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니와 이네스
2022. 8. 22.





  1937년 5월.

  이네스 다비드는 점술가를 만났다. 그 사람은 광장 한복판에 앉아 있었다. 이네스 다비드에게 사람 눈 많은 곳에서 행상인이나 점술가를 찾는 건 부끄러운 일이다. 그러나 그날은 왜인지 발이 움직였다. 작은 비행기 모형이 눈에 들어왔기 때문이었을까. 그 자는 이네스에게 카드를 몇 개 뽑게 했고, 결과를 읽어 주었다. 대부분의 내용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이네스는 그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 순풍이 분다. 라윈과 룬킨을 안 본 지 오래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곧 바람이 불 것이오."

  다만 이 말은 이네스의 귀를 사로잡았다.

  "눈을 뜰 수 없을 정도로 거센 바람이. 바라는 게 있다면 그걸 따라가요."

  "바라는 것?"

  "그것까지 내가 알려줘야 하나? 난 점 치는 사람이지 마음 읽는 마술사가 아니야."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인다. 비행기를 보던 걸 들킨 걸까? 하지만 웬만한 사람들은 이네스 다비드를 비행사로 생각하지 않는다. 뭐, 대수롭지 않은 얘기일 터다. 그대로 값을 치르고 걸음을 떼려다, 이네스는 아는 척을 하고 싶어져 돌아왔다.

  "당신, '치간느'¹ 맞죠?"

  "…."

  점술사는 답 없이 이네스를 훑어 본다. 그의 시선이 이네스의 손에 닿는다.

  "'로마니'¹라고 하죠, '마드모아젤' ²."

  그는 아주 정확하고 우아하게 '마드모아젤'을 발음했는데,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이유도 모르고 얼굴이 홧홧해졌다. 이네스는 제 손을 감싸고 도망치듯 자리를 떠났다.


 

 

 

 

 

로마니와 이네스

with. Ahmedi

 

 

 





  이네스 다비드가 사는 세상은 반듯하다. 볕 드는 실내, 화려하고 푹신한 소파에 앉아 이네스 다비드는 사람 사는 소식을 전해 듣는다. 자로 각을 재어 구획을 나눈 신문을 통해. "하인리히는 아직도…." 막심 다비드가 독일의 소식을 화젯거리로 꺼내면, "영국 소식은 들으셨어요?" 데지헤 다비드가 영국의 소식으로 말을 받는다. 화제의 전환은 빠르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이네스 다비드는 이런 말이나 한다. "그렇군요." 세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역시 네가 있어야 말이 통한다니까. 오랜만에 즐거웠다." 막심 다비드는 데지헤 다비드를 배웅하며 말한다. "뭘요. …이네스. 너 요즘은 비행한다 뭐 한다 안 돌아다닌다면서. 이 기회에 결혼할 사람이나 찾아봐." 이네스 다비드는 데지헤 다비드의 손을 쳐 낸다. "다 늙어서 무슨. 됐다니까. 얼른 가 봐." 데지헤 다비드가 웃는다. 데지헤 다비드가 자신의 남편과 아이들이 있는 집으로 돌아가면, 막심 다비드는 이네스 다비드를 보며 가볍게 혀를 찬다. 막심 다비드는 제 자리로 돌아간다. 담배와 신문, 네모반듯한 신사의 지구본으로.

  1937년 6월. 이네스 다비드는 무료한 오후를 달래며 창 밖을 구경한다. 소파에 앉은 막심 다비드가 신문을 펼친다. 신문이 말한다. 주피터 사에서 여러분을 피레네 프로젝트에 초대합니다!

  "바보 같긴. 하늘의 섬이라니 그딴 데에 돈을 낭비하고 싶은 건가? 주피터도 노망이 났어. 하늘로 고개를 들고 있으니 아무것도 안 보이는 게지."

  이네스는 제 아비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다가 멈칫한다. 창밖으로 흰 구름이 보인다. 오후의 도심에는 비행기 한 대 날지 않는데….

  이네스 다비드는 문득 제 손을 내려다 본다. 결혼반지 없이 자글자글 주름이 늘어나는 손. 그날 그 로마니의 시선은 분명 이 손을 향해 있었다. 멋대로 제 정체를 다른 이름으로 훼손하는 프랑스인을 로마니는 정확하게 호명했다. 결혼하지 않은 프랑스 여인으로. 이제 이네스 다비드는 점술가가 자신을 모욕한 이유를 안다. 그건 제가 먼저 그를 모욕했기 때문이다.

  막심 다비드는 질리지도 않고 하늘을 욕한다. 하늘과 비행기와 주피터와 이네스 다비드를.

  그날 이네스는 피레네 프로젝트에 자원하기로 결심했다.




  8월의 하늘 아래에서 로마니는 이네스에게 미래를 점쳐 주었다. 이 자는 5월에 만난 점술가보다 상냥해서, 이네스는 그의 말에 신뢰가 갔다. 사실 제 미래보다 궁금한 게 있기도 했다.

  당신의 이름이요, 로마니. 그게 궁금해서요.

  무례할 수 있는 질문 앞에서 로마니는 한참 고민한다. 그리고 미래를 예측했을 때처럼 대가로 비밀을 교환하자고 제안한다. 이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가 성립된다.

  "웬만한 사람들은, 내 이름은 곧바로 발음하지 못해. 대강 얼버무리거나 멋대로 부르는 일도 허다하지. 그래서 그냥, 대체거리를 찾아 날 소개하기로 한 거야. 머릿속의 목소리를 바보 같은 발음들로 덮고 싶지 않아서."

  로마니는 유랑민족이다. 구속될 수 없기 때문에 자유로우나, 그렇기 때문에 다시 끊임없이 훼손된다. 이네스 다비드가 어떤 로마니를 치간느라고 호명한 것처럼. 반면 이네스 다비드에게는 늘 자리가 있다. 다비드 씨, 마담, 마드모아젤. 이네스 다비드에게 제 이름은 어려운 것이 아니고, 이름을 얼버무리면 수치를 느끼는 건 이네스가 아니라 상대가 될 터였다. 하지만…

  "알 것 같아요. 이거 당신 이름을 알려달라고 묻기도 어려워졌는걸요."

  이네스는 치욕을 알았다. 그래서 로마니의 이름을 훼손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 때문에 로마니는 제 이름을 알려준다. 이네스는 입안에서 그 이름을 한참 굴려본다…… …… ……. …그러면서 5월의 하늘과 6월의 하늘을 떠올린다.

  "난 내 이름을 갖고 싶어요."

  5월의 이네스 다비드는 하늘을 올려다본다. 6월의 이네스 다비드는 막심 다비드를 모욕하기로 결심한다. 8월의 이네스 다비드는 로마니에게 말한다. 그러니까 뒤에 달라붙은 꼬리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싹둑, 자르고 싶어요. 아무도 모르게! 

  "아무도 모르게? 하지만 당신을 아는 사람들은 모두 알게 되지 않을까?"

  로마니의 말이 맞았다.

  "특별히 모르게 하고 싶은 사람이 있는 건 아니고?"

  이네스 다비드는 모두가 자신을 알길 바랐다. 그래왔으니 아무도 모르게 다비드를 떼어내는 것은 처음부터 불가능한 일이다. 그중 가장 어려운 건…

  "당신 말이 맞아요. 나는… …글쎄. 내가 몰랐으면 하네요."

  아하하! 이네스는 세상에서 가장 우스운 말을 뱉은 사람처럼 짓궂게 웃었다.






 


¹ 로마니(Romani): 인도-아리아계의 유랑 민족. 영어권에서는 '집시(Gipsies)'로 알려져 있기도 합니다. 프랑스에서는 유사하게 '치간느(Tzigane)'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집시'와 '치간느' 등은 로마니 사람들에 대한 인종적 선입견과 경멸의 의미가 담겨 있는 외래어로 잔존하고 있습니다.

² 마드모아젤(Mademoiselle): 프랑스어로 미혼 여성을 일컫는 표현.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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