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영혼들은 어디로 가는가
2022. 8. 22.

 

  라윈. 프랑스어로 1,2,3… 기억해요?

  앙, 드, 뜨와. 맞지?

  엉, 두, 뚜와. …비슷해요. 엉, 뚜와, 안. 앙뚜안. 내 비행기 이름.

  그 사람도 나는 걸 좋아했어?

  음… 잘 모르겠네요. 비행기를 싫어하긴 했는데.

  그럼… 왜 비행기에 그 이름을 붙였어? 싫어하는데도?

  그야… 내가 그러고 싶었으니까요. 죽었는데 자기가 어쩌겠어요?

 

  그건 그래. 라윈이 씩 웃으며 돌아본다. 웃는 얼굴이 멀어진다. 이네스 다비드는 거대한 구름과 폭풍우 속에서 조종간을 꽉 붙든다. 바람이 비행기를 농락한다. 빙글빙글 빙글빙글. 끝나지 않은 춤을 추듯 모든 비행기들이 바람을 타고, 혹은 타지 못하고 상공을 맴돈다. 어느 곳으로도 벗어나지 못한 채로 우는 소리를 내고 있다 보면 문득, 울음을 죄 먹어버리는 뇌성이 고막에 내리친다. 이네스는 고개를 번쩍 들었다. 바람이 등을 떠민다……. 번개가 명멸하며 눈앞에 거대한 윤곽을 그린다. 이네스는 눈을 마구 깜빡였다. 눈물로 앞이 흐려져 아무것도 볼 수 없다. 아니, 그게 아니다…… 지금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할 수 없다. 그건 한 번도 본 적 없는 것. 그러나 매일 보아왔던 것. 호기심을 건드리는 것. 그리움을 좀먹는 것. 알 수 없는 것. 잘 알고 있는 것.

  그래서 이네스는 나중에 그것을 주마등이라고 사람들에게 말한다. 아,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나 그날 본 것을 제대로 설명하는 날은 죽을 때까지 오지 않는다.

  비행기들이 춤을 추는 무리처럼 폭풍 안으로 빨려 들어간다. 이네스 다비드는 멍한 고개를 들었다. 눈물이 멈추지 않는다. 이제 어쩔 도리가 없다. 이네스는 살아서 바람을 거슬러 본 적이 없다. 그러니 죽어서도 마찬가지일 터다.

  쫓아간다. 흐려진다. 길을 잃는다.

 

 

 

 

 

 

 

 

길 잃은 영혼들은 어디로 가는가

with. Henna Vespasianus

George Gershwin - Summertime (Link)

 

 

 

 

 

 

 

 

  이네스는 살았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천공섬 피레네는 실존했다. 흔한 전설들과는 다르게.

  이네스는 헨나 베스파시아누스와 나란히 풀밭에 누워서 실없는 농담을 나눴다. 우리가 그럴 사이였던가? 그런 건 이제와 중요하지 않다.

  "그래, 좋든 싫든 함께군. 당신이 미친 것 같다면 나도, 하하, 같이 미쳐줘야겠네… 일단 숨부터 고르고 말이야…."

  헨나 베스파시아누스가 한 말처럼 그들은 좋든 싫든 함께였다. 죽을 때까지 설명할 수 없는 순간을 그들은 함께 통과했다. 풀벌레가 울고, 흉내지빠귀가 사람들의 목소리를 흉내 낸다. 이제는 다소 익숙한 사람들이 뜀박질을 하고, 웃고, 울고, 나란히 드러누워 외친다. 살았다! 헨나는 흉곽에 손을 얹고 한참 숨을 고른다. 이네스는 그와 함께 호흡한다. 천천히. 그들의 숨소리가 비슷한 리듬으로 바람에 실릴 때까지.

 

 

  헨나 베스파시아누스는 고약하고 외로운 사람이다(이 얘길 들려주면 헨나는 이네스에게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머저리. 네 멋대로 사람을 판단하는 건 아가씨의 특권인가?' 음. 적어도 이네스의 상상 속에서는 이렇다). 천공섬의 위치를 추측하는 데 기여한 학자라는 그는 해괴망측한 이름을 지니고, 사람들을 머저리라고 부른다.

  이네스 다비드는 고약하고 외로운 사람이다. 그래서 이네스는 헨나를 줄곧 괴롭혔다. 왜? 헨나는 고약하고 외로운데 혼자 되기에 열성적이니까.

  헨나 베스파시아누스는 모든 사람들을 '머저리'라는 이름표가 달린 통에 집어 넣는다. 자기는 이 통을 열어볼 생각이 추호도 없다는 듯, 자물쇠를 걸고 데굴데굴 굴려버리기까지 한다. 그래 놓고 의연한 얼굴을 한다. 이네스는 결코 할 수 없는 일이다. 이네스는 '머저리' 통 안에서 데굴데굴 굴러갈 생각도 없고, '머저리' 통을 굴릴 생각도 없다.

  헨나는 말했다. 타인의 인지와 기억에 나의 일부를 새기다니, 징그러운 일이야.

  이네스는 외쳤다. 아! …헨나 베스파시아누스. 당신 그래서 남들 이름으로 안 부르는 거야? 어머. …그런데 당신. 덕분에 당신의 '머저리'가 내 인지와 기억에 강렬하게 각인됐다는 것도 알고 있겠죠?

  이네스 다비드는 헨나 베스파시아누스를 기억해 주기로 결심했다. 징그럽게.

 

 

  "헨나 베스파시아누스!!!!!! 아하하!!"

  헨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원 없이 미친 짓을 하자고 제안했기 때문에, 이네스 다비드는 천공섬의 모든 동식물과 대원들이 들을 수 있을 정도로 큰 소리로 헨나 베스파시아누스의 이름을 외쳤다. 이네스는 매번 그랬던 것처럼 헨나의 이상한 이름을 공들여 발음한다. 예상한 대로 헨나는 얼굴을 잔뜩 구긴다.

  "실존할 거라 기대하지 않던 장소에 도착한 것치곤 소원이 차암, 소박하군. 왜 내 이름으로 난리야? 같이 미쳐주기로 했으니 나도 같이 지껄여주지. 안 그랬다간 내가 여기에 오고서 만드는 첫 후회가 될 것 같군. …너 이름이 뭐야."

  "당장 생각나는 게 그거였고, 당장 내 옆에 있는 게 당신이라서? …이네스."

  "이네스…"

  헨나 베스파시아누스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네스의 이름을 중얼거린다. 그러나 크게 소리쳐 외치지는 않았다. 이름을 손으로 잡을 수 있었다면, 헨나는 아마 이네스의 이름을 바람에 띄워 날려버렸을 터다. 머저리 통을 데굴데굴 굴릴 때와 마찬가지로.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목소리는 흩어진다. 바람은 계속 흐르고, 흐르고……

 

 

  두 사람은 숲에 서 있다.

  그들은 이제 헨나 베스파시아누스가 하고 싶은 걸 함께 해주기로 했다. 헨나는 말없이 걸었다.

  이젠 아무것도 모르겠어. 그래서 네게 남은 건 뭐지? 널 원망해. 설마 날 잊은 건 아니지? 헛된 꿈을 꾸는구나. 살려줘! 죄다 먹통이군. 낙원! 후회는 없어. 하늘에 내 심장을 내주었으니, 하늘이 내 마지막 숨을 가져간대도. 내 이야기는 오늘 끝나지만…. 그래, 나야. 이리 와줘. 조금만 더 가까이….

  흉내 지빠귀들의 소음이 귀를 메운다. 주변에 자리 잡은 새가 너무 많은 탓에, 그 소음 사이에서 이네스는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한다. 헨나가 걸음을 멈추고 묻는다.

  "너는 있어? 하늘로 먼저 보낸 사람, 아니면 오래전에 헤어져서 그리운 사람, 그런 거."

  그래서 네게 남은 건 뭐지? 한 마리의 흉내 지빠귀가 짧은 정적을 뚫고 얄밉게 속삭인다. 헨나 베스파시아누스의 등을 바라보며 이네스는 생각했다. 그래. 당신에게도 각인된 것이 있는 모양이라고. 헨나 베스파시아누스가 제 인지와 기억에 자신이 찾은 의미를 새겨주려는 지도 모르겠다고.

  "… 누군가요? 당신이 찾는 사람은."

  "내 아버지. 내전에 참전했는데, 두 달 만에 연락이 끊겼어. 죽은 거겠지. 대단한 공을 세운 사람이나 오랫동안 전선에 몸담았던 사람은커녕, 평범하게 살아남은 사람도 못 되고, 고작 두 달만에."

  헨나 베스파시아누스는 비아냥댄다. 익숙하게.

  "내 미친 짓은 믿음이야. 여긴 하늘에서 길 잃은 비행기가 오는 천국이고, 그도 이곳에 왔을 거란 믿음. 저 시끄러운 지빠귀들 중에서 '이사벨'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를, 한 가닥쯤은 찾아낼 수 있다는 믿음이지."

  이네스는 입술을 떼었다가 닫는다. 이네스는 고약하고 외로운 사람이고 헨나 베스파시아누스에게 징그럽게 각인되기로 결심했기 때문에 이건 좋은 기회일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헨나 베스파시아누스를 정성스럽게 발음하는 대신 '이사벨'을 부른다면. 그러나 이네스는 그럴 수 없다. 머릿속에 로마니가 했던 말이 떠오른다.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바보 같은 소리로 덮고 싶지 않아서 로마니는 로마니가 되었다. 이네스는 그를 이해했다. 그리고 말했다. 난 내 이름을 갖고 싶은데, 그러면서 내가 버린 이름을 아무도 몰랐으면 한다고. 나 자신조차.

  무슨 말을 꺼내야 할지 몰라 침묵을 지키는 사이 바람이 다시 흐른다. 바람은 흐르고 흘러 아흐메디를 분명하게 발음하는 자가 있는 곳을 지나고, 이사벨을 부르는 알론소가 존재하는 땅을 지난다. 그리고 이네스를 부르는 앙뚜안이 살아있는 시간을 지난다.

  "… 내가 먼저 보낸 사람은 내 피붙이예요. 쌍둥이였죠. 그 애는 대전쟁에서 죽었는데, 시신은 수습하지 못했어요. 내 아비의 이름도 전쟁 앞에서는 쓸모가 없더군요. 막심 다비드… 그 사람도 전쟁의 살을 불렸는데도."

  이네스 다비드는 비아냥댄다. 징그럽게.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들 사이에서 이네스 다비드는 여러 번 하나의 질문 앞에 도달했다. 당신은 왜 이곳에 왔나요? 이네스. 무엇을 바라보고 있나요? 이네스는 하늘을 향해 고개를 올린다. 길 잃은 별들이 맴돈다. 아니, 길을 잃은 건….

  아, 헨나 베스파시아누스. 이곳은 천국이 아니에요. 그리고 길을 잃은 건 그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죠. 당신과 나. 살아서 숨을 쉬면서 서로의 인지와 기억에 일부를 징그럽게 새기는 사람들……. 왜 그 사람들은 먼저 떠나버려서, 우리 안에 이만한 분노를 남겼는지…….

  그러나 이네스는 헨나와 함께 미쳐 주기로 약속했기 때문에 말하지 않는다. 말하지 않아도 그 역시 알고 있으리라.

  "걘 멍청해서… 뭐든 아는 것처럼 굴었지만 나를 몰랐어요. 날 모르고 죽었지. 그러니까… 걘 아마 여기에 왔어도 내가 어디 있는지 모를 거예요."

  이네스는 절반만 함께 미쳐 보기로 한다. 그러니까 이곳이 길 잃은 영혼들이 오는 곳이라면. 그리고 그 애 역시 이곳에 왔다면. 머저리처럼 그들이 우리가 어디에 있는 줄도 모르고 저 속에 숨어 있다면. 그러면 우리는 우리가 길을 잃었음을… 그들을 그리워하고, 찾고 있음을… 외쳐야 하는지도 모르겠다고. 우리가 그들을 먼저 부른다면, 그들도 언젠가 우리를 불러 줄지도 모르겠다고……. 

  "앙뚜안 이 빌어먹을 새끼야!!!!!"

  이네스 다비드는 천공섬에 도달하기 전 보았던 환영을 떠올린다. 이네스는 죽을 때까지 그 환영에 이름을 붙이지 못할 터다. 그 환영 속에 너무 많은 것들이 길을 잃고 춤을 추고 있어서, 하나로 이름을 붙이는 순간 그 모든 것들이 사라질 것만 같다. 그래. 이네스 다비드에게도 미친 믿음이 존재했다. 그 모든 이름들은 왜 이토록 징그럽게 우리 안에서 말을 거는 건지……. 앙뚜안 이 빌어먹을 새끼야!!!!! 앙뚜안 이 빌어먹을 새끼야!!!!! 앙뚜안 이 빌어먹을 새끼야!!!!! 지빠귀가 이네스의 말을 배워 흉내 낸다. 하나, 둘, 셋, 지빠귀들은 수군거리면서 바람에 이름을 싣고 또 실어 나른다. 허공에는 죽은 자의 이름이 떠돈다. 이네스는 불현듯 상상해 본다. 앙뚜안 다비드가 이 숲에서 길을 잃고 하염없이 걷다가, 지빠귀가 저를 욕하는 소리를 듣는 순간을. 이네스는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Life's but a waling shadow, a poor player

That strusts and frets his hour upon the stage

And then is heard no more. It is a tale

Told by an idiot, full of sound and fury,

Signifying nothing.

 

인생은 걸어 다니는 그림자일 뿐,

가엾은 배우가 무대 위를 안달복달 활개 치다 사라지는 것일 뿐.

그것은 머저리가 들려주는 이야기,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찼으되 아무 의미도 없는 것.

 

William Shakespeare, Macbeth, Act5 Scene5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제5막 제5장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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