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애하는 조난자들에게
2021. 12. 1.

 

Heritage Library (후가공)

BGM: Julianna Barwick - Envelop

 

 

 

마지막 면담

 

 

선장님이 그랬잖아요. 목적지가 바뀌면 찾아오라고. 이런 거 낯 뜨겁긴 한데 한 번쯤은 말해야 할 것 같으니까 들어보세요. 네. 들어보라니까요.

나는 일단 런던으로 갑니다. 이거 얘기하고 보니 조금 웃기네요. 왜, 전에 선장님이 우리의 목적지를 잊지 말라고 했잖아요. 이렇게, 호주 땅도 짚고. 기억하십니까? 당신에게 뭐라 하는 건 아니고 이 운명이란 놈이 참 웃겨서 말입니다.

운명. 내가 그놈한테 진짜 많이 시달렸거든요.

피차 오래 볼 사이는 아니니 긴 얘기는 생략하겠습니다.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긴 한데, 그건 앞으로 또 기회가 있을 것 같아서.

런던에서 할 일을 마무리하고 나면 배를 탈 겁니다.

그거 알아요? 내가 지상에 올라와서 처음으로 사랑한 자들이 뱃사람들이었어요. 나는 바다를 두려워했지만, 바다랑 제법 오래 알고 지낸 셈입니다. 신은 나를 보고 있었을까요. 그건 모르겠죠. 하지만 당신도 뱃사람이니 알 겁니다. 우리는 막막할 때 파도를 보면서 신에게 빌지 않습니까. 앞으로 나아가게 해달라고. 어쩌면 내가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산 건 신 덕분인지도 모르죠.

어쨌든, 그래서 감사하긴 한데요. 원래 철없는 애들이 가지 말라는 데로 그렇게 가고 싶어 합니다. 내가 애가 될 나이는 아니긴 한데 자꾸 주변에서들 애 취급을 해줘서……. 무튼. 배는 육지와 바다를 횡단할 수 있죠. 내가 물 밑으로 고개를 담그지 않아도 아틸라스를 느낄 수는 있어요. 게다가… …운이 좋다면 내 비밀을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할 수도 있겠고요.

네. 그거 맞습니다. 나 나가면 읽어보세요.

언젠가 바다에서 마주칠 수 있으니 알아두시라고요.

사실 진짜 본론은 이건데요. 니케 호 주실래요?

아… 역시 안 되겠죠?

 

글쎄요. 당신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신을 잘 모릅니다.

신은 우리를 왜 봐줬을까요?

우리가 앞으로 뭘 할 줄 알고.

 

 

 

 

 

 


 

비밀

 

누군가의 주머니에, 누군가의 손에, 테이블 위, 함, 객실 바닥, 혹은 바다 밑, 모래알 사이에 보관되었거나 박혀 있거나 버려진 서신.
끝이 어찌 되었든 모두 출발은 했다.
발신지는 니케 호의 어느 일등실 승객…은 아니고 밀항자였던 자.
뭍 사람과 인어에게 같은 내용의 종이가 도착했으나, 개중 몇에는 작은 종이가 비밀처럼 붙어 있다.

 

 

 

시얼샤

 

비밀과 활자의 기쁨을 아는 친구에게.

무탈하길.

 

 

 

이렌

 

당신이 준 인형 말입니다.

그 거위 녀석.

아무래도 영혼 달린 것 같은데 수리 안 됩니까?

 

 

 

파비앙

 

여보. 유산은 잘 받아가요.

언젠가 바다에서 만납시다.

 

 

 

한나

 

도망 다니는 게 얼마나 지긋지긋한지 알아.

그만두고 싶다면 찾아와.

다음엔 말없이 떠나지 않을게.

 

 

 

알렉산더 이튼

 

안녕하십니까.

당신 조각상과 이름을 받아 갑니다.

 

 

 

이오와 텐

 

두 사람의 이야기는 약속대로 할 거니까 걱정 마.

나중에 군말하지만 않도록.

 

 

 

밀라 아주머니에게

 

아주머니의 레시피 덕분에 구운 대구 요리를 잘 해먹었습니다.

어떻게 알았는지는 비밀이니 묻지 마세요. 아주머니는 눈치가 빠르신 분이니, 레시피를 누가 훔쳤을지 이미 알고 계시겠지만. 이 서신 역시 늘 두는 그 자리에 둔다면 전에 왔던 그 도둑이 훔쳐보러 올 겁니다. 놓치지 말고 잡으세요.

아주머니는 도둑질을 해본 적 있으십니까? 나는 레시피나 은행을 훔칠 생각은 없지만, 자유를 훔쳐볼 생각은 있습니다. 다만 이 자유란 놈이 덩치가 커서, 훔치려면 동료가 필요하게 생겼더군요.

행동으로 보이고 싶다면 해가 넘어가는 날 항구로 나오길.

 

 

 

네이지

 

나한테 든든한 투자자가 필요하게 생겼는데 투자할 생각 없어?

빚은 안 지게 해줄게.

아마도.

 

 

 

레베카

 

내가 배를 하나 구할 건데, 선장이 필요해. 나는 키를 잡는 법을 몰라. 이젠 항로 입는 법도 가물가물해. 톰보가 나한테 맨날 좀만 더 커야 키 잡는 법 알려준다고 했던 거 기억나? 그때 내 나이가 몇이었는데. 그러니까 이건 반은 톰보 탓이지.

베카. 내가 깬 약속을 기억해? 이제 와 소환하기에는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고, 먼저 깬 못된 놈은 나지만, 그래도 네가 멍청한 소리를 하니 나도 멍청한 소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그때 같이 '살자'고 했어. 같이 '죽자'는 소리는 하지 않았지. 우리가 배에서 배운 걸 기억해. 넌 타고나길 뱃사람이잖아.

애석하게도 이제 내가 아는 사람 중에 너보다 바다를 잘 아는 사람이 없어.

부탁합니다, 형님. 죽지는 마라.

 

 

 

아무개에게

 

영광을!

 

 

 

페니

 

엔딩으로 조언을 구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

물론 '해피엔딩'으로.

 

 

 

악마에게

 

그래서 끝을 본 감상은?

 

 

 

베니타

 

당신은 커튼콜이 끝나면 무얼 하나.

 

 

 

 

 

 


 

친애하는 조난자들에게

 

돌아갈 곳이 없는 자, 해피엔딩을 좋아하거나 비극을 사랑하는 자, 자유나 속박을 바라는 자, 탐구심이 강한 자, 말썽을 좋아하는 자, 악마와 괴물과 고양이, 그리고 바다와 육지를 횡단하는 여행자에게.

배 '리베라'의 동료를 구합니다.

바다와 육지를 오가는 이 배는 때로 땅에 닿고 대부분의 시간은 바다 위에서 보내는 우리의 집입니다. 처음으로 경유하는 땅은 호주가 될 수도 있겠으나, 앞으로의 행선지는 비밀에 부칩니다. 지상에도 동료들을 마련한다면 배 위의 우리의 재능과 진주가 그들에게 닿고, 그들이 우리에게 입을 것과 먹을 것을 제공해 줄 수도 있을 겁니다. 당신이 걱정하는 대로 이 배는 육지의 법을 따르지 않아 말썽이 생길 수도 있지만, 다른 당신이 바라는 대로 소란이 끊이지 않아 즐거울 겁니다. 물론 이 배에 무시무시한 괴물들과 싸움과 말의 귀재들이 동행하여 다른 자들이 함부로 못 할 거라는 사실도 빼놓으면 안 되겠죠.

승선 조건이 있습니다.

 

니케를 알 것

서로 잡아먹지 않을 것

아이들에게 너그러울 것

동료가 자는 사이 목을 베어가지 않을 것

일하는 자에게 먹고 입을 것이 주어질지니....

종족, 출신, 나이는 무관합니다

 

조건을 충족하는 지원자들은 대영제국의 해가 넘어가는 날 항구로 오십시오. 나는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라, 그 사이에 무얼 하든 그날은 끝내주게 멋진 배를 몰고 나갑니다. 악마가 추천한 대로 새까맣고 아름다운 배를 구해보려 하는데 자금이 부족하다는 사소한 문제가 있습니다. 고로 자금을 보탤 동료나 동료는 아니지만 자비로운 투자자도 두 팔 벌려 환영합니다. 모쪼록 함께해주길.

목표는 가능한 한 밟을 수 있는 모든 땅과 헤엄칠 수 있는 모든 바다를 횡단하는 것.

으로 지금 정했지만, 앞으로 바뀔 수 있음을 염두에 두시죠. 마음에 안 드는 게 있으면 일단 와서 항의하십시오. 모든 것은 전 구성원이 함께 정합니다.

참. 그동안 나는 런던에 있을 예정입니다.(없어도 배는 무조건 구합니다) 깜빡하고 전해주지 못한 귀하고 비싼 선물이 있다면 찾아와도 좋습니다.

 

- 당신의 친구(우리 친구 맞나?), 프랭키

 

 

 

 

 

 


 

위대한 니케호

 

 

왕의 공문 앞에서 프랭키는 다른 왕, 다른 태양의 말을 생각했다.

 

태양만 주라고 했을까. 비와 커피도 주라고 했다네.

이 몸은 신이다!

 

이러쿵저러쿵 아무개와아무개가 왕과 태양을 사칭한 날로부터 얼마나 지났다고, 정말로 왕의 공문을 받게 될 줄은 몰랐다.

돌아온 영국 땅, 아니 육지와 바다는 축제 분위기였다. 이렇게 사람이 많다니, 인어까지 많다니, 마리아와 수전노들은 위대한 니케호에 올라탄 영광스러운 기자 프랭키가 보고 싶어도 먼발치에서 사람들에게 발이나 밟히고 있을 터다. 삼류 기자들의 자리는 그런 거니까.

환하게 빛나는 햇빛과 사랑과 축포 속에서 프랭키는, 첫 번째로 생각한다. 아니, 이렇게 환영해주면 내가 그 생고생을 하면서 서신을 돌린 게 다 말짱 꽝이 되는 게 아닌가? 누가 '위대한 니케 호'를 두고 다른 걸 타? 아니 사실 나 같아도 니케 탄다. 신은 참…… 그놈의 계시 우리한테도 공유해주면 뭐가 덧나는지.

환호 속에서 낡고, 지치고, 다치고, 인어와 사람의 환호가 비명이라도 된다는 듯이 짐가방을 들고 인파 속으로, 혹은 바닷속으로 도망가는 이들을 보고 프랭키는, 두 번째로 생각한다. 뭐, 그래도 누군가는 오겠지.

… …아무도 안 오면 한 명만 끌고 온다. 지긋지긋하게 해주지, 어디. 아, 그래도 이거, 기분이 썩 나쁘진 않은데…….

말로만 부르던 영광이란 놈을 어쩌다 훔치게 된 프랭키가 입술을 씰룩거렸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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