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이 드는 방에서
2022. 2. 16.

John Frederick Kensett _ Sunset on the Sea (1872)

 

 

  그날을 기억한다. 조용한 침상, 팔꿈치 밑을 스치는 구겨진 천자락, 파도 앞 등불처럼 흔들리는 작은 목소리, 바닥을 바쁘게 밟는 구두 굽. 모든 것에 동떨어진 채로 제가 붙들고 있던 차갑디차가운 손의 감촉. 아가씨. 이쪽으로 오세요. 그날, 따뜻한 손이 그를 침상에서 떼어놓고 방 밖으로 데려갈 때까지 메리 벨라우드는 어두운 침상 위에 내리쬐는 붉은 빛을 바라보았다. 그 석양을 기억한다. 해가 지는 것만 알고 사람이 어떻게 죽는지는 모르던 어린 날. ¹

  …떨어지겠어.

  의식을 깨우는 목소리에 메리는 눈을 떴다. 붉은빛 대신 노르스름한 조명이 실내를 채우고 있다. 벽지와 화병, 빛을 내는 등에 매달린 크리스털 하나까지 제 것으로 채운 응접실. 메리는 제 턱에 닿아 있는 온기를 서서히 느낀다. 눈앞에 익숙한 얼굴이 있다.

  네?

  턱 떨어지겠다고. 이제 들어가서 자지 그래, 메리.

  턱에 닿은 손이 꼭 어린애들한테 하듯이 장난을 치고는 잡을 틈도 없이 사라진다. 메리는 저도 모르게 한숨을 내쉰다.

  프랭키.

  메리 벨라우드는 어린 날 저를 침상에서 떼어놓던 어른처럼 부드럽게 나무라는 목소리를 낸다. 아직 꿈결이라 제 목소리가 어린애의 것이 아니라 어른의 것이라는 것이 조금 생경하다. 프랭키는 킬킬대며 웃는다.

  너 얼굴이 웃겨.

  뭐? 당신은 안 웃긴 줄 알아요?

  불쑥 튀어나오는 날것의 음성. 프랭키 앞에서 종종 튀어나오는 그 목소리를 남편과 올리비아는 낯설어했다. 분명 그랬는데, 이제 프랭키 앞에서 목소리가 바뀌는 건 메리 하나가 아니었다.

  아무래도 올리비아가 네 말투 닮은 것 같아.

  당연하죠, 딸인데.

  좋은 것만 닮아야 할 텐데….

  메리는 언젠가처럼 프랭키의 정강이를 냅다 걷어찰까 하다가 눈을 흘기는 것으로 대신한다.

  오늘은 안 자려고요.

  하여튼 고집은 세. 뭐, 날 오래 보고 싶다는 네 마음은 잘 알겠지만….

  하여튼.

  두 사람은 마주 보고 낮게 웃는다.

  줄 게 있으니 잠깐만 기다려요.

  오. 선물이야?

  제집처럼 편히 누워 있던 프랭키가 몸을 반쯤 일으켜 앉았다. 메리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그래도 세월은 세월인지라, 이제 그들 사이에는 드레스 자락이 땅을 스치는 소리와 카펫을 밟는 소리 외에 아무것도 들리지 않아도 괜찮은 편안함이 자리 잡았다. 메리는 서재의 책상 위에 올려두었던 것을 조심스럽게 챙겨 온다.

  어라? 이거 왠지 낯이 익은데.

  이번엔 두고 가지 말아요.

  아~ 아~ 내가 두고 간 건가? 그때가 언제였지?

  3년은 됐을걸요.

  고운 천으로 감싸고 먼지가 쌓이지 않도록 때때로 서랍 밖으로 꺼내어주었던 장갑이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3년간 메리가 그것을 만졌던 조심스러움에 비하면 한없이 투박한 손길이다. 그러나 메리는 어쩌면 이 순간을 기다렸다는 생각이 든다.

  고마워, 메리.

  고마우면 다음에 올 때는 내 선물도 사 와요.

  어라, 그게 문제였어? 내가 올리비아 것만 사 와서? 너 남편이랑 같이 마시라고 와인도 가져왔는데도?

  그거랑 이건 다르죠.

  툴툴거리는 메리의 목소리에 프랭키가 입을 샐쭉이며 웃는다. 메리는 프랭키를 흘겨보았다가 그 뒤의 창에 시선을 빼앗긴다. 음영 밑에서도 제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뚜렷하다.  메리 벨라우드는 창에 비친 제 얼굴에 옅은 미소를 그리고는 친우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셀 수 없는 해가 뜨고 지는 동안 메리 벨라우드는 석양이 드는 방을 벗어나 계단을 밟고 벨라우드 저택을 떠났으며 다시 돌아와 메리 벨라우드의 집을 만들었다. 그 집에 앉아 오랜 친우를 마주하고 있자면, 가끔 메리는 사라진 시간을 복기하게 된다. 프랭키의 좀처럼 늙지 않는 얼굴은 메리 벨라우드가 저택을 떠나 바다 위에 있던 시간을 떠올리게 만든다. 어쩌면 주근깨가 하나둘 정도 늘었을지는 모르겠다. 메리의 상상 속에서 프랭키는 늘 내리쬐는 태양 밑에서 파도 소리를 듣고 있으니까.

  이마에 서서히 붉은 빛이 들기 시작한다.

  메리?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메리는 고개를 들었다. 다시 해가 뜬다. 

 

 

 

 

/

¹ 메리 오너님의 '01. 잊어버린 것에 관하여' 참고 및 부분인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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