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참… 어딘가 많이 닮은 것 같아요. 근데 당신이 훨 나은 쪽이죠.
당신이랑 내가요?
우와, 아까 한 말이 무안해질 정도인데요?
하지만…
우리가 어딜 닮았느냐고 묻듯이 이네스가 눈을 동그랗게 뜨면, 유진이 머쓱하게 웃는다. '하지만요, 유진!' 이네스는 말을 이으려다 멈췄다.
1937년 8월, 사르데냐. 이네스와 유진은 피레네 프로젝트의 비행사의 자격으로 사르데냐에 와 있다. 주피터 사는 프로젝트에 참가한 사람들에게 호텔 로스트 파라다이스에 숙박할 수 있도록 배려했다. 두 사람에게 로스트 파라다이스의 풍경은 아주 익숙하다. 살롱과 라운지에 가면 그곳에는 사람들이 있다. 걸음소리, 전축이 내뱉는 재즈, 웃음, 이름, 사람들…. 그 속에서 이네스와 유진은 빠르게 말을 잇고, 춤곡에 맞춰 춤을 추고, 정중히 인사하며 헤어졌다.
아는 사람이 유쾌한 신사 분을 너무 오래 독점해도 안 될 노릇이겠죠. 이제 그만 놀리고 가요! 이네스가 축객령을 내린다. 그럼 함께해주셔서 즐거웠습니다, 마담! 유진은 정중하게 허리를 숙인다. …심심해질 쯤에 언제든 불러요, 이네스. 짓궂은 윙크도 잊지 않고. 그러면 그들은 다시 일어나 걷는다. 전축은 여전히 재즈를 뱉고, 그들은 웃고, 사람들의 이름을 부른다. 매끄러운 물결처럼 풍경에 녹아든다. 다음에도 오늘과 크게 다르지는 않을 터다.
아. 그러니 어떻게 말할 수 있겠어요? 한 마디로 축약하기에는 우리가 닮지 않은 이유가 너무도 많은데…….
우리는 약속한 것처럼
with. Eugene
Alfredo Britto & His Siboney Orchestra - Sibony (LINK)
1934년 8월, 미국. 이네스 다비드는 깔깔깔 웃고 춤을 추고 어머나 경탄하고 입이 마를 것처럼 인사한 뒤 지쳐서 소파에 앉는다. 이곳 주인이 새로 들였다던 소파는 아주아주 푹신하고 그래서 이네스는 이대로 잠들어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새 술도 몇 잔을 마신 탓에 노곤노곤하니 정말로 잠이 올 것 같았다.
"이네스. 피곤해 보이는데 괜찮아요?"
유진이 눈치 좋게 곁으로 다가온다.
"뭐람. 벌써 피곤하면 어떻게 해요? 당연히 괜찮죠."
이네스는 손을 내젓다가 제 손에 들려 있던 술잔이 유진의 손에 넘어가 있는 걸 발견한다. "그건 언제… 괜찮다니까?" "당신 방금 전에 알겠다고 대답도 했어요. …이제 누구 말이 맞는지 모르겠네요. 으하하!" 짓궂은 목소리 앞에서 이네스는 눈을 가늘게 뜬다. 정말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유진!" 괘씸하다. 이네스는 늘 그렇듯 여우 같은 친구에게 면박을 놓는다. 유진은 웃으면서 자리를 잡고 앉는다.
파티에 모인 사람들이 느린 춤곡으로 접어들 무렵, 유진은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이네스는 그가 무슨 말을 꺼낼지 직감한다.
"그거 알아요, 이네스? 내일은 하늘이 끝내주게 맑을 예정이랍니다! 저는 오랜만에 비행기를 몰고 나가보려고요. 흔치 않은 날인데 그냥 흘려보낼 수는 없죠."
"아~ 정말. 나도 내일은 산책이나 나가볼까…."
"어라? 그럼 같이 갈까요? 동행은 많을수록 좋죠!"
"응? …아하하! 당신은 비행기를 띄울 거라면서요. 그런데 내가 어떻게 같이 가요!"
단호한 목소리 앞에서 유진은 말을 고른다. 당신도 2년 전이었다면 물론이죠!라고 답하지 않았을까요? 왜 비행과 연이 없는 사람처럼 구나요? 여전히 아무 말도 해주지 않을 생각이에요? 아마도 그런 말들을 삼키는 얼굴을 이네스는 외면한다.
이네스 다비드는 열차 사고로 요양 차 미국에 온 상태였고, 그간 한 번도 비행기 앞에 간 적이 없다. 사람들은 이네스를 조심스럽게 대한다. 다친 사람에게는 함부로 묻지 않는 것이 불문율이니까. 이네스 다비드는 그 사실을 알았다. 유진도 그래 줄 터다. 그는 사고가 없었더라도 점잖고 상냥한 사람이니까.
"…으하하! 이거. 함께하고 싶은 마음에 제가 너무 앞서간 모양입니다. 다음에 날씨가 좋을 땐 배라도 띄워 볼까요, 우리?"
"그러죠. 좋은 생각이에요."
그들은 약속한 것처럼 웃어넘긴다. 아하하! 으하하!
피레네 프로젝트는 성공했다. 그들은 날아서 하늘 위로 올라왔다. 천공섬을 발견한 기쁨보다 죽을뻔한 공포가 큰 이네스는 담배와 친구부터 찾는다. 그 친구가 제가 날지 않은 3년의 이유를 궁금해하던 사람이라는 걸 간과한 게 유일한 문제다.
신이 있다면 아마 피도 눈물도 없는 녀석일 겁니다. 기껏 용기 내서 비행기에 올랐더니, 이런 시련을 안겨주기나 하고! 안 그래요? 유진은 걱정했고, 큰일 날 소리를 하네? 웃기만 하지 말고 당신 얘기도 해 봐요. 이네스는 외면한다. 다시 유진이 궁금해하면, 이네스는 모르는 척하고, 유진은 상냥하게도 맞춰 주고….
왜 날지 않나요, 이네스?
몇 년간 유진은 여러 번 물었고, 이네스는 답하지 않았다. 반복해서 묵살되는 질문조차 당연한 듯이.
"대신 뭐 하나만 물어도 괜찮아요?"
"그래요. 내가 술을 처음 마시고 어떤 난장판을 벌였는지~만 빼면! 답해드리죠."
이네스는 순간 유진을 한 대 때리고 싶다고 생각했다(그가 잘못한 것은 정말 정말로 아무것도 없지만). 그러니까 이번에도 끝까지 모르는 척을 해줬다면, 그랬다면…. 하지만 이네스는 답하기로 약속한다. 왜냐하면 유진의 말처럼 그는 너무 오래 기다려줬고…… 당연하죠. 전 당신이 다시 비행하길 바라던 사람들 중 하나인걸요. 슬슬 궁금할 때도 되지 않았나요? 뭐… 여전히 답해줄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너무 오래 기다려줬다.
왜 날지 않았나요, 이네스? 약속한 것처럼 유진이 묻는다.
"나는…"
애석하게도 구름 위에 위치한 이 섬에서는 어떤 음악도 끝나지 않는다. 어떤 음악도 시작되지 않았으므로. 음악이 끝난다면 '아! 이제 가봐야겠네요.' 달아날 수 있을 텐데,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는다. 하늘은 이네스에게 늘 그런 곳이었다. 처음도 끝도 없는 곳. 의지할 것이라고는 자기 자신과 비행기밖에 없는 그 막막함……. 이네스는 손이 뜨거워지는 걸 느끼고 화들짝 놀란다. 여태껏 들고 있던 담배가 원인이었다. 바닥에 그것을 떨어트리고, 밟아서 연기를 꺼트리는 중에도 유진은 재촉하지 않는다. "괜찮아요 이네스?" 늘 그랬듯이. 이네스는 입을 꾹 다문다. 아주 천천히 담뱃불을 끄고, 그보다 느리게 입을 열었다.
"정답은 아주 간단하답니다. 내가 겁쟁이라서 그래요, 유진…. 나는 비행사의 재목이 아니에요. 아니… 처음부터 비행사가 될 생각 같은 건 없었어요. 나는 걸 좋아해 본 적이 없어요. 아니, 그렇게 생각했죠…. 아! 뭐람!"
분명 할말을 골랐던 것 같은데, 모든 것이 입안에서 헛돈다. 담뱃불을 껐는데도 온몸에 점점 열이 오르는 것 같다. 겨우 집어넣은 눈물도 다시 올라온다. 이네스는 공연히 성질을 내며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면 눈물도 열기도 가라앉으리라 믿고 싶은 사람처럼. 하늘 위에서 별들이 빙빙 돈다. 버려진 비행기들이 빙글빙글 춤을 춘다.
"당신이야 원체 나는 걸 좋아하지만 나는… 그러니까 나는 좋은 핑계를 적절한 시기에 만난 것뿐이에요. 비행기를 버릴 수 있는…. 사고? 사고는 무서웠죠! 언제나! 아주 오래전부터요. 난 그저… 당신이나 다른 사람들의 걱정이란 걱정은 다 받아먹으면서… 어쩔 수 없었던 것처럼… 그 마음에 기대서… 이게 왜, 정말이지…."
형편없는 이유. 형편없는 눈물. 형편없는 사람. 이네스는 그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지 않았다. 눈앞이 자꾸 희뿌얘진다.
"아, 이래서 말하기 싫었는데…. 특별한 이유 같은 건 없어요, 유진. 당신은 속은 거야! 난 그냥 무서워서 떼쓴 거예요. 그게 전부야……."
이네스는 형편없는 얼굴을 양손에 묻었다. 차라리 구름이 정말 희뿌연 것이었다면, 그래서 제 몸을 거기에 숨길 수 있다면 좋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아, 사라지고 싶다…….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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