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칵!
카메라의 눈이 감긴다. 원하는 사진을 얻은 사진사가 육중한 카메라를 뒤로 물리는 사이, 기자가 비행기 앞으로 다가간다. 고글을 올리고 환한 미소를 지었던 사진의 주인공이 기자의 손을 맞잡는다.
"이번에도 잘 부탁드려요."
"아~ 아닙니다, 뭘요. 저희야 돈 받고 일하는 입장인데, 저희가 감사하죠. 대회까지 얼마나 남았더라?"
"4일이었나? 어머, 얼마 안 남았네요."
"이번에도 무사고 비행 응원합니다, 다비드 씨. 그럼 다음에 또 뵙죠."
의례적인 인사가 끝나면 자리에 남는 건 한 명의 모델, 아니 비행사, 아니 위선자다. 비싼 블라우스에 두툼한 재킷을 걸치고 깔끔하게 머리를 묶은 이네스 다비드는 고글을 만지작거리다가 머리를 풀어 내린다. 묶은 지 얼마 되지 않은 머리카락은 그날 아침 세팅한 모양을 유지하고 있다. I.D. 제 이니셜을 새긴 선체와 전날 깔끔하게 세척한 프로펠러를 다시 한번 살핀 후, 이네스 다비드는 구석에 서 있던 다비드 사 사람을 부른다. "이거 격납고로 옮겨 주세요." "네, 아가씨."
들에는 바람이 옅게 분다. 오늘 찍은 사진은 4일 뒤의 비행 대회가 끝난 뒤 공개될 것이다. '대회에 참가한 이네스 다비드'라는 제목을 달고. 등 뒤에 시선이 꽂히는 느낌은 착각일까? 뭐, 착각이 아니어도 상관없다. 이네스 다비드는 사진사의 지루한 얼굴과 기자의 한심한 시선, 다비드 사 직원의 침묵 같은 걸 착실하게 모른척하고 있으니까. 뒤에서 떠들어 보라지! 어차피 사진 속에 남는 건 그들의 얼굴이 아니다.
멍청하고 아름다운 사촌에게
with. Meryl
이네스는 아주 아름답거나 아주 추하지도 않고, 지독한 부자이거나 지독한 가난뱅이도 아니다. 끔찍하게 똑똑하거나 끔찍하게 멍청한 것도 아니요, 뛰어난 심미안이나 저주 받은 감수성을 가진 것도 아니다. 이네스 다비드는 어중간한 인간이다. 이건 비극이다. 누구는 가진 자의 배부른 투정이라고 하겠으나, 이네스 다비드는 한 번도 배불러 본 적이 없었다. "배부른 소리는 멍청한 작자들이나 하는 소리야." 어쩌면 오델리 다비드의 말이 저주처럼 그 딸에게 달라붙은 건지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이네스는 캔자스에 방문하는 날을 은근히 좋아했다. 그 어지러운 시골 땅에는 오델리의 여동생이 살고 있었다. 오델리 다비드는 자신의 여동생이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탓에' '감정에 휩쓸려' '마찬가지로 신대륙이라는 허황된 이름에 휩쓸린' '가난뱅이에게 시집을 간' 멍청이라고 말하곤 했다. 캔자스에 방문하거나 가족에게 연락이 올 때마다 비슷한 말을 얼마나 입에 올렸던지. 그 딸이 오델리처럼 깔보는 시선으로 캔자스를 바라보게 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어려서부터 도시에서 자란 이네스에게 캔자스의 밀밭은 지루함의 상징이었다. 볼 것도 없는 동네에서 오델리와 이네스가 들를 곳은 페펭이라는 과거의 성을 공유하는 모녀의 집밖에 없었다.
그 집에는 이네스보다 어린 사촌이 살고 있었다. 오델리는 캔자스에 방문할 때마다 제 여동생에게 줄 선물을 챙겼는데, 이네스에게도 예쁘게 포장된 박스를 들게 했다. 그건 사촌에게 줄 선물이다. 고운 비단 리본, 레이스 장식이 화려한 드레스, 브로치, 인형, 등등…. 오델리가 제 여동생에게 '베푸는' 것을 허영으로 삼았으므로 이네스 역시 사촌에게 '베푸는' 것에서 기묘한 만족감을 느꼈다. 죄책감이라는 걸 배울 겨를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사촌 역시 다비드 모녀가 캔자스에 오는 날을 손꼽아 기다렸기 때문이다. 사촌 메릴은 이네스를 잘 따랐다. 오델리의 표현을 빌리자면 '예쁘고 순진한' 메릴. 이네스가 가져오는 선물에 눈을 반짝이고, 받기만 하는 건 미안하다면서 선물을 주기도 했던….
그때 메릴이 무얼 줬더라? 이네스는 기억이 나지 않았다.
"그러니까 머릿결 관리 비법이라던지."
다 큰 사촌이 제게 딱 달라붙어 소곤거리는 목소리를 들으며 이네스 다비드는 생각한다. 얘는 정말로 모르고 묻는 걸까? 그 누구도 비행 뒤에 세팅된 머리를 유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이네스 다비드가 기껏 해봐야 신문의 구석에 잘 나온 사진 한 장을 싣기 위해 기자와 사진사에게 돈을 찔렀다는 사실을! 예쁘고 순진한 캔자스 소녀 메릴이라면 그럴 법도 했지만, 지금 눈앞에 서 있는 건 헐리우드 배우인 메릴 위베르였다. 이탈리아의 선명한 볕 아래에서도 솜털만 보이는 피부며 바다를 담은 듯한 푸른 눈, 반짝이는 금발과 누구든 뒤를 돌아볼 아름다운 미소. 그 얼굴 밑의 의중을 이네스는 모두 헤아리지 못했다.
언제부터였을까. 메릴이 캔자스를 벗어나고도 한참 멀리 나아가 눈부시게 보일 무렵, 이네스는 자신이 되고 싶은 게 배우였다는 걸 깨달았다. 메릴처럼 영화에 나오고 싶은 건 아니다. 이네스는 삶이라는 수수께끼의 영역에서 배우가 되고 싶었다. 이네스는 한 점의 수식어로 자신을 표현할 수 없다는 사실이 싫었다. 삶의 어느 순간에 밀려나고 뒤처지고 패배해야만 하는 자신에게 싫증이 났다. 아, 지금도 보라. 이네스는 메릴을 바라보면서 자신은 배우가 될 수 없는 운명이라는 걸 절절히 깨닫는다.
메릴은 땋은 머리를 흔들며 어릴 적처럼 거래를 하자고 말하고 있었다.
"언니만 그렇게 예쁜 건 반칙이야. 그럼 교환은 어때? 그러니까, 거래 말이야!"
"얘는… 네가 그런 말하면 내가 욕 먹는다? …어떤 걸 줄 건데?"
"음, 요전번에 매디가 만들었던 한정판 케이프 말이야. 나 그거 손도 안 댔거든? 그거 어때?"
이네스는 메릴의 잔머리를 마지막으로 곱게 넘겨주며 고민하는 척 뜸을 들인다. 이네스는 메릴이 종종 뒤에서 멍청하다는 말을 듣는다는 걸 알고 있다. 바보 같은 사람들…. 그 평판이야말로 메릴이 뛰어난 배우라는 증표다.
"어머. 정말? 그럼 절대로 거절할 수 없지… 좋아. 한 번만 말해 줄 테니까 잘 들어야 돼."
이네스는 즐거운 양 웃고는 메릴의 귀에 대고 속삭인다.
"비법은 망가지기 전에 사진을 찍는 거란다. 메릴. 넌 참고할 필요 없는 비법이지."
'그리고 나는 나날이 망가지고 있지.' 이네스 다비드는 비굴한 속마음을 내뱉을 정도로 자존심을 버리지는 않았지만, 배우가 아닌 자의 목소리에는 옅은 패배감이 깃들었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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