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Soldier, and the Mademoiselle
“가끔은… 그래, 달리 표현할 말이 없군. 그쪽이 미울 때가 있소.”
소령이 그렇게 말했을 때, 두 사람은 시끄러운 인파를 피해 벤치를 찾던 참이었다. 소령의 팔을 붙잡아 이끌며 한발 앞서 나가던 이네스가 걸음을 멈췄다. 이 사람이 갑자기 무슨 말이람? 이네스는 동행의 얼굴을 빤히 들여다보았다.
“무슨 소리예요, 갑자기?”
“나무라는 건 아니고. 그냥… 가끔 그렇단 말인데.”
“가끔 그런 게 뭔데?”
소령은 한 마디 하고 입을 다물기 일쑤인 과묵한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걸 물어도 쉬이 답해주지 않는 사람이 불쑥 꺼낸 말이 이 모양이라니. 이네스는 짧은 정적도 참지 못하고 소령을 닥달했다. 눈치를 보던 소령이 입꼬리를 슬쩍 내린다.
“난 우리가 친구라고 생각하오만. 아니면 그 언저리, 가까운 어딘가.”
“친구 맞아요.”
“… 아무튼. 그대도 알다시피 내가 내세울만큼 돈이 있는 집 자식인 것도, 머리가 아주 좋아 높은 자리에 올라간 것도, 상처 하나 없이 깔끔한 도련님이 아닌 것도 아는데.”
“그래서?”
“….”
“프랭크.”
“… 이네스 다비드가, 그 ‘다비드’라서. 나보다 있는 집 자제 분이셔서. 가끔 다비드로서의 버릇이 날 낮은 사람으로 만들어서. 그게, 섭하오. 아주 가끔.”
프랭크는 손에 든 샴페인 잔을 내려다 보다가 천천히 시선을 들었다. 곧바로 답이 돌아오지 않으니 초조했다. 우습게도 제 누나에게 혼날까 두렵던 어린 시절의 한 순간으로 돌아간 기분이다. 제시와 이네스는 전혀 다른 사람인데. 눈앞의 아가씨는 마음에 안 든다는 듯 눈가를 찌푸리고 있었는데, 예상한 반응이라 상처를 입지는 않았다. 그보다 프랭크는 제 앞에 놓인 풍경 그 자체에 눈길이 갔다.
그날의 파티는 야외 정원을 끼고 열렸다. 프랭크와 이네스는 다른 사람들 사이에 섞여 한가한 잡담을 나누다(사실 프랭크는 이 대화에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빠져나온 참이었다. “그보다 소령님. 우리 밀린 얘기가 너무 많아요. 팔 좀 빌려줘요.” 몇 번의 만남 끝에 프랭크는 그게 ‘나 이제 피곤하니까 여기서 빠져나가게 도와줘요.’라는 뜻이라는 걸 깨달았다. 오랜만의 재회였지만, 이네스는 어제 만난 사람처럼 친근하게 프랭크를 이끌었다. 프랭크는 이끄는 대로 이끌렸다. 어색하게, 한 발 뒤처져서, 이네스 다비드의 머리카락을 바라보며. 그리고 이제 그는 야외의 조명 아래에서 반짝이는 이네스 다비드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다. 그 뒤로는 저로서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제각기 잔을 손에 들고 웃는다. 뭐가 그렇게들 즐거운지. 프랭크 브라운은 제가 그 속에 영원히 물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았다. 지금 이 기분을 이네스 다비드는 모를 테지. 이 아가씨는 그 풍경에 완벽하게 어울리는 사람이니까. 그러니 나는…
“소령님한테 미움도 받고, 영광이네요.”
풍경 속의 이네스 다비드가 입을 열어 비아냥거렸다. 신랄한 목소리에 프랭크는 번쩍 정신이 들었다.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렸다.
“아니,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또 뭐가 그런 게 아니야? 하나만 해요! 밉다는 거야 아니라는 거야?”
프랭크는 저도 모르게 얼굴을 한번 쓸어내렸는데, 이네스는 그걸 보고 더 열받은 표정을 지었다. 아니 나는 그게 아니고 아니 나는. 프랭크는 기각당한 말을 두 번 이상 내뱉을 용기는 없었기 때문에 침묵했다.
“그래요, 소령님. 불리하니까 입을 또 콱 다무시네요.”
“아니….”
망했군. 프랭크는 제가 무슨 말을 하든(하지 않아도 마찬가지다.) 이 아가씨를 달랠 수 없을 것을 직감했다. 아니, 그런 건 애초에 불가능한 건지도 모른다. 무얼 어떻게 해야 좋단 말인가. 무슨 말을 해야 하는 거지? 저기 잘생긴 얼굴로 웃는 청년이나 말 돌리기가 수준급인 대령 같은 남자들에게는 그런 재주가 있을지 모르겠다. 프랭크가 난처한 얼굴로 침묵하는 사이 이네스는 프랭크를 비장하게 삿대질했다가, 입을 크게 열었다가, 다물었다. 그리고 눈 깜짝할 새에 우아한 귀부인의 얼굴로 돌아왔다. “이네스, 오랜만이에요. 어떻게 지냈나요?” 신사 한 명이 눈치도 없이 인사를 건네왔기 때문에 프랭크는 그 자리에서 목석처럼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다시 둘만 남자마자 이네스가 입을 열었다.
“프랭크 브라운.”
“예.”
곧장 튀어나온 대답이 지극히 군인 답다고 이네스는 생각했다. 아마 프랭크 역시 제 입으로 내뱉은 목소리가 군인의 것이라 생각할 테지. 프랭크는 여러모로 아주 정직한 사람이었다. 싫다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아도 그랬다. 이네스는 프랭크의 그런 면모가 싫지 않았다. 사교계에서야 그런 사람과 어울릴 일이 없지만, 그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까. 하늘을 날지 않았다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이니까. 천공섬 프로젝트에서 만난 사람들은 이네스에게 작은 탈출구였다. 누군가 말하지 않았던가. 낯선 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자유로워질 수 있다고. 이네스가 두 번째로 가출했을 때 플로리다의 브라운 가로 찾아간 것은 그들이 저를 반겨줄 것을, 그리고 유쾌한 휴가를 함께해줄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 목석 같은 사람은 또 이런 식으로 선을 그어? 이네스 다비드는 죽는 순간까지 체면을 모두 내려둘 수 없겠지만, 적어도 프랭크 브라운의 정강이를 어린애처럼 걷어차 줄 수는 있었다.
“아!!”
갑자기 정강이를 걷어차인 프랭크가 놀라서 펄쩍 뛰었다.
“당신. 브라운 씨를 가장 낮잡아 보는 건 프랭크 소령이라는 거. 그 정도는 알고 있죠?”
“….”
“뭐람, 정말. 나만 나쁜 사람 만들지 말아요. 다음엔 안 봐줄 거예요.”
“… 미안하오.”
“잘못했으면 이제 ‘진짜’ 친구들처럼 팔짱 끼고 천천히 걸으면서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풀어 보세요. … 난 몰라. 목 타서 술도 다 비웠어.”
“새로 채워 드리지.”
이네스는 아량을 베푸는 것처럼 고개를 살짝 들었다. 프랭크는 작게 한숨을 내쉬며 이네스의 손에 들린 잔을 가져왔다. 그런데 퍼뜩 이네스가 눈을 크게 뜨더니 손에 힘을 줬다.
“뭐… 하는 겁니까?”
“아니. 내가 가져와요! 내가!”
그렇게 말하는 이네스의 얼굴이 살짝 상기되어 있어서 프랭크는 이네스가 취한 걸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러면 정강이를 찰 수도 있는 거고.
“그럽시다, 그럼….”
프랭크는 팔을 내렸고, 동시에 잔이 바닥에 떨어지며 와장창 깨지는 소리를 냈다. 이네스가 비명을 질렀다. 이제 이네스의 얼굴은 토마토처럼 붉어졌는데, 그게 흔한 일은 아니라서 프랭크는 놀랐다.
“다치진 않았소?”
“몰라요.”
“아니 또 왜…”
“또?”
이네스가 도끼눈을 떴다. 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프랭크는 저 얼굴이 취한 게 아니라 제게 화가 나서 붉어진 건가 헷갈리기 시작했다. 밤이 아주 길게 느껴졌다. 야간에 보초를 설 때보다 더 피곤한 것 같은데. 다른 사람들이 이네스의 비명 소리를 듣고 그가 다치진 않았는지 살피러 오자 이네스는 괜찮다며 미소 지었다. 아, 정말이지. 프랭크 브라운은 제가 죽는 순간까지 이네스 다비드를 알 수 없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이네스 다비드는 지금 쥐구멍에 숨고 싶은 심정이라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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