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th. 존 카터, 로건 루이스, 에이버리 르웰린, 어니스트 데이, 레베카
태양이 하늘과 바다, 어느 쪽과도 가깝지 않은 곳으로 기운 시각. 프랭키는 2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내려간다. 물에 잠긴 계단 밑은 어두컴컴하다. 바지를 벗고 있자면 로건이 물 위로 얼굴을 내민다.
"오늘은 조금 늦었네요?"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에게 선약이 있었나?"
프랭키가 너스레를 떨며 물속으로 들어간다. 천천히 잠수해 들어가면 인간의 다리가 사라지고 지느러미와 꼬리가 드러난다. 지상에서 내내 차단해 두었던 감각을 연다. 인어의 웃음이 공명하듯 머리를 울린다. 프랭키는 안쪽으로 헤엄쳐 들어갔다. 로건이 웃으며 뒤따른다.
인질극이 끝난 뒤 프랭키는 매일같이 니케 호의 1, 2층을 헤엄쳤다. 그때마다 로건이 따라붙는다. 우습게도 프랭키는 자신이 매일 같은 시간에 헤엄치러 온다는 걸 로건과 세 번째 마주친 다음에야 깨달았다. 바다에 혼자 들어가면 쓸쓸하다니까요. 로건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들은 세탁실과 엔진실, 화물칸과 선원 객실을 드나들면서 쓸만한 게 있나 찾아본다. 여기서 물건들의 쓸모는 아주 잠깐의 시간 동안이라도 두 인어가 웃을 수 있느냐에 걸려 있다. 로건과 프랭키는 웃음이 많은 인어였으므로 물에 잠긴 니케 호에는 쓸만한 물건이 많은 셈이다. 지금까지는 그랬다. 이곳도 시간이 지나면 완전한 바다의 소유가 될 테니까. 물살은 모든 것을 조금씩 갉아먹은 뒤 바다에게로 돌려보낼 것이다.
세탁실에서 고급스러운 드레스를 찾아낸 프랭키가 억지로 몸에 옷을 쑤셔 넣다가 드레스를 찢어먹는다. 로건이 웃는다. 거품이 쉴 새 없이 올라간다. 프랭키와 로건은 물 위로 올라가기 전에는 벗어던질 새 옷을 장만한 뒤 세탁실을 나섰다.
"지금도 인간들을 모조리 바다로 빠트리고 싶어?"
갑작스러운 질문에 로건이 웃음소리를 거뒀다. 프랭키는 모자를 거꾸로 쓴 채 로건을 바라보고 있다. 로건의 얼굴에는 옅은 미소만이 남았다.
"바다로 집어 던져도 시원찮을 인간들은 있지만 어쩔 수 없이 참아야죠."
"왜?"
"신이 그걸 바라시는 것 같으니까요."
"그러니까… 네가 찾아낸 '신에게서 빠져나갈 구멍'이 그거다, 이거지."
"신전에서 '봤잖아요'. 신에게서 빠져나가려면 인간이랑 인어가 싸우지 않고 사이좋게 지내야 하는 게 아닐까요?"
"속 편하네…."
왠지 심사가 뒤틀린 프랭키가 입술을 비죽거린다. 로건은 심통 난 인어의 표정에도 개의치 않고 옆으로 다가와 그새 자리를 이탈한 모자를 바로 씌워준다. 프랭키는 모자를 벗어 로건의 머리 위에 뒤집어씌우고 앞서나간다.
프랭키는 인어들의 운명이 닮아있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살기 위해 필연적으로 배우와 광대와 방랑자가 될 운명인지도 모른다고. 함부로 정체를 들키면 지상의 모든 것을 버리고 바다로 돌아가기로 약속했으므로 그들은 지상에서 다른 인어의 손을 붙잡아주지도 못한다.
저기요. 진실한 사랑은 뭘까요?
파비앙의 질문에 답할 수 있다면 좋았겠다. 진실한 사랑의 맹세만이 뭍에서 타인의 곁에 영원히 머무를 수 있는 권리를 쥐여준다니까. 진실한 사랑이 있다면 도망치지 않아도 되고, 자신을 드러내도 되고, 거짓말을 하지 않아도 되고, 누군가를 타의로 잃지 않아도 되니까.
프랭키는 많은 이름으로 살아왔다. 미아, 돌리, 엘리엇, 스튜어트, 재키, …. 많은 사람을 만났고 많은 곳을 스쳐 지나갔다. 좋아하는 곳에서는 최대한 오래 머무르고 싶어서 버티고 버티다가 '자네는 안 늙는군.' 사람들이 이질감을 느낄 무렵 훌쩍 떠났다. 그렇게 잃어버린 시간과 사람이 많았다. 익명의 아무개가 지적했듯이 프랭키는 덜 된 것에도 쉽게 마음을 주었기 때문에 자주 울었다. 프랭키는 그들을 다신 볼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게 되어야만 했다. 그들을 정말로 보기 싫어서가 아니라, 그들의 목숨을 살리고 제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니케 호에서 잃어버린 사람들을 마주치자 프랭키는 불안에 떨었다. 과거에 자신을 만난 적 있던 인간들이 바다 곁에 서 있을 때마다 그쪽으로 시선이 갔다. 언제라도 파도가 그들을 삼켜버릴 것 같았다. 아틸라스의 말 없는 권능이 그들의 혀를 잘라갈 것 같았다. 아직 '인간'일 적에 프랭키는 매일 섬을 순찰하듯 돌아다니곤 했다. 온종일 돌아다니다 보면 금세 머리카락이 헝클어지고 셔츠가 바지 밖으로 튀어나온다. 불안으로 떠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아틸라스에게서 조금이라도 숨고 싶었다. 아니, 어쩌면 아틸라스를 만나고 싶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아틸라스가 앞에 나타난다면 무릎을 꿇고 온종일 빌 수도 있었다. 신이시여, 제발 살려주세요.
그리고 마법의 장막이 걷혔다. 이제 인간들은 언제든 죽을 수 있고 인어들은 언제든 땅에서의 권리를 박탈당할 수 있다.
그렇다면 신과의 약속도 더는 지킬 필요가 없으리라.
뜨거운 볕 아래에 그 애가 서 있었다. 오래 항해한 세월을 증명하듯 피부는 짙게 그을렸고, 흉터 있는 몸은 단단하다. 그 아이는 더 이상 어린애가 아니었다. 발밑에 넘실거리는 바다의 눈치를 보면서 프랭키는 레베카의 곁으로 다가갔다. "오, 왔나, 친구." "그래. 뭐 하고 있어?" "갈매기와 대화하고 있었지. 저기 저 녀석이야." 레베카가 작은 바위 위에 앉아있는 갈매기를 가리킨다. 레베카는 프랭키를 알아보지 못했다. 정확히 말하자면, 미아를 알아보지 못했다. 그야 배에서 같이 자랐던 몇십 년 전의 어린애는 레베카의 기억 속에서 죽었으니까. 프랭키는 그게 못내 서럽다. 레베카의 얼굴에서 미아를 모르는 세월을 읽으면서 프랭키는 물었다.
"네 기억에서 미아는 지워버린 거야?"
"…뭐?"
레베카는 사람 좋은 미소를 거두고 프랭키의 얼굴을 살펴본다. 눈, 코, 입, 얼굴에 박힌 점들을 유심히 보다가 귀를 끌어당겨 흉터를 확인한다. 프랭키 역시 그들이 한때 잘라냈던 우정의 흔적을 레베카의 귀에서 발견한다. 그것이 늘 마음에 걸렸다. 레베카가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중얼거렸다.
"미아?"
프랭키는 뭍에서 사귄 첫 친구와 비로소 해후했다. 잃어버렸던 사람과 시간이 잠시나마 돌아온다. 운명의 시간이 다가오는, 마법이 깨진 태고의 섬에서.
"네가 뭣 때문에 그리 도망치듯 떠나고 싶어 했는지 알아, 미아. 답답하지는 않았나?"
분명 한때 동고동락한 친구였는데도 레베카는 프랭키보다 한참 성숙했다. 그들은 딱 겉으로 보이는 만큼 나이를 먹은 것 같았다.(아니, 프랭키의 경우 덜 먹은 걸지도 모르겠다) 프랭키는 헤어질 때처럼 격렬하진 않더라도 레베카가 화를 낼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베카는 너그러운 태도로 프랭키를 이해한다고 말했다.
"왜 화를 안 내? 화난다고 귀 잡아 뜯던 베카는 어디 갔어?"
"하하! 화가 났던 적도 있었지.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거였잖아."
"그럼 신도 이해해?"
프랭키가 날 선 목소리로 묻는다. 레베카는 신중하게 프랭키의 눈동자를 들여다본다.
"네가 우리들을 신의 권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서 우리로부터 미아 너를 빼앗은 것처럼, 신께서도 우리를 염려했기 때문에 결정을 내리신 것 아니겠나. 나는 자네와 신에게 빼앗긴 입장이지만 사정을 알아버리니 둘 다 뭐라고 할 마음이 들지 않는다네."
파도가 뱃전을 철썩 때린다.
"난 그저 널 다시 만나서 반가울 뿐이야."
다정한 목소리다. 프랭키는 입술을 씰룩거렸다. 불만스러울 때 나오는 각도라는 걸 아는 레베카가 새삼 그들의 세월을 더듬는 동안, 프랭키는 레베카가 기억하는 미아의 얼굴로 외쳤다.
"진짜? 나를 빼앗겼는데도 화가 안 난다고??"
"오, 미아…."
레베카는 미아가 화를 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런데 프랭키. 니케 호 밖으로 나갈 생각은 없는 거예요?"
물에 잠긴 니케 호를 함께 헤엄치던 로건이 프랭키에게 물었다. 프랭키, 당신… 인어잖아요. 뭐 해요, 어서 가져오지 않고. 바다로 떠내려가는 포댓자루를 가리키던 메리의 어이없는 얼굴이 로건의 얼굴 위에 겹친다.
"무슨 말이야? 나 맨날 산책해."
"그렇죠."
로건은 깊게 파고들지 않는다. 그래서 프랭키는 로건과 함께 헤엄치는 시간을 제법 좋아했다. 로건의 말대로 혼자 바다를 헤엄치는 건 쓸쓸하고, 무서우니까.
프랭키는 신을 무서워했고 미신을 믿었으며 겁이 많았다. 그는 아직 부식되지 않은 니케 호의 선체가, 눈구멍과 입 구멍이 뚫린 포댓자루가 신에게서 자신을 보호해준다고 믿었다. 신의 권능 앞에 그런 것들은 하잘것없다는 걸 알면서도.
신의 장난처럼 자꾸만 포댓자루가 바다 밑으로 잠기는 바람에 프랭키는 여덟 번째 포댓자루를 뒤집어쓰고 길을 나선다. 일부러 먼 길을 돌아 그곳으로 향했다. 떡갈나무 잎사귀 앞에서 한참 서성거린다. 저 잎사귀를 벌리면 그 안에 아틸라스를 위한 태고의 신전이 있었다. 겁이 난다. 프랭키는 누군가의 기척을 느끼고 홱 돌아선다.
"제발, 부탁인데 같이 들어가 주면 안 될까? 솔직히 그쪽도 무섭잖아. 그렇지?"
제 손이 떨리는 것도, 눈동자가 방황하고 있다는 것도 알지 못했다. 참으로 우스꽝스러운 몰골이다. 존은 손을 잡아 프랭키를 부축한다.
"알겠네. 괜찮다면 같이 가지. 때로 물어볼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지. 어디까지 데려다주면 되겠나?"
그는 포댓자루에 관해서도, 떨림에 관해서도, 두려움에 관해서도 묻지 않았다. 그게 프랭키를 침묵하게 했다. '어디까지?' 지금 신전에 들어간다면 무얼 할 수 있을까? 무릎 꿇고 울면서 살려달라고 빌까? 프랭키는 존의 거칠고 단단한 손을 느끼면서 제자리에서 머뭇거렸다.
"……호수로?"
프랭키는 멍청하게 답한다.
"어렵지 않지."
존은 떡갈나무 잎사귀 뒤에 무엇이 있는지 알면서도 묻지 않는다. 프랭키와 존은 신전을 뒤로 하고 천천히 그곳에서 멀어졌다.
다시 신전의 입구 앞에 섰을 때 프랭키는 안경을 쓰고 있었다. 포댓자루는 놓고 왔다. 한참을 그 앞에서 들어가지도 뒤로 돌지도 못한 채 서성거리고 있자면, 잎새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얼굴을 간지럽힌다. 한순간 모든 햇빛의 모양이 일그러지며 떡갈나무 잎사귀가 양 갈래로 열린다. 프랭키는 깜짝 놀라 어깨를 움츠렸다. 잎사귀를 헤치고 나온 자 역시 어깨를 오므리고 있다. 그 자의 눈은 순식간에 발치를 향해 내려가고, 불빛이 그들 사이에 들어온다. 자신을 낮추는 그 익숙한 태도. 에이버리였다.
프랭키는 입술을 떼었다가 다시 닫는다. 평소처럼 격 없이 에이버리를 놀리는 말을 던지지는 못한다. 그저 멀거니 서 있다가 프랭키는 에이버리가 떠났음을 한참 뒤에야 눈치챘다. 손에는 에이버리가 들고 온 등불이 있다. 에이버리가 쥐여주고 간 모양이다. 촛불처럼 에이버리가 사라지고 프랭키는 다시 혼자가 되었다.
프랭키는 에이버리가 준 등불을 들고 동굴의 입구로 들어섰다. 몸을 낮추고 기어 들어가면 얼마 지나지 않아 높은 천장이 보인다. 탁 트인 동굴은 어두웠다. 에이버리의 등불이 아니었다면 한 치 앞을 볼 수 없을 정도였다. 등불을 위로 들어 올리자 거대한 벽화와 문자열들이 희끄무레하게 드러났다. 중심부에는 신전이 있다. 천장의 종유석에서 물 떨어지는 소리가 간간이 들린다. 자꾸만 땀이 흐르는 손 때문에 등을 놓칠까 봐 프랭키는 손에 힘을 꽉 주고 앞으로 나아갔다. 걸을 때마다 철벅거리는 소리가 들린다. 아틸라스가 이곳에 있다. 신은 어디에나 있다.
윈프레드와 어니스트가 앞장서서 벽에 적힌 이야기를 해석해주었던 게 기억난다. 기원전 인어와 인간의 처지는 뒤바뀌어 인어가 인간을 사냥했고 인간은 열등한 존재로 그려졌다고 한다. 인간은 내륙에 고립되었고, 인어는 해저와 육지를 왕래하며 자유롭게 인간들을 살육했다. 이 식인 인어들을 '세이렌'으로 명명한다. 아틸라스는 그들을 저지하기 위해 전쟁을 벌여 승리했다. 세이렌은 멸종했고 식인 습성이 없는 지금의 인어가 대를 이어 왔다.
이곳에서 신이 눈물을 흘렸다. 신이 말했다. 사랑하는 육지와 해저를 모두 지키기 위하여 둘을 가를 수밖에 없었노라고. 평화를 위해 질서를, 공포를, 단절을 공고히 할 수밖에 없었노라고.
신전에 다다라 바닥에 등불을 내려둔다.
프랭키는 여전히 텐의 이야기를 쓰고 있었다. 하지만 그 이야기를 끝맺을 자신이 없었다. 날강도처럼 남의 얘기를 참고할 생각으로 익명의 편지를 보내보기도 했지만, 머리가 복잡해질 뿐 답은 찾지 못했다. 다만 익명의 답신들에는 하나같이 공통점이 있었는데, 그들 모두가 해피엔딩을 바랐다는 점이다.
해피엔딩이란 뭘까?
프랭키는 이 질문을 진실한 사랑에 대한 의문 옆에 내려둔다.
차라리 신이 무정하기만 했다면 좋았을 거라고 프랭키는 생각한다. 아틸라스의 음성은 무정하고도 애틋했다. 아틸라스는 인간과 인어를, 세상을 사랑했다. 그러므로 신이 울 때 프랭키는…….
"당신이 사랑을 안다면, 정말로 사랑을 안다면 왜 우리를 구원하지 않습니까?"
떨리는 목소리가 동굴에 울려 퍼진다. 한 마디 후 프랭키는 침묵한다. 당장에라도 아틸라스가 나타나 제 혀를 잘라갈 것 같다. 그도 아니면 무언가를 인지할 새도 없이 물에 삼켜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제 와 말을 멈출 수는 없다.
"사랑의 맹세? 그게 다 무슨 소용이죠? 진정한 사랑이 뭔데? 그래봤자 단 한 사람만 날 알아줄 수 있다면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요. 도망 다니는 건 지긋지긋해요!"
자유를 훔쳐야죠. 그보다 좋을 게 없잖습니까.
폴 아레스의 자유로의 맹종이 부러웠다.
"사랑의 맹세도, 도망자의 삶도, 비극과 죽음도 우리의 것이지 당신의 것이 아니잖아."
안 죽었습니다. 결단코. 죽게 내버려두지도 않을 거고요. 그렇기에 지금, 이 망할 섬을, 나가야 하는데… 어째서인지… 이 망할 신이, 사람을 사랑한다는 신이 이 바쁜 이를 내버려두지 않으시는군요.
호른 나왈의, 지킬 것이 있는 자의 의지가 부러웠다.
"당신은 아무것도 몰라요, 아틸라스…. 우리가 얼마나 외로운지…. 이해를 갈구하지도 못하는 삶이 얼마나 초라한지 당신은 모른다고요."
자비롭지 않고 무정한 신이라면 진작에 내 목이 날아갔을 테니까요. 그런데 그러지 않았지요, 거기서 확신을 얻었을 뿐입니다. ……아니, 그러길 바란 걸지도 모르겠지만.
뉴먼 메릿의 곧은 확신이 부럽다.
"인어도 꿈을 꾸잖아요."
저는 모두 행복하게 이 섬에서, 본인이 선택하고 싶은 것을 선택하고 아무도 다치지 않고 끝나는. 그런 꿈을 꾸고 싶어요.
오로라 레인필드의 티끌 없는 선의와 희망이 부럽다.
"당신 눈엔 우리가 평화로워 보입니까? 진짜 그래요? … …나는 가끔… 당신의 아이로 태어난 게 저주스러워요."
'신살(神殺)대 모집 중! 원하는 자는 스스로의 방문 옆에 군청색 염료를 칠할 것.'
엔디미온의 굴종하지 않는 심지가 부럽다.
목소리가 기어들어간다. 저도 모르게 고개가 바닥으로 굽어진다. 몸이 벌벌 떨렸다. 프랭키는 어느새 울고 있었다. 눈물은 물론이고 콧물이 꼴사납게 흘렀다. 그러나 두려움 때문만은 아니었다. 당신은 어른이잖아요! 벼락처럼 자신을 혼낸 뒤 허물어졌던 한나 티어니의 얼굴을 떠올리면 차마 낯을 들 수가 없었다.
운명에 속박되지 않는 자들이 있다. 아틸라스가 그들의 운명을 두 갈래로 나누어 누구도 다신 땅을 밟고 숨을 쉬지 못하게 하리라고 통보했음에도.
이야기는 한 인간이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에 절망하며 시작합니다. 상대에게 거절당한 인간은 해안가에 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자신의 눈물을 바라보며 무엇을 떠올린 걸까요? 그 인간은 바다에 대고 정령을 부릅니다. 정령은 삽시간에 파도와 함께 인간의 앞으로 다가옵니다. 그는 인간의 마음을 꿰뚫어 본 것처럼 말하지요. "당신과 영원히 사랑할 것을 맹세합니다. 이로써 당신은 사랑을, 나는 뭍의 삶을 얻습니다. 단, 약속을 어긴다면 당신의 숨은 바다가 가져가도록 하겠습니다." 인간이 원하던 것이 그것이었습니다. 영원한 사랑. 눈앞의 존재는 인간이 아니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그가 약조한 영원한 사랑이 가능할 것 같았습니다. 인간은 쉽게 마음을 뒤바꾸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존재니까요. 인간은 자신의 마음을 받아주지 않은 자를 원망하며 정령에게 약조합니다. "나 역시 당신을 사랑하겠습니다. 이로써 내 숨은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은 자신의 운명을 이미 예견한 바 있습니다. 인간은 쉽게 마음을 뒤바꾸고 남에게 상처를 입히는 존재인지라, 그는 자신이 이루지 못한 사랑의 주인이 돌아오자 흔들리고 맙니다. 아! 사랑이란! 이것은 잔인한 운명의 장난일까요, 아니면 그 무엇도 영원히 속박될 수 없다는 진리의 방증일까요. 그와 그의 마음은 결국 처음과는 다른 길로 떠내려가고 있었습니다.
그는 자신이 바라던 곳으로 발길을 돌립니다. 남은 자는….
…어째서 자신이 남겨졌는가 고민에 빠집니다. 긴 고민을 거쳐서도 스스로 답을 찾지 못해 오랜 시간 사랑을 나눠온 쌍들의 이야기를 듣기로 합니다. 그 끝에 답을 찾아냅니다. 인간은 위안을, 정령은 뭍의 삶을 바랐지요. 처음부터 둘은 서로를 사랑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각자 위안과 뭍을 향해 있었지요. 처음 상상했던 것과 다른 방식일지언정 각자 진정 바라던 것을 얻었음을 깨닫고 남겨진 자는 떠난 자를 용서합니다.
당신의 정령은 생각이 많군요.
만약 진정 사랑하고 바라 마지않는 뭍의 삶을 위해 가짜 사랑이 필요할 수밖에 없다면 당신의 정령은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런, 생각이 많았나요? 제가 쓰는 이야기의 주인공은 저를 닮고 마는군요. 창작을 업으로 삼아 다양한 인물을 설계하는 분들이 새삼 대단합니다.
질문에 생각해보았습니다. 기실, 제 이야기의 방향은 뚜렷합니다. 모두가 행복하길 바라니까요. 죄 많은 인간도, 본성을 거스를 수 없는 정령도 말입니다. 문제는 행복에 어떻게 도달하느냐인데. 배신에 상처입었으나 새 사랑을 만난다는 전개가 무난해보이는군요.
생각이 많은 건 당신이었군요. 창작을 업으로 삼기 좋은 능력이니 새삼 부러워하실 일은 없어도 되겠습니다.
가짜 사랑이라도 본성을 거스를 수 없다면 새것을 찾는 모양입니다. 이런, 질문이 자꾸 생기네요. 가짜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있습니까?
어쩌면요. 뭍에서도 가짜 사랑에서도 행복을 찾을 수 없다면 정령은 불행을 운명으로 타고난 것이 되는데, 이는 온당치 않습니다. 불행하도록 만들어진 존재는 없으니까요. 저는 누구에게나 길이 있다고 믿습니다.
- 생각이 많은 F와 생각이 많은 E.Day¹의 서신 중 발췌
프랭키의 소설에는 두 가지 선택지가 등장하곤 했다. 운명에 반항하거나, 순응하거나.
런던의 톰은 프랭키에게 말했다.
뭘 자꾸 머뭇거리는 거야? 마리아가 네 소설을 실어주길 바란다면 솔직해져, 프랭키. 이런 삼류 잡지에도 못 실리는 소설이 소설이야? 쓰레기지.
프랭키 서튼의 인어 콩트의 주인공 이름이 '톰'으로 낙찰된 것은 톰이 프랭키의 정곡을 찔렀기 때문이다.
프랭키는 정곡을 찔리면 도망친다. 도망자의 습성은 신이 안배한 운명 때문만은 아니다. 운명을 믿는 인어는 쉽게 자기연민에 빠진다. 모든 것은 운명의 탓이요, 내 탓이 아니다.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
그렇다면 운명은 무엇일까. 운명은 어디에서 비롯되었나.
해신이시여, 그대 나의 태동을 기억하듯 나 또한 그대가 점지어준 이름을 기억하나이다.
영원토록 경배하사, 나의 모든 평화와 풍요가 그대의 것입니다.²
그는 도망자의 신분을 저주했다. 마른 몸을 물에 적셔야 한다는 걸 저주했다. 뭍에서도 바다에서도 온전한 자유를 누릴 수 없음을 저주했다. 인간들이 인어가 꿈을 꾼다는 걸 모른다는 게 화가 나고, 인어의 이야기가 환상소설로 분류된다는 것이 슬프다. 반쪽으로 갈라진 운명을 저주한다. 바다에서, 아틸라스에게서 멀어질수록 신의 축복은 저주가 되었다.
아틸라스의 아이는 신을 저주한다.
어떻게 그 자들은 운명에 속박되지 않을 수 있을까?
그 방도를 프랭키는 모른다.
아틸라스가 조난자들에게 죽음과 유배를 명한 지금은 더더욱.
"이 운명이 빌어먹게 저주스럽다고요! 알고 있어요? 당신은 모르겠지! 신이니까. 빌어먹을 신이니까… …. 인어고 인간이고 뭐고 그냥 살려주세요. 그냥… 죽은 듯이 살거나 도망치면서 사는 거 말고, 아니, 사는 건 알아서 할 테니까… 기회를 주세요. 내가… 내가 당신을 덜 미워할 수 있게, 좀! 아!!!!! 미치겠네 진짜. 그래요. 진짜, 진짜… 죄송해요. 그런데 미치겠어요. 난 도망치고 싶지 않았어요. 나는…. 아니, 진정한 사랑이 뭔데?"
그가 할 수 있는 건 떼를 쓰는 것밖에 없다. 프랭키는 고개를 숙이고 훌쩍거리다가 아직도 신이 제게 형벌을 내리지 않았다는 걸 깨닫고 벌개진 얼굴을 들었다.
"아니…… 사실 그렇잖아. 우리가 뭘 잘못했는데?"
언젠가 파비앙 G. 코코가 말한 것처럼 프랭키는 끝내주게 남탓하다 그걸 돌려받을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그의 운명일지도 모른다. 다만 무언가를 돌려줄 남에 신이 포함된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겠으나… …. 아직 목은 떨어지지 않았고 혀도 붙어 있다. 물은 잔잔하고 신은 말이 없다.
"대답해주세요. ……죽을 만큼은 아니잖아요. 그렇죠? 네?"
#2021
어니스트 데이 ¹
The Greatest Nike. '해저일지'에서 발췌 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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