 프랭키가 자조하면 로건은 그를 돌아본다. 목걸이처럼 착용하고 있는 은빛 반지가 물살에 떠밀려 앞으로 훅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말하지 않아도 그들은 서로가 비슷한 걸 생각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다. 그들은 뭍의 흔적을 덕지덕지 달고 다니는 인어였으니까.

  "같이 가요."

  잠시 뒤처졌던 로건이 옆으로 부드럽게 다가온다. 그들은 바닷물에 가라앉은 인간들의 선박을 탐험하기 위해 앞으로 나아간다.

 

 

 

#2021

폴 아레스의 역극 ¹ 

'로그 > 프랭키' 카테고리의 다른 글

운명  (0) 2021.11.26
아틸라스의 아이들  (0) 2021.11.26
아무개를 아시는지  (0) 2021.11.26
제멋대로  (0) 2021.11.26
해파리  (0) 2021.11.26
myosk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